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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잔재 19가지

김삼웅 외 지음 | 가람기획
제1부 - 반세기를 온존해 온 우리 속의 일제잔재

<총론> 반세기를 온존해 온 우리 속의 '일제잔재'
- 정운현(중앙일보 기자, 친일문제 연구가)동서고금의 인류의 역사는 한 시대가 끝나면 구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이를 토대로 새 시대를 열어왔었는데, 이는 역사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보인다. 한편 이 같은 사실들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광복 이후 우리의 역사는 기본적인 요소조차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반민특위 와해로 '친일파 척결'이라는 해방정국 당시 최대의 민족적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이며, 다음은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제잔재를 온존시켜온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민족은 과거 역사에 대해 지극히 무비판적이었고 동시에 불만 속에서만 살아온 셈이다. 광복 반세기를 한해 앞둔 지금 우리는 다시 1백년 전, 즉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과 거의 유사한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태도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과거사 청산은 곧 민족정기 회복이다" : 과거사 청산과 관련하여 우리는 가끔 우리와 같이 2차세계 대전 당시 피지배를 경험한 프랑스의 끈질긴 '나치청산' 사례를 예로 들곤 한다. 프랑스는 종전 이후 민관이 합동으로 민족반역자를 색출, 처단하였는데 그 같은 노력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제잔재 청산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우선 친일파 척결을 시작으로 하여 현재 우리 주변에 온존해 있는 각 분야의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다시 말해 우리 내부적인 과거사 청산이 그 하나이며, 그 다음은 징용·징병·종군위안부·사할린 교포·전범희생자·원폭피해자 등 일제 하 전쟁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을 둘러싼 제반문제 해결이다. 물론 후자는 일본과 맞물려서 처리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최근 수년 전부터 일제 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연구와 운동이 전개돼 온 것은 사실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사회에서 일제잔재를 청산하려면 민족단체를 중심으로 유관단체들이 결집하여 사회운동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세력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일제잔재 청산은 일반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일제시대를 '극복'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일제잔재 청산은 단순히 '과거사 청산'이라는 차원만이 아니라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민족정기 회복이라는 차원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



<언어> 우리 겨레의 얼을 빼는 일본말 - 이오덕(아동문학가)

우리말 속에 들어와 있는 일본말(한자말의 문제) : '가께우동'이나 '야끼이모'니 '시따'니 '기레빠시'니 하는 말들은 우리말이 아니란 것을 거의 모두 알고 있고, 그래서 요즘은 안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리고 이런 말들은 가령 끝까지 잘못되어서 그 일부가 아주 우리말이 된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 될 것이 없다. 우리말 전체의 틀이 우리 것으로 살아 있다면 이런 말은 우리 것에 아주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에 의하여' '되어진다' '불린다' '‥에 있어서의' '‥에의' '‥에로의' 따위나 '입장' '역할' '의의' '의아해한다' '가시화' '해우' '민초' '발발' '호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이밖에 얼마든지 있는 이런 말들은 우선 우리말의 틀을 깨뜨리고 질서를 바꿔놓는다. 우리말을 요란한 한자말 문체로, 괴상한 일본말 직역체로 바꿔 놓는다. 그러면서 이런 말들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대개 모르고 쓰지만 나중에는 알면서도 쓰게 된다. 뭇사람들이 '와리바시','다라이'라고 하면 바로 나무라고 욕하는 지식인들이 스스로 쓰는 잘못된 관념어나 어려운 한자말은 그것이일본말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고치지 않는다. 지난 분단 반세기 동안 무식하다는 백성은 그래도 일본말을 많이 고쳤지만 지식인들은 단 한 가지도 고친 것이 없고, 도리어 일제시대에도 안쓰던 일본말을 퍼뜨리는 일에 앞장서 왔고, 지난 반세기의 분단 세월에서도 말과 글로 일본말을 퍼뜨리고 우리말을 짓밟기에 앞장서 왔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말 사전에 올려 있는 낱말들은 70%가 한자말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한자말의 대부분은 일본말 사전에서 옮겨놓은 것이고, 한자말의 풀이도 일본말 사전을 거의 그대로 베껴 놓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글에서만 나오는 한자말을 쓰면 일본말이 되어버리는 까닭이 이러하다. 우리말에 파고든 -토인 '의'를 함부로 쓴다든지, 움직씨(동사)를 입음꼴(피동형)로 써서 '불린다''되어진다'고 하는- 한자말이 아닌 이 모든 어설픈 말들은 일본말이 아니라 영어의 영향 때문이라고, 영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영어를 따라가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이런 말을 쓰게 된 내력을 살피면 그 시초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일본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일본말 따라가는 것이 서양말 따라가는 것으로도 되어버렸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것을 망치게 하는 이런 말들은 일본말이든 서양말이든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할 것이다. 속담이란 것이 있다. 일본속담이라면 일본사람들만이 옛날부터 살아오면서 널리 쓰게 된 격언이다. 그런데 일본속담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자랑스럽게 쓰고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미끄러진다든지, 도토리가 키를 잰다든지, 벌레를 씹는다든지 하는 따위다. 이래 가지고 무슨 낯으로 남들 앞에서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이야기하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본말과 일본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모두가 잘못된 외국말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알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고쳐보려고 하는 사람은 더욱 없는 형편이다. 우리말의 앞날을 볼 때, 이 땅은 일본문화의 식민지가 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자기 혁명을 해야 한다.



<교육> 교육계의 일제잔재 - 이명화(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교육의 이상은 개인적 삶을 보다 나은 단계로 발전시키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은 국가의 체제이념 파괴 정책에 입각하여 그 내용이 결정되며 학교는 국가이념을 효과적으로 전수하는 정치사회기관으로 이해된다. 한국의 교육은 근대교육이 실시된 이래 역사적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해방 후 미군정 실시, 민족분단, 군사독재정권 등 거듭되는 파행적 정치, 경제구조의 확대로 정상적인 민주발전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교육은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키고 강화하는 권력의 도구로 이용되어 관행적 현상과 모순을 선도하기도 하였다. 그 파행적 진행의 원인을 규명해보면 청산되지 않은 일제 식민지교육의 잔재가 아직도 한국교육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가로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해방과 미군정기의 교육 : 일제 하 민족해방투쟁 속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은 공히 교육 부문에서 교육평등과 의무교육의 실시라고 하는 내용의 강령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는 일제 식민지교육이 근대화교육을 내세웠지만, 기실 조선인들에게 식민지 노예의식과 민족적 열등감을 조장하였고, 초등교육과 실업교육의 기초적 기능교육만을 가르쳐 조선민중을 우민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민지교육으로 말미암아 교육에서 차단되고 소외된 민중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개방하는 교육평등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일제에 대치한 새로운 지배자인 그들의 필요에 맞게 통치질서를 잡아가야 했으며 그 역할이 교육에 부여된 것이다. 이 점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효과적으로 식민지 민을 통치하기 위하여 교육을 도구로 삼은 것에 다름 아니다. 미국국무성의 정책보고서에 의하면 미군정이 행하는 교육개혁은 "미국의 정책에 대한 한국민들의 지지를 획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소련과의 협상에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임을 분명히 천명하였는데, 이는 냉전체제가 구축되면서 미국이 38선 이북의 소련이라는 경쟁상대를 강하게 의식하여 남한의 교육개혁에 착수했음을 보여준다. 미군정은 한국교육위원회에 이어 1945년 11월 23일에 조선교육심의위원회를 다시 구성하여 신교육제도의 도입, 의무교육제 실시, 교육행정기구 개편, 학교교육이념과 제도의 골격 등 교육 전반에 걸친 문제에 대해 토의하고 방향을 제시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에는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나섰던 친일교육자들을 배제하기는커녕 파트너로 선정하여 이들이 교육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1947년 11월에 구성된 조선교육연합회(이후 대한교육연합회로 개칭됨)는 미국교육회(NEA)의 조직과 형태를 모델로 조직된 것이다. 교련은 자율적인 교원단체로 구성하고자 했지만 친일인맥으로 조직·인맥이 짜여짐으로써 어용단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일제시대 총독부 식민지교육의 지원단체인 조선교육회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교육과정 개편과 식민지교육의 잔재 : 한국의 교육과정 개편은 일제 때 교육령 개정과 마찬가지로 급격한 정치적 변혁이 있을 때마다 시행되었는데, 8·15, 5·16, 1980년 5·17 직후에 교과과정의 개편이 크게 이루어졌다. 문교부 검정교과서는 국가의 교육통제를 선명히 보여주는 것으로, 일제시대 총독부가 교육령을 개정할 때마다 그에 맞춰 새로이 교과서를 발행하였는데, 해방후 우리 교육계에도 교육과정이 변화할 때마다, 엄밀히 말해 정치적 변혁이 있을 때마다 교과서가 새로 쓰여졌다. 해방 후 우리말로 된 교재가 거의 없었으므로 미군정에서는 일본어로 된 교재를 번역하여 사용하였다. 일제 총독부 교과서편찬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식민지민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목표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모든 가치를 조장하고 일제의 가치규범과 체제옹호,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해방 후 국정교과서도 선택의 여지없이 정부정책을 홍보·선전하는 책자가 되어 피교육자들의 교육적 선택권리를 박탈하고 다양한 해석과 폭넓은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모든 가치판단은 획일화되었고, 강요된 정답만을 주입하여 정해진 해석 외에 일체의 다른 해석을 불허함으로써 창의적 사고를 차단하였다. 권위주의·획일주의 사고는 이 사회가 비민주적인 사회로 유지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인명> 우리 이름에 남은 일제잔재 - 배우리(한국땅이름학회 부회장)

요즘에는 옛날에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이름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광복 이후부터 나오기 시작한 한글이름들이 한글 세대에 맞는다고 보아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거의 보편화되다시피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광복 50년이 되도록 아직도 일본식 이름이 남아 있고 그러한 상황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 겨레의 큰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순 우리말 이름은 삼국시대에도 : 한자가 이 땅에 들어와 널리 쓰이기 이전인 고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당시의 사람 이름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 흔히 보는 이름들이 아닌 독특한 것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혁거세, 수로, 을지, 이사부, 거칠부, 사다함, 개소문 등. 이 이름들은 모두 당시의 우리말에 바탕을 둔 '우리 식 이름'이었다. 예컨대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지금의 말로 '밝은 세상'을 뜻하고 있고, '수로(首露)'는 '마로', '으뜸(머리)'을 뜻하고 있다. '을지문덕'의 '을지(乙支)'는 웃치(상관=上官)' 또는 '억지'의 뜻으로 유추되고 있고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夫'는 각각 '이은(계승한)' 머리(상관)'와 '용감한 장수'의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름은 한자가 보편화된 통일신라 이후 차츰 중국식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모든 이름들이 중국식으로 거의 두음절로 통일되고, 우리 토박이말과는 거리가 먼 이름으로 옮겨갔다. 원래, 고대의 우리 사회에는 성과 이름의 구별이 없었다. 삼국시대로 들어와 상류 계급에서 이름을 갖기 시작했으나,서민계급에서는 대개 성이 없어 이름만 써왔다. 성 외에 관貫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신라 말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本, 본관本貫, 향관鄕貫이라고도 한다. 대개는 씨족의 근거지가 되는 땅이름에서 취하여진 것으로, 그 씨족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성과 관이 같으면 원칙적으로 같은 씨족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씨족이 달라도 임금으로부터 성과 본을 받는(사성사관賜姓賜貫) 경우도 있었고, 다른 씨족의 성과 관을 그대로 따서 쓰는 일도 있어서 반드시 성과 관이 같다고 해서 같은 씨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제는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강요 : 고려 중엽 이후로는 거의 모든 한자식 성과 이름을 갖게 되고 돌림자(항렬)도 이때쯤 생기게 되었다. 씨족 이름인 성姓, 같은 세대끼리의 동지적 결속을 강화하여 그 동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항렬을 단 석 자의 틀에 담아놓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의 이름처럼 조직적인 것이 없다고 외국인들도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이름 문화(?)는 우리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민족말살정책을 펴온 일제는 그 완성편 격으로 창씨개명을 단행하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과 미·일전쟁을 전개하면서 발악적인 식민정치의 마지막 수단으로 이른바 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한 것이다. 일본식 창씨는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 총독부는 이를 이행하지 않은 조선인은 행정기관에서 일을 볼수 없게 하고, 물자를 배급해 주지 않는 등 각종 불이익을 주었다. 또, 각급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으며, 겉봉에 조선식 이름이 쓰인 우편물이나 화물은 배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행정조직과 경찰을 총동원해 가정마다 일일이 창씨개명을 종용, 강제적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성도 이렇게 바뀌어 버렸지만, 또 많은 이들은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주목할만한 전형이 여자 이름의 끝에 붙는 '자子'자였다. 사대부 집 여자 이름에는 '희姬','경卿','옥玉','주珠'자 등이 보통 쓰었고, 상인 계급에서는 '간난이' '입분이' '언년이' '아지(아기)'등으로 보통 명사처럼 붙여왔던 여자 이름들이 하루아침에 '춘자春子' '화자花子'등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일제의 영향으로 여자 이름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이 '아들 자子'자 외에 '가지 지枝'자도 있다. 또, 남자 이름으로는 '랑郞'자, '웅雄'자, '식植'자, '일一'자 등이 많이 쓰였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이름 분야에 일제잔재가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풍속> 민족생활풍습과 일제잔재 - 주강현(민속학자, 민족문화유산연구실장)

민족생활풍습과 일제 식민지의 유산들 : 일제는 무엇보다 민족심성을 왜곡시켜 자주성을 박탈시켜나갔다. 민족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탄압과 왜곡을 비집고, 그 공백을 대신 채워나간 것은 바로 일본 및 서구 우월주의적 문화관념이었다. 이제 일제의 후과가 미친 결과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하여 살펴본다.



- 사례 : 민족적 세계관과 식민잔재 : 일제는 식민지배 초기부터 한국인의 민족심성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는 미신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교육시켜왔다. 그러나 미신이란 말은 실제로는 한국말이 아니었다. 명치유신시대에 일본의 개화파들이 구미의 'Superstition'을 번역하여 만든 일본식 조어였다. 그들은 바로 미신이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갖고서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굿적인 심성을 모두 미신으로 공격하면서 미개한 민족이기 때문에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펴게 된다. 물론 전근대사회의 여러 사상이나 속신 속에는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요소들도 많으나, 이는 당대 사회의 발전단계에서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 사례 : 놀이문화와 식민잔재 : 일제의 여독이 강하게 들어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놀이문화다.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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