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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역사

더글러스 스타 지음 | 이룸
제1부 피의 마법



순한 송아지의 피


17세기 파리 근처의 한 마을에 앙투안 모로이라는 광인이 살았다. 그는 '광증'을 앓고 있었으며 증세가 심해지면 아내를 구타하거나 옷을 홀랑 벗어버리고 거리를 뛰어다녔다. 루이 14세의 주치의인 내과 의사이자 동물의 피를 인간에게 수혈할 때 나타나는 영향에 대해 고찰해 온 장-밥티스트 드니는, 모로이를 내과 의사들과 외과 의사들, 그리고 상류층 사람들로 둘러싸인 의자에 앉혔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로이의 팔에 있는 정맥을 절개하여 은으로 된 관을 삽입하고 10온스 정도의 혈액을 뽑아냈다. 그런 다음 그는 관의 다른 쪽 끝을 송아지의 다리 동맥에 삽입, 한 컵 정도의 송아지 혈액이 그 남자의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다. 이 의사는 송아지의 피가 가지고 있는 '온순함과 신선함이 이 광증 환자의 피가 가지고 있는 열기와 난폭함을 누그러뜨리길' 바랐다. 17세기의 의학이란 민간요법, 점성술, 종교적 주문, 그리스인들로부터 전해진 지혜 따위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외과 의사들만큼이나 수술을 자주 했던 이발사나 외과 의사들은 어떤 병이든 초기 증세만 나타나도 환자에게 해로울 정도로 방혈을 시키곤 했다. 그것은 환자의 피에서 '나쁜 체액'을 뽑아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도 흔했다.



드니는 최초로 인간에게 수혈을 한다는 제안을 함으로써 수혈 기술에서 개척자가 되었다. 그는 자연이 혈액의 교환이라는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는 철학적 가정에서 출발했다. 결국 태아는 태반을 통해 모체의 혈액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동물로부터 영양물질을 받는다는 것이 하등의 잘못될 이유가 없다는 도덕적 입장을 주장했다. 드니는 모로이에 대한 두 차례의 수혈을 끝마쳤다. 또한 그는 한 스웨덴 귀족에게도 수혈을 했지만 그만 사망하고 말았고, 부분 마비가 있는 여성도 수혈을 받았는데 목숨은 건졌다. 얼마가 지난 후 드니는 모로이의 아내로부터 자신의 집을 방문해 달라는 한 통의 편지를 받고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그곳엔 그의 수술을 도와줄 조수와 기구 일체, 송아지 한 마리 등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어 즉시 수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드니는 송아지를 잡아매고 환자에게 자리를 잡게 했지만 그들이 막 대롱을 삽입하려는 참에 모로이는 그 금속관이 빠져나올 정도로 격렬한 발작을 일으켰고, 그들은 송아지의 피를 전혀 수혈하지 않은 상태에서 실험을 마쳤다. 다음 날 밤 앙투안 모로이는 사망했다. 모로이의 아내는 드니를 비방하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고, 드니는 파리 외곽의 샤틀레 형사법원에 그에 대응하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결과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처음 두 차례의 수혈은 모로이를 진정시켜주었지만 그 이후 그가 다시 광기 발작을 보였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모로이가 아내에 무자비하게 주먹질을 하고 난 후 아내는 '어떤 가루'를 남편이 먹을 수프에 집어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수혈이 시도될 무렵 모로이는 비소 중독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드니가 완전 무죄임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혈액을 주입하는 시술 방법은 차츰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2년 후 프랑스 의회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수혈 행위를 공식적으로 금지시켰고, 영국도 이런 선례를 따라 마찬가지 조치를 취했다. 로마에서 두 남자가 수혈로 인해 사망하자 교황은 유럽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시술을 금지했다. 의사들이 또 한 번 인간에 대한 실험적인 수혈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0여 년이 지나고 나서이며, 그때는 오로지 인간의 피만 사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혈액은 몇 가지 유형이 존재하며 치명적인 반응을 피하기 위해서는 혈액형이 정확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의사들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시술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혈처럼 기적과 같은 힘을 가진 치료법은 없다"

정맥 절개, 즉 방혈은 이집트와 그리스의 고대 문명에서 비롯되어 중세, 르네상스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와 제2 산업혁명기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의사들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질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환자들의 피를 뽑았다. 1920년대까지도 미국의 시골 의사들은 환자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철 따라 '정맥에 숨구멍을 틔워주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혈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방혈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기원전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저술을 남긴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질병은 체액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치료는 구토, 발한, 배설, 방혈 등을 일으킴으로써 평형을 되찾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알렉산더 대왕에게 전해졌으며, 그의 정복전쟁을 통해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체계가 페르시아 지역과 힌두교권 세계에 전해지게 되었다. 수세기 후 로마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동안 검투사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의 우두머리였던 클라우디우스 갈레누스가 그러한 믿음을 받아들였다. 유능하고 수완이 좋았던 의사 갈레누스(또는 갈렌)는 넓은 범위의 질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방혈을 권했으며, 불순물을 제거하는 다른 방법들보다 훨씬 더 명확한 것이라며 방혈을 선호했다. 페르시아의 아비시나와 같은 대가들도 사실상 알려진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법으로서 방혈을 처방했다. 몸에서 질병의 증상이 나타난 쪽과 같은 쪽에서 방혈을 했던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아랍인들은 증상이 나타난 부분의 맞은편에서 방혈을 했다.



방혈에 의한 치료는 유럽에서도 지속되었다. 12세기 의학 교육시설 가운데 최고였던 살레르노 의과대학 의사들은 보건지침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전형적으로 넓은 범위의 증상에 대한 치료법으로 방혈을 추천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방혈은 오늘날의 아스피린만큼이나 신뢰를 얻었고 인기가 있었다. 전반적인 건강 유지를 위해 수도사들은 1년에 서너 차례씩 서로 피를 뽑아주었다. 의사들은 정중하게 봉건 영주의 피를 뽑았다. 박사들은 방혈에 가장 좋은 시기를 알려 주는 점성학적 조건들을 알 수 있는 정교한 도표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교황은 성직자들이 방혈 시술을 하는 것을 금지해 버렸고, 의사들은 잘못된 진료 행위를 했을 경우 봉건 영주에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으므로 시술을 단념하게 되었다. 따라서 방혈은 이발사를 겸한 외과 의사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방혈의 역사에서 가장 신랄한 드라마는 방혈의 발상지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미국 최고의 방혈의는 내과 의사이자 애국자였던 벤저민 러시였다. 그와 동시대인들에게 '방혈의 왕자'라고도 알려진 러시는 학자에 인문주의자, 사회개혁가, 독립선언문의 서명자이기도 했다. 러시는 모든 질병은 혈관이 자극을 받기 때문이며 방혈을 충분히 하면 누그러질 것이라고 여겼다. 러시는 인간의 몸에는 25파운드 가량의 혈액이 들어 있으며, 그 중 20파운드 정도를 방혈해도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만약 환자들이 까무러치기라도 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그것은 가혹한 치료방식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에너지로 무장한 러시는 필라델피아 전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치료법을 처방해 줬다.



러시의 주적主敵은 그 지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이었던 <포큐파인스 가제트>의 발행인인 윌리엄 코베트라는 경영자였다. 코베트는 러시를 파멸시키려는 목적에서 「러시-라이트(rushlight)」라는 소책자 시리즈를 제작했다. 조지 워싱턴(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몇 개월도 되기 전에 「러시-라이트」에는 위싱턴이 받았던 치료에 대해 존 브리켈이라는 의사가 기고한 비평문이 실렸다. 브리켈은 "노인들은 젊은이들만큼 방혈을 잘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위싱턴의 피를 그렇게 다량으로 방혈시키지 말았어야 했다는 점을 특별히 언급했다. 그러는 동안 이 전직 대통령을 진료했던 세 명의 의사들 가운데 엘리샤 딕은 다량의 방혈에 대해 경고했지만 나머지 두 의사는 그의 반론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몇 주 후 진료에 참여했던 또 다른 의사인 구스타프스 브라운 박사는 자신들이 딕의 충고를 듣지 않았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러시 박사의 불운과 조지 워싱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방혈은 그 후 반세기 동안이나 인기 있는 치료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질병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의사들은 의지할 수 있는 다른 치료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몇 가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 사건들로 인해 결국 의사들은 정맥 절개 시술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중 한 가지는 1830년대 초 몇 차례에 걸쳐 영국의 도시들을 황폐화시킨 전염병 발진티푸스였다. 발진티푸스는 그 자체가 환자를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고, 열에 들뜬 환자는 체력이 약해진다. 겨우 몇 온스의 피를 뽑는 것조차도 환자를 기절하게 만들 수 있다. 방혈이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켰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열병 증상이 오고 난 후로는 아예 방혈을 포기합니다"라고 에든버러의 한 의사는 기록했다. 두 번째 새로운 국면은 의학 통계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의학 분야의 등장이다. 의사들은 개별적 치료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1830년대에 들어와서 피에르-샤를-알렉상드르 루이라는 파리의 한 의사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백 가지 증상에 대한 표를 만들고 발진티푸스에 의한 열병이나 폐결핵과 같은 질병의 진행 추이를 기록하여, 어떤 질병이 발생하면 그 질병에 대한 통계치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균학 연구의 대가인 프랑스의 파스퇴르, 스코틀랜드의 조셉 리스터,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는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병원균에 관한 이론은 현대 의학의 바탕이 되었다. 세밀한 관찰, 통계자료와 상세한 병력의 이용, 세포생물학의 발전, 병원균에 관한 이론의 탄생 등 이러한 모든 국면 전개는 방혈 관습의 퇴조로 이어지게 되었다.



기괴한 응집

현대적인 수혈 의학의 시대는 1908년, 뉴욕 시에서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의학 연구를 위해 록펠러 연구소에 와 있던 프랑스 출신의 연구자 알렉시스 카렐 박사의 아파트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린 사람은, 컬럼비아 대학교의 에이드리언 V.S.램버트 박사와 그의 두 형제들이었다. 램버트의 아내가 여자아이를 출산했는데, 그 아기는 지난 며칠 동안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이 아기는 누군가 신선한 피를 순환기 체계에 투입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서 죽게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램버트 박사는 실험용 동물의 동맥과 정맥을 접합하는 수술을 해낸 카렐 박사의 연구 결과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으며, 카렐 박사라면 자신의 갓 태어난 딸아이의 생명을 구해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카렐은 아기 아버지의 왼쪽 팔목에 있는 동맥을 노출시킨 다음, 자신의 세 지점 봉합 기술을 사용해 아기의 다리에 있는 가느다란 정맥에 아버지의 동맥을 연결하는 봉합을 시도했다. 아버지의 피가 아기의 혈관을 타고 빠른 속도로 흘러 들어가면서 혈관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기는 살아났다. 카렐의 동료 의사의 말을 빌리면, "이 나라에서 달성한 가장 뛰어난 외과수술의 성공으로 꼽을 수 있는 수술"을 해낸 것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고, 카렐은 1912년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멸균 과정이나 혈액형, 또는 혈액이 바늘이나 대롱 안에서 응혈되는 것을 막는 방법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1900년 비엔나에 있는 병리해부학 연구소의 칼 란트슈타이너 박사는 시험관에 혈액 샘플을 섞다가 특정 조건 아래에서는 혈구가 응집된다는 현상을 알아채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전에 동물과 인간의 혈액을 섞거나 혹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혈액과 건강한 정상인의 혈액을 섞었을 때 이러한 반응을 본적이 있었지만, 이를 그저 혈액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 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란트슈타이너는 건강한 사람들의 혈액 샘플 사이에서도 이러한 응집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혈장 급혈자(給血者:환자에게 수혈용 혈액을 공급하는 사람)의 명단을 왼쪽에 수직으로 적어 넣고 적혈구 급혈자의 이름은 맨 아래쪽에 나란히 써넣은 간단한 표를 만들어 결과를 기록했다. 결과는 응집이 일어났는가의 여부에 따라 + 또는 -로 표시했다. 그가 'A'라고 부르게 된 한 집단에서 나온 혈장은 또 다른 집단 'B'의 적혈구를 응집하게 만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B'집단에서 나온 혈장은 'A' 집단의 적혈구를 응집시켰다. 둘 중 어느 쪽도 세 번째 집단의 적혈구를 응집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 세 번째 집단을 후에 'O'라고 명칭을 변경하긴 했지만 처음에는 'C'라고 불렀다. 몇 년 후 란트슈타이너의 요청에 의해 대규모로 수혈 교차 적합 시험을 실시하던 그의 두 동료는 두 종류의 혈장 모두에 반응을 보인 네 번째 집단을 발견하여 그것을 'AB'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치료 목적으로 행해진 수혈의 다양한 결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또한 헝겊에 묻혀져 2주 동안이나 바싹 말라버린 혈액의 혈액형도 탐지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법의학에서 혈액형을 이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제2부 혈액 전쟁



대량 학살의 전주곡

1935년 독일 동부 마을에서 한스 세렐만 박사는, 급히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적당한 급혈자를 찾을 수 없자 자신의 팔을 절개, 동맥을 드러나게 하여 자신의 피를 수혈해 주었다. 그의 혈액형은 마침 환자의 것과 융화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박사는 독일인의 피를 더럽혔다는 혐의로 6개월 동안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졌다. 환자는 비유태계 백인이었고 세렐만 박사는 유태인이었던 것이다. 여러 나라가 혈액에 대한 탐구에서 진보를 보이고 있던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의학 연구를 해내고 있었던 독일인들은 근거 없는 사회적 통념과 미신에 빠져 퇴보를 하고 있었다. 나치 체제 하에서 혈액은 다른 종족의 순수성의 표상인 상징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긴 액체였던 것이다.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그러한 믿음은 독일에서의 의술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했으며 수많은 목숨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종족의 혈통적 순수성에 대한 나치의 이상은 반유태주의, 사회적 다윈주의에 대한 믿음, 권력에 대한 필사적인 열망 등이 뒤범벅되어 이루어져 있었다. 나치 하 과학자들은 혈액에 관한 연구 또한 망쳐놓았다. 그 시대에 첫째가는 인종이론가이자 독일 혈액형 연구협회의 설립자인 오토 레헤가 이끄는 과학자들은 혈청학 연구를 아리아인의 우수성과 영토 주장에 대한 증거로 이용하려 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럽 사람으로서는 란트슈타이너 다음으로 뛰어난 연구자였던 폴란드 출신 혈청학자 루드비히 히르츠펠트의 연구를 왜곡시켜 자신들의 연구 기반으로 삼았다. 히르츠펠트는 2년 동안 '새장'이라고도 알려져 있던 독일군의 철벽같은 초병 경계선 안에 수만 명의 연합군 병사들이 봉쇄되어 있던 살로니카에 함께 갇혀 있었다. 그는 거기서 모두 19개의 인종 집단으로부터 8,000개의 혈액 샘플을 수집하여, 각 집단의 지리적 기원과 서로 연관을 지으면서 특정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면 영국인에게는 A형 혈액형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 A형이 43.2%인 반면 B형은 7.2%였다. 반대로 인도인에게는 B형 혈액형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B형이 41.2%인 반면 A형은 19%였다. 전반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겨가면서 B형 집단의 비율이 증가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보다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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