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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通(중국통)

황의봉 지음 | 미래의창
역사 - 중국의 강남江南을 봐야 대륙의 얼굴이 보인다



- 대담자 김준엽
: 김준엽(金俊燁·85) 사회과학원 이사장에게는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교육자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일제 때인 1944년 1월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중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의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일본군을 탈출, 천신만고 끝에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투신한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또 김 이사장은 교육자로서 고려대 교수와 총장, 아주대 재단이사장 등 근 반세기를 후진양성에 매진해 왔다. 이 밖에도 김 이사장은 이범석 초대총리와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정권으로부터 장관, 국무총리 등을 거듭 제의받았으나 이를 모두 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와서 남긴 의미 있는 발자취를 찾아내 복원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데요, 가장 관심이 큰 유적은 어떤 것입니까?]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내 기념관을 만드는 일 다음에 착수한 것이 항저우杭主에 있는 고려사高麗寺 복구였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항저우의 고려사 복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文宗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혜인사慧因寺로 당시 유명한 정원淨源대사가 있던 곳이었어요. 의천은 정원의 가르침을 받을 목적으로 모친과 맏형인 12대 임금 순종順宗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세의 나이에 밀항하여 자오저우珠江ㆍ長江三角洲, 카이펑開封을 거쳐 항저우로 찾아가 정원대사에게 사사했어요. 그후 의천은 모친의 독촉으로 중국 체류 1년 4개월만에 돌아와야 했는데, 귀국 후 혜인사에 많은 재물과 불전을 보낸 연유로 혜인사가 고려사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 약간의 초석만 남아 있는 고려사는 복원경정이 내려져 2005년 10월경 준공을 목표로 곧 공사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고려사는 말하자면 한중 불교 교류의 중요한 사적지인 셈이군요. 대각국사의천이 항저우까지 가서 불교 공부를 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과 고려의 왕래가 그만큼 잦았다는 이야기입니까?]



"당·송唐·宋시대에 중국의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어요. 그래서 주요항구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무역업무나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관장하도록 했습니다. 시박사를 설치한 곳은 장쑤성의 양저우揚州, 저장浙江성의 항저우와 닝보寧波, 푸젠福建성의 취안저우泉州 등 장강(양자揚子강) 유역과 남쪽 지역, 즉 강남에 많았고, 강 북쪽으로는 북송 때 산동성 자오저우에만 설치했어요. 그동안 우리는 베이징이나 동북3성에만 많은 관심을 쏟아왔는데, 사실은 이 강남 지역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지역은 비단 한국과의 교류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고, 최근에는 경제발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중국 대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느껴볼 수 있는 얼굴과도 같은 곳입니다."



[한국의 마르코폴로, 최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최부(1454~1504)는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되는『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중요한 인물입니다. 135일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닝보, 항저우, 양저우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베이징까지 간 뒤 귀국했는데 이때 거쳐간 거리가 무려 8,000여 리에 달합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표해록』입니다. 당시 중국의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최부가 직접 경험한 해안의 경비상황, 즉 해방海防이라든가 지방의 군사제도, 특히 지명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어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운하의 상황이라든가 수차水車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차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부입니다."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 외에도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닝보 등지의 항구와 한반도와의 무역도 따지고 보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옛날 바닷길의 개척에 따라 무역의 거점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요?]



"중국 남방과의 교통로를 학계에서 해상 실크로드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명나라 때 동아시아뿐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까지 갔을 정도로 해외교류가 활발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만 해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해상교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차차 교통이 발달해 황해를 직접 건너 산둥반도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출발지가 경기 남양만이었어요. 그러다가 삼국시대 무렵부터는 닝보쪽으로 직접 항해했습니다. 따라서 무역의 거점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요. 고려시대에 금나라가 생겨 중국 북부를 점령하자 칭다오靑島 남쪽의 자우저우가 대對한반도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산둥성 지역에는 한중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유적이 있지 않습니까?]



"장보고는 산둥성 끄트머리에 있는 스다오石島를 근거지로 무역이나 해상교통을 지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상황은 일본인 승려 엔닝円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국에 갈 때와 돌아올 때 모두 신라선을 타고 갔었는데, 일본에 귀국해서 이 순례행기를 썼습니다. 이 기록이 없었다면 장보고의 활약상이라든가 당시 신라방의 사정 등등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상들의 발자취와 한중간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대개 어떤 문헌에 많이 나와 있습니까?]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많이 나오는데 아직 연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승려들에 관해서는 혜교慧皎의『고승전』, 도선道宣의『속고승전』, 찬녕의『송고승전』등이 대표적인 중국문헌이고,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신라 김대문金大問의『고승전』, 고려 각훈覺訓의『해동고승전』등에서 당시 승려들의 내왕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대문의『고승전』은 지금 소실돼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절에 가서 기록들을 뒤져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 관련 유적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한국과 중국이 말로만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중국의 불교나 유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또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밀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정치 - 인치에서 법치로, 중국공산당 변신의 내막



- 대담자 정종욱
: 정종욱(鄭鐘旭·65) 전 주중대사(현 아주대 교수)는 김영삼 정권 때인 1996년 1월부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4월까지 대사직을 역임했다. 중국과 수교 이후 지금까지 중국대사는 현재의 김하중 대사까지 합쳐 모두 6명. 정치인 출신이나 직업외교관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 정치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론과 현장경험을 함께 갖춘 경우다.



[2002년 11월 제1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후 열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선출된 데 이어 2003년 봄 국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후진타오 체제가 공식출범했습니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부의 내부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우입니다만, 권력구조 내부는 다소 복잡합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을 승계하여 국가권력과 당권을 장악하고 이어 군권마저 장악했습니다만 그 승계가 아직도 불완전하다는 설도 있어요. 그러나 권력장악이 다소 불완전하다고 해도 오래 전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진타오가 실제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권력승계가 제도화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시대가 인치의 시대였다면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은 법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신호라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의 중국 권력구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라기보다 협력과 공조의 관계라고 봅니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권력의 공유는 중국에서 이제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개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다원화되었습니다. 국가가 사회를 압도하거나 한 개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셔틀외교에 나서는 등 과거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북핵 문제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고 판단을 했겠죠. 그리고 만약 북한의 핵보유가 공식화되면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날 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까지도 핵무기를 갖겠다고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2003년 당중앙에 북핵 문제를 다룰 위기대책반이 가동됐고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책임을 맡았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외교부 내에 북핵대책반이 설치된 것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국이 북핵 문제가 야기할 사태를 심각하게 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6자회담 중국 수석대표인 왕이 부부장은,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더군요. '한반도가 통일됐을 때 중국군이 미군과 압록강에서 서로 총을 겨누는 사태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상유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내심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 문제에 관한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선 현상유지죠. 그런데 현상유지가 깨진다는 것은 곧 전쟁이나 한반도 통일을 의미합니다. 중국으로서는 굉장히 걱정스러운 측면이죠. 좌우간 북한 내의 여러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결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정부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데, 한반도 통일 후 미국과 중국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미·중관계가 좋고, 당분간 대만 문제라든지 북핵 문제를 둘러싼 큰 변화가 없는 한 양국의 관계가 극적으로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한국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은 우리와 동맹관계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하고 더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말들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북하고 곤혹스러운 게 사실인데, 과연 이런 말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로 다자적인 협력체를 구성해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아시아를 하나의 틀로 묶는 다자적인 무역메커니즘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다자적인 조직을 자꾸 만들어서 양자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희석시키고 걸러줘야지,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우리한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사 - 중국군中國軍,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며 미래를 기다린다



- 대담자 황병무
: 황병무(黃炳茂·65)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는 중국의 군사 문제에 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중국군사통이다. 30년 이상 중국군사 문제를 연구해 오고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저명하다. 황 교수의 중국 군사 관련 주요저서로는『신중국군사론』,『China Under Threat』,『China's Security』등 다수가 있는데, 일부는 미국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황 교수는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한국군사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고, 중국의 인민해방군 관계자나 군사전문가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재는 대만이 현상유지 정책을 택할 것으로 보시는데요. 그렇지 않고 적극적인 독립정책으로 나온다면 예상되는 조치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만이 독립을 하려면 정치적으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라든가 영토조항을 바꾸기 위한 헌법개정, 국호의 변경 등을 시도하겠지요. 지금 대만 헌법에는 중국 대륙도 영토에 들어가 있는데 독립하려면 먼저 그 부분을 삭제해야 합니다. 또 국호도 변경한다면 '대만 민주공화국Republic of Taiwan'으로 해야겠지요.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의 이런 행동뿐 아니라 대만사회가 분열상을 보여, 내란 상태로 들어 간다든지 혹은 폭동이 일어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이므로 이 같은 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유사시 양측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중국이 대만 공격에 사용할 수 있는 지상군은 푸젠福建 지역에 배치된 제31집단군 7만 명을 비롯해 유사시 전략예비부대와 기동부대 약 25만 명을 증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만은 지상군 약 20만 명과 예비군을 동원하면 40만 명 수준의 침공군을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항공력 면에서 중국 공군은 수호이-27 100여 대, 수호이-30 58대를 보유한 반면, 대만은 미라지-2000 57대, F-16 146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주력기 구성으로만 보면 유사시 중국 공군이 대만해협에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 평가입니다. 중국이 확실히 우세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미사일입니다. 대만을 겨냥한 490여 기의 미사일 이외에도 중·단거리 미사일 11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12기 등은 대만에 아주 위협적이에요. 대만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먼저 중국군, 즉 인민해방군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성립의 역사를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군은 1927년 8월 1일 난창南昌폭동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의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도하에 주로 농민들을 조직해 만든 군대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혁명을 수행하는 군대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당의 군대'라는 것이죠. 중국군은 인민을 동원해서 국가를 만들어 낸 군대입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군 본연의 전투대 역할 이외에도 1927년에서 1930년 초에 걸쳐 강서소비에트라고 하는 최초의 해방구를 만들어서 통치행위를 하는 등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고, 또 군대의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역할 등 3가지 역할을 맡아왔다고 하겠습니다."



[중국군의 기본적인 핵전략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중국은 기본적인 핵전략을 최소억지전략에서 제한억지전략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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