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영원한 굴레, 전쟁
프랑수아 제레 지음 | 부키
<서론> 전면전의 세기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대규모의 파괴를 겪고 난 유럽 열강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듯했다. 세계의 번영을 나눠 갖기 위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무력감과 모든 민족이 한정된 공간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조잡하게 적용한 지정학적 전망으로 말미암아 당혹감에 휩싸여 있던 유럽 대륙의 지도자들은, 그 혼란기에 수립된 국경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는 노력을 군사적인 우발성에 맡겨 버렸다. 하지만 20세기는 광범위하고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평화에 대한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1928년에는 전쟁의 포기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합의한 파리 협정, 즉 켈로그-브리앙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불법 행위로 간주되었다. 1945년에는 취약했던 국제연맹을 대신해 유엔이 창설되었고, 유엔 헌장을 통해 국경 존중과 영토 주권에 기반을 둔 진정한 국제법 체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조금도 없었다. 숱한 불안과 위기감이 교차하던 냉전의 시대였던 것이다. 다만 유럽-북대서양 지역의 경제적 번영과 유럽 공동 시장 건설이라는 상황이 핵무기 억제라는 기반 위에서 전쟁 무기 사용을 중단시키고 있었다. 20세기 후반기는 두 세계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한 세계는 외부의 침입이나 종교적·사회적·인종적 내전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경제적인 번영을 통해 불균등하나마 부의 재분배로 사회적 통합을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정확히 남반구를 지칭한다고도 할 수 없고 또한 제3세계를 지칭한다고도 할 수 없는 다른 한편의 세계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전쟁·전염병·기아라는 불길한 '삼합회'가 이 지역에서 16, 17세기의 유럽처럼 맹위를 떨친 것이다.
물론 발칸 반도에서의 분쟁 위기와 미디어들의 수선스러운 과장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초인 지금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폭력의 위험성이 완화된 듯 보인다.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인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분야에서 유엔이 보여 준 무능력과 비효율은 인류에게 필수적인 보편적 평화의 이상향을 추구하는 데 다시 한 번 좌절감을 안겨 주고 있다. 새로운 세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대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획득한 이권을 유지, 발전시키려는 의지로 점점 더 활발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패권 국가의 다소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미국은 정보 시대와 동일시된다. 미국은 정보를 통해 힘을 얻는 동시에 정보의 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계화라는 새로운 압력을 수반하고 있다. 어떤 국가가 그들이 보유한 팽창력을 바탕으로 영역을 멀리까지 확장하려할 때마다 세계화는 으레 대두하는 문제였다. 세계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오래된 통상로와 분할선에 따라 재편되었는데, 그러한 맥락에서 현대성은 전통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은 오랜 단절의 시기를 겪은 뒤에 새로운 국경을 모색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인간, 사고, 상품의 자유로운 유통을 의미했다. 냉전 시대의 종말은 이러한 유통과 국경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그러나 모순적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소수의 권리나 인권 같은 상위 가치라는 명목으로 요청되는 간섭권이 영토 주권의 엄격성을 문제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 유통을 저지하려는 의지가 통행로와 중간 기착지에 더욱 엄격한 통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조세 회피지'로 향하는 자본 유통에 대한 통제가 합법이라면 결핍과 사회적 부당성, 권력의 독재적이고 파벌적인 독단에 직면해 있는 국민들로부터 박탈하여 번영을 누리는 먼 지역들로 제공되는 석유 같은 자원의 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유통과 국가 문제는 서로 간에 모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1세기에는 이러한 혼돈을 피하기 위한 타협점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분쟁들
제국들과 국가(1900-1914)유럽의 국가들 :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은 뒤에도 유럽의 강대국들은 제국이라는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을 재탄생시킨 1848년의 2월 혁명 당시 급작스럽게 다시 등장한 국가 개념은 역사의 새로운 행보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기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탄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내셔널리즘이 지배적 사고로 떠오르게 된다. 국민 국가의 원칙은 군주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적 정당성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유럽 속령이 감소되던 시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병적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군주제, 제국, 매우 드물긴 해도 공화정 등의 다양한 형태로 국민 국가가 실현되고 있었다. 내셔널리즘이 제국의 체제 분열에는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생겨난 여러 국가 간의 경계를 확립시키는 데 이르지는 못한 것이다. 인구수로나 경제적으로 한창 팽창되던 유럽에서 내셔널리즘은 국수주의,이탈리아식의 민족 통일주의, 팽창주의 등 공격적인 형태들로 치닫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정학적 전망과 여러 가지 제국주의 이론을 출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로 인해 다시금 두려움과 열정이 부추겨지면서 결국 1914년의 대폭발로 이어지게 된다. 내셔널리즘은 또한 국가에 대한 정의조차 통일성이나 안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혈연, 속지주의 등의 결정론이나 자의성이 서로 다른 성질의 여러 모델들을 출현시켰던 것이다. 그 가운데 최악의 사례가 생물학적 정체성으로서의 '민족'이라는 인종주의적 개념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하게 된다.
유럽 대륙의 쇠퇴(1914-1929)제1차 세계 대전으로 쇠약해진 유럽은 분쟁의 씨앗을 내포한 강화 조약 체결로 결정적인 쇠퇴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투르크 제국의 잔해를 나눠 가짐으로써 식민 제국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이로써 자신들의 패권이 유지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공산화된 러시아가 제정 시대 영역을 다시 확립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일시적으로 본래의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희귀하고 있었다.
1차 대전은 과연 세계적 차원의 전쟁이었을까? :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한 보스니아계 학생이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페르디난트를 암살하자, 동맹 체제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유럽은 장기전에 돌입했으며, 그 즉각적인 동기는 경제적 경쟁 의식과 발칸 반도에서의 게르만-슬라브 간의 적대 관계 및 내셔널리즘의 부상과 같은 요소들이었다. 1915년 이탈리아는 영불 동맹(우호 협정이라고도 한다)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양국 동맹에 합류한다. 영토가 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 반도까지 이르렀던 오스만제국의 참전은 전쟁이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미국, 중국, 브라질이 각각 1917년 4월, 8월,10월에 영불 동맹 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세계화된 분쟁은 확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5년에 걸친 장기전을 치르는 동안 경제적 동원의 규모가 점점 증가했으며, 엄격한 검열에 근거한 '과대 선전'을 통해 철저하게 의도된 내셔널리즘이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 전쟁은 전면전 양상을 띠어 갔다. 후방에서는 이른바 '전시 경제'가 발전한다. 전쟁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게 된 관계로 모든 산업이 군비 경쟁에 동원된다. 참전국들은 미국 같은 경제 강국들로부터 빚을 지게 되었다. 정치인들의 확고한 의지와 민간인들의 조직화로 '제1차 세계 대전'은 국가적인 모든 힘이 결집된 일종의 쇼크가 되고 있었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드디어 프랑스의 콩피에뉴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800만 명의 사망자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입힌 크나큰 정신적 상처, 숱한 전투로 피폐해지고 엄청난 빚에 시달리는 새로운 유럽을 남긴 채 전쟁은 종결된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들의 미숙한 처리로 또 다른 충돌의 씨앗들이 격분한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1917-1924 : 러시아 제국에서 소비에트 제국으로 : 7년이라는 기간동안 한 제국이 몰락한다.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소수의 혁명가들은 새로운 정치 원리에 따라 그들 방식대로 제국을 재건하게 된다. 재정 러시아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이중의 위협에 직면한다. 러시아 군은 훨씬 산업화된 독일군의 공세에 무릎을 꿇었으며, 패배의 충격은 1905년 2월 막대한 손실을 입히며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파업과 시위가 페테르부르크까지 확산되었다. 군수 물자와 식량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고 있던 1500만 병사들로 이루어진 러시아 군에 가장 많은 병력을 조달하던 농민들 역시 분노를 폭발시킨다. 그 결과 진압 병력조차 등을 돌렸고 측근들로부터도 비난을 면치 못했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결국 1917년 3월 폐위되고 만다. 권력은 즉시 두마(Douma, 의회)에서 비롯된 임시 정부로 넘어간다. 임시 정부는 온건파 민주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 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했으나 실제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지배적이던, 노동자와 군인들로 이루어진 소비에트들과 권력을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두 권력은 전쟁 또는 정치적·경제적 재편성 중 어느 쪽에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지를 놓고 대립한다. 더군다나 레닌이 취리히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와 있었다. 1917년 10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쿠데타는 내전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한다. 노동자와 혁명가들 가운데 우수한 역량을 지닌 자들로 충원된 500만 병력의 적군(赤軍)은 방대한 지역에서, 그리고 극도로 복잡한 상황 어느 곳에서나 그 능력을 발휘했다. 1922년 12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USSR)이 건국되고, 새로운 국가 헌법은 1924년 1월에 비준된다. 하지만 새로운 영토 기반이 포기되었으며, 나라 전체가 거의 파산 상태였다.
글로벌 세계의 탄생1929년 대공황으로 예고된 제2차 세계 대전은 기존의 국제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후 유럽은 미·소 중재 하에 수많은 국경 문제를 해결한 반면,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예를 들어 근동에서는 다음 세기까지 지속될 대립 요소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이후 국제 정치 전 분야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29년 대공황 : 재난의 형태로 진행된 경제적 세계화 : 지금까지도 경제학자와 역사가들은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다. 거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달한 경제 체제들이 대공황 이후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계를 거부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난 즉, 세계적 전쟁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929년 10월 '검은 목요일', 야만적 투기와 관련된 월가의 주가 대폭락이 이미 몇 달 전부터 소비 감소로 타격을 받던 미국 경제를 강타했다. 그에 대응해 미국 정부는 관세율을 인상하고 외국에 투자된 자본을 거두어들이는 등 자국 경제를 나머지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모든 장치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고립주의적이고 보호주의적인 대처는 경제 위기를 외부로 전파했을 뿐이었으며, 그 결과 미국과 가장 의존적 관계에 있던 유럽 경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루스벨트는 대규모 사업을 전개하여 소비를 진작시키는 뉴딜 정책을 추진한다. 반대로 독일은 국가 사회주의적 자급자족 체제를 향한 강력한 국유화를 실행했는데, 이 경우 군수 산업 분야의 발달은 경제 발전의 데이터를 왜곡시켰다. 경제 위기는 급작스럽게 국가가 경제 분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끔 만들었다. 전통적인 자유 방임주의가 원인으로 지목되던 긴박한 상황에서 국가가 유일한 사회적 조정 장치로 부각된 까닭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은 이때 사용된 처방의 유효성에 대한 모든 평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만다. 전쟁 직후 프랑스, 영국이 포함된 여러 유럽 국가가 대대적인 국유화를 실시하면서 국가 주도의 계획 경제 모델을 발전시킨 것이다.
세계전이고 전면전이었는가? : 1940년 여름까지만 해도, 1차 대전보다는 덜 파괴적이던 유럽 내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오산이었다. 전쟁은 곧 전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 이 전쟁은 유럽 지역에서 벌어지는 지극히 내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습격 등의 사태들이 결국 전쟁에 세계적인 차원을 부여하고 만다. 이것은 단지 지리적인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원의 총력적인 동원, 극한적인 폭력에 대한 의존, 전쟁 목적의 절대성과도 관련된 문제였다. 1914-1918년에는 전투 중단과 평화를 위한 정치적 모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분출되었다. 하지만 1944년의 상황은 그와 달랐다. 최후까지 가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언론, 라디오방송, 영화 같은 일상적인 지적 활동의 동원은 전과 달리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가장 심각한 것은 전통적인 전쟁 법칙을 파기하려는 태도가 증폭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대륙은 폐허가 되었으며, 도덕적 위기는 극에 달했다. 숱하게 벌어진 반역 행위, 적국과의 협력, 비열한 행동,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 행위, 이 모든 것이 오래도록 문명 세계임을 자부하던 유럽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유럽은 주변 세력의 지배를 받는 두 지역으로 양분된다. 하나는 미국이 점차 영향력을 증대시키던 유럽-북대서양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레닌주의적 공산주의 이념이 독특하게 결합된 세력이 지배하던 소비에트 지역이었다. 자율성을 상실한 유럽은 두 강대국의 적대적인 영향력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려야 했으며, 마셜 플랜(Marshall Plan,유럽의 부흥을 위한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 계획으로 동유럽의 사회주의 공화국들은 이를 거절한다)이 시행되는 1947년 이후에는 명백하게 양분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이스라엘-아랍 전쟁 : 1947-1949년 팔레스타인에서 발발한 분쟁은 불과 몇 년 전에 겪은 세계 전쟁에 비해 하찮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유럽에서의 유대인 대량 학살의 과중한 무게가 작용하고 있었다. 유대 민족은 안전한 삶을 강하게 희구하고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대 민족 국가를 폭력 속에서 탄생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이스라엘은 중동 지역에서 이득을 보려는 서구인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비롯된 온갖 모순들이 얽혀 있는 매듭이 된다. 하지만 아랍인들로서는 이러한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이유도, 떠맡아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화약고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각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국가를 보유해야 할 필요성을 확실하게 절감한 19세기 말에 이르러 비로소 체계적인 정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는 아랍 수장들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밸푸어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 건립을 위한 모태'창설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는데, 당시 영국 정부는 국제연맹으로부터 이 지역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유대 이민자들은 비옥한 땅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이 지역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는 결의안을 채택하는데, 이것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나누는 이른바 '분할 계획'이다. 유대인들은 수용했으나 아랍인들이 거부했던 이 결의안은 예루살렘을 국제 지역으로 지정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권은 1948년 5월 14일에 종료된다. 같은 날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때부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