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된 유토피아, 공산주의
필립 뷔통 지음 | 부키
20세기의 주요 사건들
10월 혁명(1917)우리는 1917년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10월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처럼 적절하지 않은 명칭이 붙은 역사적 사건도 드물다. 왜냐하면 일단 10월 혁명은 10월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1917년에 사용되던 러시아의 달력은 그리스정교의 영향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어 1918년 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채택했던 그레고리력에 비해 13일 뒤져 있었다. 두 번째로, '혁명'이라는 용어는 이전과 이후를 확연하게 구분하는 분명한 단절을 내포하고 있는데, 볼셰비키가 승리한 다음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이후로도 수년 동안 서구의 신문들이 '러시아 혁명'을 보도할 때에 그것은 황제인 차르를 중심으로 한 제정 러시아의 전제적인 정치체제 '차리즘'에 종말을 고했던 2월 혁명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지 10월 혁명에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10월 혁명'이라는 명칭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의 선전활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봉기에 앞서 볼셰비키 당원들은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 - 현재의 상트페트로그라드로 레닌 사후에는 레닌그라드라고도 불렀다 - 에 주둔하고 있는 25만 명의 병사들 중 2만여 명을 설득한다. 그리고 10월 24일 화요일 저녁(상용력 11월 6일), 이 중 6,000명에 달하는 일부 병력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라는 이름 하에 행동을 개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해 수도의 전략적 거점들을 점령한다. 10월 혁명은 정부군 측에서는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반란군 측에서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등 거의 무혈로 달성되었다. 서구의 많은 역사가들은 '10월 혁명'이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이 사건을 '볼셰비키 쿠데타'라 부른다. 사실 10월 혁명은 큼직한 시위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발생한 러시아 민중 운동과 이러한 자발적 운동에 기존 정권의 전복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부여한 한 정당의 만남으로 발생한 것이었다. 자발적인 혁명의 움직임과 볼셰비키 혁명당의 활동이 맞물린 셈이다.
신화화된 역사 :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함께 러시아는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총체적 위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린다. 이때부터 체제의 약화는 구체적인 현실이 되고, 1917년 2월 민중의 자발적인 저항 앞에 국력은 쇠약해진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5일간의 혁명(2월 23~27일, 상용력 3월 8~12일)이 끝난 후 차리즘은 큰 저항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차리즘의 종말이 결코 공산주의의 건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서 차리즘의 폐지는 저항의 움직임을 가속시켰다. 결국 러시아를 동요시켰던 사회 불안 속에서 진정한 정치적 돌파구를 제공할 수 있는 세력은 볼셰비키뿐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정치적 안정이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중 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당시 볼셰비키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의 과정을 진행시켜 국가 권력의 마비와 점진적인 쇠퇴를 이루는 것이었다. 볼셰비키의 목적은 오직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1917년 9월 볼셰비키 지도부 내에서는 내분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레닌이 가지고 있던 계획의 기본적 성격을 알 수가 있다. 레닌을 제외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권력 장악이 당의 쿠데타와 동일시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 당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노동자·군대·농민 대의원 평의회, 즉 민중의 자발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조직체인 '소비에트(les soviets)'를 통해, 그리고 그 이름 하에 혁명이 수행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레닌이 '소비에트의 합법성'에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다. 그는 볼셰비키당이 독자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혁명 과정을 단독으로 선도할 것을 요구한다.
10월 24일의 봉기는 소비에트 대회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실행되었지만, 사실 그 명분 자체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결국 10월 25일 소비에트대회 개최 직전 레닌은 자신이 소속도 되어 있지 않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의 명의로 정부의 전복과 소비에트 권력의 확립을 선언하는 문서를 발표한다. 온건 사회주의자들(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의 무장 공격을 비난한 후 대회에서 퇴장한다. 하지만 이들이 퇴장함으로써 레닌에 의한 볼셰비키 단독 정부 구성은 더욱 손쉬워졌고, 그는 이를 소비에트 대표자들의 의도인 것처럼 미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훗날 오랫동안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정치적 허구의 시작이었다. 러시아 인들은 '평화, 토지, 노동자의 권력'을 꿈꾸었지만, 볼셰비키는 '유럽의 내전, 토지의 국유화, 당의 독재 권력'을 의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화는 몇 주 지나지 않아 사라졌으며, 레닌의 계획이 현실화되면서 온갖 제약이 강요되기 시작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1919)1864년 건설된 국제노동자연맹, 즉 제1인터내셔널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자와 비교적 소수였던 무정부주의자들 간의 내부 분열이 주된 원인이 되어 1876년 해산된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인 1889년 새로운 국제 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이 파리에서 설립되고, 여기에 가입한 정당들은 1914년 400만 명의 운동원을 모집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2인터내셔널은 당시 세계의 정치적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며, 특히 1914년에는 총체적 내분이 발생하게 된다. 레닌에게 있어 이 사건은 단순한 실패를 넘어 인터내셔널의 종말을 선언하고 새로운 기구를 건설할 수밖에 없게 만든 뼈아픈 배반이었다.
코민테른의 설립 : 1919년 3월 2일부터 5일까지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코민테른 혹은 제3인터내셔널이라고도 불리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설립한다. 레닌은 이 새로운 기국의 취약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터내셔널이란 하나의 깃발이자 혁명기간 동안 그가 제시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이었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계속 사회불안이 나타나던 이 시기에,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의 혁명이 시대의 자명한 과제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격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고, 코민테른 설립의 목적은 바로 진행 중인 공산주의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기구의 설립은 엄청난 결과를 낳는다. 새로운 기구 내에서 10월 혁명의 특권을 쥐고 있던 볼셰비키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집행부는 처음부터 러시아 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코민테른에서의 이와 같은 소련의 우위는 기구가 존속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결국 1928년 열린 6차 대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기구는 소련의 지배권을 반영하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의 도입(1934), 전쟁 규탄(1939), 레지스탕스 가담(1941), 심지어 인터내셔널 해산(1943)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요한 결정은 볼셰비키 지도부에 의해 내려졌고, 나중에는 이러한 역할을 스탈린의 측근들이 이어받는다. 정치적 결정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졌고, 코민테른 회의는 순전히 조직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결정을 집행하는 데 이용되었다.
내전과 공포정치(1918-1920)볼셰비키당은 곧바로 권력 몰수의 과정을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1918년 7월에 채택된 소비에트 최초의 헌법은 "공산당-1918년 3월부터 볼셰비키당의 명칭은 공산당으로 바뀌었다-은 모든 국가 기구를 감독·명령·지배한다."고 명시하였고, 이와 함께 곧바로 사회적 변화가 시작되었다. 1917년 12월부터 공포정치를 확립시키기 위해 체카(Tcheka)라는 특별 기구가 조직되었다. 이 정치 경찰 기구는 1918년 2월부터 같은 해 6월 사형 제도가 공식적으로 제정될 때까지 약식 처형을 집행했다. 탄압의 수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18년 9월부터였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1,000명 이상, 모스크바에서는 몇 백 명의 수감자가 사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잔혹함은 러시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폭력적인 분위기를 몰고 온다. 러시아 내전은 공산주의 조직들에 의한 필사적인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공식적인 선전이 선언한 것과는 달리, 내전은 백군(白軍, 황제군)에 대한 적군(赤軍, 혁명군)의 투쟁도 아니었고, 외세의 반동적 간섭에 저항하는 러시아의 혁명적 투쟁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민간인에 대해 체계적으로 저질러진 공포정치일 뿐이었다. 지방에서는 곡식을 징발하고 탈영병을 줄이기 위해, 도시에서는 파업을 없애고 새로운 권력에 대한 현실적인 혹은 잠재적인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전쟁과 정치 : 러시아 내전에는 반대 세력의 투쟁과 외세의 간섭이 농민 전쟁의 진정성을 은폐했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었다. 사실 공산주의는 오랫동안 농민들의 투쟁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전쟁'이라는 표현은 농민 반란의 규모나 적군이 사용했던 투쟁 방법들을 생각할 때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소련 당국은 1918년 여름에 공식적으로 250건의 농민 반란이 있었다고 발표했으며, 1919년에는 전 지역이 소비에트 정권의 영향력을 벗어나 있었다. 이렇듯 농민들이 공산주의 권력의 일차적 위험 요소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적군과 체카'는 공포정치를 통해 여러 도시 공동체들을 장악해야만 했다.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비롯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도 공산주의가 승리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반대파의 분열과 여러 가지 실책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유리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예전의 소유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반환함으로써 공산당의 몰수 정책에 반발하고 있던 농민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즉각적이고도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으며, 여기에는 운동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나름의 이해관계를 완전히 떠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전은 사회의 전복을 의미함과 동시에 승자에게는 정치 투쟁을 의미했다. 사회 관계들은 전복되고 부와 권력은 재분배되었지만, 새로운 수혜자들은 또 다시 새로운 권력과 결탁해 서로 싸워야만 했다. 당 자체도 변화했다. 상징적으로 공산당 내부에서의 분파 설립이 금지된 것은 공산주의 권력이 실제로는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게 된 시기였던 1921년 3월의 5차 당 대회 - 이 때문에 당 내부에서의 민주주의도 사라진다 - 에서였다. 이렇듯 내전의 종결은 공포정치의 종결이 아니라 공포정치의 강화와 제도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공포정치를 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했으며, 공포정치의 정도는 정치적 변화에 따라 더욱 심해지기도 했다. 내전은 단지 10월 혁명의 종결이 아니라 전체주의라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인민전선(1936)'인민전선(Front populaire)'이라는 명칭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현상을 가리킨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옹호했던 새로운 정책, 즉 이전의 과격한 정책을 계승하는 좌파 통일 정책을 의미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와 '국가'로 규정할 수 있는 대외적 흐름에 대한 참여를 의미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원래의 의미가 변형된 '공산당식 신어(novlangue communiste)' 속에서 이 명칭의 정의를 찾아볼 수 있다. '전선'이라는 명사는 공산주의자들이 추진한 통일 정책, 혹은 그들이 이끌었던 대중 조직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의 서술어를 살펴보면, 가장 좁은 의미로는 '통합된(uni)', '통일된(unique)'이라는 뜻을 지닌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국가의(national)' 혹은 '애국의(patriotique)'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건설한 전선들과 같은 의미이다. 이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인민(populaire)'이라는 서술어는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좌파 정당과 연합하는 중간자적인 길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스스로 한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측면이다. 인민전선은 국제 공산주의의 노선 공유방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아무리 선동적인 선언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인민전선 때부터 오직 중간 단계에서의 목적들만이 우선시 되었으며 현명한 온건함만이 투쟁의 새로운 신조가 되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단절을 만장일치로 인정하면서도, 그 시기를 추정하는 데 있어서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핵심적인 사항만을 고려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과연 언제 사회주의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공동 투쟁을 권장하게 되었는가? 나치즘의 세력이 커지는 동안, 그러니까 히틀러가 권력에 등장한 이후일까? 아니면 1934년 2월 6일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파쇼적 폭동 이후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이후일까? 이 중 마지막 대답이 적절한 것 같다.
반파시즘과 인민 민주주의 : 소비에트 정부의 외교적 변화는 새로운 정치적 입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파시스트는 콜레라이고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는 페스트라고 했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차별성 없는 비판을 철회하고 이 둘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제일 가는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민주주의적 사상을 중심으로 한 단결은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정학적 관점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에 대립시켰던 소련의 전통적인 경향은 (부르주아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관계없이) 파시즘 영역과 민주주의 영역을 구분짓는 새로운 경향으로 대체되었다. 스탈린은 전략 변화에 대한 상징적인 절차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도부를 교체, 1934년 4월 초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를 최고직에 임명한다. 불가리아 출신의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소비에트 지도부가 결정한 새로운 통일 전선의 핵심 사안들을 모리스 토레즈에게 전달한다. 한 달 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대표자들이 집결했으며, 이 새로운 전선은 1934년 6월 23일에서 25일 사이 이브리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개최한 전국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범한다. 토레즈는 폐막 연설에서 과거 전선의 잔해들을 모두 청산하고 새로운 반파시즘 노동자 통일 전선을 찬양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한다. 1934년 10월에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통합을 권장했을 뿐 아니라 이것을 '반파쇼 인민전선'(1934년 10월 9일 토레즈에 의해 처음으로 붙여진 명칭이다)으로까지 확대하여 스탈린의 바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 새로운 정치 노선을 계기로 전 세계의 공산주의는 전력 질주를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들은 더 이상 소외되지 않았으며, 새로운 반파쇼 연합 세력 중 가장 단호하고, 투쟁적이며, 더 나아가 믿음직한 구성원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강력한 반파쇼 대중 운동의 확산 덕분에 이들의 지위는 매우 높아졌다. 소규모 지부들을 포함한 인터내셔널의 모든 지부에게 진정한 중흥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중국, 또 하나의 공산주의?(1949)「르몽드」 베이징 특파원이었던 로베르 기앵은 1949년 5월에 공산주의자들의 상하이 입성을 묘사하면서, 한 프랑스 인이 "상하이에 착륙한 화성인들"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여기에 덧붙여 이 두 세계의 차이를 드러내는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은 농민, 부패, 타락, 비밀 결사의 나라이고, 공산주의는 산업 혁명, 유럽 노동자 운동, 서구 사상, 스탈린의 엄격주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만남에서 어떠한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까?
"농민은 올바른 판단을 한다" : 1921년 7월 설립 당시 중국 공산당의 당원은 채 100명도 되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