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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역사이야기

정선 외 지음 | 코리아미디어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내가 아는 이광수는 죽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 민족의 얼을 지켰던 이는 후대들에게 애국자로 존경을 받지만 민족의 얼을 팔아먹은 자는 후대들로부터 매국노로 외면을 받기 마련이다. 일제시기 항일운동의 포문을 연 민족대표 33인이었다고 해도, 이후 삶의 궤적에 따라 존경을 받기도 했고, 외면을 받기도 했다. 절친한 사이였던 한용운과 이광수, 3.1 민중항쟁 이후 보여준 그들의 상반된 삶이 바로 그러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용운을 애국자라 칭하고, 이광수를 매국노라 부른다. 이러한 애국자 한용운과 매국노 이광수의 삶을 대비해 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다. 이광수가 학도병 출전을 호소하며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종로사거리에서 한용운과 이광수가 우연히 마주쳤다. 그러나 한용운은 전혀 모르는 사람인양 이광수를 외면하고 걸어갔다. 이 때 이광수는 한용운을 붙잡는다. 한용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마디를 던진다. "내가 아는 이광수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다!"



분출하는 민중, 뒷걸음질치는 민족주의자들

1905년 조선을 팔아먹는 매국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외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지만 화승대로 무장한 의병이 38식 보총을 들고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제대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결국 일제에 맞서려는 이들은 만주로 옮겨가 독립군 이름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에 남아있던 이들은 민족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며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겠다며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하였다. 주체적 조건과 함께 국내외적인 정세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변혁이 성공을 거두었고, 핀란드와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하는 등 전 세계 각국의 민족운동이 빠른 속도로 고양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국내정세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드디어 1919년 3.1민중항쟁이 발발하였다. 폭발적이고 거족적으로 일어난 3.1민중항쟁은 서울과 평양 시위를 시작으로 점차 확대되어 3월 중순에는 전국 13개도와 해외의 만주, 상해, 연해주, 하와이 등에서도 전개되었다. 300여 만명의 각계각층 민중들이 10개월 동안 전국 각지에서 3,200여 회의 시위에 참가하게 된다. 시위가 급속하게 퍼져나가자 일제는 기마경찰대와 군부까지 동원하여 유혈적 탄압을 자행했다. 결국 3.1민중항쟁은 조선 민중의 애국적 투지를 널리 알리는 항일항쟁이었으나 실패로 마무리되고 만다.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총칼 앞에서 내세운 것은 무저항주의였다.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안창호가 내놓은 것도 '실력양성론'이었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우리민족이 실력을 양성하면 일제가 자연스레 이 땅에서 나갈 것이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이때 일제를 전율시키는 한 방의 총소리가 울렸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거두 이등박문을 격살하고 독립만세를 외쳐 조선인의 기개를 과시한 것이다. 구미열강에 대한 기대, 국채보상운동, 의병투쟁에서 답을 얻지 못했던 안중근은 개인테러의 방법으로 일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나 개인테러로도 일제는 청산될 수 없었다. 결국 항일운동은 새로운 노선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비폭력노선에서 무장투쟁노선으로의 전환이다. 총으로 탄압하는 침략자 일제에 맞서 총으로 맞서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한 항일운동세력은 만주지역을 무장투쟁의 거점으로 삼는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새세대 청년운동가들은 무장투쟁노선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다.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조국독립의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던 항일무장투쟁은 새세대 청년운동가들이 군대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일제의 수탈정책은 심각해졌고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반일투쟁은 연일 일어났다. 농민은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10만이 참여한 추수투쟁을 성공적으로 결속지었다. 이 추수투쟁은 경제투쟁이면서도 일제를 반대하는 정치투쟁과 밀접하게 결합시켜 나감으로써 시종일관 일제를 피동으로 몰아넣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선과 중국 민중들 간의 단결과 진보주의자들의 연대가 공고해졌다. 드디어 우리민족의 항일운동경험을 분석하면서 새세대 청년운동가들은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그리고 1931년 12월, 그들은 명월구에서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항일전쟁을 선포한다. '무장에는 무장으로!'



김구의 외침,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가 두 차례의 호외를 발행한다. 이어 조선일보, 경성일보 등을 비롯한 주요 신문들이 앞 다투어 소식을 전한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압록강변의 보천보에서 일본경찰지서와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김일성부대는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마을사람들을 모아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24시간 동안 보천보를 점령했다가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보천보 습격전투에 일제가 경악하고 독립운동가들이 환호했던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았다. 조선은 땅도 빼앗기고 얼도 빼앗겨 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암울한 시기에, 조선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반드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신념을 안겨준 데 있다. 이것을 증명하는 유명한 말이 있다. 보천보전투 소식을 접하고는 임시정부가 김일성부대를 후원해야 한다며 접촉까지 시도했던 백범 김구, 신문을 뒤적이다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접하는 그 순간 창문을 열어 제끼며 수차례 큰소리로 외쳤다. "배달민족은 살아있다!"



백두산으로부터 확장되는 해방구

항일무장세력은 항일전쟁을 선포하면서 중국 만주에서 조선 국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백두산에 근거지를 건설한다. 백두산근거지는 압록강, 두만강 주위의 대산림지대에 둘러싸여 있어 유격전을 전개하기 유리할 뿐 아니라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형성하기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항일유격대는 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해서 보천보전투를 전개, 승리하였으며 조국광복의 서광을 앞당기었다. 백두산근거지는 국외의 항일무장세력과 국내의 항일운동세력이 하나가 되어 조국광복을 위한 전민항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반탁이냐 찬탁이냐, 무엇이 진실이냐?



희대의 여론조작극, '신탁통치'


항일운동의 승리로 우리민족은 36년간의 어둠을 뚫고 해방을 맞이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민중들의 힘과 지혜로 다양한 정당사회단체와 지방자치기관들이 각지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1943년의 카이로회담에서 코리아의 독립국가건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던 미국이 스스로의 발언을 뒤엎어버렸다. 코리아반도를 세계패권을 위한 전략요충지로 삼기 위해, 미국은 38선을 그은 후 순식간에 이남을 점령해 버린다. 코리아반도 이북에서는 일제식민잔재를 청산하면서 건국준비사업이 차근차근 진행된 반면, 이남은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국에 의해 친일파와 식민통치기구, 일제식민통치시기의 법률까지도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이후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법제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남북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이 시기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소련, 미국, 영국 등 3개국이 모여 '모스크바3상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내놓은 신탁통치안을 기본으로 미국대표는 남북조선에서 일정한 기간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을 실시하고, 그것이 끝난 다음에도 4개국(미, 소, 영, 중)의 신탁통치를 더 한 다음, 필요에 따라 5년 더 연장하자는 안을 주장했다. 이에 소련은 조선인 스스로 독립국가를 세울 능력이 있으므로 5년 이내의 후견만 하자는 안을 낸다. 결국 설득력있는 소련의 안대로 후견제가 채택된다. 결정사항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미국은 바로 동아일보기사를 비롯하여 3상회의의 내용을 철저히 왜곡시킨다. 미국은 자신이 회담장에서 한 발언을 감추고 '조선사람들이 3상회의 결정을 반대할 자유가 있다'며 반탁운동을 부추겼다. 그리고 우익세력을 동원해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실제 이승만과 한민당은 미군정의 보호와 지원으로 신탁통치 반대라는 허울아래 모스크바협정 반대시위를 조직했으며 이를 반공운동으로 몰고 갔다. 이 사건은 결국 우리민족을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대립과 민족분열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었으며, 그 결과 1차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5월에 미국의 의도대로 결렬되고 만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즉시 철수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제출한 안은 코리아반도 이남을 최소 40여 년 동안 신탁통치하면서 식민지로 지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의 후견제를 실현하는 것이 조국의 통일독립을 빨리 이룩할 수 있는 길이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이 관철된 가운데 건국사업을 보다 활발하게 전개하였다면 실제 5년의 후견제 또한 시기를 단축하고 자주적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3차대전, 조선과 16개 미연합국의 대결전



작전명 '1950 코리아를 접수하라!'


2차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 범위에서 사회주의변혁과 민족해방운동이 승리하자 1947년 미국 트루먼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트루먼주의', 즉 냉전주의를 발표한다. 미국은 이 때부터 냉전을 기치로 한 봉쇄정책을 수립하고 세계적 범위에서 사회주의변혁과 민족해방운동의 전진을 가로막으며 새로운 형태의 지배영역을 확장해 나가려고 하였다. '애치슨선언'에 기초한 미국의 동북아정책은 아시아 대륙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섬들의 방위를 일본의 미군거점과 결합시키는 '거대한 초승달' 전략으로 요약된다. 이는 미국의 전쟁수행능력을 적절히 활용하여 아시아에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봉쇄하면서 특정지역을 의도적으로 노출시켜 상대측이 전쟁을 감행하도록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렇게 발생한 전쟁에 강력하게 반격하면서 미국의 지배영역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미국의 그 '의도적 노출 지역'에 이남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코리아전을 위한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미국은 일본열도를 병참기지로 만든다. 일본군국주의 전범자들을 대거 복권시켜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던 아시아민족들에 대한 경멸감을 부추겼다. 또한 1949년 4월 미8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민정업무를 일본인들에게 맡기고 미8군을 비롯한 전투부대들은 군사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미국은 또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2차대전 이후 해체했던 군사동원체제를 다시 부활시켰고, 1950년 4월 14일에는 방위비를 기존의 135억 달러에서 500억 달러로 늘리는 내용의 기밀문서『국가안보회의 68번각서(NSC-68)』를 작성했다. 작전명 '1950 코리아를 접수하라!'의 수행은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고, 이 흐름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의 전선, 조국전선 결성

코리아전 발발 4년전, 이북은 남북 각각에 존재하는 광범한 연대체인 남민전(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1946.2.15)과 북민전(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1946.7.22)의 통합을 추진한다. 북민전의 통합문제는 이미 1949년 5월 중순부터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5월 25일에는 두 민전을 합쳐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한 달 후인 6월 26일 조국전선결성대회에서 정식으로 통합을 선언한다. 조국전선은 이 대회에서「평화적 조국통일을 위한 선언서」를 채택했다. 서울과 평양에 따로 정부가 구성된 후 분단이 점점 고착화되어 가자 1949년 6월 19일 이북은 이남정권에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이전까지는 이남 의회와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북이 남북 두 국회의 통합으로 단일한 입법기관을 수립함으로써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자는 방안을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모든 제안들을 번번이 거부하며 오히려 '위장평화공세'라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6월 25일 결국 코리아전이 발발한다.



껍데기는 가라, 타는 목마름으로 외친다



대통령을 몰아낸 민중들의 힘


전쟁 이후 이남민중들의 생활은 철저히 파탄났다. 심각한 물가상승으로 농민들은 저곡가정책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서울로 올라온 농민들은 실업률을 가증시켰다. 악순환되는 경제구조는 이미 민중들의 분노를 투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은 다른 계층들의 투쟁을 고무하였고, 농민들은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가혹한 수탈에 반대하며 생활처지개선투쟁을 전개한다. 학생들 역시 점차 실천투쟁에서 활기를 띠며 이남사회의 변혁을 모색하게 된다.



4월민중항쟁의 시작은 대구 고등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전국 고등학생들의 투쟁으로 확산된다. 또한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부정선거규탄투쟁에서 정권퇴진투쟁으로 전환한다. 경찰은 학생들을 향하여 발포를 하였고,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계엄 하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국무위원 총사퇴, 이기붕 부통령 사퇴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관철시키고 만다. 4월민중항쟁으로 열려진 공간은 이후 진보의 확산을 가져왔다. 전쟁으로 억눌려 있던 민중들은 이러한 일련의 투쟁들과 함께 활발한 통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반민주 '껍데기'를 쓸어버리고,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1960년대가 시작되었다.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한껏 열려진 공간에서 자주통일운동이 힘차게 성장하는 동안 어두운 음지에서는 검은 음모가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고 숨어있었다. 4.19민중항쟁에 놀라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은 식민체제를 다시금 공고화하기 위해 모종의 준비를 착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일부 젊은 운동가들에게 포착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거대한 음모를 감당하기에는 아직 진보세력들의 준비가 부족하였다. 과학적 이론에 근거해 제때 적확한 노선을 제출하는 능력도 부족했고, 어떠한 탄압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튼튼한 대중지반을 형성하지도 못했다. 정세를 분석, 전망하는 안목도 미흡했으며, 처지와 조건에 따라 합법과 비합법투쟁을 배합하는 등 다양한 투쟁방법을 능숙하게 구사하지도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마침내 검은 군화들이 조용한 서울의 새벽을 짓밟기 시작할 무렵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젊은 운동가들은 조용히 지하로 몸을 감추었다. 파쇼악법과 파쇼탄압기구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합법 정당 활동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후 이들은 '인혁당(인민혁명당)', '통혁당(통일혁명당)',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등 비합법 전위당 활동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진보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 때 그 사람 박정희와 파쇼적인 그 때 그 역사



"내 재임기간 중 가장 성공한 쿠데타"


"내가 재임 중 미중앙정보국(CIA)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이 혁명이었다." 1964년 5월 3일 미 중앙정보국장이었던 알렌 덜레스의 비비씨(BBC)방송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재임기간을 회고하는 인터뷰에서 그는 5.16군부쿠데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계속되는 인터뷰에서 그는 "만일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방관만하고 있었더라면 민중은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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