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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최후

김윤희·이욱·홍준화 지음 | 다른세상
제1장 왕권만 부여잡고 있는 국왕

영원한 제국의 허상


역사의 역설 : 조선이 망한 원인을 찾기 위해 멀리 정조 연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도 역사가 갖는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유럽의 르네상스에 비견될 정도로 찬란한 문물을 꽃피웠고, 다양한 사상 경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시기의 주된 사고는 성리학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정조가 추구했던 이상사회 역시 당시 사회의 발전 방향에 걸맞은 것이 아니었다. 정조가 성리학자나 관료들과 달랐던 점은 이상사회를 만들어가는 주체로 국왕을 상징했던 점이다. 정조는 뛰어난 자질과 피나는 노력으로 훌륭한 학문 능력을 갖추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가 자기의 호를 '만천월명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한 데서 그 자부심이 잘 드러난다. 국왕인 자신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이고, 신하들은 수많은 개울에 비유한 것이었다. 개울은 달빛을 받아야 빛나는 것이니 신하들은 국왕인 자신의 뜻을 따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료와 학자들은 자기 위에 군림하려는 군주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그가 그렇게 갈망했던 왕권강화를 위한 수많은 조치들은 대부분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죽은 다음에는 왕권이 극도로 위축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이 역사가 갖는 역설이다.



정조가 남긴 것은 세도정치 :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 반대 정치세력에 의해 무참히 죽은 아버지, 그 속에서 한없이 위축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정조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외할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심했다. 뛰어난 능력과 젊어서의 불행은 정조에게 무너지는 조선 왕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도록 했다. 그런데 정조는 정치 운영 논리와 제도 자체를 개혁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새로운 사상이나 시류보다는 성리학에 입각해 정치를 운영했다. 정조는 당대의 대학자인 김조순의 딸을 세자와 혼인시키도록 약정하고 김조순에게 세자의 보호를 맡겼다. 김조순이 갖고 있는 학문 능력과 김상헌의 후손이라는 가문의 후광을 왕권 강화에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순조가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하고자 할 때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바로 김조순과 그 일족들이었다. 순조는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지 못했고 세도정치는 문제점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고종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왕권은 곧 국권! : 고종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전환기에, 국왕과 황제라는 이름으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비록 영조와 정조의 이념을 계승하여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진통을 겪던 시기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던 사람이 고종이었다. 고종에게 자주와 독립은 왕권의 자주와 독립이었다. 한순간이라도 흔들리는 왕권을 지킬 수 있다면 훗날 그들이 결국 왕권, 나아가서는 국가까지 무너뜨리는 위험한 존재일지라도 기꺼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임오군변의 공로를 빌미삼아 청나라는 이후 더 심하게 조선에 간섭했다. 청나라의 심한 간섭에 반발을 느낀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는데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청나라는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견제하려고 했다. 외국의 힘을 빌어 외국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국과 자국민의 힘으로 자주를 지키려는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외교적으로 반청의 태도를 견지하던 그가 막상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미가 보이자 맨 처음 내놓은 말이 '청나라 군사로 막아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농민전쟁은 좌절되었고, 조선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 통로를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으며 1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아관파천이었다. 1897년 2월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온 고종은 땅에 떨어진 왕국의 체모와 왕의 체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조선왕국의 모습을 벗어버리고자 했다. 그해 8월 12일 고종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제2장 개혁을 향한 외로운 움직임

국민국가를 향한 최초의 개혁


살 길은 오직 자수자강(自修自强) 뿐 :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고 지배층이 변혁을 시도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그 정변 과정에서 정적을 가차없이 죽이고 상해를 입히는 등 폭력적인 면모를 보임으로써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정변 주모자였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국군에게 살해당했으며, 김옥균과 박영효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청의 내정간섭과 이에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민씨 정권의 행태로는 조선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민씨 정권은 이미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를 위협으로 여기고 이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김옥균은 돌파구를 정변에서 찾았다. 기회도 좋았다.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나라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군대 3천 명 중 1천 500명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지금까지 냉담하던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찌로가 개화파에게 접근해 왔다. 청불전쟁을 기회로 일본정부가 조선에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킨다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다. 다케조에는 개화파들에게 정변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과 거사 후 개혁에 필요한 300만 원 가량의 차관을 약속했다.



첫 번째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 갑신정변이 왜 삼일천하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민중이 정치개혁 의지가 없었던 탓이라기보다는 정변 자체가 민중세계에 뿌리박지 못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던 탓이 크다. 민중들이 정변파를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데 큰 이유가 있다. 정변파들의 외세 의존성은 대개 정변의 한계로 지목되고 있다.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수자강하려는 생각이 앞서,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을 위협적으로 여기기보다는 문명화를 위해 현실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세력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에서 주창한 청나라의 종속관계 청산, 국왕의 전제와 민씨 척족의 국정 간섭을 막고 국정 운영을 하려고 한 점,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제정, 지조법 개정과 탐관오리와 국가 기관의 정비, 국가 재정기반의 확립 등은 국민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함으로써 이러한 정치적 이상이 실현될 기회는 금방 주어지지 않았다. 정변 실패 이후 국내 현실은 암담해져갔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와 이후 고종의 한러밀약에 자극받아 청의 속박정책이 더 강화되었다고 하지만 갑신정변이 안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형식으로든 청의 속박정책은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개혁이 없는 봉건적 통치구조 속에서 점진적인 개화정책이 추진된다 한들 그것이 얼만큼이나 효력을 볼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제3장 변화를 향한 민중의 외침

1862년, 농민항쟁의 불꽃이 일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타오르는 농민들의 항쟁 : 1862년(철종 13년) 정월 말. 경상우도 진주 지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분위기를 띄운 곳은 지리산 기슭에 자리한 작은 마을 단성이었다. 그곳은 전부터 환곡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단성민들은 현감과 서리를 규탄하는 투쟁에 나섰다. 선두에 섰던 사족(士族)들이 단성읍을 장악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단성민란이라고 한다. 이 와중에 단성에 이웃한 도회지 진주도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진주목사 홍병원은 결세를 메우기 위해 도결이라는 명목으로 진주목 주민들에게 10만 냥을 납부하도록 강요했다. 이를 본 백낙신은 통환(統還)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진주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부정으로 축난 돈 6만 냥을 할당, 납부하게 했다. 백낙신의 조치에 불만을 품은 채로 나무를 하러 다니던 초군들은 얘기를 나누던 끝에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조관을 지냈고 진주의 대표적 양반의 하나였던 이명윤과 그의 6촌으로 몰락한 양반이었던 이계열, 유계춘 등이 중심이 되어 모의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집회를 강행하기로 했다.



드디어 2월 6일. 진주 각 마을 사람들이 수곡장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낙신은 도결을 철회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정한 성과를 얻어낸 농민들은 다시 평소 악명이 높았던 지주들 집을 습격하여 불태우거나 부숴버렸다. 이러한 진주의 봉기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마을에서 마을로 빠르게 전해졌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 모두 71개 지역에서 난이 일어났다. 1862년 농민항쟁은 지주전호관계의 모순이 증폭하고 나아가 세도정권 이래 삼정문란으로 인한 지방관과 서리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농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반봉건 항쟁이었다. 대부분 지역의 농민항쟁이 농민들의 자치조직인 이회(里會)나 읍회(邑會)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가 봉건적 모순과 함께 제국주의의 침입에도 대응해야 했던 시점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찬란한 불꽃을 피울 수 있었다.





제4장 세상을 바라보는 닫힌 눈

성리학이 무엇이길래…


변화가 필요한 때에 척사위정론을 내세워 : 민중사상의 확대는 성리학에게 커다란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성리학은 이 때에도 내적인 자기반성을 통한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자기 이념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18세기 후반부터는 성리학에서 척사위정의 논리가 강화되어 갔다. 모든 이단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배척하고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진흥해야 한다는 논리를 분명히 제시했다. 그러면서 성리학은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특히 천주교 신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자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은 그 공격성을 더욱 강화했다. 조선에 서양세력의 출몰이 잦아지고 그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등장한 척사위정론은 유림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개항기에 이르러서는 사학에 대한 이론적 반대에만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성리학적 가치관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저항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 같은 척사위정운동은 조선 후기 성리학이 드러내고 있던 자기보위적(自己保衛的) 특성의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이다. 성리학도 조선을 건국할 당시에는 고려 사회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진보적인 이념이고, 사회의 발전방향에 맞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사회 운영원리가 필요했고, 조선 사회 내부에서도 새로운 사상들이 출현했다. 그럼에도 조선의 지배층들은 여전히 성리학만을 정학으로 부둥켜안고서 변화를 거부했다. 그 결과는 변화가 필요하던 19세기 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이후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

개항을 받아들였던 이유 :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을 때 500년간 조선의 지배층이자 지식인이었던 유생들은 강력한 반대의 상소를 올렸다. 유생들은 일본이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막부체제를 뒤엎고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으며, 청의 영토였던 오키나와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생들이 왜를 서양과 같이 생각하여 통교를 반대한 이유는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 성리학 질서가 무너질까 두려워서였다. 결국 자신들의 지위가 크게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한편 고종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1874년부터 친정을 하기 시작하면서 고종은 대원군이 마련해 놓은 쇄국의 기틀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대원군 시기 두 차례에 걸친 전쟁(병인양요와 신미양요)과 군비 확충은 고종 정부에 재정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대원군이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양반에게 세금을 거두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조세를 부담시켰기 때문에 민심은 왕과 왕실에서 이미 떠나 있었다. 1862년 진주민란과 같은 것이 언제 또 발생할지 몰랐다. 민란과 서양이라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고종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개항을 활용하고자 하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조선이 개항을 했던 이유를 일본의 무력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위협에 대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표명했던 유생들의 힘이 발휘될 수 있는 유교의 나라였다. 만약 고종이 무력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결정했다면 유생들을 설득할 논리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왜는 왜일 뿐'이라는 고종의 개항 논리는 고식적인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았다. '왜'가 아닌 금수의 나라 미국과 조약을 맺으려 할 때 고종의 이 논리는 전혀 먹혀들 수 없었다. 금수의 나라 미국은 성리학적 세계관인 화이관에 따르면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개항을 앞두고 스스로 개항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리를 갖추기 못한 데는 쇄국이라는 대원군의 정책에 원인이 있었다.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 지식인이었던 유생들은 세계의 변화를 단지 위기로만 보았다. 500년 간 굳건하게 발전해 왔던 성리학적 사고를 변화시켜줄 새로운 사상 없이 상황논리로 유생들의 반대를 무마했던 고종은 개화정책을 단행할 때마다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변화를 받아들일 사고의 틀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는 매우 다른 결과를 이끌어냈다.





제5장 제국주의와의 전쟁은 경제에서부터

준비 없는 개항


준비 없이 맺어진 불평등 조약 : 일본이 조약을 맺으려 했던 목적은 무엇보다 조선에서 무역 활동을 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여러 모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우월한 지위를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본이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은 급작스런 정치적 변화와 일본의 협박 앞에 아무 준비도 없이 조약 체결에 나섰고, 그 결과 조선의 경제는 피해를 입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조선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은 완벽한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 '조일수호조규 부록에 부속하는 왕복문서'는 조선 관료의 준비되지 않는 통상 자세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었다. 8월 경기중영에서 조선의 대표 조인희와 미야모토 고이치 사이에 1차 회담이 개최되었으며, 3차에 걸친 회담 끝에 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통상장정에는 관세에 대한 조항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바로 양국 대표간의 소위 '왕복문서' - 이 문서는 양국 대신간의 개인적 의견을 교환했던 편지였다 - 에 의해 관세 문제가 매듭지어졌다. 일본과 조선 모두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내용은 표면상 동등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에 수출하는 상품은 기계를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공산품이었으며, 조선이 수출하는 상품은 농산물인 미곡이었다. 양국의 경제 상황이 대등하지 않은 가운데 조인된 무관세무역은 조선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관세와 개항장 밖 행상을 맞바꾼 조약개정 : 관세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조정 관료들은 점차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일본과 협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채 임오군변의 발생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임오군변을 진압하는 데 군사를 파견했던 청나라는 근대적 통상장정의 체결을 요구하였다. 청과 조선 사이의 조공무역 체계로는 무역상 이익을 보지 못할뿐더러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이 장정은 청나라 상인이 개항장을 벗어나 조선 어디에서든지 행상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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