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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마이클 샬러 지음 | 이매진
장군의 형성

신생 공화당과 끈끈하게 연결된 밀워키의 성공한 변호사이자 정치인의 아들이었던 아서 2세(맥아더의 아버지)는 남북전쟁 중에 위스콘신 자원보병단 소속 장교로 참전했다. 나중에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이 젊은 지원병은 제대한 뒤에는 아버지(맥아더의 할아버지, 아서) 밑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75년에 루이지애나에서 재건 임무를 하고 있던 아서 2세는 버지니아 출신의 메리 핑크니('핑키)를 만나 결혼했다. 핑키는 1876년, 1879년, 1880년에 각각 아서 3세와 맬컴, 더글러스를 낳았다. 더글러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남북전쟁에서 세운 공훈에 관해 자랑스럽게 시시콜콜 이야기하곤 했다. 멋진 표현을 총동원한 더글러스의 이야기는 아버지가 고위장교로 필리핀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1900년 무렵에 아버지 친구들이 널리 알린 이야기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영웅담이 대개 그렇듯이, 이 이야기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중의 신하에서뿐만 아니라 어린 더글러스의 가슴속에서도 점점 부풀려졌다.



열세 살인 더글러스는 텍사스 주 샌앤토니오에 있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1897년에 졸업했다. 1899년 더글러스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생도 맥아더는 총 4년 중 3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유명세 때문에 동기들이 특히 심하게 괴롭혔다. 1903년 6월에 졸업, 소위로 임관된 더글러스는 첫 임지로 필리핀을 선택했다. 더글러스는 1901년 필리핀을 떠나 아버지의 발자취를 좇을 수 있었다. 웨스트포인트에 재학 중인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아서 맥아더 장군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하는 한 요인으로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강력한 식민지를 통해 일본을 봉쇄하고 극히 중요한 경제적 이해를 확보하며 세계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아서는 주장했다. 이 모든 주장은 훗날 아들의 활동을 통해 울려 퍼지게 된다. 1901년 7월, 육군부(1947년 해군부와 통합해 국방부가 된 국방부의 전신)는 맥아더를 본토로 불러들였다. 미국 군대가 필리핀인들을 학대한다는 보고가 늘어나면서 의회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 결과 아서 맥아더는 무죄로 밝혀졌지만, 처벌 차원에서 본토로 불러들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필리핀과 아시아를 발견하다

1903년 10월, 더글러스 맥아더 소위는 필리핀에 도착했다. 아버지 아서는 미국에 대한 독일의 위협이 증대하고 있다는 연설을 해서 육군부의 공식적인 문책을 받은 상태였다. 그 일이 있은 직후에 오랜 적수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육군장관 자리에 올랐다. 맥아더 부자는 정치적인 적수가 자신들이 응당 대가로 받아야 할 진급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했다. 1909년에 태프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맥아더 장군은 퇴역했다. 아서는 3년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죽는 날까지 육군이 자신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육군장도 치르지 말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치하지도 말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1904년 여름에 말라리아에 감염되는 불운을 겪게 된 더글러스는 그해 10월까지 완쾌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906년 워싱턴DC의 공병학교에 배치되었다. 더글러스는 공병학교의 교과과정이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비상근 군사부관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일을 통해 더글러스는 정열이 넘치는 대통령과 이따금씩 극동 문제를 토론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지만, 주로 하는 일은 방문객을 백악관에 알리고 의전행사를 위해 옷을 차려 입는 것이었다.



1912년에 아서가 세상을 떠난 뒤, 더글러스는 어머니를 부양했다. 어머니의 기력이 쇠하는 것(그러나 핑키는 1935년까지 살았다)을 우려한 더글러스는 어머니가 충분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밀워키나 다른 대도시로 근무지를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워싱턴에 간 맥아더는 우드 밑에서 근무했다. 4년 전만 해도 맥아더의 군 생활은 어두운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아버지의 연줄 때문이었을 테지만 이제는 군대의 최고사령관 바로 밑에서 도제 노릇을 하게 되었다. 1913년 9월, 맥아더는 육군참모본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고 이렇게 해서 유력한 집단에 진입하게 되었다. 1917년 4월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하자 맥아더 역시 동료 장교들처럼 전투임무를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얄궂게도 육군참모본부의 일원으로서 책임이 커짐으로써 전투임무 배치에 걸림돌이 되었다. 뉴턴 베이커 육군장관은 기존 주(州)방위군 부대를 통합함으로서 육군을 신속하게 확대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맥아더 소령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해서 베이커의 계획을 지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고, 전국 각지의 주방위군 부대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특별 육군 사단을 조직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아 윌슨의 관심을 끌었다. 그 직후 대통령은 맥아더의 대령 진급과, 맥아더의 아이디어에 기초한 제42 '무지개' 사단의 수석참모 임명을 승인했다. 전투는 맥아더의 극적인 재능과 군사기술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되었다. 맥아더는 1차대전 중에 이따금씩 시선을 집중시키는 스타일을 채택했는데, 자신을 의도적으로 위험에 노출시키고 무지개 사단의 명예를 깔본다는 생각이 드는 본부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계획적으로 용감한 행동을 했다. 또 규정에 어긋나는 복장을 착용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특이한 모자와 말채찍, 스웨터, 긴 머플러 등으로 몸치장을 했는데, 이 모든 복장은 다음 번 전쟁에서 걸치게 될 모자와 선글라스, 옥수수 파이프 등의 전조였다.



1918년 11월 11일에 정전이 이루어진 뒤 평화시에 군에서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지 아직 알지 못한 채로 맥아더는 1919년 4월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집안의 연줄이 도움이 되었다. 아버지 아서의 옛 동료였던 육군참모총장 페이튼 마치는 더글러스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 자리는 2차대전 이전의 육군의 엄격한 연공제 속에서 진급에 아주 유리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육사 교장으로 재임한 2년 반의 시간은 좌절감만을 가져다 주었다. 나이든 교수진은 케케묵은 교과과정을 현대화하려는 교장의 시도에 분개했다. 존 J. 퍼싱 장군이 육군의 수장 자리에 오른 1921년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바야흐로 둘 사이에는 개인적인 원한이 쌓여갔다. 1922년 1월에 맥아더는 두 아이를 가진 부유한 이혼녀 루이즈 클롬웨 브룩스와 약혼을 발표했다. 브룩스는 그 전에 퍼싱과 가까운 사이였고 따라서 많은 친구들은 두 사람이 결혼을 하리라고 기대했었다. 약혼 발표가 있은 지 2주 뒤, 퍼싱은 맥아더를 웨스트포인트 교장직에서 해임하고 필리핀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1925년 맥아더 소장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1927년에는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올라 스포츠와 인성, 애국심 사이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찬양했다. 이렇게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개인적인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맥아더와 루이즈는 1927년 중순에 갈라섰다. 루이즈는 군 장성의 부인으로 지내는 삶을 지겨워했고, 남편이 일에만 전심전력을 쏟는 데 반대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시어머니의 태도를 참지 못했다. 또 불화의 탓을 성적인 문제로 돌렸다. 맥아더는 일종의 안식처를 찾아 이혼 뒤에 필리핀으로 향했다. 1928년 말에는 육군의 필리핀 군관구 사령관으로 마닐라로 배속되었다. 장군은 마누엘 케손을 비롯한 많은 필리핀 엘리트들과 친분을 나누었다.



1929년 4월 「뉴욕타임즈」는 맥아더가 대통령을 향한 정치인 경력의 첫 단계로 총독직을 원한다고 추측했다. 식민지의 최고 문관 자리라면 1901년에 태프트가 아서 맥아더를 몰아냈을 때 앉았던 자리가 아닌가. 1928년 내내 케손의 이름으로 자신을 총독 후보자로 추천하는 편지를 대필해 워싱턴에 수도 없이 보냈다. 총독 자리는 전 육군장관 드와이트 데이비스에게 돌아갔지만, 맥아더는 2차대전이 벌어질 때까지 세 차례나 더 케손의 펜대를 빌어 낯뜨거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1930년 11월에 맥아더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처음에 맥아더는 나이를 감안하면 4년의 임기를 마치는 54세가 되면 군 경력이 끝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모총장을 지낸 사람이 군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또 다른 개인적인 불안감도 드리워져 있었다. 1929년부터 마닐라에서 한 젊은 여성과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인과 스코틀랜드인의 피를 물려받은 혼혈아 엘리자베스 '이자벨' 쿠퍼는 거의 30살에 가까운 나이 차와 인종 때문에 결혼을 하거나 애인이라고 밝히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비록 이자벨과 함께 귀국할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그 뒤에 벌어진 여러 문제는 장군의 염려를 정당화해 주었다.





태평양전쟁과 미국의 정책

사실상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1944년 말까지 더글러스 맥아더는 필리핀으로 돌아가는 데 온 힘을 집중시켰다. 실제적인 군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일본군을 뉴기니에서 몰아내고 그 섬을 자신의 목표를 향한 디딤돌로 삼는 것을 의미했다. 이 작전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루즈벨트의 '유럽 우선' 전략과 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맥아더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전략과 업적을 선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뉴딜에 반대하는 정치지도자 및 신문계 거물들의 영향력에 의지했다. 장군이 감언이설과 협박, 간청과 요구를 대대적으로 번갈아 동원한 결과,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자원을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에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민간 및 군 관리들의 판단력이 "정치에 좌우되고 있다"면서 자신의 적수들은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서남태평양지역 사령관은 필리핀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일본을 연결하는 생명선을 절단함으로써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가져올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맥아더는 해군이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때까지 뉴기니 공세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일본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다음 목표물로 삼을 것을 우려한 맥아더는 "대서양과 인도양의" 해군 및 공군력을 "잠시 빼내어" 자기 사령부를 증강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합동참모본부는 이 병력을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하와이로 급파했다. 워싱턴의 군사전략가들은 가로챈 적의 전문을 처음 읽을 때부터 일본 해군이 미국 함대를 끌어들여 결정적인 일전을 치르기 위해 (하와이 인근의) 미드웨이 제도를 점령할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미국 해군은 사실상 적의 공격 예봉을 완전히 격파, 일본으로 하여금 훨씬 풍부한 자원을 가진 적과 겨루는 소모전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맥아더는 뉴기니 섬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의 일부로 소규모 비행장이 있는 부나로 시선을 모았다. 뉴기니 섬의 서북단은 필리핀 남부로부터 몇 백 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장군은 일본군 역시 부나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해군 정보부의 경고를 무시했다. 이제 부나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교전을 벌여야만 했다. 맥아더는 신임 전투지휘관인 로버트 아이컬버거 장군에게 신속한 승리를 거둘 것을 명령했다. 맥아더는 만약에 승리를 거두면 아이컬버거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공표"하여 그를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승리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아이컬버거에게 약속했던 훈장을 수여했다. 아이컬버거는 그 이유가 대중들로 하여금 뉴기니의 첫 번재 승리 소식을 듣고 자신이 아니라 맥아더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부나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맥아더는 곧바로 뉴기니의 해안선을 따라 파죽지세로 진격할 수 있었다. 부나 전투는 작전상으로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 공보요원들이 이 전투를 묘사한 방식은 전쟁 내내 계속될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중요한 전투에서 직접 지휘를 한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맥아더의 공보참모들은 실제 사실을 조작, "맥아더 자신이 야전지휘관으로서 곳곳의 밀림과 해안 상륙거점에서 전술을 진두지휘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오로지 "무오류의 맥(Mac. "맥아더의 애칭)에 대한 완벽한 신뢰를 반영하는 우호적인 뉴스만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다. 세계가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 관할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되는 경로는 악명 높은 '맥아더 성명'을 통해서였다. 맥아더는 "역사상 어떤 전투… 생명과 자원의 손실을 최소화"한 채 그와 같은 결정적인 전과를 이룩한 적이 없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부나의 승리로부터 필리핀 상륙에 이르기까지 거의 2년 동안 맥아더의 사령부는 15만에서 20만 명의 일본군을 죽였다고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서남태평양지역 사령부가 벌인 선전활동이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든 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맥아더 사령부가 이룬 승리뿐 아니라 해군과 해병대가 이룬 것까지도 더글러스 맥아더의 공로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맥아더의 군사적 지도력에 관한 최근의 평가들은 그가 극히 적은 자원으로 엄청난 성과를 달성했다는 대중의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의 정치학

194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이룩한 놀라운 성과는 모든 뉴딜 비판자들을 감동시켰다. 루즈벨트가 1944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었으므로, 공화당은 백악관을 탈환할 것이라는 전망에 군침을 삼켰다. 1942년에서 44년 사이에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들은 군 지도자로서 맥아더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대통령으로 그를 첫 손가락에 꼽은 사람들은 20퍼센트에 불과했다.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선호했다. 맥아더의 지지자들은 서로 약간씩 겹치는 두 범주 - 전통적인 고립주의자들과 중서부의 공화당원들 - 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립주의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한편에는 전쟁이 국내의 개혁을 방해할 것을 우려한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전쟁으로 뉴딜의 사회주의적 경향이 확대되고 자본주의의 토대가 침식될 것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장군은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설지도 모른다는 축을 일언지하에 부인하면서 자신은 "군인으로 출발"했으며 "군인으로 생을 마감하겠노라"고 밝혔다. 비록 맥아더 자신은 한번도 선거전에 관해 공개적으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가까운 참모 몇 명이 그를 대신해서 중개인 역할을 했다. 이 참모들은 장군을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은밀한 활동을 벌이는 공화당 관리들과 연락하는 일을 떠맡았다.



1943년에서 44년 초까지 서남태평양지역 사령관은 아이컬버거 장군에게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딱 하나 이유는 그놈의 개자식 루즈벨트를 이기기 위한 거라네"라고 말하곤 했다. 참모진을 동원해서 지지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외에도 맥아더는 1942년 이후 잇따라 발간된 영웅적인 전기들의 득을 보았고 종종 이런 전기 발간을 부추기기도 했다. 4월에 이르자 맥아더 '거품'이 터져 버렸다. 토머스 듀이는 이미 후보지명을 향한 장족의 진보를 한 상태였다. 독자적인 모임인 '맥아더를 백악관으로 보내기 위한 클럽'들은 대중적인 선거운동을 벌이면 맥아더의 승산이 높아질 것이라고 오판, 장군을 위스콘신과 일리노이의 예비선거에 등록시켰다. 이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투표에서 듀이는 위스콘신 대의원단의 대부분을 장악함으로써 맥아더 진영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장군의 대선 후보 출마에 관한 이야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 앨버트 L. 밀러 하원의원(네브래스카 주 출신. 공화당)이 1943년에서 44년 사이에 자신과 맥아더가 교환한 서신 몇 통을 공개했다. 밀러는 "좌익과 뉴딜주의"를 비난하면서 "당신이 우리의 다음 번 대통령이 되는 것은 우리의 문명 자체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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