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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북한

존 페퍼 지음 | 모색
머리말 - 한반도 위기, 카운트다운 중

2004년 8월, 미국과 북한은 양자의 의견차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미국, 북한, 남한,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만났다. 이 6자회담은 미국이 타협을 거부하면서 산산조각났다. 부시 행정부내의 실용주의자들은 6자회담체제를 지지했지만, 이 문제를 실제 협상에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는 못했다. 6자회담이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강경론자들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강요했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풀어낼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를 모든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펴 왔다. 이른바 북한과의 쌍방협상 또는 2자 안전보장이다. 강경파들의 전망에 따르면, 다자간 협의나 제안들은 북한정부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는 무의미한 이벤트에 불과하다. 한편, 평양은 다양한 안전 보장책 및 경제적 보상만 주어진다면 자신들의 핵을 기꺼이 교환하겠다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지정학은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지역임을 시사해주고 있다.



현재의 위기는 부시 행정부가 말하듯, 단순히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끊임없는 욕구가 빚어낸 결과가 아니다. 또한, 정책의 일관성 없이 좌충우돌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그러한 위기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0년 10월 평양에서 극적으로 연출된 클린턴-올브라이트 합작품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북 정책에서 드러나게 된 균열은, 2001년 1월 조지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미국의 대북 정책 기조였던 당근과 채찍 전략은 극단적인 불신과 오해를 낳았고, 2000년의 짧은 데탕트(긴장 완화)를 가능하게 만든 연약한 기반마저 제대로 구축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클린턴-올브라이트 합작이 논리적으로 지리멸렬해지자(이는 부분적으로는 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의회와 국방성, CIA와 국무성 등의 보수주의적 반대의 결과였지만), 부시팀으로 하여금 민주당의 외교정책이 남긴 몇 안 되는 긍정적 유산 중의 하나마저 쉽게 휴지조각으로 버리도록 만들었다. 북한은 미국 정치인들에게 있어 유명한 '매맞는 아이'였고 미국의 매스컴들 또한 부시가 북한을 상대로 도발하는 것을 부추겼다. 북한은 미국의 가장 오래된 적敵이다. 북한이 악명 높은 "악의 축"으로 불리기 10년전, 콜린 파월 장군은 걸프전 전야에,"나는 악인을 축출할 것이다. 카스트로와 김일성까지 책임지겠다."라고 선언했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은 죄 없는 방관자는 아니다. 강경파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는 북한 정부는 심각한 인권문제를 안고 있으며 필요한 어떤 방법으로라도 핵 억제력을 보유하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북한의 외교 정책이 반대 상황에 대한 논리적인 대안이며 그 영역에 있는 힘의 심오한 불균형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극한정책은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에서 포용정책을 통한 민간 지원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북한은 폐쇄사회이고, 불행히도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어둠에 묻혀버리는 나라다. 그런 북한에 대한 무지 -북한의 동기, 역사, 능력, 회복력- 는 1994년 미국을 전쟁 직전의 극한까지 몰고 갔다. 이렇게 위험한 데자부(기시감 혹은 기체험감이라고도 한다. 정상인의 경우에는 과거에 경험한 사건, 사물형상에 대한 일반화의 형태로 이해되지만, 병적인 경우에는 신경증이나 정신분열증에서 많이 볼 수 있다.)속에,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전임자보다 훨씬 부족한 지식과 논리를 가지고 현재의 국면에 임하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남한과 북한에 관해 이해를 돕고 남북한의 대미 관계를 조망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 미국의 외교 정책, 그리고 동아시아의 변화하는 군사, 경제적 상황에 대한 간결한 분석이 그 내용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남북한의 화해와 재통일을 촉진시킨다기보다는, 분열과 정복을 기조로 하는 현재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 사례를 보여줄 것이다. 철저히 무지하고 근시안적이며 지정학적으로 오만한 워싱턴은, 한반도의 분단이 미국 경제와 안보에 가장 이익이 되는 상황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런 미국의 정책은 남북한 역사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1장 한반도의 한恨



한미 관계의 현재 위기는 무엇보다도 역사적 불공평, 특히 열강들의 침략과 지배 또는 19세기까지의 국제 교류와 기독교 신앙을 무기로 해서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던 외세의 오만한 야욕들을 직시하는 배경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역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독립적인 주체가 되려는 끝없는 욕망은 남북한 사람들의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었다. 1910년 일본과 합병되기에 앞서, 대한민국은1300년 동안 통일국가로서의 역사적 정통성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이란 것이 거북스러웠다. 한국인들은 서구 열강에 의해서 중국이 받은 모욕과 일본이 추구한 현대화를 모두 피해가기만을 열망했다. "신선의 왕국"이라 불리는 한국은 자신들의 유학사상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한국은 명백한 불리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이 부상하는 국제경제질서 속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금이나 철과 같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토착 상인계급이나, 강력한 군사력, 나아가 일본과 같이 근대화된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정치계급이 존재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은 호전적인 외세들에게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먹이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격돌했고, 당시는 이미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의 전략적 이권을 놓고 격돌했다. 러일전쟁을 종식시킨 데오도르 루즈벨트에 의해 중재된 협약에서,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얻어냈고, 그 대가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이 공적으로, 루즈벨트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반면, 한국은 약소국의 전철을 밟아 그들의 종주권을 잃어버렸다. 천 년이 넘는 단일국가로서의 드높은 자존심과 지위가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 전에 분단되었다

일본이 식민지화한지 35년 후 한반도는 사실상 해방됨과 동시에 분단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동맹군에 항복했고, 이 날이 바로 남과 북의 한국인들이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한국인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미 한반도는 분단되어 있었다. 4일전 8월 11일 자정 회의에서, 미래의 국무장관 딘 러스크와 다른 미군 대령은 미국과 러시아의 영향권이 미치는 범위에서 한반도를 분할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38선을 선택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도착하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38선 분단에 동의했다.



소련과 미국은 1945년 12월 잠정적으로 5년 안에 한국에서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에 대해서 동의했다. 하지만 독일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새로운 냉전이 이윽고 통일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8선은 1948년 남쪽의 대한민국과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발족하면서 형식화되었다.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바라는 남북한 측 지도자의 확고한 의사 표시에도 불구하고, 소련군과 미군 둘 다 1949년까지 극소수 군사 고문들만 남겨놓고 모두 철수했다. 남쪽에서는 격렬한 내란이 이어졌고 북쪽에서는 정치적 갈등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내걸고 좌파세력에 대해 압박을 가했고, 김일성은 남진을 제창하며 자신의 정치적 합법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생한 사건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핵무기만 없었을 뿐이다

이 문제에 있어 가장 전통적인 역사서들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철저한 조사과정 끝에 훨씬 복잡한 문제들을 밝혀냈다. 북한과 남한의 국경 분쟁이 1948년에 시작됐고, 수천 명의 군인이 개입된 중요한 전투들이 1949년 여름에 계속해서 일어났다. 북쪽에서의 해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건들은 모두 남한에서 도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공식'날짜보다 최소한 1년전에 시작된 것이고 그 유혈 참사의 책임은 남과 북 양쪽에 다 있다.



한국전쟁은 30만 명의 북한군과 40만 명의 민간인 사망자를 냈다. 3백만 명의 시민들이 집중 폭격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3년 6월, 미국이 관개용 댐들과 독산 저수지 벽을 폭파하면서, 북한의 도시지역은 물에 잠겼고 이는 북한의 농업 기반을 약화시켰다. 나치가 네덜란드에서 자행한 것과 똑같은 전쟁 범죄로 간주되는 행위였다. 비록 미국이 핵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북폭으로 인한 상처는 핵 폭격과 거의 동일한 피해를 초래했을 만큼 그 참상은 심각했다. 또한 북한과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곤충들의 감염과 다른 미생물의 감염이 나타난 것은 미국이 북폭 당시 생물학 무기를 실험했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되고 있다.



얼음은 녹기 마련이다

2000년 6월 13일, 두 나라 사이의 냉각관계는 해소된 듯 보였다. 남북한의 정상이 분단 후 50년 만에 평양 공항 활주로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김정일과 김대중은 악수를 나눈 후, 갈채를 보내는 수만 명의 북한군중들이 운집한 도로를 따라서 공항을 빠져 나와 도심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남쪽에서는, 수백만 명이 텔레비전을 통해 김정일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는데, 김정일의 새로운 색안경 스타일은 하룻밤 사이에 남한의 새로운 유행으로 떠올랐다. 3일간의 회의에서, 두 정상은 향후 10년 간 비무장지대를 오고가는 공식 혹은 비공식적인 접촉을 최대로 확대시키겠다는 야심 찬 미래의 청사진을 세웠다.



남북 화해의 화려한 성과 및 2000년 정상간의 얼굴을 맞댄 회담으로 인해 생성된 흥분은 현재 일정 부분 비관주의적 기조로 접어들고 있다. 남북한 간 무역 및 투자를 위한 새로운 법률적 정치적 토대 구축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남한 자본의 이동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북한 투자에 관심을 표시한 기업들의 절반이 생각을 바꿨다. 또, 현재의 핵 위기는 남북 양측 투자자의 확신에 제동을 걸고 있다. 논쟁, 그리고 기대감의 실추 속에, 2002년 남북한 정부는 회담을 속개했다. 실제로 남한의 통일부는, 2002년에 개최된 회담의 범위가 "1989년 시작된 정례 접촉이래 가장 열성적인" 것이었다고 발표했다. 2003년 비무장지대의 지뢰 제거 후 두 나라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연결 도로를 건설했고 몇몇 대표단은 이미 북한지역을 방문했다. 또한 2003년에는 여섯 번째 이산가족 재회가 있었다. 현재의 핵 위기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냉각시켰지만 아직도 남북한은 화해에 대해 절망하고 있지 않다.



2장 평양의 관점 : 공산주의는 끝나지 않았다



1989년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그의 가까운 동료인 동유럽 권력자들이 권좌에서 추락하는 모습을 공포 속에서 지켜보았다. 서구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와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와 같은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했다. 북한 경제는 이미 하향 곡선을 긋고 있었다. 공산주의 진영에서 보조받던 식량과 에너지, 그리고 소련 연방의 거대한 시장을 잃게 된 북한 정권은 확실히 돌아버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로 이웃에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 남한의 존재는, 독일의 사례를 연상시키듯, 군사 경계선으로도 막을 수 없는 대대적인 탈북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공산주의는 종언을 고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유럽에서는 끝났는지 모르지만, 몽고를 제외한 아시아에서는 그 체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북한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북한 정권을 교체하려는 외부 세계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북한 정부는 공격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군대를 전쟁억제력으로 보강해야 했다. 그리고 북한의 '전체주의'를 분석한 서구의 수많은 문서들에도 불구하고, 북한 리더십은 정치, 경제, 문화와 외교 정책의 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 변화 중 일부는,연속된 자연재해를 겪은 후, 1990년대 중반의 급격한 경제 쇠퇴를 경험하면서 본의 아니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대부분의 변화는 신중한 정책의 결과였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쇠퇴하게 된 이면을 고려할 때, 이 변화들 또한 북한 정권의 장기화를 잘 설명해준다.



북한의 비장의 카드, 군사력

북한의 군대는 실로 규모가 크다. 연간 예산 중 2002년에는 14.9퍼센트, 2003년에는 15.4퍼센트가 국방비로 흡수되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 즉 인구의 20분의 1이 군 복무중이며, 7백만 명 이상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규모이다. 또한 북한은 제3국으로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리비아, 이란, 이라크, 그리고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에 무기를 수출해서 거의 십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보도에 다르면, 북한은 생물학무기와 화학무기 상당량을 비축해왔다. 그러다 불거져 나온 것이 핵 의혹이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차관보는, 파키스탄에서 수입해 들여온 원심분리기로 농축우라늄을 추출하기 위한 북한의 비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북한 당국과 만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파키스탄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주요한 동맹국이었다. 그리고 당시 외교정책의 초점은 이라크를 상대로 한 일련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켈리는 북한의 반박을 예상했지만, 북한은 미국이 의심하고 있다고 단정지은 것으로 보였다. 북한이 자신의 핵계획을 인정하든지 말든지 미국은 북미 간 제네바 협정이 무효화했고 거의 10년 동안의 평화적 관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북한 군대의 기술력은 구식이다. 1999년 남북한간에 서해교전이 벌어졌을 때, 남한군은 분명히 북한보다 우세했다. 전반적으로 암울한 처지의 군대를 보유한 북한은 그에 대한 보상을 찾는 듯, 의외로 원자력 개발계획을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평양은 미국이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위협 자세를 취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북한은 투자도 유치 받지 못했고, 적절한 실험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으며, 러시아와 중국이 핵 무장한 북한을 가까운 국경에 두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부품들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도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핵 재료만 가지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전 세계가 북한에 사용 가능한 핵무기가 있다고 믿는다는 가정 하에, 북한은 그들의 목표인 미국의 북폭 저지를 효과적으로 얻어내고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북한 경제는 남한 경제가 상승하고 있는 동안, 평균 수준 이하로 침체되었다. 그래도 지도부는 자신들의 경제개발모형이 우수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1976년까지, 북한은 해외 외채 지불을 이행하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 규모는 외형상 급속하게 커져가고 있었다. 거인증을 향한 이 경향은 북한경제를 그 유명한 공룡 다이노사우러스만큼 거대하면서도 동작이 굼뜬 존재로 만들었다. 게다가, 북한이 기술 수입을 늘리는데 있어서 주저한 것은 -자본 설비 투자의 수준이 공산권 기준과 똑같이 낮은 수준- 결과적으로 나중에 북한의 경제를 쇠퇴시키고 말았다. 북한의 기계화 농업은 이렇게 쇠퇴하는 산업기초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농부들에게 식량 재배를 목적으로 하는 개인 부지를 조성토록 하는 사업이 권장되었다. 이 새로운 자유에 크게 고무된 농부들은 자기만의 부지를 더 넓힐 생각으로 심지어 언덕의 경사면에 있는 나무들까지 모조리 베어버렸다. 이렇게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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