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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1부 지성의 궤적



사르트르와의 만남


지적으로 나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철학자나 작가나 학자, 사상가는 어느 한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굳이 한순간만을, 한 사람만을, 하나의 저서만을 들라면 1953년 봄 어느 날에 읽은 사르트르의 저서 『존재와 무』에 담긴 그의 실존주의를 해설한 일본어 번역서이다. 6·25 전쟁 와중의 어느 무렵이었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극심한 경제적, 신체적 고통과 지적 혼미 속에서 절망적 악몽에 빠져있던 스물 셋의 젊은 문학도였다. 나는 그 책을 통해서 그때까지 말로만 듣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야말로 내가 품고 있던 세상과 삶에 대한 모든 물음의 해답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가졌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지적 혼미에서 벗어나도록 세상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자, 정서적 허무주의의 수렁에 비춰진 한줄기 구원의 손길로 느껴졌다. 사르트르와 그의 실존주의를 처음 만난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세계와 인간의 모든 문제가 그의 실존주의 하나만 가지고서 만족스럽게 조명되거나 설명되지 않으며, 시원하게 풀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르트르와의 만남이 나의 운명을 바꾸었고,『존재와 무』의 독서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관한 수많은 책들이 나의 삶을 때로는 고독과 고통으로, 때로는 열정과 긍지로 충만케 했다는 사실이다. 그 뒤에 알게 된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과 더불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인생을 보는 시각과 삶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태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하나만의 선택

소학교 5학년생이던 겨울방학 때라고 기억된다.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다 학병을 피해 숨어 다니고 있던 큰형이 갖다 둔 꽤 많은 문학 서적들을 뒤적거리다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 내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과는 영 다른 세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시골 소년은 곧잘 손이 꽁꽁 어는 냉방에서 책을 통해 황홀하고 마술적인 세계에 남몰래 매혹되고 흥분된 나날을 보냈던 것이었다. 출세하고 편안히 산다는 것은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차츰 인식하게 되었고, 나는 인생의 의미, 만물의 현상에 대한 원리를 확실히 근원적으로 알고 싶었다. 어느덧 나는 감상에 빠진 문학 소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건넌방에는 프랑스 문학 계열에 속하는 책들과 그러한 경향을 좇은 일본 문학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책들을 탐독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자라면서 프랑스 문학이 역시 가장 참신하고 모험적이고 화려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그랬기 때문에 문학 소년으로서의 나는, 철학에도 끌리는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불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6·25 전쟁과 겹쳐진 4년 간의 대학 시절은 앎에 대한 욕망도 채울 수 없었고 착잡한 사회적·시대적 곤경이 겹쳐 삶에 대한 심각한 괴로움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1957년 프랑스 정부장학생으로 파리로 가게 됐다. 소르본느를 드나들면서 귀가 트이지 않고 입도 열리지 않고 펜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이렇게 10개월을 보낸 나는 흐릿한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머릿속이 맑아짐을 느꼈다. 문학 작품도 논리적인 설명을 거쳐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으며, 시도 조리 있는 해석을 통해서 더 깊은 감명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기 맛을 안 중처럼 약간이나마 지성과 학문의 진미를 알게 된 나는 지식에 대한 욕망을 뿌리가 빠지도록 만족시키고 싶었으나, 부득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음 해 가을 서울로 돌아왔다.



이미 한 학기를 보낸 바 있는 이화여자대학교는 나를 따뜻이 반겼고 아껴주었다. 나는 아직 한창 젊은 때였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즐거웠다. 그리고 이화에 인연을 맺은 지 4년 반이 지났을 때 나는 오막살이집과 얼마 안 되지만 아끼던 책을 팔아 버리고 함께 계시던 연로하신 어머님을 형한테 모시게 하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 터무니없는 인생의 도박을 건 것이다. 나는 파리로 다시 떠났다. 조이스와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피카소, 그리고 아폴리네르의 파리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날 끌어당긴 것이다. 그뿐 아니다. 사르트르의 파리를 잊을 순 없었다. 인간에겐 자유가 있으며, 한 인간의 인생은 그 당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르트르의 견해는 화려했다곤 할 수 없는 나에게 위로와 아울러 주어진 환경을 깨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 보겠다는 만용을 돋구어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처럼, 많은 파리의 지식인들처럼 모든 문제에 대해서 조리 있고 질서 정연하고 깊이 있는 견해를 갖고 그것을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었다. 구체적인 것부터 하나씩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학위 논문이란 명목을 걸고 말라르메에 관한 종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지적 훈련으로 생각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하며 지적인 것으로 이름 높은 이 시인을 택한 이유는 난해한 시를 이해해 보자는 나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 모든 사유는 철학으로 통한다는 말에는 깊은 일리가 있다. 철학은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고 있는 원칙 자체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갈 수 있는 한까지의 철저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학문이고 깊이 추구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철학적인 사색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파리에 가서 2년이 되던 해부터 나는 논문을 준비하는 틈틈이 하나둘 철학 강의를 듣기로 작정했고, 논문이 끝난 다음 해에는 일년 동안 남아 전적으로 철학 강의만을 들었다. 그러나 모든 여건이 여의치 않던 나는, 지적으로 환희와 희열감을 느끼게 해 주었고, 평생 처음으로 지적인 성장을 크게 체험했고 그럼으로써 애착을 갖게 된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다. 미국행이 유일한 찬스라고 생각한 나는 그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1965년 말 내가 로스앤젤레스의 USC 대학에 오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다 늦게 신청한 장학금을 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966년 2월 봄 학기부터 나는 정식으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다루는 철학의 문제나 방법은 내가 파리에서 배워 온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유럽에선 종합적인 파악을 지향함으로써 전체적인 관점을 키우기는 쉬우나 그 반면, 그 관점에 대한 세밀하고 확고한 논리가 빈약하다. 이에 반해서 현대 영미 철학은 종합적 파악에 앞서 세밀한 부분의 철두철미한 분석을 지향한다. 나는 지적으로 모든 우주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의 참모총장이 되고 싶었다. 1968년 가을부터 뜻한 바도 없었는데, 나는 얼결에 어쩌다가 미국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다음 날 강의를 준비하면서 한 학기 두 학기를 보냈을 때 내 입과 귀는 조금씩 트이는 듯했다. 그때까지 잘 연관을 맺어 볼 수 없었던 문제들이 좀 더 선명한 논리적 윤곽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깜깜했던 크나큰 철학적 문제가 선명히 해결됐을 때 느끼는 지적 쾌감은 아마도 성(性)을 통해서 느끼는 쾌감 이상으로 강렬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겐 쓸쓸히만 보였을 나의 보잘 것 없는 삶의 대가가 컸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 것은 11년 만에 돌아온 서울에서였다. 사장으로서, 한 사회의 중견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인생의 기쁨을 나는 잃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의식적인 결의에 의해 잃어버린 것을 새삼스럽게 아쉬워하고 부럽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어떠한 인생이 참다운 인생이며, 뜻있는 삶인가를 결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나대로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선택했다. 이 선택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다. 그러나 나는 그 희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이렇게 고요한 채찍질을 계속하고 있다. '타협치 말라. 뿌리를 빼라!'



지적 방랑의 변명

나는 지금까지 어떤 철학자도 그대로는 추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철학자들로부터 무한한 지적 통찰력과 지혜를 배운다. 위대한 철학자, 작가, 혁명가는 물론 나를 가르쳐 주신 시골 소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모든 스승들에 이르기까지, 나와 가까웠던 모든 친지들, 수많은 책들, 세계, 자연, 그리고 나의 모든 경험이 나의 철학적 교사이자 교과서였다. 나는 삶의 궁극적 허무를 의식한다. 그러나 이 허무감을 달랠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자연, 지구, 우주의 주인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 지구, 우주의 운명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물리적으로는 무한히 광대한 우주의 무한히 작은 일부분임을 안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정신적으로 우주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궁극적으로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한지,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옳고 그릇된 삶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선과 악, 옳고 그릇된 삶은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에 달려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그러나 그냥 편함으로서의 혹은 쾌락으로서의 행복을 멸시한다. 나는 유토피아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꾸준한 개혁으로서 개선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독재적 사회주의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물질적 가치만을 중요시하는 추악한 자본주의에 구역질을 느낀다. 나는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그곳 민중들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지향하던 유토피아적 이상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문화가 대중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의 천박한 쾌락주의적 대중문화를 혐오한다. 나는 약바른 자를 경멸한다. 그러나 위선자는 정말 참을 수 없다. 나는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 자신에게 철저하고 싶다. 나는 철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세계의 어느 것도 바꾸어 놓을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철학은 세계를 밝히는 빛이다. 나는 철학의 실용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 세계의 창조자라는 점에서 철학은 가장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철학적 사유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세계 속에 갇혀 있음을 안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를 하는 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가 태어나고 생존하는 사회, 세계, 자연을 초월하고 우주는 그러한 철학적 사유 속에 들어있음을 안다.



인생 텍스트론

'인생은 무엇인가?' 혹은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인과 철학가들이 던졌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항상 철학적 관점에서 제기되어 왔고 그에 대한 대답이 제시되어 왔다. 장자는 인생을 나비의 꿈으로 비유했고, 고대 그리스 철인들은 '인간의 본질이 이성에 있다'고 믿었으며, 공자와 칸트는 윤리 의식을 인간의 본질로 여겼다. 마르크스는 한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 주장했고, 서양 종교는 인간을 신의 아들로 확신했고, 파스칼은 무한히 방대한 우주에 비해 무한히 작지만 무한히 작은 존재에 비해서는 무한히 큰 '중간적 존재'에 비유했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허무함을 확신했고, 사르트르는 인생이 무용한 고통이자 수난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다양한 인간관·인생관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철학적 이념은 인간중심주의이다. 인간중심주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인간의 사고를 암암리에 지배해 왔다. 그것은 인간에게 긍지를 부여하고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자연지배와 약탈행위를 정당화해 왔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이같은 지배적 사상의 그늘에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인간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떠한 영원한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었고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 아니라 생태계의 한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다같이 의식하게 되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고, 세계 전체를 마야(maya)로 본 힌두교의 입장을 이어받아 나/자아만이 아니라 모든 이른바 실체들의 허구성을 '공(空)' 혹은 '무(無)'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위와 같이 크게 다른 두 종류의 입장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든 과연 우리는 그러한 철학적 인생관·인간관에 만족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 다음에도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라는 물음은 논리적으로 꼬리를 물고 계속될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이유는 모든 사유가 부딪치는 '이성'의 한계에 있다. 어떠한 설명, 어떠한 정의도 항상 불완전하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원인, 이유를 묻는 모든 물음은 무한 역행적, 즉 논리적으로 대답이 불가능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현상이나 인생이라는 사건으로서 접근될 때 그에 대한 대답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따라서 문제조차 제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물음이 우리를 떠날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중요한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논지를 위해서 실제로나 논리적으로 다같이 불가능하지만 인간과 인생에 대한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완전했다고 인정한 상황을 가정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상상해 보자. 인간이라는 존재나 인생이라는 과정에 대한 's는 p이다'라는 일반적 형식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명제의 옮음, 즉 진리임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어떤 존재 혹은 사태를 확인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존재와 사태, 다른 한편으로 그 의미는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 전자가 서술적 대상이며 따라서 서술적 대답을 가질 수 있는 데 반해 후자는 오직 평가적 관점에서 평가적 대답만을 얻을 수 있다. 전자가 사실적 문제인 데 대해 후자는 가치론적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도 인간과 인생에 대한 논의가 가치에 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 가치의 차이가 그 관계를 혼돈한 나머지 사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사실적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과 인생에 대한 물음이 사실적으로 제기되고 그에 대한 대답을 사실적으로 찾으려 하는 한 우리는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 허무주의는 모든 존재 특히 인간존재와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부정한다. 인간과 인생에 대한 사물적 관점의 테두리 안에서 허무주의를 부정하는 태도는 이성적 사유가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본능적 저항에 지나지 않는다. 허무주의를 부정하게 되는 이유는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본능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현상을 사실적 관점에서 대하는 한 철학적으로 허무주의는 역시 옳다. 그것은 전통적 기독교적 교리와 상충됨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이에게 지동설은 역시 옳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의식은 미다스 왕이 손에 비유된다. 미다스 왕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바뀌듯이 인간의 의식이 닿는 모든 대상, 행위,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의미로 변하게 마련이다. 언어적 존재로서 인간이 모든 것을 문화화 즉 의미화할 수밖에 없고, 언어를 떠난 '의미'가 있을 수 없고, 언어적 작업이 '글쓰기' 이고 그렇게 써놓은 글을 텍스트라 한다면, 인간의 삶은 텍스트 쓰기에 지나지 않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삶의 과정과 그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의미'를 갖게 마련이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지 않고 의미로서 존재하며, 그러한 인간에 의해 우주 전체도 그냥 존재하지 않고 무엇인가의 의미로서 존재한다. 이 점에서 '물리적으로 인간은 우주 속에 포함되지만 자신의 머릿속에 우주를 넣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은 우주보다도 더 크다'는 파스칼의 역설적 주장은 말이 되고 또한 옳다.

마음의 둥지 짓기

아직도 마음은 꿈 많은 20대인데 내가 죽음이 언제고 닥쳐올지 모르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아주 객관적인 자명한 일이다. 나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나머지 삶의 하루 하루를 좀 덜 부끄럽게 그리고 좀더 뜻있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해 본다. 나는 이미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서 나름대로 열심히 그리고 보람있게 살고자 애써왔다고 자처한다. 내가 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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