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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쟁

윌리엄 위어 지음 | 시아출판사
제1부 민주주의의 발달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당사자 : 그리스(밀티아데스) 대 페르시아(다티스)

의의 : 민주주의의 생존



문명 세계에서 등장한 민주주의란 새로운 제도는 민중이 주인이 되는 제도였다. 오랫동안, 그리스는 신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왕이 다스렸다. 그러다가 대부분 도시들은 왕정을 뒤엎고 통치자, 곧 참주(僭主)라고 불리는 실력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마지막 참주인 히피아스를 물러나게 하고 반 참주법을 통과시켰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사위인 마르도니우스에게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이오니아의 그리스 백성들을 손에 넣은 참주들을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자리에서 쫓겨난 참주들 가운데 한 명인 칼리마코스는 다리우스의 속셈이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이미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아직 저항하고 있는 도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정도일 뿐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를 '위대한 왕'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선원들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해변뿐만 아니라 다르다넬스 해협, 크림, 아프리카의 키레네, 마실리아(지금의 마르세유), 스페인의 지중해 방면과 대서양 방면으로 식민지를 삼고 있었다. 만약 그리스의 도시들이 연합한다면, 그들은 다리우스가 모을 수 있는 어떤 선단도 물리칠 수 있었다. 다리우스는 그런 그리스 사람들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 않고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민주주의의 후원자라는 인상을 내세우면서 많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페르시아의 군주제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다리우스가 보낸 사신들에게 복종의 표시로 흙과 물을 주었다. 그런데 유독 스파르타를 상대로 한 심리전만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도시 국가는 마치 군대처럼 운영되었기에 정권에 대한 반대파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테네에는 반대파가 있었다. 다리우스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첩보원들을 보내 이오니아에서 민주주의가 꽃피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면서 페르시아 군대에 도시의 문을 열어 주기만 하면 정권을 잡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페르시아 첩보원들이 집권자들의 군대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 주겠다고 약속하자 아테네의 배신자들은 협력하기로 했다. 다리우스의 계획이 성공하려면 페르시아군이 에게 해를 넘어 그리스 본토에 재빠르고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해야 했다. 페르시아 군대가 작은 도시 에레트리아를 재빨리 점령하면 아테네 군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테네의 배신자들이 페르시아 군사들을 끌어들일 수 있으며, 스파르타나 그 밖의 다른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네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리우스는 지휘권을 조카인 아르타페르네스와 다티스라는 메디아 사람에게 맡겼다. 용감하고 경험 많은 군인 다티스가 실질적인 지휘를 하게 된 것이다.



칼리마코스는 마라톤 평원 위에 있는 고지에 올라 페르시아 적군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자기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인 1만 명과 플라타이아이 사람 1천 명 정도의 규모는 될 듯 했다. 페르시아 힘의 근원은 늘 창기병과 기마 궁수로 이루어진 기마병에 있었다. 마라톤과 같은 평원에서는 기마병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페르시아는 이 곳을 상륙 지점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원군이 온다면, 그리스군이 모두 보병이라 하더라도 이민족을 바다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는 스파르타에 도와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달리기 선수인 페이디피데스를 보냈었다. 그동안 아테네와 동맹군인 플레타이아이 사람들은 산맥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따로따로 아테네군 부대를 이끄는 열 명의 장군들은 현재 위치를 지켜야 하는지, 페르시아군을 공격해야 하는지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장군 가운데 한 명인 밀티아데스는 칼리마코스에게 공격하는 쪽으로 표를 던져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칼리마코스는 아테네 역사상 지금처럼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장군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결정으로 민주주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칼리마코스는 페르시아군이 해변 쪽으로 옮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지금이 공격할 때라고 마음을 정했다.



마침내 다티스는 부대에게 배에 오르라고 명령했다. 페르시아 최강의 기마대가 먼저 출발했다. 그 동안 칼리마코스는 공격 찬성에 표를 던졌다. 운이 따랐는지 그 날은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날이었다. 밀티아데스는 군대를 정렬시켰다. 페르시아 사람들과 사카 사람들은 페르시아 진영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약한 그리스군 중심부를 필사적으로 공격했으나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그리스 병사들의 창은 더 길었고 그들의 갑옷은 더 두꺼웠다. 그리스군의 중심부가 뒤쪽으로 휘어졌을 때, 양 측면에 있던 부대가 중심으로 진격했다. 페르시아군은 가운데로 몰렸고 병사들은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밀집되어 혼잡을 이루었다. 페르시아 병사들이 뒤돌아서 배로 도망치자 그리스군이 뒤쫓았다. 밀티아데스와 칼리마코스는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스파르타까지 달렸던 페이디피데스를 불렀다. 아테네에 승전보를 알리려고 한 것이다. "빨리 달려야 한다." 장군들은 강조했다. 그 전에 어떤 달리기 선수도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진맥진하면서 아테네까지 가서 외쳤다. "승리했다. 승리했어!" 말을 마친 그는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다시 한 번 그리스 원정을 결정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가 지휘한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 섬 근처에 있는 좁은 해협으로 끌어들여 쓸어 버렸다. 그리고 이듬해에 그리스의 많은 도시 국가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를 완전히 무찔렀다. 민주주의는 죽지 않았다.



벙커힐 전투 (서기 1775년)

당사자 : 미국(윌리엄 프레스콧) 대 영국(윌리엄 하우)

의의 : 미국의 독립



젊은 과격분자들이 이끄는 농민들이 조국을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으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다. 게이지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3천 명의 추가 병력을 받았다. 보스턴에 있는 영국군은 5천 명에 이르렀다. 게이지는 효과적인 첩보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 첩보망을 통해 반란군이 탄약과 무기, 심지어 대포까지 미리 모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게이지는 콩코드에 있는 무기고를 빼앗으려고 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반란군도 첩보 조직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영국군이 오기 전에 무기고를 옮겼다. 게이지의 부대가 콩코드를 덮쳤을 때, 그들을 맞은 것은 무장 농민이었다. 영국군은 난데없이 공격을 받고 찰스타운으로 쫓겨났다. 그 뒤 게이지의 부대는 보스턴을 포위했다. 게이지는 그들이 영국의 정규군과 직접 맞서는 상황이 오면 토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게이지가 반란군들의 숙영지를 방문했더라면, 그 규모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중부 식민지, 심지어 남부 식민지에서 온 군대뿐만 아니라 뉴잉글랜드 각지에서 온 의용군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스라엘 푸트남 장군은 매사추세츠의 윌리엄 프레스콧 대령과 숙련된 공병 장교 리처드 그리들리 대령, 참호를 팔 무장 농민 1200명과 함께 벙커힐보다 조금 낮지만 좀더 가파르고 영국군과 가까운 브리즈힐에 요새를 쌓고 있었다. 그들은 돌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울타리를 쳤다. 울타리 뒤쪽에는 참호를 팠다. 미스틱 강 위로 솟은 절벽 아래쪽에는 강변에 돌벽을 쌓았다.



한편 영국군 사령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작전이 세워졌다. 먼저 로버트 피곳 중장이 찰스타운 마을에 진입해 요새를 진격하여 반란군들을 그 자리에 묶어두고, 그 동안에 윌리엄 하우가 척탄병 중대와 전투 중대들을 이끌고 미스틱 강변 쪽에 급히 쌓은 적의 요새를 공격한다. 그 후 척탄병과 전투 중대들이 적의 정면을 공격하는 바로 그 순간에 경보병이 적의 후방에서 기습 공격하는 것이다. 피곳의 부대는 찰스타운 마을에 상륙했고, 저격수들의 총탄을 받았다. 영국 배들은 마을에 백열탄(시뻘겋게 단 대포알)과 소이탄(불타는 삼과 타르의 혼합물을 채운 속이 빈 탄환)을 발사했다. 마을은 금방 시끄러운 용광로로 변해 버렸다. 피곳은 군대를 이끌고 마을 근처로 갔다가 요새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의 경보병들은 강변에서 4열종대로 늘어서서, 버려진 돌벽처럼 보이는 곳을 향해 재빨리 전진했다. 선두에는 영국 웨일스 퓨질리어 연대의 경보병 중대가 섰다. 선두가 돌벽 전방 30미터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귀청을 때리는 폭음이 들려왔고 이어서 연기구름이 피어올랐다. 선두에 섰던 퓨질리어 연대의 경보병 중대는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그 뒤에 섰던 국왕 직속 경보병들은 동료들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분노에 찬 함성을 질렀다. 그때 두 번째 일제 사격이 쏟아졌다. 경보병 중대는 일순간 멈칫했고 그 때 세 번째 일제 사격이 이어졌다. 경보병 부대 모두가 뒤로 도망쳤다.



한편 하우를 뒤따르는 첫 번째 공격대인 척탄병들은 돌벽 앞 70미터 지점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그들이 돌벽 전방 30미터에 이르렀을 때 담벼락 위로 반란군의 머리와 장총 총구가 불쑥 나타났다. 이어서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이 들리더니 하얀 연기구름이 피어올랐다. 대열을 이루었던 군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한 덩이가 되어 뒹굴었고, 몇몇 사람만이 서 있었다. 이제 두 번째 돌격을 맡은 전투 중대들이 그들을 헤치고 전진하면서 사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반군의 사격은 정말 빨랐다. 하우는 자기 부대원들에게 소리치면서 칼을 흔들었지만, 영국군 병사들은 뒤쪽으로 달아났다. 피곳의 부대도 요새 가까이 갔다가 똑같은 경험을 했다. 하우와 피곳은 격퇴 당한 뒤 15분 후에 경보병, 탄척병, 전투 중대를 묶어 부대를 다시 조직하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참호에 몸을 숨긴 적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살이 일어나며 영국군은 다시 한 번 밀려나고 말았다. 하우는 세 번째 공격을 하려고 부대를 종대로 길게 늘어뜨렸다. 영국군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미국 사람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반란군들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전투에 참가했던 1800명 미국 사람 가운데 449명이 죽거나 다쳤다. 반면에 영국군의 손실은 훨씬 컸다. 2600여 명이 전투에 참가해 1060명이 죽거나 다쳤다. 영국군은 대수롭지 않은 언덕만을 차지했다. 그러나 반면 미국 사람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벙커 힐에서, 미국 사람들은 한 수 위의 전력을 가진 영국군과 맞서 싸웠고, 탄약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들을 물리쳤다. 미국 사람들이 저항하기로 결심하자, 영국은 희망 없는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그들의 식민지 땅은 18세기에 동원할 수 있는 어떤 군대로도 정복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영국 공습 (서기 1940년)

당사자 : 영국(윈스턴 처칠) 대 독일(아돌프 히틀러)

의의 : 민주주의의 생존



히틀러는 영국이 작은 힘이나마 자신의 동반자로 남기를 바랐다. 윈스턴 처칠은 이전의 독일 식민지들을 되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강화 협정을 맺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 처칠은 그 생각을 버렸다. 7월이 되자 히틀러는 영국 침공 작전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독일이 영국을 어렵지 않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막강한 육군과 공군은 이미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델란드, 룩셈부르크, 심지어 프랑스까지 정복했다. 히틀러의 친구로서 루프트바페의 총지휘관이었던 헤르만 괴링의 임무는 해군 함정과 해안의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적의 공중 공격을 막고, 상대 육군의 초기 저항을 쳐부순 후, 최전선 후방에 있는 예비 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괴링에게는 다소 벅찬 임무였으나 교만한 전투기 조종사인 그는 잘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영국은 전투기 생산을 크게 늘려왔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의 연구팀이 레이더를 발명한 덕분에 영국의 레이더 기지가 섬의 동쪽과 남쪽 해안을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괴링은 7월 10일, 영국 남쪽 해안과 영국 해협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향해 첫 공습을 했다. 그 뒤 독일은 공습 때마다 20대 내지 30대의 비행기를 출격시켰다. 7월 31일까지, 독일은 180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반면에 영국은 70대를 잃었다. 8월 1일 히틀러는 루프트바페에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해 최단 시일 내에 영국 공군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8월 13일 루프트바페는 영국 공군 기지를 공격했다. 그날 이루어진 스피트파이어 공장 폭격 때에는 독일 비행기 45대가 격추되었다. 그에 반해 영국 비행기의 피해는 13대에 불과했다. 8월 15일,루프트바페는 75대의 비행기를 잃었다. 영국 공군의 피해는 35대였다. 그 때부터 괴링은 휘하 장군들에게 영국 공군 전투기 기지에 모든 공격을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그 덕에 8월 24일과 9월 10일 사이 영국 공군은 290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루프트바페도 비행기 380대를 잃었지만 그 가운데 반만 전투기였다.



8월 24일과 25일 밤, 연료 저장고를 폭격하려고 영국으로 날아간 독일 전폭기 10대는 런던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도시 한복판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후 영국은 베를린 공습으로 복수했지만 그리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그러나 그 공습에 히틀러는 분노했다. 9월 7일,루프트바페는 모든 힘을 런던에 쏟아 붓기로 했다. 독일 비행기들은 런던에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영국 국민의 사기를 꺾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영국의 군사력은 한층 강해졌다. 영국에서 '블리츠'라고 부르는 런던 대공습은 거의 전쟁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 즈음 영국은 6월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히틀러는 작전을 연기하더니 9월 17일에 취소했다. 독일은 영국 공습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 공습으로 히틀러의 패배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말을 향한 긴, 아마도 가장 긴 여정의 첫 발걸음일 터였다. 그 뒤 히틀러는 작전을 동부 전선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의 등뒤에서는 이미 적이 천천히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 적은 세계 최대로 꼽히는 해군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군의 규모도 늘리고 있었다. 그 공군은 모든 면에서 루프트바페를 앞설 것이다. 게다가 그 적은 바다를 건너오는 수백만의 새로운 적군을 위한 기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제2부 동서의 대립

굽타 전투 (서기 1180년)


당사자 : 몽골족(테무친) 대 케라이트족(왕 칸)과 그들의 동맹군

의의 : 뒤에 칭기즈칸이 되는 테무친의 등장. 테무친의 등장으로 몽골족의 유라시아 정복과 동서양 사이의 지식 교환이 이루어진다.



사막이 늘어나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사람들은 전쟁을 피해 대규모 이동을 했다. 그것은 아시아 고원 지대의 오래된 이야기였다. 몽골족, 티벳족, 퉁구스족 모두 삶의 터전을 위해 싸웠다. 그중 튀르크족이 가장 강했고, 초원 부족들 가운데 가장 약했던 부족이 몽골족이었다. 몽골족은 중국 국경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 중국인들은 국경에 잠재적인 적이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웃 유목민들인 타타르족을 회유했다. 타타르족은 몽골족을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후 야카 몽골족의 왕인 예수게이는 끊임없이 타타르 진영을 습격했다. 그는 포로였던 타타르 여인인 호엘룬이 자기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들의 이름을 테무친이라고 지었다. 테무친이 아직 어렸을 때 예수게이가 죽자, 타타르족을 비롯한 적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예수게이의 가족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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