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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존 M. 홉슨 지음 | 에코리브르
제1부 선구적 개발자로서 동양



이슬람과 아프리카의 선구자들: 아프로-아시아 시대에 세계의 다리와 경제 구축, 500∼1500년유럽 중심주의는 1500년에 이르러 발전한 문명으로서, 유럽의 출현과 더불어 유럽인에 의한 발견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이로써 중요한 문명들을 격리시켜 온 장벽들이 붕괴되었고, 19세기에 출현해 1945년 이후에 성숙한, 세계화라는 전도유망한 서양의 시대를 위한 길이 닦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눈에 익숙한 유럽 중심적인 그림은 하나의 신화이다. 문명적 고립주의(타국과 동맹 관계를 맺지 않고 개입을 꺼리는 외교 정책)를 무너뜨린 세계 경제는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에 의한 발견의 시대였던 16세기에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구적인 유럽인은 중동의 아랍인·페르시아인·아프리카인에 의해 정해진 협정에 따라 기존의 세계망으로 진입했을 뿐이었다.



동양의 세계화는 유럽의 '암흑기'에 시작되었다. 751년에 서유럽의 카롤링거 제국이 탄생하고 8∼9세기에 수많은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들이 출현함에 따라 세계 무역 체계가 유럽으로 확장되었고, 이 때문에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양극이 세계 왕국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적인 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중세와 현대 서양의 어머니, 혹은 산파였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아라비아의 이슬람교도들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보다 앞선 성과를 올렸는데, 이는 3세기에서 확실하게는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610년 이후 중동은 무함마드(마호메트Muhammad. 이슬람교의 창시자)의 '계시'와 함께 세계적인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의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이슬람 세력의 통합을 주도한 것이었다. 또한 이슬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무역과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활동 성향이었다.



꾸란을 면밀히 연구한 맥심 로딘슨은 "꾸란은 성지 순례 중에도 무역을 행함으로써 종교적 실천과 물질적인 생활을 공유하고, '신의 보상금'이라는 이름 아래 상업적 이익을 가급적 많이 산출하라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이슬람의 상대적 이점은 상당한 확장력에 있었다. 이슬람교는 수평적인 공간을 정복하고, 지구상의 광범위한 지역을 통해 퍼져나가 자본주의를 확산시킬 능력을 대부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때문에 이슬람의 중심지인 메카는 자연히 세계 무역의 요충지로 떠올랐다.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는 650∼1800년 사이에 무역뿐만 아니라 동양의 많은 '자원들'을 서양으로 전달한 세계의 다리였다. 이슬람교는 종교적이거나 상업적인 영향력을 통해서 서유럽뿐만 아니라 동쪽의 인도, 동남쪽의 아시아와 중국, 남쪽의 아프리카로 뻗어나갔다. 당대의 수많은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9세기 즈음 이슬람 상인이 개척한 하나의 길고 지속적인 대륙 횡단 무역로(실크로드)가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졌다.



무슬림(이슬람교 신자)은 특히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과의 무역에 의존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집트가 극동과 서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무역 루트 중 하나를 장악한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 시장이 이슬람 해외 무역의 가장 수익성 있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선박들은 모잠비크의 수팔라나 칸바루(마다가스카르)와 같이 먼 남쪽의 아프리카 동해안에까지 진출했다. 에티오피아·짐바브웨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금이 채굴되었고, 킬와(남부 탄자니아)는 중요한 화물 집산지였다. 아프리카인들은 구슬, 별고배고둥(고대에 화폐로 쓰였다), 구리와 구리 제품, 곡물, 과일, 건포도, 밀, 그리고 나중에는 직물을 수입했다. 동아프리카 항구들이 가장 집중적으로 상업적 관계를 맺은 지역은 인도, 아덴, 수하르, 시라프였다. 그리고 이런 장거리 무역은 아프리카 내륙 지방을 통한 무역에도 활기를 불어넣었다. 더욱이 시질마나(모로코에 위치)나 오다가스트와 같은 서아프리카의 화물 집산지들은 일찍이 이슬람교도의 정착으로 확장되면서 동서부 해안을 통해 북부와 사하라 이남 지역을 연결했다.



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계 무역이 수마트라의 슈리비자야 왕조뿐만 아니라 유대계 상인들에서도 눈에 띄게 횡행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대계 상인들은 중동·북아프리카가 서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위 극동에서 세계 무역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슈리비자야의 부흥이 당 왕조 때 부활한 중국 무역에 힘입었다는 점에 동의한다. 또한 그곳은 중동, 인도, 중국 간에 이루어지는 무역의 중요한 집결지였다. 결과적으로 650∼1000년 사이에 세계적 응집력의 주도권은 이슬람의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가지고 있었다.



동양의 세계화를 나타내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근거는 13세기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출현이다. 이 국가는 동서양을 하나의 무역 공간으로 연결했다. 13세기 말엽까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이 몽골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한 이 광활한 제국은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평화적인 지역을 제공했다. 그럼으로써 한편으로는 중국과 유럽 간 약 8,000킬로미터에 걸쳐 세계적인 무역 시장이 형성됐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수한 동양 사상과 기술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당대의 유명한 인물인 마르코 폴로, 발두키 페골로티는 비단길에 대해 '밤낮으로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강력한 무역망은 14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축소되었다. 사마르칸트에서부터 외부로 뻗어 나오던 타메를란(티무르의 별칭)은 흑사병의 황폐화처럼 팍스 몽골리카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이것이, 동양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종말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오히려 무역은 중앙과 특히 남쪽 경로를 따라 점점 확산되었다. 자네 아부러고드에 따르면, 중앙 루트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해 작은 사막을 건넌 다음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지나 바그다드에 이르렀다가 마지막으로 육로와 해로로 갈라졌다고 한다. 남쪽 경로는 알렉산드리아-카이로-홍해 복합 지역과 아라비아 해, 인도양과 그 너머까지 이어진다.



13세기 이후 이집트는 동쪽으로 통하는 주요 관문을 설치했다. 더욱이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세계 무역의 '개척자들'이 아니라 중동의 무슬림과 특히 이집트인이 규정한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아프로-아시아인 주도의 세계 경제와 무역의 틈새로 스스로를 밀어 넣은 '순응자'일 뿐이었다. 이로써 동양 주도의 세계 경제와 유럽에 대한 북아프리카의 무역 패권에 대한 설명을 끝맺는다. 그러나 1517년보다 훨씬 이후까지도 유럽에 대한 이슬람의 무역 헤게모니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슬람의 확장력이 이집트에서 오스만제국으로 그 바통을 넘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응집력은 주도권은 1100년에 중국으로 그 바통이 넘어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중국의 개척자들 : 최초의 산업적 기적과 중국의 고립주의에 관한 신화, 1000∼1800년

중국은 1,500년간 '산업적 기적'을 일궈냈으며 송대의 혁명과 함께 산업화의 절정을 맛보았다. 그것도 영국이 산업화 단계에 진입했을 때보다 600년 앞선 시기였다. 중국의 철과 강철의 기적은 기원전 6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13년에 주철로 만든 물건이 처음 제작되었으며, 기원전 2세기에는 강철이 처음 생산되었다. 무엇보다 용광로와 피스톤형 풀무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사용되기 시작했고, 31년에는 공기 조달에 수력이 이용되었다. 특히 중국인은 5세기에 연철과 주철을 함께 녹이는 '관강법灌鋼法'을 이용해 강철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충격적인 혁신은 11세기에 숯을 코크스로 대용한 일이다. 이것은 유럽 중심주의가 그 후로도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영국이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사실이다. 또 직물산업의 발전은 흔히 18세기 영국의 성과로 취급되는 것이 보통이나 중국의 비단 산업은 기원전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발전적인 기술 혁신은 삼베와 비단 제조에 수력으로 움직이는 방적기를 대거 이용한 직물 산업에서 이루어졌다.



또 하나 특별히 눈에 띄는 송나라의 혁신은 현금을 기반으로 하는 세금제도의 창설이었다. 9세기경에 외상을 목적으로 처음 생겨난 지폐는 10세기 초가 되면서 교환의 매개물이라는 의미의 '진정한' 지폐로 발전했다. 1161년까지 중국은 한 해에 1,000만 장의 지폐를 발행했다. 이 획기적인 발전을 나중에 유럽인이 모방했지만, 영국인의 눈에 띈 것은 한참이나 지난 1797년이었다. 현금 경제의 발전은 특히 인쇄와 제지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으로 이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종이가 갑옷, 벽지, 의류, 화장실용 휴지, 연, 티슈 등 독창적이고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는 사실이었다. 중국의 제지 산업은 서책 제작을 위한 방대한 수요에 의해서도 활성화했다. 또한 중국은 영국이 18∼19세기에 달성한 농업혁명을 연상시키는 거의 모든 요소를 6세기에 이미 갖췄다. 사실 송나라 농업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유럽 중심적 역사가도 '대체적으로 유럽에서는 20세기가 될 때까지도 12세기의 중국이 이룩한 상황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송나라 정부는 '청묘법靑苗法'으로 알려진 정책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농부들에게 농업에 투자할 장려금을 지급하고, 매우 낮은 금리의 차관을 제공했다. "아마도 그것의 주된 성공은 신기술의 혜택에 민감한 농촌 인구가 스스로의 독창성을 실험하고 향상시키려는 노력에 있었을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저서 『시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적 발견은 인쇄, 화약, 나침반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세 가지는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또 유럽 중심주의는 최초의 중요한 '군사 혁명(1550∼1660년)'을 유럽인이 일으켰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주요한 기술적 발명은 화약, 총, 대포였다. 그러나 이 모두는 850∼1290년에 이루어진 '최초의 군사 혁명' 때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 중국인은 850년경에 화약을 발명했고, 10세기 초에 그것을 화염방사기에 사용했으며, 969년에는 불화살에 이용했고, 1231년에는 폭탄, 수류탄, 로켓(박격포의 형태)에 이용했다. 그리고 14세기에는 육지와 바다의 광산에 이용했다. 심지어 중국인은 한꺼번에 320대의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로켓 발사대를 개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인 역시 14세기에 날개와 핀이 달린 로켓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니덤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V-1 로켓과 유사한 파괴력을 지녔다"고 한다. 총의 기원은 10세기 중반의 '불창'에서 찾을 수 있다. 철제 총알을 뿜어내는 최초의 총은 1259년에 발명되었고, 금속 총신은 1275년에 사용되었다. 1288년에는 '폭발물'로 알려진 조잡한 대포가 발명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중국의 군사 혁명이 가진 가장 인상 깊은 면모 중 하나가 바로 해군이라는 사실이다. 송대의 해군은 2만여 척의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배의 무기 체계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1129년에 투석기가 화약 폭탄을 날렸고, 1203년에는 배 몇 척이 철판으로 무장했다. 중국은 원한다면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제국적인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단지 중국은 자국의 특별한 정체성에 따라 제국주의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할 수 있다.



제2부 서양은 꼴찌였다



기독교 왕궁의 형성과 유럽 봉건주의의 동양적 기원, 500∼1000년

유럽의 봉건 경제는 정치 및 군사 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고, 도덕적이고 규범적인 틀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8세기 경에 나타난 새로운 전쟁 형식(돌격 기병대)은 봉건 국가와 봉건 경제의 제도적 기틀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였다. 그 계기는 등자의 발명에 있었다. 등자는 기병에게 자신의 힘과 말의 힘까지 합쳐서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유럽 중심적 학자들은 등자를 733년에 샤를 마르텔이 발명했다고 주장하나 기병이 엄지발가락만 올려놓는 등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인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기원전 2세기 후반). 그리고 등자의 중요한 혁신은 3세기경 중국에서 발명한 청동 및 주철 등자로 완성되었다. 477년경에는 중국 전역에서 그러한 등자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비단길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퍼졌고, 7세기 말에는 페르시아까지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694년에는 아랍인이 쇠로 등자를 만들었고, 이러한 기술 혁신은 바이킹과 롬바르드족을 통해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돌격 기병대는 어떻게 봉건적인 정치 제도의 시작을 가능하게 했을까? 기병대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전쟁 방식이 안고 있던 중요한 문제는 전적으로 비용이었다. 따라서 농업적인 수익을 농민들에게서 거둬들이거나 몰수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농민들을 자유롭게 착취하기 위해서 농민들이 거주하는 땅을 기사들에게 하사했다. 이렇게 해서 강력한 귀족층이 출현했고, 봉건적인 사회·정치 체제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봉건제는 기술적·민족적·신분적·군사적·정치적 힘의 복합적인 융합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세계적이거나 동양적인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럽은 농민과 귀족, 귀족과 통치자, 통치자와 사제, 통치자와 교황,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뿌리 깊은 내적 갈등으로 멍들어 있었다. 때문에 고유의 동질성이 있을 리 없었다. 단일의 정체성, 즉 동질의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외적인 '타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독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 걸맞은 후보로 이슬람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해악인 동시에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야 했다. 그래야 유럽인이 그에 대항하며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무슬림은 (두 종교가 중요한 유사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로 비난받았다. 이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야벳(노아의 셋째 아들)에게는 '확장될 운명'의 기독교 유럽이, 셈(노아의 맏아들)에게는 '이교도로 넘치는' 아시아가 주어졌다. 좀 더 일반적으로 라나 카바니는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반대이며, 무함마드는 사기꾼, 사악한 호색가, 악마와 손잡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여겨졌다. 결국 이슬람 세계는 유럽의 적이 되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첫째 문제는 유럽의 자아가 세계적인 배경에서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유럽은 '기독교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정체성이 중동의 이슬람교와 대비되는 기독교로 상상되거나 형성되었다. 이는 16세기까지 지속된 유럽인의 정체성 형성의 첫 단계를 특징지었다. 그러나 기독교 왕국으로서 유럽은 하나의 '개념'에 불과했다. 기독교가 원래 동양의 종교이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가 선구자라는 신화, 1000∼1492년

유럽 중심적인 학자들은 '1000년 이후'의 항해 혁명과 금융 혁명뿐만 아니라 상업 혁명도 특히 강조한다. 그리고 모든 혁신 뒤에는 진취적인 이탈리아인의 천재성이 숨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주요 동양 국가들이 이미 개척해 유지하던 기존의 세계 경제 속에 참여함으로써 경제력을 얻었을 뿐이다. 나는 실제로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발전 뒤에 숨어 있는 중요한 혁신 모두가 더 발전한 동양의 세계화를 통해서 이슬람이라는 세계적인 다리를 거쳐 전해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유럽 무역의 발달은 궁극적으로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된 동양의 상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또한 중동과 중국에서 유입된 다양한 동양의 '자원들'은 주로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상업로를 따라 이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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