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만들기 - 신화와 역사의 갈림길
강옥초 외 지음 | 휴머니스트
나폴레옹 - 역사를 넘어 신화로 남은 사나이영웅은 스스로 역사를 만든 것만큼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폴레옹의 후예들은 저마다 원하는 색채로 '위대한 황제'의 기억을 장식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신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기본골격이 개선장군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등장한 나폴레옹 자신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창안되고 유포되었다는 점이다. 28세의 풋내기 원정군 사령관인 나폴레옹은 1796년 5월의 로디 전투에서 11월의 유명한 아르콜레 전투를 거쳐 이듬해 1월 리볼리 전투에 이르기까지 연전연승을 기록하며 원정 1년 만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신예 장군의 기백과 천재적인 용병술, 불굴의 투지와 진취적 기상은 당시 정쟁과 부패에 찌든 총재정부와 좋은 대조를 이루었으며, 국민의 마음은 젊고 패기 있는 새로운 영웅을 향해 움직였다. 날로 치솟는 개선장군의 인기에 큰 부담을 느낀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이집트에서 영국군을 무찌르라는 임무를 맡겼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전쟁'에서 승리한 후 카이로에 입성하고 자파를 함락시켰으나 생 장 다르크에서 고전한 끝에 다시 카이로로 회군해야만 했다. 더구나 영국 해군의 포위공세에 밀려 이집트에 고립된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의 귀에 들려오는 소식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피라미드의 그늘 아래서 대군을 호령하는 불세출의 호걸이 거둔 승전보일 뿐이었다.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비밀리에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파리로 귀환한 지 한 달이 안 되어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마침내 권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이 혁혁한 전승을 바탕으로 마침내 권좌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은 자신을 새로운 구세주로 부각시킬 줄 아는 능란한 정치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이며, 나아가 권력을 장악할 알맞은 시기를 저울질할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출범한 통령정부에서 종신통령의 지위에 오른 나폴레옹은 비밀경찰을 창설해 반정부 음모를 미연에 차단하고 검열제도를 확대해 비판 여론을 단속하는 한편, 관변언론을 효과적으로 동원해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통치자의 이미지를 심어나갔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새 법전을 반포하고 제국대학을 창설하는 등 프랑스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연이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유럽의 패권자로서의 지위를 다져나갔다. 젊은 황제는 회화와 음악 등 대중예술은 물론 심지어 건축조형물까지 제국의 영광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제국의 수도 파리는 나폴레옹의 영광으로 뒤덮였으며, 카루젤의 개선문과 방돔 광장의 전승기념탑이 세워지고 샹젤리제 거리 한복판에 또 하나의 개선문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교황과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 주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한편 가톨릭 예배를 공식화하여 국민의 종교적 심성을 황제에 대한 숭배로 돌리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특히 1806년에 반포된 <제국 교리문답>으로 하늘의 권능을 받은 황제의 위엄을 자라나는 세대에게 교육했다. 그리고 반대파를 처형하고 언론을 통제한 독재자 나폴레옹은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이를 자신의 권력기반을 굳히고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이용했다. 정치적 자유를 상실한 국민은 제국의 영광으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전승의 열광 속에 탄생한 제국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의 참담한 패배와 더불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대군이 유럽 대륙을 포화로 물들이고 서서히 점령군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자, 곧 민족주의적 저항운동이 싹트고 유럽의 대문호들은 침략자를 탄핵하는 붓을 들었다. 권좌에서 쫓겨나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탈출하여 권력을 다시 장악했으나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백일 천하'는 끝나고 고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전후해서부터 복고왕정 기간 동안 프랑스 전역에는 <코르시카의 식인귀>, <코르시카의 악당> 등 무려 5백여 종이 넘는 흑색 팸플릿이 나돌았다. 그러나 복고왕정의 '나폴레옹 죽이기'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821년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는 충격과 격정에 사로잡혔다. 추모의 열정이 전국을 휩쓰는 가운데 나폴레옹 신화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유배지에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따라온 라스 카즈에게 그때까지의 삶을 돌이키며 회고록을 구술한 것을 출판한『세인트 헬레나의 비망록』이었다. 몰락한 황제는 15년 간의 치세 동안 자신이 추구한 진정한 목표는 프랑스 대혁명의 대의를 실천하고 절대 군주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민족들에게 자유의 이념을 전파하며, 나아가 유럽 모든 민족의 공존과 화합을 이루는 위대한 제국을 실현하는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세계를 제패한 젊은 영웅의 좌절된 꿈, 이는 1820∼1830년대에 전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 물결을 타고 유럽의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되살아난 나폴레옹의 모습이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군악대의 축포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낸 낭만주의 시인과 사상가들은 황폐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을 조롱이나 하듯 영웅시대에 대한 향수를 노래했다. 나폴레옹 숭배는 7월 왕정 시대에 활짝 만개했다.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추대된 루이 필리프는 나폴레옹 숭배 열기를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맞추어 이용했다. 7월 왕정의 나폴레옹 숭배작업이 절정에 이른 것은 1840년, 전 유럽의 이목을 끌며 진행된 나폴레옹 유해의 환국이었다. 한때 나폴레옹을 무찌른 유럽 동맹군이 다시 모여 프랑스를 위협하는 형세가 되자 프랑스에서는 복수를 외치는 호전론이 힘을 얻었으며, 여론을 의식한 루이 필리프는 국민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한편 대외적인 세력과시를 위해 국제적인 비난을 무릅쓰고 나폴레옹 유해를 파리로 송환했다. 나폴레옹 유해의 환국은 실로 범국민적인 추모와 숭배의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그는 조국의 용사들이 잠들어 있으며 조국의 부름을 받을 용사들이 옷깃을 여밀 성역에서 여전히 통치하고 명령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나폴레옹은 애국 병사들의 성지인 앵발리드에 자리 잡았다. 나폴레옹의 기억은 곧 프랑스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했으며, 7월 왕정은 국민총화의 분위기를 진작하고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는 실익을 얻었다. 민중의 가슴속 깊이 파고든 죽은 황제는 단순한 숭배와 추모의 열정을 넘어서 일종의 세속종교의 경지에 들어서기도 했다. 나폴레옹은 재앙을 쫓고 복음을 전하는 '신의 아들'이자 '메시아'로서의 품격을 얻게 된다.
1848년 2월, 부르주아의 금권지배에 항거한 파리의 민중은 루이 필리프를 내쫓고 공화정을 세웠다. 2월 혁명으로 성립한 사회공화정은 보통선거제를 도입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2월 혁명의 결실은 죽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권위주의 통치가 시작되자 정치 탄압의 희생양이 된 제2제정 반대파들은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에 맞서는 만큼 전임 황제의 치적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조카의 등극이 오히려 삼촌의 추락으로 나타난 것이다. 무모한 전쟁을 일삼던 루이 나폴레옹은 스당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고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고, 그 후 공화정체제가 공고화된 1890년대에 들어서 나폴레옹 황제의 인기는 다시 살아났다. 나폴레옹은 위인을 흠모하는 시대 분위기에 걸맞는 영웅 중의 영웅이었으며 공화정은 나폴레옹을 필요로 했다. 다시 대중에게 돌아온 나폴레옹은 조국의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자 민족정기의 창도자인 동시에 보통 사람과 함께 근심걱정을 나누는 친근한 이웃이기도 했다. 그는 신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며 그저 한 인간이었다.
과학과 실증을 중시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사람들은 낭만주의적 민족신화나 영웅전설에 대해 앞선 세대들만큼 열광하지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전후해 독일과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1912년 첫 호를 낸 <나폴레옹 연구 평론>은 독일을 무찌르고 유럽의 평화를 지켜낸 나폴레옹을 널리 선전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이제 승리의 조직자이자 유럽 평화의 사도로 나타났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프랑스의 패배, 대독 항전과 드골의 권력 장악에 이르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구세주'로 다시 등장했다. 나폴레옹에게서 옛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고자 한 사람은 바로 독일의 압제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고 '20세기의 나폴레옹'으로 등장한 드골 대통령이었다.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든 제5공화정에서 나폴레옹은 특정 당파나 정치이념의 전유물을 넘어서 민족의 영광이자 범국민적 자산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곧 '프랑스의 영광'을 뜻했다. 드골주의의 색채로 단장된 나폴레옹 신화, 그것은 곧 인격화된 '프랑스의 영광'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프랑스인의 뇌리에 간직된 '위대한 프랑스'라는 거룩한 금자탑에는 나폴레옹과 드골이라는 두 거인의 영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새 천년에 접어든 오늘날 나폴레옹이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유럽 통합 시대로 향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프랑스인들의 뇌리에 잠재되어 있는 막연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리라.
잔 다르크 - 그 기적의 서사시와 기억의 여정잔 다르크의 일대기는 세 가지 이미지로 표현되는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시기는 1412년 동레미라는 변경 마을의 유복한 농가에서 태어나 13세 무렵부터 하늘의 '음성'을 듣고 17세에 고향을 떠나기까지이다. 이 시절의 잔은 양떼를 몰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순박한 시골 소녀로 등장한다. 두 번째 시기는 계시를 받은 선지자, 사명감에 불타는 전사의 영웅담이 펼쳐진다. 오클레앙을 해방하고 랭스로 진격하여 국왕의 축성식을 거행하는 등 혁혁한 공적을 세우고 콩피에뉴에서 포로로 잡히기까지이다. 마지막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신성모독, 우상 및 악마숭배, 배교 및 이단, 유혈 선동, 남장 등의 긴 죄목으로 19세의 나이에 화형대에서 사라지기까지, 한마디로 한 영웅이 희생양으로 산화하는 시기이다. 이렇게 3막의 서사시로 짜여진 그녀의 짧은 생애는 여러 세기에 걸쳐 한층 더 치열한 서사시의 제4막이 펼쳐졌다. 잔은 후세의 기억 속에서 더욱 파란만장하고 기나긴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한동안 잔은 공식적인 기억의 각광 속에 자리잡지 못했다. 그녀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교회는 물론이고, 궁정으로서도 하찮은 시골의 '양치기 소녀'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것 자체가 그리 편치 않은 과거사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잔은 남달리 '강인하고 고결하며 현명한 여자'로 칭송받거나 프랑스 역사를 수놓은 전설적인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학문적 연구나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혁명과 더불어 비난과 찬사, 조롱과 흠모, 이렇듯 역설적인 운명의 주인공으로 잔의 기억이 서서히 소생했다. 잔의 기억이 공식적으로 되살아난 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기였다. 왕당파와 가톨릭 교회, 급진적 공화파가 제각기 원한을 품고 있던 상황에서 정부는 국민적 단합과 군사적 힘의 상징으로서 신화상의 영웅이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로마 공화국의 미덕을 구현하고 고대의 여신상과 닮은꼴로 형상화된 잔은 '조국의 영광에 대한 애국적 열정'으로 불타는 '여자 나폴레옹'이었으며, 나폴레옹이 품은 욕망의 이미지대로 재창조된 영웅이었다.
1815년, 워털루의 패배는 15세기의 영웅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사회와 국가의 세속화 경향에 맞서 싸워온 가톨릭 성직자들 역시 잔을 교회의 제단에서 드높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를 걷어내야만 했다. 이들은 랭스에서의 축성 이후 그녀에게 닥친 비운을 신이 부여한 엄정한 소명의 한계를 감히 넘어서려 한 교만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잔의 기억이 근대적 애국주의와 더불어 진정한 국민적 신화로 각색된 것은 7월 왕정과 제2제정기에 걸친 낭만주의 역사가들, 특히 미슐레와 키슈라의 저술을 통해서였다. 고문서학자인 키슈라의 사료 편찬작업에서는, 잔의 사명은 프랑스 전체를 영국의 점령으로부터 해방하는 '국민적인' 과업이었으며, 잔이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실패한 것 역시 그녀 자신의 교만에 대한 신의 징계가 아니라 국왕과 그 측근들의 시기와 방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입각해서 1830년∼1870년대의 좌파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잔의 민중적 이미지와 더불어 지배계층에 의한 희생자의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결국 제2제정 말기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프랑스가 기억하는 두 모습의 잔이 서로 대립하며 존재했다. 하나는 교권주의적이며 반(反)혁명적인 '오른쪽의' 프랑스에 속하는 가톨릭의 성녀 잔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에 대한 제3신분의 항쟁과 발미의 전장에서 산화한 애국 영령들의 피로 거듭난 프랑스, 즉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왼쪽의' 프랑스에 속하는 '조국의 계시자' 잔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 이면에 당파를 초월한 국민적 통합의 상징으로 잔을 추앙하려는 움직임이 자라나고 있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위협과 식민지 경쟁이 격화되던 상황에서 공화국은 대내적인 결속이 필요했다. 그러나 공화국과 가톨릭의 진정한 화해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조국의 성녀'가 애국주의의 기치와 함께 점점 더 우파 쪽으로 기울어 가면서, 이에 불안을 느낀 좌파의 공격도 점점 더 드세어졌고, 일부 고위성직자들은 "잔은 우리의 것"이라 선언하며 그녀를 "기독교적 애국주의"의 모델로 선전했다. 이에 맞서 세속 공화국의 지지세력인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잔의 기마상에 "군주와 사제들에게 버림받은 잔 다르크, 성직자들의 희생양에게"라고 새긴 화환을 바쳤다. 1896년 가톨릭 학생들은 기마상 주위에서 "잔 다르크 만세, 국왕 만세", "유대인들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같은 해에 결성된 '잔 다르크 동맹'은 유대인과 프리메이슨들을 "그리스도의 진정한 병사들"의 적으로 선언했다. 가톨릭-왕당파에게 잔은 "새로운 이스라엘"인 프랑스를 통한 교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고, 그녀를 죽인 장본인은 영국인들에게 매수당한 한 주교, 곧 '유대인'으로 낙인찍힌 코숑과 부르고뉴파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파리 대학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조성된 좌파와 우파의 이른바 '신성한 동맹'은 이 같은 분열을 한동안 잠재우고 잔에 대한 국민적 숭배로 가는 길을 닦았다. 외적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잔의 호소력은 이번 전쟁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승전과 더불어 잔의 영광은 절정에 달했고, 1920년 잔은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성인'이 되었으며, 1922년에는 프랑스의 두 번째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를 굳혔지만,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에 잔은 다시 극우파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패배와 점령은 잔의 시대처럼 프랑스를 분열시켰고, 그와 더불어 잔에 대한 기억의 분열을 고착시켰다. 비시 체제는 잔을 '국민혁명'과 대독협력의 깃발 아래 끌어들였다. "대지의 딸이자 선량한 프랑스 농부의 딸"인 잔은 돈과 이데올로기, 썩은 문명에 물든 유대인들에 맞서서 전통적·농촌적·가톨릭적 가치를 구현하는 도덕적 재무장, 이른바 '갱생한 인간'의 귀감이었다. 결국 잔의 이미지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경건하고 조신하고 순종하는 착한 프랑스 소녀 또는 평범한 현모양처로서의 잔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명을 받고 가정을 떠난 이후의 잔, 즉 자신의 여성성과 모성마저 희생해가며 무장을 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슈퍼 우먼 또는 남성화된 잔이 있었다. 해방 후 잔은 드골과 공산주의자들의 진영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전후 좌파는 더 이상 잔의 신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1945년, 가톨릭 교회 또한 인민공화운동을 통해 결정적으로 공화국에 가담한 뒤 잔의 상징을 영성의 무기로 이용하기를 그만두고, 여느 성인들에 대해서처럼 신중한 공경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에게 '잔 다르크'는 예전만큼 종교적·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