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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100년 중국

노신 외 지음 | 일빛
내가 겪은 무술변법



* 1898년,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를 주축으로 하는 유신파維新派 인사들과 청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광서제光緖帝의 지지 하에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불리는 정치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변법'은 꼭 103일 만에 좌절되었다. 자희 태후(慈禧太后: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귀족 집단이 궁정에서 정변을 일으켜, 광서제는 유폐되고 담사동 등 관료 6명이 처형되었으며 강유위와 양계초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이 글을 쓴 장원제張元濟는 당시에 총리아문에서 일하면서 '변법'에 참여하였다. 그의 기억에 근거한 충실한 기록으로 인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무술변법의 역사가 후세에 남겨지게 되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뒤 장원제는 상해上海로 내려가 중국 출판업계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1894년, 중일 갑오전쟁(청일 전쟁)에서 중국은 일본에게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병신년(1896년; 광서 22년)을 전후하여 우리들 가운데 일부 동료들은 자주 도연정陶然亭에 모여서 조정을 비난하곤 하였는데 참가자 수는 수십 명에 이르렀다. 당시만 해도 모임의 이름은 없었다. 강유위는 나중에 북경에 도착해서 무술년(1898년; 광서 24년) 3월에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나는 총리아문에서 장경章京을 맡고 있었다. 주관하는 업무는 학당, 철도, 광물 채굴, 조선造船, 군사 훈련, 외교 등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하였다. 광서제는 새로운 책 읽기를 좋아하여 새 책을 올려 보내라고 총리아문에 자주 명령을 내렸는데, 그 일은 주로 내가 맡았다.



무술년 4월 28일, 광서제가 강유위와 나를 불렀다. 당시 한림원 시독학사였던 서치정이 상소를 올려 두 사람을 추천했기 때문에 광서제가 우리 둘을 불렀던 것이다. 우리는 서원西苑에 도착하여 조방(朝房 : 조정의 관리들이 조회를 기다리기 위해 모인 방)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유위가 조방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변법에 대해 영록대부榮祿大夫와 논의를 하였는데, 그는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태감太監이 강유위를 불렀고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나는 근정전勤政殿 옆의 작은 방에서 광서제를 알현하였다. 그때 나는 북경에서 친구들과 통예학당을설립하였다. 학당에서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40~50명쯤 되었다. 그 날도 광서제가 학당의 상황을 물어왔다. 광서제가 "학생을 잘 가르치면 장래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것"이라며 격려해 주었다. 광서제의 말투는 온화하였고 용상은 매우 강건하였다. 그 날 광서제는 강유위를 총리아문의 장경으로 임명하였다. 원래 광서제는 그를 총리아문 대신으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영록대부가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풍문일 뿐 정확하지는 않다.



무술년 6~7월 사이에 어사 송백로가 팔고문(八股文: 명나라 중엽 이후 관리 등용 시험에 쓰던 문체)을 폐지하고, 학당을 설립하자는 상소를 올리자 광서제가 이를 윤허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새로운 정부를 반대하는 수구파의 분위기가 매우 강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강유위에게 적당한 선에서 그만두고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강유위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담사동이 원세개에게 병사를 이끌고 이화원을 포위하라고 하였다는데 진상이 어떠한지는 나도 잘 알지 못한다. 그때 나는 그처럼 비밀스러운 일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7월에 원세개가 북경으로 들어간 일만은 사실이다. 당시 원세개는 소규모 훈련소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광서제는 그를 만나본 뒤에 그에게 시랑侍郞을 제수하였다. 8월 초에는 세간의 소문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서태후西太后가 이화원에서 대궐로 돌아가 정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8월 6일,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고 조서를 반포했다. 강유위는 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소식을 듣고 영국인 티모시 리처드의 보호 속에 북경을 떠났다. 양계초는 일본 대사관으로 도망쳐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체포된 여섯 인사, 이른바 '육군자(六君子 : 여섯 명의 청년 개혁가. 담사동, 강광인, 양심수, 임욱, 양예, 유광제)'를 엄벌에 처하라는 조칙이 반포되어 그들은 8월 13일에 손발이 묶인 채 말에 끌려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우리는 총리아문에서 격일제로 근무하였다. 세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간다는 소문이 파다하였지만 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당직을 서면서 조용히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8월 23일, 내가 면직을 당했다. 나는 통예학당을 폐쇄하고 학당의 재산과 서류를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에 넘겨주었다. 정변이 일어난 뒤에 나는 이홍장을 만나 권고했다. "지금 서태후와 폐하의 의견이 맞지 않습니다. 그대는 국가의 중신이니 중재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그가 탄식했다. "어린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경자년(1900년)에 의화단 사변이 일어났을 당시, 이홍장은 광동과 광서의 총감독을 맡고 있었다. 8군 연합군(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이 북경으로 들이닥치자 서태후와 광서제는 서안으로 피난을 가면서 이홍장을 북쪽으로 불러 의논하였다. 이홍장이 상해를 지날 때 나는 그를 보러 가서 더 이상 청 정부를 위해 충성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했다. "어린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 나는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성을 바칠 것이다." 이후 이홍장은 세상을 떠났고 나는 끝내 내 뜻을 승복시킬 수 없었다. 실권이 없던 이홍장은 변법 운동에 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정변 이후, 서태후는 광서제를 중남해中南海의 영대瀛臺에 가두어 놓고는 그가 몸이 안 좋아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중국에 주재하고 있던 각국 사절들은 모두 광서제의 변법을 옹호했다. 또 의사를 데리고 가 광서제의 병을 치료하려고도 하였기 때문에 서태후는 외국인들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이후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무술변법의 실패는 당연한 일이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변법을 통해 국운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손중산과 동맹회



* 동맹회의 정식 명칭은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이다. 1905년 8월, 손중산孫中山의 제창 아래 반청 조직인 흥중회興中會와 화흥회華興會를 기초로, 광복회光復會와 연계하여 일본 도쿄에서 창립된 이 단체는 전국적인 혁명 조직으로 거듭났다. 그들이 내세운 강령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民國을 건립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소유하자'는 것이었다. 1911년 10월에 일어난 무창봉기武昌起義는 전국적인 규모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이끌어 냈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이후인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國民黨으로 개편되었다. 이 글을 쓴 하향응何香凝은 초기 동맹회 회원이자 유명한 혁명가였던 요중개 선생의 부인으로, 진보적 입장에 서서 평생 동안 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1905년, 정식으로 동맹회를 창립하려는 준비 작업은 이미 상당한 궤도에 올라 있었다. 당시 요중개는 유학 비용을 빌리러 홍콩에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없었다. 그래서 손 선생님은 여중실과 나를 불러 이야기하셨다. 나는 이미 동맹회에 참여하여 만주족 축출, 중화의 회복, 민국의 수립, 토지의 균등권 등을 혁명의 목표로 삼고 있었는데, 그때 다시 정식으로 가입 수속을 밟았던 것이다. 손 선생님은 주고받는 우편물이 많았기 때문에 때때로 가명을 사용했다. 우편물 가운데 '중산中山', '고야高野', '일선逸仙', '손택孫宅' 등이 적힌 편지는 내가 모두 거두어서 손 선생님께 전달했다. 손 선생님의 정확한 지도와 동지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1905년 8월에 중국 동맹회가 도쿄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또 장차 수립될 새로운 국가를 '중화민국(中華民國)'이라 칭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혁명의 바람이 일어나고 뜻있는 청년들이 잇따라 혁명을 지지하여 동맹회가 급속하게 발전했던 상황이 예상 밖이긴 했다. 동맹회에 가입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입과 동시에 이 구호들을 놓고 선서를 하고 이를 곧 투쟁의 지침으로 삼아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체 동맹 회원들 가운데 일부만이 진심으로 이 구호들을 지지했다.



1905년 10월, 동맹회의 기관지인『민보民報』가 발간되었다. 그러나 당시『민보』에 발표된 글과 동맹회에 단순히 가담했던 사람들의 생각은 동맹회 회원들 간에 존재하는 사상의 분열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민보』에 발표된 글들과 일반적인 사상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었다. 첫째는 청 왕조를 전복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민족주의 사상이었다. 그들은 청 왕조가 전복되고 난 뒤 중국이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생각이 없었다. 둘째로는 청 왕조가 전복되고 나면 중국을 자본주의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곧 유럽이나 일본식 자산 계급 민주 노선이었다. 셋째는 당시 이미 일본 청년·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초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사회주의자들의 저작을 번역하면서 자산 계급을 '호부豪富'로, 무산 계급을 '세민細民'으로 옮겼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주집신과 요중개였다.

1911년 봄, 나는 혼고에 있는 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홍콩으로 돌아와 친정에 살고 있었다. 1911년 3월 29일에 광주廣州 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지 홍콩은 혁명당 사람들의 접선 장소였다. 나는 당시 특별한 임무는 없었지만 봉기를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봉기를 통해 보여준 청년들의 행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후 전국적으로 혁명의 열정이 고무되었고, 청 왕조의 통치 기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해혁명이 발발할 당시 손 선생님은 해외에서 혁명을 선전하며 기금을 마련하고 있었고, 다른 혁명 당원들도 다들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지도력이 부재한 상태였다. 군벌과 관료, 정치인들과 입헌당파가 이러한 기회를 틈타 혁명의 성과를 탈취했다. 정권이 봉건적 제왕으로부터 지주와 군벌, 매판 자산 계급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손 선생님은 12월 상해로 돌아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송교인의 건의에 따라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편한 뒤 군벌과 관료, 매판, 지주, 지방 토호와 악질 지주 등도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그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 선생님의 혁명 주장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에게 국민당 입당은 정치적 의도일 뿐이었다. 국민당은 점차 혁명성을 잃어갔다.



이때 원세개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봉건주의와 제국주의 양쪽의 지지를 받아 혁명을 탄압하였다. 원세개는 무력으로 혁명군을 공격하면서 한편으로는 혁명에 동조하는 듯 위장하기도 했다. 손 선생님이 제기했던 열강에 대한 반대는 곧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토지 균등'은 봉건주의를 약화시키는 기초이고, '자본의 억제'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애국적·급진적 민주주의 이념을 당시 국민당 안팎의 봉건 매판 분자들은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국주의에 두려움 혹은 환상을 갖고 있는 이들 또한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었다. 국민당 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우파분자들은 임시 대총통직을 원세개에게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팎에서 밀려오는 압력으로 말미암아 손 선생님은 석 달 만에 임시 대총통직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이 혁명을 추구했던 목적이 결코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었음을 보여줬다. 신해혁명의 승리는 결국 봉건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탁으로 나라를 훔쳐간 대도大盜 원세개의 수중으로 급속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 '부의' - 나의 퇴위



* 1908년, 섭정을 맡은 순친왕醇親王 재풍의 세 살 난 아들 부의溥儀가 황제에 등극하고 연호를 선통宣統이라 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청 왕조가 무너지면서 부의는 어쩔 수 없이 퇴위하게 되었다. 1924년 부의는 황제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황궁에서 쫓겨났다. 1934년에는 일본군이 동북 지역을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부의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일본군이 투항한 이후 부의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1950년에는 중국 정부로 넘겨져 수감되었다. 1959년 12월 4일 최고인민법원이 부의를 특사로 석방하였고, 1964년에는 제4차 전국 정협(政協: 중국 인민정치 협상 회의)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1967년에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살아생전에『나의 전반생』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글은 그 가운데 한 부분이다.



나는 정신없이 3년 동안 황제로 지냈고, 또 정신없이 퇴위했다. 퇴위를 앞둔 얼마 전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 나는 양심전養心殿 동난각東暖閣에 있었고, 융유태후(隆裕太后 1868~1913. 서태후의 질녀로 광서제의 황후. 1909년 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청 왕조가 멸망하고 1년 뒤인 1913년에 병사하였음)는 남쪽 창문 옆 침대에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 앞에는 한 뚱뚱한 노인이 붉은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뚱뚱한 늙은이는 매우 시끄럽게 코를 훌쩍거리면서 뭐라고 말을 했지만 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그 뚱뚱한 늙은이가 바로 원세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이 바로 내가 원세개를 본 유일한 날이었고, 원세개가 마지막으로 태후를 만났던 날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게 일러준 내용이 틀리지 않다면 그날 원세개는 융유태후에게 직접 나의 퇴위 문제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무창 봉기 이후 각지에서 잇따라 봉기가 일어나자 만주족 원수는 민간군을 진압할 북양 각 지역의 신군新軍을 지휘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던 순친왕은 하는 수 없이 혁광의 추천을 받아들여 원세개를 기용했다. 때를 기다리던 원세개는 군권과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야 황제의 조칙을 받아 북양군에게 민간군을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양漢陽을 되찾은 뒤에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나서 북경으로 직접 들어가 융유태후와 순친왕을 만났다. 원세개는 북경으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혁광을 통해 융유태후 앞에서 농간을 부림으로써 순친왕을 퇴위시키고 관사로 물러가도록 하였다. 이어서 군대에 사용한다는 명목으로 융유태후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출하기도 하였고 측근들을 동원해 군대를 지원하도록 재물을 헌납 받기도 하였다. 뒤이어 원세개는 러시아 주재 공사 육정상陸征祥과 짜고 여러 외국 주재 공사관과 연합하여, 청 황실에 전보를 보내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도록 했다. 또 전체 국무원 명의로 비밀리에 태후에게 보고를 올려 공화국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주장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러한 보고가 이루어진 날이 바로 내가 원세개를 만났던 11월 28일이었다. 사실 민간의 군대와 조정 군대가 담판을 벌일 때도 원세개는 줄곧 공화제 실시에 반대하고 입헌 군주제를 주장했다.



민간 군대와 조정의 군대는 담판을 벌여서 국가 주권 소재의 문제를 임시 국회에서 표결로 처리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국회의 구성원과 시간, 장소 등에 관한 문제는 조정의 뜻이 확고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정쟁의 와중에 남경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손중산이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다음날 원세개는 갑자기 당소의의 대표자격을 철회하고 자신이 직접 민간군 대표와 전보로 교섭하기 시작했다. 원래 입헌당이었다가 혁명당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세개가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믿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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