히포크라테스의 발견
반덕진 지음 | 휴머니스트
프롤로그 - 히포크라테스의 발견고전기 그리스 문화는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며 시대를 초월한 젊음과 신선미를 간직한 그리스인들이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빚어낸 문화유산이다. 이 시대의 그리스적 사유는 고전기 그리스의 3대 전집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 전집』과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전집』등을 비롯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이 남긴 다양한 저술 속에 담겨 전해오고 있다. 사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두 철학 전집보다 먼저 집필되었다. 그 속에 담긴 '히포크라테스적 사유(Hippocratic thought)'는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전 5세기는 서양 학문사에서 인본주의가 탄생하는 의미 있는 시대였다. 히포크라테스학파는 앞서 '인간'을 학문의 대상으로 연구함으로써 '인간학'의 탄생을 촉진시켰다. 히포크라테스의 합리주의는 의학의 영역에 적용되어 '합리적 의학'을 탄생시켰다. 인체의 평형을 유지하려는 '자연적 본성'이 인체 내부에 있음을 인식하고, 이 '자연치유력'을 환자의 치료 과정에 활용하여 자연의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닫힌 교육에서 열린 교육으로의 전환은 의학 수준을 한층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써 히포크라테스학파는 경쟁 집단을 따돌리고 고대 의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러한 히포크라테스적 사유는 이후 서양 학문사에서 쉼없이 인용되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히포크라테스는 '선서' 이외에는 연상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고전기 그리스를 이해하는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인문학이 접속해야 할 문화 코드의 하나가 되었다. 히포크라테스 사유의 매력은 '휴머니즘' 정신과 '통합적' 인식 방법의 만남에 있다. 그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는 물론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및 인문환경과의 상호작용까지 고려하면서, 이것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고서는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고 본 인문의학자였다. 그의 전집에 나타난 인도주의 정신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환자의 인권 선언에 해당되는 부분도 있다. 우리사회에서 의료윤리와 생명윤리는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분야이다. 천박한 의료 문화를 개선하고 혼란한 의료 현장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안락사, 뇌사, 장기이식 등과 같은 첨단 의학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히포크라테스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전집 속에는 헨델의 메시아처럼 우리사회에서 1년에 단 한번 울려 퍼지는 <선서>를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유효한 내용들이 풍부하다.
1부 - 생애의 발견
히포크라테스 섬, 코스그리스의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소크라테스는 흔히 문사철(文史哲)의 아버지로 불린다. 서양 학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발원지가 그리스인 경우가 많듯이 서양의학의 아버지 역시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넓은 의미의 그리스인이라 해도 아테네에서 탄생한 소크라테스와 나머지 세 사람인 키오스 섬의 호메로스,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코스(Cos)섬의 히포크라테스 사이에는 에게 해가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가 본토 출신이라면 히포크라테스는 에게 해 동남부 변방의 작은 섬 출신인 것이다.
코스 섬을 상징하는 2개의 키워드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이다. 이를 연결시켜 종종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Asclepiad)인 코스의 히포크라테스'로 표현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god of medicine)' 혹은 '의사의 신(physician-god)'이며, 그의 후손인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Father of Medicine)'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아데스인 코스의 히포크라테스'라는 표현은 히포크라테스의 '가문'과 '고향'을 함축하고 있다. 즉 그의 '가문'의 시조는 아스클레피오스이고, '고향'은 코스 섬이다. 사실 히포크라테스가 고향에서 보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며, 생애의 후반부에는 아스클레피오스 가문의 고향인 북부 그리스의 테살리아에 정착해 의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곳은 테살리아보다 코스 섬이다.
오늘날의 코스 시는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지만, 원래 코스 시는 섬의 남서쪽에 있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전 431~404) 중에 스파르타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코스인들은 새로운 코스 시를 원래의 자리에 복원하지 않고 전 366년에 섬의 동쪽에 재건하여 이 도시를 중심으로 코스 섬 전체가 단일 공동체로 재편되었다. 정치적 통합과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인구 이동을 수반하여 히포크라테스의 출신지인 아스티팔라이아(Astypalaea, old city)는 소읍으로 쇠락했다. 사실상 고고학자들은 아직 이 아스티팔라이아가 히포크라테스 일가의 근거지이자, 그의 학파(Hippocratic school)의 근거지였음을 보여주는 명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코스 섬 시절의 히포크라테스히포크라테스의 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 가문의 시조인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 아스클레피오스 : 아스클레피오스는 원래 테살리아(Thessaly)에 있는 트리카 지방의 왕자로, 탁월한 의술을 지닌 치료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의 의술이 너무 유명하다보니 사후에 의술의 신으로 신격화되었다. 즉, 그는 원래 인간이었으나 후에 신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의 신으로 격상되기 이전에는 아폴론이 의술의 신으로 숭배되었으나 뛰어난 영웅을 신의 혈통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아스클레피오스는 슬며시 아폴론의 아들로 편입되었고, 드디어 전 5세기 경부터는 아폴론을 대신하여 의술의 신으로 자리잡았다. 전 430~427년의 아테네 역병(Athenian plague) 기간 동안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도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숭배의식이 확산되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사용한 치료약은 머리카락이 뱀으로 된 고르곤들의 피였는데, 이것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물인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뱀의 유래이며, 뱀이 감긴 지팡이는 지금도 의학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테살리아의 트리카 지방에서 숭배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아스클레피오스 숭배로 가장 유명한 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에피다우로스이다. 이곳에서 사실상 최초의 의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 의술은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들인 아스클레피아다이에 의해 계승되었고, 아스클레피아다이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신비적 의학을 합리적 의학으로 전환시킨 히포크라테스이다.
- 히포크라테스의 탄생 : 이스코마코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도리아 방언을 사용하는 코스 섬에서 80번째 올림피아기(紀, Olympiad)의 첫해에 태어났고, 코스의 향토학자인 소라노스는 코스의 문서보관소를 탐사한 후 그의 탄생일이 아브리아다스 군주의 통치 기간인 아그리아노스의 달(月) 27일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코스인들은 오늘날까지 바로 이날에 희생 제물을 바치며 그를 기리고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탄생 연도는 전 460년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히포크라테스학파'를 언급한 최초의 인물이 2세기의 갈레노스임을 감안할 때 이스코마코스의 저서 역시 적어도 그 이후에 나왔으며, 나아가 이스코마코스의 저서를 인용하고 있는 『소라노스본 전기』의 경우 그 집필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2세기 이전으로 볼 수는 없다. 아무튼 히포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부계 직계 후손으로 코스 섬에 정착하여 대대로 살아온 아스클레피오스 가문 출신이다.
- 아스클레피아데스와 아스클레피아다이 :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기록에서 흔히 아스클레피아데스 혹은 아스클레피아다이로 표현되고 있다. 흔히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을 단수 형태로 아스클레피아데스라 하고, 그 후예들을 복수 형태로 아스클레피아다이(Asclepiads / Asclepiadae)로 표현한다. 협의의 아스클레피아다이는 의사 여부를 불문하고 아스클레피오스의 직계 후손들을, 광의의 아스클레피아다이는 일반 의사들까지도 포함하는 용어이다. 이처럼 아스클레피아다이는 원래 아스클레피오스의 직계 후손들을 지칭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의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었다.
히포크라테스의 가계 : 아스클레피오스에서 시작된 이 가문의 의학적 전통은 대대손손 전승되어 오는 과정에서 유전학적 전통으로 이어졌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의학을 전수했으나 마카온은 트로이 전쟁(전 1250년경)에서 전사하여 대를 잇지 못했다. 반면 포달레이리오스는 생환하여 후손들을 남겼고 히포크라테스도 이 계열에 속했다. 포달레이리오스의 후손들은 가문의 요람지인 시르나(Syrna)를 출발하여 2개 혹은 3개의 분파로 갈라졌다. 그 중 한 파는 아시아 해변에서 가까운 작은 섬인 코스에 자리잡았으며, 이 집단에서 히포크라테스가 탄생했다. 다른 파는 코스의 맞은편에 위치한 크니도스(Cnidus) 반도에 정착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명성 때문에 크니도스학파는 코스학파에 비해 위축되었으나, 이 두 지역은 의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다른 분파는 코스와 크니도스 아래에 위치한 로도스 섬에 정착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따라서 전 5세기 그리스의 의학은 코스, 크니도스, 로도스 파로 3분되었다가 전 3세기에 코스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신전 의술과의 관계 : 가문에서 습득한 의학 이론 및 기술 외에 히포크라테스는 보다 구체적인 치료 방법들을 어떻게 익혔을까 하는 점도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사제 의사와 같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사제도 의사였으며, 이 신전은 의학 연구와 교육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히포크라테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결국 그가 철학으로부터 의학을 분리시켜 코스에서 합리적 의학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코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보관된 성공적인 치료 사례를 통해 의학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는 로마제국 초기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히포크라테스의 교육에 관한 비교적 오래된 기록들은 그가 코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새겨진 치료법들을 통해 의학을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 대륙에서 의술을 펼치다
코스를 떠나 테살리아로 향하다 :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당시의 의료 문화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당시는 공식적인 의사 면허증이 발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의사로서의 치료 능력은 필수적이었고,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수사학적 능력도 요구되었다. 이런 의료 환경에서 의사로서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의사들은 공의(public physician, 公醫)나 개업의(private physician)로서 타지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자신의 고향이나 학교를 떠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코스를 떠난 히포크라테스가 향한 곳은 테살리아였다. 사위와 딸은 아스티팔라이아에 남아 장인의 의학 정신을 계승했고, 두 아들은 아버지를 수행하여 테살리아에 도착했다.
테살리아에서의 활동 : 히포크라테스의 의술은 전 431~404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동안 성숙되어 갔다. 전 419~416년에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그는 이미 테살리아에 정착해 있었다. 히포크라테스가 테살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라리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정주의(定住醫)로 활동했는지, 아니면 여러 도시에 일정 기간 머무르는 편력의(遍歷醫)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임상 경험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진 히포크라테스와 그 일행의 새로운 경험은 히포크라테스 의학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유행병>에 기록된 개별적인 사례들은 테살리아 기간에 수집된 것들이며, 각 도시의 고유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주민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요인들로는 바람과 관련된 도시의 방위, 수질, 토질, 주민들의 섭생 등이 있다. 순회 의사들을 위해 집필된 <공기, 물, 장소에 관하여>와 같은 논문은 히포크라테스와 그 아들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다양한 세계로 진출하지 않았다면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죽음 : 코스에서 생활하다 북부 그리스로 이동한 히포크라테스는 인생의 긴 여정 끝에 고령의 나이로 테살리아의 라리사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위서집」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한데, 『소라노스본 전기』의 여러 설명들, 특히 11절은 이러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창안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철학자나 문학자의 전기에 나타나는 임종시의 특별한 일화가 히포크라테스에게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유명인들의 전기에 담겨 있는 묘비명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리스의 전기 서술에서 묘비명은 주인공의 생애를 응축하여 표현하는 필수적인 사항이자 마무리 절차로 간주된다.
히포크라테스의 무덤은 테살리아의 기르톤과 라리사 사이에 있었으나, 이에 대한 다른 고대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히포크라테스가 실제로 라리사 근처에 안장되었다면 영웅들의 매장지에서 그들에 대한 제의가 정기적으로 거행되었던 당시의 관행을 상기해볼 때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숭배의식도 주기적으로 거행되었을 것이다. 또한 라리사인들은 인근지역에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영웅 사당의 건립을 기꺼이 환영했을 것이다. 라리사와 기르톤은 테살리아의 도시이고, <특사의 연설>에는 히포크라테스가 그곳에서 수십 년 동안 거주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가 임종한 곳은 자기 조상들의 집성촌이자 자기 삶의 후반부를 보낸 테살리아 지역임은 분명한 것 같다.
묘비명 : 진위 여부는 가리기 어렵지만 히포크라테스의 묘비명은 <그리스 명구선>에 실려 있다. "건강의 여신의 무기로 수많은 질병을 치유하고 우연이 아닌 의술로 명성을 얻은 코스의 아폴론 가문 출신의 테살리아인 히포크라테스, 여기 잠들다." 히포크라테스의 묘비명은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예방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묘비명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건강의 여신인 히기에이아(Hygeia)와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성을 비교, 이해할 필요가 있다.
히기에이아와 아스클레피오스는 원래 둘 사이에 특별한 혈연관계가 없었다. 히기에이아는 티타네(Titane)에서 숭배된 반면 아스클레피오스는 테살리아에서 숭배되었다. 전 5세기경에 이르면 히기에이아는 아스클레피오스의 딸로 편입되어 아스클레피오스와 함께 숭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 3세기경부터는 그들에 대한 신앙이 에피다우로스에서 로마로 전파되었다. 뱀은 이들과 공통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히기에이아의 숭배자들은 주로 '건강'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들에게 치료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건강이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합리적이고 절제 있는 생활에 주어지는 것으로, 의학의 주된 기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건강한 육체 속에 깃든 건강한 정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반면 아스클레피오스의 숭배자들은 의사의 주된 역할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히기에이아는 보건학(혹은 예방의학)을,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묘비명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치료의학의 전통보다 히기에이아로 상징되는 예방의학적 성격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비교적 최근에 히포크라테스의 흉상이 알려졌다면, 코스의 동전에 새겨진 초상은 16세기부터 알려져 왔다. 1세기 로마 지배하의 코스 섬에서 사용된 이 동전에는 대머리와 턱수염을 기른 남자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전설시간이 지남에 따라 히포크라테스의 일화와 전설은 점차 대중들의 마음속에 정교하게 다듬어져 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