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일제 침략사
임종국 지음 | 한빛문화사
일본인 기생촌의 발달
개항과 일본 요정1882년, 임오군란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양인·일인을 막론하고 성안 10리에 외국인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1882년 8월 12일 육·해군 1천 2백명을 거느리고 인천으로 진주하였고, 일부 선발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 성안으로 들어와서, 현 충무로 2가 부근에 있던 금위대장 이종승의 집에 가공사관을 설치했다. 즉 서울 성안에 외국인이 거주한 첫 케이스인 것이다. 이렇게 거주하기 시작한 서울 성안의 외국인들이 1884년에는 청인 2천명과 일인 1백여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진고개 일대의 일인부락에서는 게이샤(일본기생)는 고사하고, 여염집 부녀자인 왜각시(일본 여자)도 구경하기 쉽지 않았다. 요릿집은 그보다 좀 늦어서 1885년~1886년에 개업했는데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1887년에 개업한 정문루(井門樓)가 실로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고급 요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설은 한식 가옥에 객석(客席)으로 고쳐 꾸민 온돌방 두 칸이 전부였고, 간판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나카이라 해서, 말하자면 식모 겸 작부 두어 명이 하숙을 하며 통근하고 있었다. 이들 청일전쟁 이전의 고급요정은 대부분이 조선종이에 주(酒)·효(肴) 두 자를 써 붙여 놓고서도 충분히 고급요정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밀선을 타고 온 왜갈보개화기의 고급요정은 어느 집에서나 - 나카이라면 모를까 - 이른바 게이샤는 두지 못했다. 임오군란과 갑오동학항쟁, 을미사변, 또 그 후에 전개된 의병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인들의 조선 도항은 그야말로 결사적인 각오가 없이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이리하여 영사는 여권수속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아녀자라면 원칙으로 도항을 금지했던 것이다. 그러니만큼 치마만 둘렀다 하면 우선 시세부터 뛰어 올랐다. 그 시세는 당시 일인들 거의 전부가 독신으로 건너와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를 지경이었다. 조선에 돈벌이가 좋다고 들은 아마쿠사 섬의 섬 여자들은 밀선으로 2개월 이상 풍랑과 싸워 가면서 한밤중에 몰래 조선에 상륙하였다. 요시와라의 홍등가·인육시장(사람의 몸뚱이를 거래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매음굴'을 빗대어 이르는 말)에서는 천업부들이 조선에 가 있는 아는 사람을 찾아서 임시조건으로 혼인계를 부탁한 끝에, 아내라는 자격을 얻어서 조선으로 건너 왔다. 하지만 약속대로 이혼을 안 해주니 여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2백~3백 원(쌀 50가마 내외)씩 절연금(絶緣金)을 지불해 가면서 매춘전선으로 진출한다. 청일전쟁 전후에 조선에 와 있던 일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대개가 그런 족속들이었다.
정식 게이샤라면 마쓰이란 자가 1888년에 데려왔다는 후구스케라는 여자 단 하나가 있었다. 그 나머지 정문루 시절의 소위 나카이들은 열이면 열이 모조리 밀선을 타고 건너온 무허가 작부인 만큼, 질이란 것이 도대체가 수준 이하였다. 이렇게 뿌려진 악의 씨들은 그 후 청일전쟁으로 일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지면서 한층 번성해 가기 시작하였다. 즉 1895년 봄의 청일 강화조약으로 일인들이 한껏 승전 무드에 취해 있던 무렵이다. 1897년에는 아히도메란 자가 메밀국수집을 겸해 간이음식점을 개업하였는데, 이것이 1900년에 요정 화월(花月)로 급성장하였다. 통감부 문관들의 단골 요정이었던 화월은 이토 시절에는 하루 이익금이 2천 원(쌀 4백 가마) 이하를 밑돈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화월은 굴지의 요정재벌로 성장하였다. 1896년 가을에 영사는 "게이샤가 아니면 객석에서 가무음곡을 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허가 작부들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정에서는 노래를 잘 하는 나카이들을 뽑아서 게이샤 감찰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진짜 게이샤들이 하나 둘씩 수입되면서 통감부 요정 전성시대로 옮겨 가는 것이다.
전통적 기생 법도의 붕괴왜식 풍조에 빠르게 물이 든 사람이 송병준이다. 1900년 10월, 왜첩 가쓰오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을 개업한 송병준은 1906년에 개진정(開進亭)을 차림으로써 조선인 오키야(일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짐에 비례해서 매춘업이 번성하자, 그에 따른 수요를 위해서 '오키야'가 1906년에 문을 열었다. 이것은 기생·창녀를 유숙시키면서 주문에 응해서 출장 매음을 하게 하되, 제집에서는 유흥을 하지 않는, 말하자면 알선 매춘업이다)의 창업공신이 된다. 청화정은 매국 일진회(一進會) 패들의 소굴로, 병합의 이면에서 파란만장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쨌거나 이렇게 밀려들어온 왜풍은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으로 통하던 전통적인 밤의 세계에 중요한 몇 가지 변화를 초래케 하였다. 그 첫째, 남산 일대에 일본인 기생촌이 번창하자 그네들의 맨발 벗는 풍습이 그들에게 고용된 조선인 잡역부를 통해서 화류계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안방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전래의 우리 풍습은 여자들의 맨발을 수치로 알아서, 남편이 보는 앞에서라도 버선발을 벗으려 들지 않았다.
둘째, 한말 이래로 양반들이 세력을 잃자, 전통적인 기생들도 따라서 영락하였다. 이 무렵 철도가 생기자 영락한 시골 기생들, 빈농·소작인의 딸들까지도 덩달아 양금(洋琴)채를 잡고 날뛰는, 전통적 기생법도의 퇴락현상을 가져왔다. 그 무렵 노래 못하는 기생을 속칭 '벙어리 기생'이라고 했는데, 노래건 춤이건 이제는 벌써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경우와 지체가 무너진 기생방에서는 명색 오입쟁이들의 태반 이상이 춤도 노래도 모르는 속칭 '귀머거리 오입쟁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답 좋은 것은 철로(鐵路)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 이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하던 1904년 무렵의 속요이다. 벙어리 기생과 귀머거리 오입쟁이들이 벌이는 세기말적 광경을 일제는 정책적으로 조장하였다. 구한말 집권층의 정치적 불만의 탈출구로써 유산계층의 탕재로 민족자본의 형성을 저해하기 위해서, 청년층의 민족의식을 주색으로 마비시키기 위해서, 일본군의 한국 주둔과 함께 시작된 게이샤 풍속도는 식민지 강점과 지배전술의 중요한 측면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필연의 결과인 무부기(無夫妓)의 등장이다. 전래의 풍습은 기생이 반드시 기둥서방을 두게 마련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몰려든 벙어리 기생들이 이런 전통적 격식을 지켜낼 겨를은 없었다. 송병준의 후원을 얻은 이들 기둥서방 없는 기생들은 1908년에 다동(茶洞)조합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훗날 대정권번으로 개편된다. 약방·상방기생들 역시 1908년 광교조합을 결성하고, 이것이 한성조합을 거쳐 한성권번이 되면서 일본식 권번(券番. 후세에는 오키야와 비슷한 기능을 하면서 화대 계산까지 맡게 된 관청을 일본에서는 '겐방'이라 했는데, 그 한국식 표기가 권번이 아닌가 짐작된다. '오키야'와 기생조합의 기능을 합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권번은 요릿집의 요구에 따라 기생을 파견하면서 화대를 징수하고 수수료를 뗌으로써, 일종의 중간착취기관이란 성격도 없지 않았다) 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창녀인 시궁골 3패들은 1908년에 경성창기(娼妓)조합을 결성하였다. 친일대감 조중응이 이것을 신창조합으로, 또 신창권번으로 개칭하게 함으로써 기생과 창녀의 구별마저도 모호해지고 만다. 이리하여 조선인 기생권번은 일인 게이샤의 3개 권번에 비해서 대정·한성·한남·대동의4권번이 만들어졌다.
이리떼들의 침입침략자본의 진출일제는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 아니라,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1894년, 청일전쟁 출병군의 진주와 함께 시작된 묵정동 70평의 공창 가는 1904년 러일전쟁 출병군이 주둔하면서 '신마치'(지금의 묵정동) 8천 3백 평의 대인육시장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이렇게 번성한 홍등(紅燈) 녹주(綠酒)는 뺏은 자들의 오만한 환성이었고, 빼앗긴 자들의 저항을 마비시키는 중요한 전술의 하나였다. 조선에 침략자본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과 거의 동시이다. 전권변리(辨理)대사 구로다가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따지기 위해서 6척의 함대를 이끌고 부산에 왔을 때, 그 일행 중에 군납업자로 훗날 대재벌이 되는 오쿠라가 섞여 있었다. 이 때 오쿠라는 한국 측 접견사(接見使) 수행원이던 송병준을 구워삶아서 함께 부산에 상관(商館)을 차리게 하였다. 그런데 당시는 양이론(攘夷論)·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이 풍미하면서, 일본을 서양의 앞잡이로 보는 소위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에 의해서 배일(排日) 기세가 크게 창궐하던 시절이다. 이럴 때 송병준이 침략자본과 결탁, 부산에 상관을 차리자, 민중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후로 송병준은 친일 때문에 10여 차례나 사경에 직면하는 것이다.
병자수호조약으로 부산이 개항장(開港場)이 되면서 1878년에는 어느새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되었다. 이를 통해서 사금(砂金)의 매입이 시작되는데, 이렇게 반출된 조선의 금은 일본의 금본위 화폐제도 확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금의 반출은 "정상적인 무역 수지의 결과로 일본에 반출된 것이 아니었다." 1876~1880년의 한일무역은 대한(對韓)수출 2,104,322엔, 수입 2,173,856엔으로 수입초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금이 일본으로 들어간 것은 조선에서 일본화폐를 유통시키고, 차관 저당으로 금광개발권을 강탈하여, 영세 채금업자에게서 선대금(先貸金) 대신 금을 강취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정한 방법은 쌀·잡화 등의 거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쌀은 경작 전에 궁핍한 농민에게 약간의 선대금(先貸金)을 준 후 소출을 빼앗아 가는 고리대금식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약탈적 수법에 의해서, 1903년 군산·인천에 지점을 설치한 불이흥업(不二興業)은 1914년에는 종래의 상호등본(藤本)합자회사를 불이흥업주식회사로 고치면서 자본금을 1백만 엔으로 증자하였다.
대륙낭인이란 건달패일제 침략사에서 대륙낭인(大陸浪人)들의 존재를 가볍게 다룰 수는 없다. 이자들은 좁은 일본에서는 뜻을 펼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대륙 웅비를 꿈꾸며 바다를 건너온, 일종의 건달 같은 족속들이다. 메이지 새 정권의 소외자이던 이 부류는 일정한 직업 없이 대륙을 유랑하다가 어용 마적이 되고, 혹은 침략 군벌의 앞잡이가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이 부류의 초기의 반정부적 성향은 이윽고 극우파 파시즘 노선으로 선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 대륙낭인들의 집단은 도야마가 영도한 현양사(玄洋社)와, 거기에서 갈려진 우치다의 흑룡회(黑龍會)로 대표된다. 서남(西南)전쟁―유신파 거물 사이고가 정한론에 패함으로써 일으킨 반정부 반란 사건―의 북새통에서 살아남은 규슈의 불평객 사족(士族)들은 반정부적 정치결사를 거쳐서 1881년 현양사를 결성한다. 그 사칙은 황실경대(皇室敬戴)·본국애중(本國愛重)·민권 고수로, 천황주의 내셔널리즘의 정치결사 내지는 정치적 압력단체였다고 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 갈려 나간 흑룡회는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대륙이 어수선할 때, 1900년대 대륙 진출을 꾀하면서 결성된 단체이다. 이들은 만주 흑룡강에서 회의 이름을 따옴으로써 대륙 진출의 첨병을 자처하였다. 이들은 러일전쟁 때 군사간첩으로 활동했고, 일한합병의 이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성향과 기질을 가진 대륙낭인들이 구한말 한반도의 풍운을 앉아서 구경할 턱이 없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타자 '현양사 3걸(三傑)'의 하나로 불려진 히라오카는 조선에 파견할 의용군을 모집한다. 이 현양사 의용군의 계획은, 히라오카가 1천 2백 명의 병력을 거느린 전권단(全權團)의 수행원으로 한국에 건너와 제물포조약을 강제로 맺음으로써 중도에 모집이 중지되었다.
왕비를 죽인 말썽꾼을미사변의 연루자로 재판을 받은 48명 중 규슈 출신이 33명으로 무려 68.8%를 차지하고 있다. 현양사의 발상지이자 대륙낭인의 원산지인 이 지역 사람들은 서울 필동의 합숙소 낙천굴(樂天窟)을 근거로 해서 온갖 책동을 자행하고 있었다. 미우라는 요컨대 정치성이 강한, '음모가'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주한공사로 부임한 그는 신임장만 제출했을 뿐 공사관에 틀어박혀서 세상 구경을 하려 들지 않았다. 참선승을 자처하면서 경문을 외우거나, 아니면 낮잠을 자는 것이 일과였다. 미우라의 흉중에는 엄청난 음모가 서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와 바둑을 두다가 미우라가 지나가는 말처럼 질문을 했다. "어차피 한번은 여우(명성황후를 가리킴) 사냥을 해야 하는데, 자네가 부릴 수 있는 젊은 사람은 얼마나 되지?" 이리하여 아다치를 비롯한 흉행부대(兇行部隊)가 1895년 10월 8일 새벽 광화문 담을 넘어 들어갔다. 지밀한 곳을 덮쳐 왕비를 살해한 이자들은 석유를 끼얹어서 시체까지 태워 버리고 말았다. 왕비에게 직접 칼질을 한 하수인은 다카하시였다. 그러나 히로시마 법정은 피고 48명 전원에게 무죄 면소판결을 내렸다. 이리하여 그 흉행자(兇行者)들, 예를 들면 아다치 같은 사람은 제1·2차 가토 내각과 제1차 와카스키 내각의 체신대신, 하마구치 내각과 제2차 와카스키 내각의 내무 대신 등으로 영달한다.
난봉꾼 공사 하야시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권익을 존중하고, 대신 조선에서 일본의 권익을 보장받는다는 소위 만한(滿韓)교환안을 거부당하자 전쟁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런 북새통 속에서,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을 협박해서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한 자가 일공사 하야시이다. 한일 간의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이 조약 제4·5조에 의해서 일제는 조선에서의 용병권(用兵權)·주병권(駐兵權)과 군용지 수용권을 확보한다. 이리하여 일제는 종래의 일군 수비대를 한국 주차군으로 개편하고, 이것을 훗날 조선군(주한일군)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조약을 강제 체결한 하야시는 '3대 조선통'으로 불려진 사람이다. 즉 일제 병합정책의 3대 원흉으로 바꿀 수 있는 말인데, 이자는 비단 조선에서가 아니라 남산 밑 게이샤촌에서도 통(通)이었다. 하야시의 왕실 회유공작은 이런 방탕 속에서 전개되었다. 한일의정서의 조인을 위해서, 하야시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을 1만 원에 매수했고, 군부대신 이근택에게는 위압과 협박을 가했다. 이리하여 하야시는 전국 황무지의 50년의 개간권을 청구하였고, 이하영·이지용을 구워삶아서 국내 하천의 자유항행권을 얻어내었다. 마침내는 을사(乙巳) 당년의 특명전권공사로서 5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이토 ― 화류계의 제왕
왜성대의 부랑자러일전쟁으로 일제는 조선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대로(對露)강화조약서를 비준 교환(1905.10.15)한 한 달 후,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식민지화의 최초의 관문을 열어젖혔다. 을사5조약에 의해서 1906년 2월, 통감부가 구 경기도청 부근인 육조(六曹) 앞 외부(外部) 청사에 개설되었다. 이로부터 1년 후 통감부는 남산 및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식민지 강점의 아성으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이 권부(權府)의 초대 주인공 이토(伊藤博文)는 1906년 3월 2일에 착임하였다. 일인들은 이토를 풍류통감이라 불렀다. 그 무렵의 통감관저란 뒷골목 부랑자 소굴과 추호도 다를 바가 없었다. 먹고 자는 기생에 드나드는 기생, 신파·구파의 소리꾼하며, 희극배우 만담꾼에다 건달 장사패 등등…. 마시고 떠들고 아부하고 계집 상대로 희롱질에다 노름까지 붙어서 밤 사이에 천금이 오가곤 했다.
통감관저가 이토록 부패한 데에는 침략사적인 원인도 없지 않았다. 이토가 조선에 온 것은 주권과 이권의 탈취가 목적인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자면 조선인 각료에 대해서 매수·회유·협박 등의 공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