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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삼의 눈

쓰루미 요시유키 지음 | 뿌리와이파리
제1부 태평양의 섬들

부엌의 실험


두꺼운 옷을 입고 난로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인간족과 해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해삼의 이미지가 중첩이 된다. 인간은 해삼이 될 지도 모른다. 해삼은 겨울의 계절어(季語 : 일본 시가에서 계절감을 나타내기 위해 넣는 말. 휘파람새가 봄, 금붕어가 여름을 나타내는 따위-옮긴이)다. 해삼의 시세는 연말, 연초에 올라갔다가 3월에 들어서면 떨어진다. 가공하는 사람들은 시세가 오를 때는 내장을 빼낸 날해삼을 출하하고, 3월에 시세가 떨어지면 건해삼 가공을 시작한다. 해삼을 취급하는 지역인 노토 나나오의 이시자키, 오카야마의 비젠, 야마구치의 스오섬, 오이타의 구나사키키츠키 등이 모두 그렇다.



원래 이 계절적인 성격은 혼슈(本州 : 일본 열도의 주가 되는 가장 큰 섬-옮긴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홋카이도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협마다 다르지만, 홋카이도에서 해삼 잡이가 허용되는 것은 대충 6월 중순경부터 9월까지다. 해삼이 겨울의 계절어로 여겨지게 된 것은 하이쿠(俳句 : 5?7?5 자의 17음을 정형으로 하는 일본의 단시-옮긴이)가 에도(江戶 : 도쿄의 옛 이름-옮긴이)의 문예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서였는지는 모르지만, 구라모토 사토시씨가 NHK의 날씨 예보에서 "태풍은 멀리 훗카이도로 빠져나갔습니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도쿄중심주의라고 비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계절어의 선택 방법도 그런 느낌이 든다.



채취, 가공, 그리고 조리하는 세 가지 과정이 해삼 문화의 요소다. '가공'과 '조리' 사이에 해삼 종류에 따른 식별, 크기나 마무리에 따른 등급 결정 등의 작업이 있다. 노동과 기술이라는 점에서 보면 해삼 문화의 세 요소 가운데 가공과 조리의 비중이 크다. 채취하는 것보다 그 후의 작업에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 작업에 대해 모르면 해삼 문화의 수수께끼에 도달할 수 없다. 날해삼을 건해삼으로 가공하는 방법 가운데 내가 시도해 본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였다. 해삼은 체중의 95퍼센트가 수분이기 때문에 보존 식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분을 빼야 한다. 가공했을 때의 원료에 대한 제품의 비율은 20분의 1, 즉 5퍼센트이다. 이것이 가공의 원리이다. 다음은 우리 집 주방에서 시도해 본 건해삼의 가공 실험이다. 최초 실험에서는 이리코(건해삼)라고 부르는 일본의 고어(古語)에서 힌트를 얻어 눈 딱 감고 해삼을 프라이팬에 볶아 보았다.



부드러운 해삼의 피부가 열에 의해 흠이 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볶는 것은 굽거나 삶는 것과 조리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해삼을 볶아서 수분을 빼고 햇볕에 말렸다.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뒤틀린 탓에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형태가 나쁜 건해삼을 고베 모토초의 도매상에서는 "모양이 안 나." 라며 좋아하지 않는다. 싸게 팔 수 밖에 없다. 성공은 못했지만, 이 실험에서 몇 가지 발견을 했다. 에도시대에는 쇠솥에 해삼을 볶아서 가공한 지역이 있었다. 프라이팬에 서서히 열을 가하여 해삼을 관찰하면 곧바로 몸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해, 실제로는 삶는 것과 같아진다. 왓카나이의 고에토이에서 해삼을 잡아 말리는 가지카와 상점의 한 할머니는 "해삼은 물 한 컵으로 간단히 삶을 수 있어"라고 가르쳐 주었다.



건해삼은 매우 고급스런 상품이기 때문에 아주 세심하게 가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나오의 이시자키 수협 조합장인 이시쿠라 기헤이조씨는, 솥에 넣을 때도 "석유통이나 양동이로 한꺼번에 넣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해삼의 몸을 펴듯이 넣는 것이 좋다." 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해삼이 솥 밑바닥에 붙지 않도록 끊임없이 휘저어야 한다. 다 삶은 해삼을 볕에 말릴 때도 생선을 굽듯이 앞뒤를 뒤집어 준다. 그 깨 해삼의 모양이 좋아지도록 손으로 잘 펴준다. 홋카이도 아부타의 오가와 미쓰오씨는 "이쪽은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이와나이가 맑다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났다."고 말했다.



지구상에는 '원상복구'에 별 관심이 없는 문화도 있는 모양이다. 설 직전에 홍콩의 남북 행 거리를 걸었는데, 한 모녀가 건해삼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고 저울에 올려 놓고 있었다. 설 요리에 쓸 것이었다. 해삼 요리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집에서 발전해왔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지만, 해삼에 대한 기호가 민중 사이에도 퍼져갔던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우중판당의 해산물 도매상 한나 씨는 이렇게 말했다. "홍콩에서는 이런 걸 어디다 쓰지? 비료라도 쓰는 건가?" 뒤틀려서 '모양'이 좋지 않은 건해삼이 마대에 빼곡히 들어있었다. 이제까지는 상품 축에도 끼지 못했던 해삼에도 주문이 들어온다. 건해삼을 비료로 쓰는 지역이 태평양의 팔라우 등에도 있다. 그러나 우중판당에 모여든 엄청난 양의 해삼 찌꺼기들은 서서히 힘을 더해 가는 중국 서민의 입에 들어가지 않을까. 이러한 교류의 변화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해삼 자신일 것이다. 그 비밀을 찾기 위해 '해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쿡 선장의 붉은 깃털

비록 간접적이지만, 쿡 선장도 해삼과 관계가 있다. 그는 자주 타히티와 통가에 배를 기항시켰다. 선원의 휴식과 식량과 땔감, 식수의 보급을 위해서였다. 섬 주민은 호의적이고 식량은 넉넉했다. 그는 통가에 '프렌들리 아일랜드(友好島)'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타히티에서는 섬 여자들과 선원들 사이에 친교가 생겼다. 쿡 선장은 섬 주민에게 어떻게 대가를 지불했을까. 유럽화폐 따위는 전해져 있지 않았다. 결제는 물물교환이었다. 어떤 것을 주었을까. 상대가 그 존재나 이용 방법을 알고 있고 원하는 물건을 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1769년 그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 타파 포(tapa 布)를 받고 기뻐하던 일을 기억했다. 타파는 폴리네시아어인데, 수목의 내피를 그물 형태로 두들겨편 부직포다. 그 분포는 넓어서 폴리네시아를 비롯해 멜라네시아, 미크로네시아,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말레이 제도, 셀레베스, 보르네오, 중·남아메리카의 멕시코, 페루, 아프리카까지 퍼져 있다.



타파의 재료는 뽕나무과, 아욱과 식물로, 꾸지나무, 벵갈보리수, 용수나무, 오리나무, 무화과나무, 히비스커스(부용 비슷한 서양 화초 하와이의 대표적인 꽃-옮긴이) 등이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꾸지나무다. 오늘날에는 피지, 통가, 사모아, 뉴기니에서 재배되고 있다.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이것을 받고 기뻐했다. 쿡은 미리 사 놓았다가 마오리족에게 보였을 것이다. 1774년 타히티에서 배에 실은 짐이 거의 바닥이 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전해에 통가에서 선적한 붉은 깃털이 있어서 식량과 교환할 수 있었다. 타히티에서 붉은 색은 오로지 신에게 바쳐지는 신성한 색으로, 붉은 깃털은 종교의식을 거행할 때 반드시 필요한 장식이었다.



쿡 선장의 붉은 깃털로부터 60년이 지났다. 섬 주민들은 구미의 공업제품에 익숙해져졌다. 그들은 새로운 상품을 기억하고 욕망을 느꼈다. 욕망이 개발된 것이다.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사업전략이다. 이러한 새로운 욕망이 중국으로 향하는 해삼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돼지교역, 백단향 교역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산지와 어장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는 데는 운이 필요했던 듯싶다. 그렇게 운 좋게 발견된 피지의 어장으로 에메랄드 호는 구미의 공업제품을 운반했다.



해삼교역이 바닥에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선장은 해삼 해변의 주변에서 여러 가지 산물을 모았다. 거북의 등딱지, 살아 있는 돼지, 얌(yam : 삼과의 덩굴성 식물의 총칭으로, 식용으로 씀-옮긴이), 건축자재 등이었다. 이 선장이 대신 제공한 것은 대포, 화약, 아연, 고래 이빨 등이다. 고래 이빨을 찾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해삼 주위에는 쿡 선장 시대의 붉은 깃털의 전통이 살아남아 있었던 것이다. 해삼은 남태평양의, 서양의 산업사회와 아시아 전통이 이어지는 곳에서 '가만히' 살고 있었다. 가만히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백단향이나 고래보다도 진주조개보다도, 해삼에 대한 기록은 적다. 인간이 해삼에게 빌붙어 살아왔으면서도….





제2부 에버리지니의 해변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의 얼개


해삼의 눈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를 조망한다면 어떻게 될까. 멜라네시아는 여기서 단락을 맺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그레이트배리어리프로 눈을 돌린다. 서양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진입에는 앞문과 뒷문이 있었다. 앞문, 뒷문이라는 비유는 사실 가치 판단이 깔린 부적절한 표현이지만, '백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역사 인식에는 이 문제가 밀접하게 뒤엉켜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사'에 대해서는 누구나 비슷한 발상을 하게 되는 듯 하다. 『중국인 쿨리의 역사』를 쓴 캠밸은 "중국인 쿨리에게 오스트레일리아의 뒷문을 개방해도 좋을까?"라고 썼다. (쿨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중국·인도 출신 하층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로, 1862년 미국의 노예해방으로 해방된 흑인노예들을 대신하는 노동력으로 매매되었다-옮긴이) '발견사'의 맥락에서 말하면, 17세기 초에 스페인 함대가 페루를 거쳐 뉴헤브리디스 섬에 도착했고, 그 부대장 L.V.토레스는 대륙과 뉴기니를 사이에 둔 해협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인들은 희망봉을 돌아 그대로 동진해서 오스트레일리아 서해안에 이르러 자바로 북진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태즈메이니아 섬에 이름을 남긴 아벨 타스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자카르타에서 파견한 선장이었다. 이후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식민지 개척은 동남해안을 기점으로 해서 북과 서로 뻗어나갔다. 유럽 본국과 연결하는 항구도 시드니를 중심으로 해서 동남해안에 집중되어있다. 따라서 근대 문명의 이식이라는 척도로 시드니, 멜버른 일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진지역'이 되었다. 유럽의 개척 전선이 북으로 뻗어 가는 과정에서 해삼과 진주조개가 그레이트배리어리프나 토러스 해협에서 발견되어, 오히려 그곳이 특수 해산물의 본고장으로 성장했다. 당신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 무렵이었다. 이것이 대륙 동해안 해삼 산업문화사의 대강의 흐름이다.



건해삼은 구미 배가 본국으로 운반할 수 있는 산물이 아니었다. 백단향과 돼지에 이끌려 이곳에 도착한 교역선이 마닐라맨에게 가공법을 습득하고 이것을 중국방면으로 운반했다. 중국에서 올릴 이윤이 그들을 손짓했던 것이다. 고래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와 일본 모두 독특한 어획 방식과 문화를 키워왔지만, 식민지주의 발달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래잡이 방식과 이용법 모두 유럽에서 생긴 것이 남태평양에 이르렀고 그것이 점차로 북상한 것이었다. 해삼사업을 연구한 학자들은 해삼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 많은 서양학자들은 건해삼이 중국에서 잘 팔리는 산물이 된 것은 중국인들이 건해삼에 '최음 효과'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고 기술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근대산업은 해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고고학자 C.C.맥나이트 교수의 주장이다. 17세기 후반부터 남셀레베스 어민이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의 아넘랜드로 매년 해삼을 채취하러 찾아왔다. 그들은 해변에 작은 집을 짓고 에버리지니와 더불어 해삼을 채취해 건해삼으로 만들어 가지고 돌아갔다. 이 출어는 20세기 초반에 끊어졌다. 그러나 에버리지니는 해삼 잡이에 나선 어부들을 '마카산'으로 기억하고 동굴화에 그들의 배를 그려 남겨 놓았다. 이 해삼 잡이는 마카산과 에버리지니의 독무대였다. 백인은 여기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사에 대해 두 견해가 있는 셈이다.



고래 -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수출산업'(블레이니)

건해삼 -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근대 산업'(맥나이트)



마카산의 해삼 잡이 배

1802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의 카편테리아 만에서 탐검측량을 한 매튜 플린더스 선장은 유적 같은 것과 마주쳤다. 그의 「항해기」에서 인용한다.



나무 그늘에서 18인치 정도의 둥근 돌이 실린더 모양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물가에까지 늘 어서 있었다. 9개의 핀을 세워 둔 듯한 모습이었다. 해변은 둥근 돌을 밀어올린 듯 매끄 럽게 다져져 있었다. 돌은 둘레가 검게 그을렸고, 돌과 돌 사이에는 뜬숯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며, 주위에는 거북 알의 노른자위가 묻은 새의 깃털이 떨어져 있었다. 알 껍 질을 보고 거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한 흔적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처음에 는 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주위를 파 보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약 석달 뒤에 판명되었다. 카편테리아의 서쪽 만 입구에서 6척의 배와 마주쳤다. 그가 탄 '인베스티게이터 호'는 매우 낡은 배로, 물이 새는 것을 조치하면서 측량을 계속했기 때문에 석 달이 지난 그때까지도 아직 그 부근을 어정대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본 작은 유적이 중국인의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고 그들이 화기를 휴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경계하면서 6척의 배로 접근했다. 플린더스 선장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으로 마카산의 해삼 잡이를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었다. 그것이 1803년이었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4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래플스와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둘 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마카산은 아넘랜드의 에버리지와 협력해서 해삼 잡이에 종사했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에는 바이니라는 신원 미상의 종족이 등장한다. 이들의 피부는 황갈색이며 마카산과 같은 종류의 배로 북서쪽에서 남녀가 찾아와 돌로 된 집을 지었는데, 마카산이 가져온 것과는 다른 종류의 쌀을 재배하는 기술이 있었다. 아넘랜드에서는 고고학 발굴이 몇 번 행해졌지만 돌집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학자 R.M.번트 교수는 바이니가 살라야르 섬이나 부퉁 섬에서 온 바자우족일지도 모른다고 썼다. 두 섬 모두 셀레베스 섬 남부의 부속 섬이다.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자우족은 해변에 산호암으로 수로를 쌓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수로 옆에 건물 바닥이 지면보다 높은 집을 짓고 일가 또는 소집단으로 고기잡이를 나간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에도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들의 주식은 사고야자 전분과 카사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모두 채집경제로 생활해 온 에버리지가 쌀에 대해 명확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바자우 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기 어렵다. 바자우는 해삼의 생식을 즐기는 어민이다. 마카산에게는 바이니라는 선조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넘랜드의 해삼을 바이니 시대, 마카산 전기, 마카산 후기로 분류했다. 어쨌든 바이니의 신원은 학문상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애초에 마카산의 해삼 잡이가 언제 어떻게 오스트레일리아 북 해안에 도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맥나이트 교수도 많은 자료를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한 끝에 '1650년∼1750년에, 어쩌면 17세기 후반'이라는 매우 신중한 결론을 내렸다. 무라이 요시노리씨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맥나이트는 해삼 잡이 배가 온 것만 가지고 이론을 세우고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여러 섬 어민들의 다른 활동(진주, 진주조개, 거북 등껍질, 상어지느러미, 듀공, 백단향, 용연향 등의 교역과 채취, 가공)을 포함해서 시대를 추정하면 다른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조치(上智)아시아학」 제3호)



마카사르의 네덜란드 관리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길더로 표시되었다. 1829년 노던 주에 출현한 마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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