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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의 문화사(1880~1918)

스티븐 컨 지음 | 휴머니스트
<서론>

이 책의 각 장에 나오는 소 주제들은 두 가지 근본적인 철학 범주에서 나온 것이다(시간과 공간은 칸트가 주장하였듯이 모든 경험의 필수적인 토대라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처음의 계획은 전통적인 예술 장르나 분과학문의 구분을 다루면서 당시에 나타난 새로운 사고방식을 구성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고방식은 기존의 경계들을 자꾸만 벗어났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론적 틀을 철학적 개념의 토대 위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로 인해 동시성(simultaneity) 같은 개념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 결과 당시 문화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새로운 견지에서 사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전자통신은 동시성을 현실화시켰으며, 현재·속도·형태·거리에 대한 관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현재에 대한 관념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특정한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만큼 무엇인가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려 할 때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는 요소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사가 과학기술 결정론에 빠져버리면 곤란하며 그런 점에서 과학기술과 문화가 정확히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 각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전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적인 시간의 실제성을 긍정한 것과 전통적인 공간의 위계가 평준화된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사적인 시간을 주장하는 이론의 핵심이었고, 서구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서 위계가 평준화되는 현상은 귀족사회의 평준화와 민주주의의 발흥, 그리고 종교에서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의 구별이 와해되는 과정과 병행하여 진전되었다. 대다수의 변화는 세기의 전환기 주위에 몰려 있으면서 문화적으로 볼 때 대체로 연관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1부 - 시간



시간의 성질

균질적인 시간, 이질적인 시간


지식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라는 이론, 즉 관념들은 다른 관념들에 반대하여 생성되므로 관념에는 기본적으로 논쟁적인 성격이 있다는 이론에 따라 시간의 성질에 대한 이 시기의 생각들을 상호 대립되는 세 쌍의 견해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은 균질적인가(homogeneous) 비균질적인가(heterogeneous), 원자적인가(atomistic) 흐름인가(aflux), 가역적인가(reversible) 불가역적인가(irreversible).



뉴턴의 보편 시간, 그리고 칸트 : 시간은 일률적으로 흐르며 시간 축 어느 지점에서나 동등한 부분으로 분할할 수 있다. 이것이 뉴턴이 1687년에 정의한 시간이다. 칸트는 뉴턴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론을 부정하고, 시간은 모든 경험의 주관적 형식 혹은 기초라고 주장했다. 시간은 비록 주관적인 것이지만 모든 이에게 동일하다는 점에서는 또한 보편적인 것이었다. 틀림없이 뉴턴과 칸트가 경험한 사적인 시간(private time)은 서로 달랐을 테지만, 19세기 후반 이전에는 누구도 시간의 균질성에 대해 체계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기계 시계가 발명된 14세기 이래 단일하고 공적인 시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전은 19세기 말 표준시(standard time)의 도입이었다. 현지 시간들(local times)을 확정하는 것, 법률이 언제 발효되는지, 그리고 보험증서의 개시는 언제부터인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표준시의 지지자 헬무트 폰 몰트케 백작은 독일 의회에서 표준시를 채택하자고 호소했다. 당시 독일에는 다섯 가지 상이한 시간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군사계획상의 공조가 곤란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간을 단일화하기 위해 애쓴 선구자, 캐나다의 공학자 플래밍은 표준시가 공조와 평화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표준시간에 의해 좀더 용이해진 병력동원 시간표에 따라 1914년 전 세계가 전쟁에 돌입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과학적 관점에서나 군사적 관점에서 세계시간 도입을 주장하는 논의들이 다수 있었지만, 세계시간을 최초로 수립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철도회사들이었다. 그동안 철도의 기능을 몹시 복잡하게 만들어 철도회사의 이익을 갉아먹은 혼란을 종식시킨 것이었다.



세계의 시간들 : 1884년 워싱턴의 본초자오선 회의에 참석한 25개국 대표들은 그리니치를 자오선 제로(0)로 확정할 것을 제안하고 하루의 정확한 길이를 결정하였으며, 전 지구를 한 시간의 간격을 둔 24시간 대역으로 구획했다. 그리고 세계일(the universal day)의 정확한 개시를 확정하였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결정한 시간과 그리니치 시간 간에는 엄청난 혼란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유럽 국가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이 나라에는 모두 네 가지의 상이한 시간관계를 가진 지역들이 있었는데, 그 중 어떤 것도 그리니치 시간으로 정확히 환산될 수 없는 상태였다. 프랑스는 마침내 1884년의 가이드라인에 바탕을 둔 세계시간 단일화 운동을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1912년 국제시간회의를 파리에서 주최했는데, 이 회의는 정확한 시보(時報)를 결정하여 유지하고 그것을 전 세계로 전송할 수 있는 표준방식을 제공해주었다. 파리 천문대가 천문일을 읽어낸 다음 이를 에펠탑에 송신하면 에펠탑은 그 신호를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여덟 군데 기지국으로 전송한다. 1913년 7월 1일 아침 정각 10시. 에펠탑은 전 세계를 향해 최초의 시보를 발신했다. 표준시의 도입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근대는 광범위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보편 시간과 엄밀한 시간관념을 받아들인다.



시간의 사회적 기원을 탐사하는 뒤르켐 : 19세기 후반에는 시간의 사회적 기원에 대한 몇몇 탐구들이 이루어졌는데, 주목할 만한 최초의 작업은 에밀 뒤르켐의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는 시간은 사회조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사적인 시간과 사회적 기원을 갖는 '일반적인 시간'을 구분한다. "시간이라는 범주의 바탕에는 사회생활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이다." 각 사회는 시간 속에서 생활을 조직하고 리듬을 정립한다. 그러고 나면 이 리듬은 모든 시간적 활동을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단일한 틀이 된다. 이리하여 "달력은 집단 활동의 리듬을 표현하며 동시에 집단 활동의 규칙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한다."

과거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


과거에 대한 인식은 시대별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사상가들은 역사적 과거를 정체성의 원천으로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키워나갔으며, 여러 가지 목적에서 개인적인 과거를 탐구하였다. 당시 과거에 대한 생각들은 네 가지 주요한 문제, 즉 지구의 나이,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 그러한 영향의 가치, 잊혀진 과거를 되찾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과거의 힘을 믿은 사람들 - 로크, 헤겔, 다윈, 마르크스 : 처음으로 사고를 역사화한 사람은 모든 인식이 감각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로크였다. 이 원리를 거의 모든 경우에 적용시켰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생득관념이나 인간의 선험적인 본성을 거부하고, 인간은 전적으로 역사와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했다. 19세기에 콩트, 헤겔, 다윈, 스펜서, 마르크스는 모두 철학이나 국가·사회체제·생명체는 시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며 현재의 형태는 지나간 과거의 모든 자취를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19세기 사상가들이 제시한 거대한 역사적 체계는 역사적 혹은 발생적 접근방식을 찬양한 반면,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렇게 하면 과거가 현재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고 비난하며 열렬히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역사주의의 지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골동품으로서의 역사'는 개인이 상황에 굴복하고 자신의 내적 자산을 폐기하도록 이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냉소하며 예술의 에너지를 마비시킨다. 니체는 사적인 과거에 대한 과도한 의식이 그 사람의 의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지질학, 동물학, 정치 철학, 고대 문명 연구 : 과거가 현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 뒤쪽에는 다양한 문화적 기록들이 포진해 있었다. 축음기와 영화 카메라는 과거를 보존하기 위한 역사상 유례없는 기술을 제공했으며, 촬영물 보관소나 보존 협회들은 그를 위해 새로운 제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그리스도교가 등장하여 생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은 영원불변하는 신의 시선 속에서 실현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류사의 중요성이 폄하되어온 지 거의 2천 년, 이제 19세기 사상가들은 생의 의미와 정당성을 인류사에서 찾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묻혀 있던 문명을 발굴했으며 진화론이 생물학계를 석권했고, 역사에 대한 자유주의적 믿음과 사회주의적 믿음이 정치사상을 지배했다. "지질학, 동물학, 정치 철학, 고대 문명 연구 등 그 어떤 것을 보더라도 19세기는 역사의 시대, 즉 새롭고 역동적인 세계상의 성장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였다." 한편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이처럼 위압적인 역사주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으며, 과거의 지배력이 현재에 대한 반응을 둔화시키고 미래를 위한 자산을 고갈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을 공유하고 있었다.



역사적 과거와 사적인 과거의 차이 : 역사적 과거에서 개인적인 과거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역사의 하중을 벗어던지려는 광범한 노력의 일부였다. 19세기 중반에는 사실주의자들이 전문적인 연구와 과학, 예술의 주제를 당대 세계에서 구함에 따라 역사적 과거가 지니고 있었던 신비감이 그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사실주의자들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도, 역사주의에 대해서는 엄밀한 사고의 바탕으로 끌어안았다. 하지만 세기말을 전후하여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역사적 과거에 대한 찬양이나 역사주의적 방법으로부터 선회하여 개인적인 과거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역사적인 과거보다 사적인 과거에 더 주목했다는 것은 균질적인 공적 시간에서 다양한 사적 시간들로 초점이 이동했다는 사실과 궤를 같이하는 현상이다. 개인적인 과거는 사적인 것이고 따라서 개개인마다 다른 반면, 역사적 과거는 집단적인 것이며 균질적인 경향이 더 강하다. 이리하여 시간의 성질에 대한 진전(이질성·유체성·가역성)은 개인적인 과거를 중시한 입장과 일치한다.



현재

동시성을 창조하다


1912년 4월 14일 사상 최대의 건조물 타이타닉호는 북대서양의 빙원(氷原) 속을 무모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밤 11시 40분, 망루에 있던 감시원이 빙산을 발견했다. 선장은 오전 0시 15분 무선원(無線員)에게 조난 신호 타전을 명령한다. 몇 분 후 수십 척의 배가 타이타닉호의 재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증기가 추동하고 무선전신의 마술이 연출한 공해상의 동시적 드라마였다.

무선과 전화의 공조 : 먼 곳의 사건들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능력, 무선이 창출하고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표현된 그 능력은 현재의 경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1889년에 솔즈베리 경은 전신에 의해 가능해진 동시적 경험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전신은... 어느 특정 시점에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해 문명 세계 전체의 의견을 거의 한순간에 끌어모았다." 전신은 1830년대 이래 실용화되었지만, 실제 사용자는 숙련된 통신사와 송신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무선은 전자통신의 송신 대상을 확대시켰고, 전화는 송신 대상을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쥘 베른은 1888년에 쓴 공상과학 소설에서 '전화 언론'이란 걸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5년 후 그것이 현실화되었다. 헝가리의 한 기자가 부다페스트에서 뉴스 서비스를 개시하고 이후 그것을 종합적인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로 확대시켰다. 가입자 6천 명의 가정에는 연주회, 강의, 연극, 신문 논설, 주식 시황, 국회 연설 생중계 등의 프로그램 편성표가 배포되어 있었다. 영국의 한 언론인은 만일 그러한 서비스가 영국에 도입되면 "누추한 오두막이 도시와 직접 접촉하게 되고 '개인용 전화'가 모든 계급을 동질화시킴으로써" 부유층의 수많은 사치품들이 '민주화'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빛의 속도 - 예술가들의 확신과 물리학자들의 불만

생각의 변증법은 예기치 못한 경로를 밟게 된다. 그렇게나 많은 예술가들이 그 시대 특유의 경험으로서 동시성을 찬미하던 바로 그때,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부분들을 가진 우주에 동시성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동시성의 거대한 상징은 에펠탑이었다. 하지만 전파의 실제 속도는 한정되어 있었으며 빛의 속도 또한 19세기의 실험들이 초당 18만 6천 마일 정도라고 계산해냈다. 예술가와 비평가에게 이 상상을 뛰어넘을 속도는 동시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물리학자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은 공간적 좌표와 시간적 좌표는 상관적 운동에 따라 다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사건이 동시적인지 아닌지를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들과 상관적으로 운동하는 관찰자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동시성 개념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원자 단위 이하의 극소세계나 우주적인 차원의 사건 등 초고속 상대 속도를 갖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이 외로운 반론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라는 순간 안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수많은 사건들이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내용이 당대의 빅뉴스가 되고 말았다.



두터워진 현재 - 동시성, 일체감, 두려움

클레이는 마치 유성의 자취가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현재란 근접한 과거의 일부이며 이 시간 간격을 '외견상의 현재'라고 정의내렸다. 후설은 과거의(지나간) 음은 사라져가지만 '되당김(retention : 과거지향, 기억)'으로서 현존한다고 설명한다. 현재에는 그 핵심에 '지금-인식(now-apprehension)'이 들어있고,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되당김이라는 '혜성의 꼬리', 그리고 예기된 미래의 지평이 들어 있다. 미래의 구성 요소란 '미리당김(protentions, 예기)'이며, 바로 이것이 뭔가를 의도하는 의식의 성질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현재란 되당김과 미리당김으로 두터워진 의식이 연속적으로 풀어지는 들판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로부터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동시성 문제였는데, 전자통신이 등장함으로써 하나의 존재가 두 곳에 동시에 있는 일이 유사 이래 최초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시성은 문화적으로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그에 대한 반응 중에는 이전에는 거리와 소통부재로 인해 상호 고립되어 있던 사람들 간에 일체감이 점증한 현상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체감의 증가라고만 말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바가 있었다. 가깝다는 것은 동시에 이웃끼리 너무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이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즉 두려움도 초래했다는 점에서.



미래

미래는 어떻게 체험되는가


1918년 정전 직후 외젠 멘코프스키는 인간은 근접한 미래를 능동성과 예기(expectation)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한다고 구분하였다. 즉 능동성 방식의 경우 개인은 미래로 향하며 사건들을 통제하면서 환경 속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반면 예기 방식에 있어서는 미래가 개인 쪽으로 다가온다. 이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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