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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끈 : 철조망의 문화사

앨런 크렐 지음 | 사계절
1. 악마의 끈

철조망은 서부로의 팽창, 그에 따른 백인들의 정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철조망이 이주민들의 동업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며, 그런 만큼 초기의 옹호자들에게 철조망은 지배와 소유를 위한 도구로 비쳐졌다. 매사추세츠의 워시번·모언 제조회사는 1880년 이른바 철조망 선언서라고 할 만한 책자를 펴냈다. "사람들은 자신의 땅에서 자신만의 커다란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울타리를 세운다. 어슬렁대는 야만인들의 수준을 뛰어넘어 문명사회로 접어든 곳일수록 주민들이 가정을 이루어 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는 순간 울타리의 혜택은 곧바로 나타난다." "강하다. 누구나 손쉽게 다룰 수 있으며 울타리 재료로도 그만이다. 게다가 영구적이다. 이제부터 울타리는 철조망에 맡기시라." 워시번·모언 제조회사는 줄곧 공격적인 판촉 활동을 벌인 결과, 1880년에 이르러 철조망 생산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이 무렵 철조망은 수지 맞는 사업 품목이었다. 그해 철조망은 약 8,050만 파운드어치나 생산되어 팔려 나갔다. 1874년 일리노이 출신의 조지프 F.글리든이라는 농부가 철조망으로 처음 명실상부한 상품 특허를 받았을 때 벌어들인 1만 파운드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다.



철조망 관련 특허는 처음과 두 번째 모두 프랑스인이 차지했다. 1860년 그라생-발르당이 취득한 특허와 1865년 루이 프랑수아 자냉이 취득한 특허가 그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앨폰소 대브와 루시언 B.스미스라는 두 명의 미국인이 각각 특허를 받았고, 헌트는 그보다 불과 4주 뒤에 특허를 받았고, 질베르 가비야르가 프랑스인으로는 세 번째로 특허를 받았다. 국적이 다른 이들이 상대방의 발명품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7년 동안 두 나라에서 모두 여섯 개의 특허가 나왔다. 하지만 이들 특허 가운데 용도가 비슷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그라생의 뻣뻣한 털처럼 생긴 철침은 울타리를 쉽게 타넘지 못하도록 그 윗부분에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특허에는 가축에 대한 일체의 언급도, 전적으로 철조망으로만 된 울타리에 대한 제안도 없었다. 다만 기존의 벽이나 담장에 부착해 무단 침입자를 막는 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철조망의 쓰임새는 안전에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자냉의 특허증에는 울타리와 관련된 내용이 없는 데 비해, 가비야르와 마이클 캘리, 스미스의 특허에는 가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스미스의 특허는 흥미롭다. "울타리는 설치비도 매우 저렴할 뿐더러,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아무것도 부착하지 않는 일반 철사 울타리에 비해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동물들이 미리 알고 피함으로써 톱니바퀴나 철사 꾸리에 부딪칠 염려가 없다." 어쨌든 스미스의 특허는 상품화되지 못했지만 그는 서부 지역 농장의 울타리 설치에 대한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철조망의 원리를 최초로 제시한 인물이었다.

월터 프레스콧 웹은 자신의 저서에서 철조망을 대초원과 평원의 산물이라고 정의했다. 대초원과 평원에서 사용, 발전되면서 철조망은 서로 다른 이유로 농부와 농장주들의 울타리 재료로 널리 활용되었다고 하는 편이 좀 더 정확할 듯하다. 농부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가축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반면, 농장주들은 가축을 놓아기르는 체계에 익숙해 있었고 따라서 울타리를 치는 데 적대적이었다. 가축의 질을 높이려면 방목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874년 조지프 F.글리든은 철조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발명품으로 특허를 받았는데 이보다 5개월 전 헤이시는 이른바 S자형 가시로 특허 신청을 한 상태였고, 그러고 며칠 뒤 글리든을 불법 도용죄로 고소했다. 20여 년 후에야 막을 내린 지루한 공방 끝에 대법원은 글리든의 손을 들어주었다. '승리자'라는 명칭이 붙은 글리든의 철조망은 디자인도 단순할뿐더러 제작도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비용도 저렴해서 단연 돋보였다. 이후 그의 발명품은 현대적 철조망의 모델이 되었다. 지금까지 철조망과 관련한 특허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한 이유는 각 철조망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철조망이라는 발명품의 다양한 특징을 살펴보는 한편, 발명가에 따라 용도가 달라졌던 철조망의 기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한편 철조망을 두고 미국 서부 지역 여론은 첨예하게 둘로 갈라졌다. 일부 텍사스 주민들은 그것이 잔인한 물건인데다 자신들의 방목 문화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북부를 살찌우려는 양키의 계략일 뿐이라며 처음부터 철조망을 반대했지만, 이 새로운 울타리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텍사스의 팬핸들에서는 일부 대규모 토지에 가축 통제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울타리가 세워졌다. 즉, 말 방목장을 구획하기 위해 울타리를 쳤고, 텍사스 열병을 옮기는 것으로 추정되었던 남부 지역 가축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쳤다. 대개 농장주들이 개별적으로 설치한 이런 울타리의 길이는 심지어 30마일에서 40마일에 이르렀다. 울타리는 어느새 팬핸들 전체를 뒤덮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러한 장벽으로 인해 1885~1887년의 혹독한 겨울철에 수천 마리에 달하는 가축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철조망 울타리에 갇힌 동물들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동사하고 말았다. 텍사스 주민들은 사방을 에워싼 철조망에 대항해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어 대면서 철조망이 세워지기 이전의 시기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철조망의 속성은 1919년 에드윈 포드 파이퍼가 발표한 <철조망>이라는 시의 중심 주제를 이룬다.

"천국에는 철조망 없는 목장이 있다 하니

나 가려네. 그곳으로, 안녕. 모두 안녕

하지만 악마의 모자 끈으로는 철조망이 제격이지

지옥도 온통 철조망 천지일 터."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1년 후에 출간된 파이퍼의 이 시는 '열린 목장'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철조망을 비난하고 있지만, 솜(Somme,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에 있는 주) 전투의 철조망 안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철조망이 불길함의 대명사로 인쇄 매체에 등장한 것은 위에 나온 시의 "악마의 모자 끈"이라는 표현이 처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데이비드 데이리는 철조망이 도입된 직후 카우보이들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디언들이 철조망을 가리켜 '악마의 밧줄'이라고 불렀다는 견해도 있다. 이는 철조망이 인디언들의 전통적인 사냥터를 폐쇄해 야간의 기습 사냥을 방해하고, 강화 조약을 맺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악마의 끈'이나 '악마의 밧줄'이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일상어로 자리잡았는지, 나아가 누가 그런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지 간에 아무튼 그 말속에는 철조망의 위협이 함축되어 있다.



텍사스의 울타리 절단 전쟁은 이 점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1883년 여름,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인 운동의 형태로 시작된 철조망 절단은 곧이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올빼미', '푸른 악마', '토지 동맹'과 같은 이름 아래 비밀리에 활동했던 울타리 절단자들은 때로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기도 했다. 1883년 <도지시티 타임스>는 "10월 14일 클레이카운티의 남부 지역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철조망 절단 운동의 지도자로 알려진 버틀러라는 남자가 사망했으며, 부상자도 몇몇 나왔다. 아마도 울타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소행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마침내 1884년 텍사스 주는 울타리 절단 행위를 범죄로 간주한다는 법령을 공포했지만, 텍사스는 물론 다른 주에서도 울타리 절단은 산발적으로 자행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 버니스 크리스먼은 "주민들이 철조망에 대해 얼마나 적대적이었는가는 카운티 대부분을 차지했던 브라이턴 목장의 철조망을 자르는 데 500명이나 모였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고 회고했다. 물론 울타리 절단 전쟁의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작용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복잡했다. 갈등의 원인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토지 균분론, 그린백 운동(미국 역사에서 주로 농업에 이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유통되는 지폐의 양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해 벌인 운동) 등 아주 다양했다.



2. 고문당하는 육체

"일그러진 얼굴과 납작해진 철모가 우리 시야에 들어온다. 프랑스 군인이다...

그들 중 한 명이 고개를 쳐들며 칼집에 손을 갖다 댄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푹 꼬꾸라진다.

그 와중에서도 두 손은 마치 기도를 하듯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다.

숨이 완전히 끊어졌는지 이제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총에 맞은 두 손과 잘려 나가고 남은 팔뚝만이 대롱거리며 철조망에 매달려 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제목으로 1929년 처음 출간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이 기념비적인 소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참호병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레마르크는 철조망이 신체에 미칠 수 있는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보다 신체를 꿰찔러 꼼짝 못하게 하고는 기념물처럼 매달아놓는 철조망의 능력에 주목한다. 철조망이 농촌 경제에서 현대전의 기계화된 풍경 안으로 편입되면서 그 상징적 의미는 완전히 바뀐다. 하지만 방어와 구획, 편가름이라는 철조망의 본래 용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조망의 새로운 효력은 전적으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는데 참호 안에서의 살육과 장기적인 구금에 따른 무력화 현상이다. 초기의 판촉 과정에서 영웅으로, 때로는 유토피아의 일원으로까지 대접을 받았다 하더라도 철조망은 늘 끔찍한 장치였다. 이러한 철조망 고유의 성격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대규모 분쟁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1898년과 1900년 사이에 발생한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에서 첫 선을 보인 철조망은 트란스발과 오렌지 자유주의 보어인들과 대치하던 영국인에 의해 처음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1901년 초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키치너 장군은 철조망과 방책을 함께 엮는 전략을 구사하기로 했다. 키치너의 계획은 철조망과 방책을 그물처럼 연결해 보어 기병대를 몰아낸 다음, 방책망의 일부를 활용해 남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게릴라 소탕망을 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철조망을 공격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계산이었다. 키치너가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방벽은 감금(incarceration)을 의미하는 어휘에 '수용소(concentration)'라는 새로운 단어가 추가되었다. 나중에 이 단어는 가장 극심한 형태의 억압과 동의어가 된다. 오로지 살육만을 자행한 나치의 트레블링카,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수용소와 집단 수용과 노동력 착취가 목적이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시설에서는 철조망이 필수 장치였고 전기까지 흐르게 해 폭력은 더욱 잔혹해졌다.



물론 키치너의 수용소 정책이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키치너에게 신랄한 공격을 가한 사람은 도덕운동을 펼쳤던 에밀리 호브하우스였다. 호브하우스는 1901년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블룸폰테인 수용소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나서 수용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비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물도 턱없이 부족했다. 침대나 매트리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연료 역시 부족했다." 다시 그곳을 찾은 그녀는 "질병이 만연하고 있다. 6주전에 들른 이후 62명이 사망했으며, 의사도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다. 우리가 간호사 교육을 시킨 보어인 소녀 두 명도 자기 몫을 훌륭히 해내다가 사망했다"고 썼다. 남아프리카 전쟁과 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들이 제작한 선전 영화의 주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스 슈타인호프 감독의 <크루거 삼촌>이라는 영화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파울 크루거(보어인 지도자)와 영국인들 사이의 갈등을 기본 틀로 한 이 영화는 수용소를 통해 영국인들의 잔혹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 잔혹성이 절정에 달했던 독일의 강제 수용소도 이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씁쓸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현대인의 상상력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닌 장소다. 나치에 의해 자행된 대량 학살의 상징인 이곳은 현재 순교 기념 박물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집단 학살 수용소이자 강제 수용소였으며, 강제 노역장이기도 했다. 무수한 유대인과 루마니아인, 러시아인,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살해당했다. 1930년 새로 출범한 독일 정부는 유난히 적대적인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중부 지역에 게토가 조성된 데 이어, 1941년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지클론 B가스 실험이 이루어졌다. 최초로 집단 학살 수용소였던 헤움노에서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 직후 베우제츠와 소비부르 수용소가 세워졌고, 1942년 5월에서 6월 사이에 제2 트레블링카 공사가 시작되었다.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 울타리는 처음부터 강제 수용소 건물의 일부로 세워졌다.



올가 렌기옐은 영화 <다섯 개의 굴뚝: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통해 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했던 자신의 경험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렌기옐은 철조망을 사이에 둔 금지된 사랑과 자살 수단이 돼버린 철조망 이야기를 한다. "철조망은 포로 생활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철조망은 해방의 수단이기도 했다. 매일 아침마다 인부들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서 온몸이 뒤틀린 시체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 대신 그 방법을 택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는 이런 형태의 자살을 일컬어 '철조망 껴안기'라고 불렀다. 렌기옐의 설명으로 미루어볼 때, '철조망 껴안기'라는 단순한 표현은 철조망의 억압적 기능을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친밀한 형태인 사랑으로 바꾸어버린다. 물론 그와 동시에 이러한 표현은 권력 획득의 선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일이 수용소 당국의 특권이었다면, 자살은 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헤움노와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링카의 설립 목적은 살인이었다. 그 가운데 베우제츠와 소비부르, 트레블링카의 설립은 폴란드계 유대인의 대량 학살을 명령한 일명 라인하르트 작전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서 온 유대인들도 이들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작전을 가장 완벽하게 수행한 곳'은 트레블링카였다. 적게는 70만 명에서 많게는 9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루마니아인도 2,000명 가량 포함되어 있었다. 1943년 트레블링카가 폐쇄되면서 모든 흔적이 지워지기 몇 달 전 일단의 수감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탈출을 감행한 700명 이상의 수감자 가운데 70여 명만이 가까스로 도주에 성공했는데 카임 스타예르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스타예르는 트레블링카 모형을 제작하는 데 꼬박 3년 반을 투자했다. 현재 이 모형은 멜버른의 엘스턴위크에 위치한 유대인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받침대 위에 세워진 이 모형은 마치 제작자의 고통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지금은 유리 상자로 씌워져 있다. 투명한 용기 안에는 조그만 인물들이 보이며, 방금 도착한 장난감 기차가 인간 화물을 부리고 있다. 그 너머로 건물들이 보인다. 이를 통해 모형은 잔인한 기억을 불러내는 또 다른 상징물로 자리잡는다. 그러고 나면 철조망이 남는다. 여기서 스타예르는 철조망만큼은 유일하게 실물로 표현했다. 철조망은 트레블링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철조망은 수용소 전체를 둘러싸는 동시에, 숙소와 환영 장소로부터 처형장을 분리했다. 하지만 철조망 사이로 뭔가 보인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에 트레블링카의 철조망은 이른바 잔가지와 갓 베어낸 나뭇가지, 소나무 가지, 어린 나무로 불리던 다양한 재료를 함께 엮어 설치되었다. '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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