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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에드워즈 지음 | 모색
서론 - 가능성의 한계

이 책의 주제는 자유다. 이미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보다 자유에는 더 큰 장애가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행동과 사고의 속박을 허용의 한계가 아닌 가능성의 한계로 믿는 현대의 허구를 폭로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부의 불평등과 분배라는 몇몇 문제점을 제외하고는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초기 교권이나 독재의 통제로부터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을, 즉 정치의 세계뿐 아니라 믿음과 가치를 뒷받침하는 조직 구성을 가능한 한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1. 전체주의를 넘어서 - 노암 촘스키를 중심으로

신중한 전진! -'상식'의 함정


심리학자들은 어떤 주장을 즉석에서 불합리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피해버리는 상황을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어떤 주장을 바로 거부할 때, 그 바탕에는 각각 합리적, 감정적, 혹은 자기 이익이라는 동기가 깔려 있다.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은 확실하다고 고집하지 않지만, 감정이나 자기 이익에서 나온 반응은 대체로 어떤 손해라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전략은 너무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반응하기보다는 이성에 의지하여 가능하면 사실을 조심스레 관찰하는 것이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행동 방식은,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반체제적 정치 저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촘스키는 현재 미국과 여러 나라의 경제, 정치 및 군사 권력의 남용에 대한 비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견해와 지극히 다른 세계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견해는 언론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세계관과는 사뭇 다르다. 기득권의 이익 추구에 대해 촘스키가 비난하듯이,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은 자기 이익을 증대하는 데 배치되는 그를 당연히 거부한다.



여론 조작 - 선전으로서 대중매체

언론 매체의 행동에 대한 선전 모델은, 지극히 효율적인 통제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지배 세력은, 언론의 행동을 통제 체제로 조작할 수 있다. 극단적 수준까지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이런 통제가 거의 철저하게 눈에 띄지 않아서 가능했다. 선전 모델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통제가 가장 완전하려면 어쨌든 완벽한 자유라는 순수한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이런 체제는 전체주의적 폭력에 기초한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통제 체제를 대표한다. 촘스키와 허먼은, 언론과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 유지는 의도적 계획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유 시장'의 힘이 작용하여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영웅적 행동이 아니다!" - 걸프에서 전쟁 범죄

일반인들은 기업 이익을 추구하는 서구의 후원에 의해 저질러진 반인류적 범죄를 언론이 침묵하여 진실을 알지 못했다. 바로 이 사실이 뉴스가 체계적으로 걸려낸 형태의 조작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선전 체제의 조작을 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파괴를 예로 들어보자.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해석은 지극히 일반적이다. 쿠웨이트의 기름을 훔치는데 몰두하였고 어쩌면 사우디아라비아를 정복하기 위해서 움직였을지도 모르는, 쿠웨이트인의 자유뿐 아니라 서방의 주요 이익을 빼앗고자 위협한 히틀러를 닮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였다. 냉전만 가시면 세계 평화가 온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진 유엔이, 과거에는 군사 간섭이 핵 참사를 야기시킬 수 있는 민감한 지역에서(걸프만과 같이) 이제는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게 되었고, 쿠웨이트의 자유와 인권을 후원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외교적 노력에도 완고하고 어리석은 이라크의 폭군이 무력을 사용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외과적'인 수준의 정교한 공격으로 이라크의 군사 시설을 무력화시켰다. 전쟁은 분명했기 때문에 이라크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과거 미국의 법무장관 램지 클라크에 따르면 이것은 상투적인 진술이며 언론의 해석이다. 뉘른베르크 헌장에 따라서 우리 모두는 민주적 시민으로서 궁극적으로 주요 전쟁 범죄에 대해 책임이 있는데 언론의 이러한 해석은 뉘른베르크 헌장의 정신에 저촉되는 엄청난 거짓말이다.



1988년과 1990년 사이에 전쟁으로 야기된 경제적 문제는 새로운 긴장을 원치 않았던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와의 반목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쿠웨이트는 원유의 과잉생산으로 유가를 낮추려고 하고 있었고, 이 저유가 정책은 이란전쟁 이후 경제적 복구에 매진하던 이라크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대해 쿠웨이트와 협상하려는 이라크의 시도는 철저하게 저지 당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쿠웨이트가 극도로 비타협적인 바로 그때 미국이 이런 형태의 지역 분규에 관심이 없다고 이라크를 안심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확언이었고, 뒤이어 즉각적인 대규모의 침공이 이어졌다. 8월 11일, 침공 8일 후 4만 명의 미군이 걸프 만에 있었다. 쿠웨이트의 자극과 미국의 재보증, 이 둘의 결합은 이라크를 파괴하기 위한 구실로 범죄를 저지르도록 유혹하는 계획된 함정이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이 형태의 독립이 석유의 고가격과 함께 아랍 제국에 투자하는 동안 석유 수익에 대한 위험을 야기시킬 것이라는 점을 오래 전부터 주지하고 있었다. 걸프만의 위기는 이 지역에서 서구의 경제적 이익을 방해하는 민족주의자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 원래 목적은 이라크를 약화시켜 서구에 우호적인 예속 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이란, 니카라과,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등 다른 제3세계 국가와 일반적으로 동일한 전략이다.



램지 클라크가 걸프에서 전쟁 범죄라는 문제에 깊이 개입하게 된 중요한 계기는 1991년 2월 연합군의 이라크 공습 결정이 정해진 시기, 검열받지 않은 필름에 담긴 6시간 동안의 민간인에 대한 생생한 공습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주요 TV는 그가 촬영한 필름 자체를 거부했다. 주요 사건에 대한 정부의 시각(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제이다)을 그대로 반복하는 언론의 순종이 이 거부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클라크의 설명은 촘스키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 서구 기업의 목적에 타협하지 않는 정부·사실·사건은 언론에 의해 무시되거나 중시되지 않거나 혹은 종종 비난당하기까지 한다.



환경오염의 참된 이유와 그 해결 및 오존 감소, 공기 및 해양오염 등의 문제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 또한 선전 모델에 의해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핵심은 이 문제 제기가 기업의 목적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점이다. 촘스키를 읽으면 '넵튠(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으로 'Neptunus'의 영어식 표기. 공연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의 의미로도 사용됨)이 돌풍을 일으키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혹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통제된 것이 아니라는 신념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믿는 바를 통제함으로써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왜곡과 은폐 및 철저한 거짓말을 확인하고 나면, 이로부터 해방되어 극적으로 새롭게 뜬 눈으로 낡은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2. 프로파간다 모델의 확장

불가피한 신념


앞장에서는, 대중 언론에 작용하는 국가와 기업의 치밀한 통제 체제를 프로파간다 모델 - 이하 선전 모델로 표기한다 - 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사람들의 사고 방식이 특정 조직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경제 작동과 생존이 좌우되는 측면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자유, 민주주의, 자선, 종교적 이상 등을 격찬하는 논의는 허용되지만 주된 작동 목표는 기업 성장의 극대화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정의된 '성공'이 행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하다고 믿게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 '성공'은 경제 체제에 길들여져 낭비하는 헤픈 씀씀이라는 과시적 소비로 정의된다. 셋째, 신분 과시와 사치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이 체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 목표를 선택한다."라고 믿도록 만드는 데 관심을 가진다. 이 측면은 아마 이 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예전의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적 대안을 능가하는 이 체제의 향상된 효율성은, 바로 개인이 자발적으로 소유욕을 충족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신념은 기업의 소비 체제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선전 체제는 인간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도외시하고 기업의 목적을 떠받드는 '성공', '행복' 및 '자유'의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토론의 제한 - 진리의 상대성

선전 모델이 국가와 기업의 이익을 위한 요구에 들어맞도록 사람들을 길들인다는 사실을 각색하여 현대 사회를 가득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실재에 대한 비합리적 각색으로 현대 사회를 가득 채우자는 것이다. 현대의 상대주의는, 모든 진리는 개인 수준에 머무른다는 예외적 사상에 의거하고 있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는 주장은 현대의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사회 규범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경우, 그 비판이 자명한 진리일지라도 이에 효과적으로 도전하게 하는 주장이 제시된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권력 체제의 거짓말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중대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경제적 성장, 성공을 통한 출세, 기업 이익의 최대화, 부와 안락의 증대 등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고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병행하여 체제의 필요에 따라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것은, 모든 선과 올바름은 상대적이며 본질적으로 의미 없다는 것과 같다. 때로는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한다. 이는 얼마나 논리적 모순인가!



보이지 않는 폭군

기업을 위한 소비주의가 불가피하다는 신념이 훼손되지 않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선전 체제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진리를 찾으려는 바람과 역량을 제한시켜야 한다. 즉 진리에 대한 꿈을 말살시켜야 한다. 기업의 목적을 지지하고, 삶에 대하여 좀더 나은 대답을 찾으려는 가능성조차 무산시키는 사상을(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믿게 만들면서 선전 모델은 기본적인 인간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킨다. 단지 우리가 인간 신념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작용하는 선전 체제에서 탈출해야만 이 왜곡을 볼 수 있으며, 순수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3. 종교적 진리 죽이기

신성하지 않은 삼위일체 - 무신론, 소비주의 및 진보


150년 동안 무신론은 단순하면서도 끊임없이 역설을 하여 소비주의와 '진보'라는 산업을 널리 퍼지게 하였고, 종교적으로는 이상적인 도그마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무신론은 선전 이론의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사회 목표는 엄청난 소비를 필요로 하며, 그 소비는 사람을 그저 신체적 욕구, 기계적 욕구를 잘 충족해야 하는 덧없고 단순한 '고기 덩어리'로 보게 한다.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단순히 무책임하고 즉각적인 만족을 권고하는 식으로 현대 사회에서 표명된다. 현대의 환경 위기는 무신론과 소비주의의 합작품이다. 이들의 신조는 현재의 순간 이외에 중요한 것이 없다. 사실은 현재의 순간이 문제가 아니라 기분을 전환시키는 쾌락의 경험이 중요하다. 이러한 확신은 질병이나 광기로 보이기도 한다. 현대 소비주의는 자신의 경박의 무게 때문에 무너지면서 환경을 오염시켜 슈퍼노바(Super-nova), 즉 초신성이 되는 지점에 확실히 도달할 것이다.



권력 종교

무신론이 소비를 부추기는 것은 끊임없이 출현하는 권력 종교의 모습이라 말할 수 있다. 권력 종교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인본주의적 종교'라고 부른 참된 종교와 달리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이고 충실한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단지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며 용이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권력 종교는 특정한 신념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권력을 후원하는 기능으로 구성한다.



4. 바른 생활 죽이기

우주의 법과 지상의 법이라는 무기의 단점


오늘날 사람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라고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근거에서 자유로운 민주 사회에 살고 있다고 의문의 여지없이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사회 생활의 일반적 법칙을 정형화할 수 있다. 권력은, 불가침이 사회의 목표라는 거짓을 만들었다. 경제 성장이, 인간이 노력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목표이고 정형화된 법칙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진리의 합리적 해석, 특히 근본적 종교 및 도덕적 진리가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이 현대의 기만적 체제와는 너무 달라 사람들은 혼돈 상태에 빠지거나 혹은 희화화된 암초에 걸리거나 허무주의 등의 위험한 적에 포위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나쁜 행위로 '잘 지낼 수 있든 말든' 관계없이 '도덕적 정언명법'에 의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냉소적인 무신론적 시각은 당연하게도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외교 정책이 내세운 '도덕적 정언명법'은, 예를 들어 재계를 인도하는 '기업의 책임' 윤리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현 시대를 지배하는 이익 추구가 가진 비인간성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 시각이 모두 국가와 기업의 권력을 오래 유지하도록 목적에 부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토마스 홉스(Tomas hobbes)가 말한 국가 없는 야만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는 이상적 근거가 나오게 된다.

아무리 중요한 윤리적인 문제도 거부되는 무의미, 무도덕한 상태를 불필요한 소비주의로 채워야 한다. 따라서 쾌락과 출세만이 의미 있으며, 그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주의 중재라는 생각이 타파되고 난 뒤에 어쩔 수 없이 공허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 단지 사회의 공익에서 보상과 처벌이라는 인간의 제도가 부적절하게 채워진 것이다. 우주의 중재나 사회의 공익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허구라는 생각이 대두되면 허무주의가 출현한다. 많은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서 20세기에 발생한 극단적인 폭력의 이유를 찾아냈다. 이는 구체적으로 티모르, 이라크와 성층권의 오존층 파괴와 같은 최근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상한 이념이나 신념을 표면적으로 내세우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어쨌든 인격적 신의 관념을 믿을 수 없게 된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과 죄가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꽤 강한 인상을 갖고 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왜 그런지 모른다. 이런 생각은 근거가 부족하다. 또 체계화된 신념이 아니어서 사람들은 쉽게 믿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은 대개 사회의 부정적 평가나 처벌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처벌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사람들은 윤리적인 제도에서 벗어날 것이다.





5. 당일치기 여행자

고립 - '혼자 있다'의 의미


고독이란 말은 '외톨이의, 황폐한, 무시된, 파멸적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독은 종종 '슬픔을 억누름'이라는 의미도 있다. 고독이란 말은 '혼자 떠나다'라는 라틴어 '데솔라레(desolare)'에서 유래되었고, '솔루스(solus)'는 '혼자'라는 말에서 나왔다. 고독한 당일치기 여행자는 성공하고 모든 것에 잘 순응하여 부를 거머쥐고 출세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혼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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