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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그들은 누구인가

한일민족문제학회 지음 | 삼인
제1부 재일 조선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식민 지배와 남북분단이 가져다 준 분열의 노래

냉전이 낳은 또 하나의 현실
: 재일 조선인의 국적은 '한국', '조선', '일본'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따라서 재일 조선인의 현실 생활이나 아이덴티티의 존재 양태는, 실제로는 남북한 및 일본이라는 세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리고 있으며 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재일 조선인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할 때 일본은 물론, 한국 그리고 북한을 제대로 시야에 넣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동시에 남북통일 문제도 자신들의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외부의 힘에 의해 분단을 강요당했으며, 그것은 결국 남북 분단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 재일 조선인을 보는 눈도 '적'이냐 '아군'이냐 하는 이분법적이며 대립적인 것이 되었다. 재일 조선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국가의 이익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전에 조선인을 '일본 국민'이라며 혹사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패전하자마자 재일 조선인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1945넌 5월의 신(新)헌법, 즉 '일본국헌법'의 발포로 노골적으로 드러났는데, 거기에는 재일 조선인의 '국적'을 둘러싼 악랄한 책략이 있었다. 신헌법이 시행되기 하루 전에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령'을 공포 및 시행하고, 조선인과 대만인 등 구(舊)식민지 출신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면서 일반 '외국인'으로 내몰아버리는 계책을 사용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구식민지 출신자를 의도적으로 외국인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에 대한 국가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회피했다는 데에 있다. 재일 조선인은 1947년에 실시된 최초의 외국인 등록에서, 국적 표시가 모두 '기호'로서의 '조선'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이 성립되자, 일본 정부는 국적 표시를 '한국'으로 바꿀 수 있도록 승인하였다. 다시 말해 '기호'로서의 국적으로 '조선'과 '한국'이라는 두 종류가 된 것이다.



조선이라는 국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일본이 재일 조선인의 국가로서의 한국과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였다. 동시에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결정하는 '한일 법적 지위 협정'이 맺어졌다. 그때 '한국' 국적은 정규 국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국적을 '한국' 국적으로 바꾼 사람에게는 일본 정부로부터 '협정 영주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국민건강보험의 적용뿐이었다. 정주 외국인, 특히 재입국 허가 제도의 적용, 공무 취임권(국가 공무원, 지방 공무원) 등은 거부당한 채였다. 재일 조선인 입장에서 보면 협정 영주권이라는 것은, 한국 정부에 의한 '기민(棄民)정책'이며 일본 정부의 동화(同化)정책의 강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에는 구식민지 출신자 및 그 자손인 재일 조선인 약 51만 명이 '특별 영주자'로서 영주권을 보장받고 있다. '한국'이 정식 국적인 반면, '조선'은 아직도 국제적으로 무국적을 의미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한 이유로 재일 조선인 젊은 세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만 하는 상황이다.



재일 조선인이 통일을 염원하는 이유 : 재일 조선인은 한 개체 안에 일본과 한반도라는 두 나라(지역), 민족과 출신지, 언어와 습관, 문화 등을 혼재시켜왔다. 게다가 남북한과 일본의 관계, 또는 일본의 법 제도나 차별적 정책이 재일 조선인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당면 과제로 정주 외국인으로서의 인권 확보와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꼽고 있다. 남북이 하루빨리 통일될 때에 재일 조선인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재일 조선인의 '민족' 의식은 갖가지 요소를 지닌 복합적인 것이다. 재일 조선인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할 때, 특히 자기의 출신을 확인하는 역사 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꿔 말하면, 더불어 살아갈 '공동체'를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게 재일 동포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재일 동포 정책
: 분단 상황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반일'슬로건을 내걸었다. 한국 정부는 재일 동포에 대해서는 분단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분열 정책을 폈다. 한국 정부는 필요할 때에만 재일 동포를 '국민'으로 규정했다. 일본 정부의 재일 한국인 정책은 '민족 차별'에 다름 아니다. 재일 동포는 이제까지 한국과 일본, 또 북한 어느 곳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셈이다.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재한 재일 동포'는, 한국인 아니면 일본인이 되라는 국가 국적 중심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심적 부담감을 안고 있다. 재한 재일 동포는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다 하더라도, 출입국과 법적 지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도 각종 불이익을 받고 있다. 공공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거나 정치적 권리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은, 대한민국 헌법이나 국제인권 규약에 위배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일본인관은 많이 변화되었지만,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어쩌면 오히려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냉전 시대에 제일 심각했던 문제는 재일 동포를 '간첩'으로 의심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재일 동포 단체 중 반국가 단체로 낙인찍힌 것은 총련 뿐만이 아니다.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의 간부들은 한국 국적이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한통련의 전신은 한민통인데,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문제시되었던 단체이다. 제일 큰 문제는 조선적을 가진 무국적 재일 동포들이다. 이들이 모두 총련 소속도 아닐뿐더러 결코 '북한 국적'이 아니다. 일본의 법무 당국도 조선적은 '기호'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식민지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 및 그 후손들 가운데,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던 자" 정도의 뜻인 것이다. 그들은 남북 분단과 북일 단교의 틈바구니에서, 무국적자로서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통일 과정에서 풀어가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재일 동포 새롭게 인식하기 : 한국인은 재일 동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첫째, 재일 조선인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산물이다. 한국 정부가 국익을 최대화하는 국내 정책 및 외교 정책을 펴지 못함으로써 한국인이 재일 동포에 대해 잘못 인식하게 된 부분이 적지 않다. 둘째, 재일 한국인들 중 특히 상공인과 기술자 등 지식인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셋째, 재일 동포 가운데서도 민족 의식을 가진 이들이 귀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재일 동포 2~4세는 일본 사회에 '동화'되는 것과, 민족성 회복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며 악전고투하고 있다. 넷째, 내국인도 언제든지 재일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 현행법상 내국인이 외국에 체류중일 때는, 재외 국민과 마찬가지로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재일 동포의 참정권 행사에 대한 논의를 한국인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국가들 가운데 외국 체류자의 부재자 투표권이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다섯째, 한국인이 모르는 뛰어난 재일 동포가 너무 많다. 특히 그 인재들 가운데 한국에 자유 왕래하는 것조차 금지 당한 30만 명 정도의 조선적, 무국적 동포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사회가 그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재외동포법의 문제점 : 1999년 12월, '재외 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이른바 재외동포법이 제정되었다. 재외 동포는 법적으로 비(非)거주자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거주자로서의 각종 보호(세입자의 전세금의 보호 등)나 국민 보험·연금을 비롯해 각종 혜택도 받지 못했다. 이제 재외 동포는 재외국민등록번호를 지급받게 되어서 본국에서의 자유와 보호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재외동포법은 2002년 3월 위헌 판결을 받았다. 재중 동포들이 소송을 낸 것이다. 원래 이 법은 재중, 재구소련(CIS), 재일 조선적 동포 등을 포함시키지 않아 민족 내에 균열을 조성하는 차별법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법률은 2003년 말일까지 개정되지 않을 경우 폐지될 수밖에 없다. 재외동포법의 본질이 IMF 외환 위기 타개를 위해 경제 사정을 고려한 '재외 동포 본국 투자 유치법' 및 기민 정책과도 상통되는 '재외 동포 거주국 귀화 촉진법'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국제연합의 국제 인권 규약에 비추어 재외동포법을 '동포우대법'으로 해석하는 것도 논리에 어긋난다. 국민 국가는 그 소속 국민(민족)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우선적인 의무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재외동포법의 개정 및 재외동포기본법의 재정 과정을 한국 사회가 국가로서의 결함을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

2부 재일 조선인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재일 조선인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동포들
: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될 당시, 일본 열도 곳곳에는 200만 명이 훨씬 넘는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다수는 이동자로서 조선의 농촌에서 생활난을 해결하려고 임금 노동직을 찾아 도일했거나, 1940년 이후 태평양전쟁기에 강제 노무 동원으로 이송 당한 사람들이었다. 일본의 패전 직후 귀국한 조선인 수는 약 150만 명 정도였는데, 연합국 총사령부는 "일본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일본 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귀국을 희망하는 조선인들의 소지 금액과 소지품 무게를 극도로 제한하였다. 따라서 얼마 되지는 않지만 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버릴 수 없고, 가족과 함께 도일해서 이미 고향에는 생활 근거가 전혀 없는 탓에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10년 8월에서 1945년 8월까지 일본은 식민지 동화 정책의 명분상 조선인을 일본 국적자('제국 신민')라고 포장했지만, 패전 직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외국인으로 여기며 일본의 제반법 제도에서 축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947년 5월 2일에는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공포하여,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의 구(舊)식민지 출신자들은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외국인 등록과 등록증의 소지를 의무화하였다. 그에 따라 1947년 12월 말까지 외국인 등록을 마친 조선인은 약 60만 명이었다. 바로 이들이 현재 일본에서 '특별 영주'의 자격으로 정주하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원형이다.



재일 조선인 원형의 형성 : 1920~1930년대에 도일한 조선인은 일본의 도시 외곽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던 조선인 집중 거주지(일명 조선 부락)를 생활의 거점으로 삼았다. 1920~1930년대가 현재 재일 조선인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라고 생각된다. 1920년에는 약 3만 명에 지나지 않던 거주자 수가 1940년에는 119만 명에 달하여 약 40배의 증가를 보였던 것이다. 인구의 지역별 분포는 1920년대 초까지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에서 가까운 순으로, 즉 주로 서부 일본에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 시기가 경과함에 따라 점점 동부 일본으로 확산하여, 1935년경에 이르면 5대 지역으로 확정된다. 이는 다름 아닌 일본의 5대 도시 지역에 해당한다. 이들 지역은 현재에도 재일 조선인이 가장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한데, 그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일제는 중일 전쟁 발발 후 1939~1945년까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일본 각지의 석탄, 금속 광산을 비롯한 군수 산업체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수많은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이 전시기(戰時期)에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은 이주 성격의 도일자가 아니기에 조국 해방 후에 거의가 귀환했다. 그러나 전시기 이전에 고향에 경제적 근거를 두지 않고 이주성의 도일을 한 사람들 중에는, 1945년에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즉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이 많았다. 이들 본인과 그 후손이 현재의 재일 조선인인 것이다.



차별과 억압에 맞선 재일 민족 해방 운동

1920년대 민족 운동의 태동
: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조선인 운동은 해외 민족 운동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한을 품고 고국을 떠난 이주민과 유학생이 조국의 자주 독립과 평등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했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재일 조선인은 무력 독립 항쟁의 역사 대신 신사상 수용과 노동 운동, 당과 대중 단체에 의한 반전, 반제 운동 등으로 민족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운동의 양상은 2.8 독립선언으로 불이 당겨졌지만, 관동 대학살과 '대역(大逆)사건'을 계기로 더욱 조직화, 대중화되어 갔다. 인삼 행상을 하며 고학하던 박열은 1923년 4월 불령사(不逞舍)를 조직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폭탄 투척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돌연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시내는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조선인과 아나키스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근거로 학살을 자행했다. 이 대학살로 조선인 약 6천여 명이 희생당했다. 일본 정부는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대지진을 틈탄 조선인의 폭동과 황태자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 즉 '대역 사건'으로 비화시켜 학살의 여론을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박열은 법정에서 오히려 조선 왕관과 왕의를 입고 일본 천황의 죄를 묻는, 초유의 법정 투쟁을 당당히 전개했다.

이와 함께 3.1운동의 좌절 이후 재일 유학생들은 다양한 사상 투쟁과 조직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더욱이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을 일본 언론을 통해 접했던 유학생들은 점차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새로운 변혁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망국과 민족 차별의 울분을 삼키고 있던 청년들에게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사상 서적과 단체 활동은 새로운 조국 건설의 희망으로 비쳤던 것이다. 1920년 당시 도쿄에는 경시청에 의해 요주의로 지목 받은 18개 단체가 활동 중이었다. 이 단체 중 조선인 유학생들이 참여한 단체는 7개 단체에 이른다. 한편 의열 투쟁과 사상 활동에 힘입어 1920년대 후반에는 조선인 노동자에 의한 노동 운동이 매우 치열하게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 운동이 전 민족 운동으로 한 단계 발전하게 된 것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사건 이후이다. 조선인들은 참화와 학살, 공포를 딛고 일어나 그 해 12월부터 피해조사회와 동포위문반을 통해 조직을 재건한 데 이어, 이른바 4대 민족 운동을 전개하며 강력한 민족 자립, 민권 옹호를 위한 대중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후 민족운동은 대중 단체들과 전위 조직의 연대 속에서 추진되었다.



1930년대 반전, 반제 운동 :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대륙 침략을 노골화하여 만주 침략에 이어 중일전쟁을 치달았으며, 합법 단체 통제와 활동가 전향 공작을 강화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는 운동 단체의 침체를 뚫고 활기를 불어넣었다. 유학생 민족 운동은 1930년대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1936년 조선유학생연구회 사건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항거한 반제 비밀 결사 운동이다. 일제의 강제 징용과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 민족 말살 정책에 반발한 학생과 노동자들은 비밀 결사를 꾸준히 결성하여 항쟁하였다. 한편 1920년대 재일노총과 조선공산당 일본 총국을 중심으로 노동 운동을 지도하던 공산주의 운동은, 1928년 12월 제6차 코민테른대회의 테제를 계기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만주와 일본 등지의 조선공산당 조직은 이른바 속지주의(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에 흡수되어 활동하게 된 것이다. 1932년 당시 일본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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