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밥은 무엇인가
최준식·정혜경 지음 | 휴머니스트
서설 - 한국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서
인사동의 한정식품"정 선생님, 어느 집으로 갈까요? 선생님 전공이 음식이니 한번 정해보세요." 내가 한국 음식 전문가인 정혜경 교수에게 이렇게 제안한 것은 도대체 어떤 게 한국음식인지 궁금해서였다. 매일 집에서든 밖에서든 음식을 안 먹는 날이 하나도 없는데,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한국음식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먹는 건 좋지만 알고나 먹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교수에게 소위 전통음식을 한다는 한정식집을 가보자고 제안하였다. 요즈음에는 한정식 집에서도 온갖 종류의 음식들이 뒤섞여 나와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거기가 전통음식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오히려 한정식 집을 잘 안 다녀요. 그동안 음식을 가지고 실험 하느라 현장 답사나 실습은 별로 신경을 못 썼어요. 그러니 최 선생님이 골라 보세요."
정혜경 교수는 음식점 선정을 굳이 마다했다. 나도 한정식 집은 - 값이 비싼 관계로 - 많이 다녀보지는 못해 잘 모르지만, 전통적인 것을 살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인사동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음식점 가운데 하나를 골라 가보기로 했다. 인사동에는 음식점이 부지기수로 많지만 정식으로 한정식을 파는 집은 많이 다녀보지 못했다. 우선 한정식이라 써놓은 식당이 적지 않아 어디를 가야 할지 선뜻 정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 생각이 떠올랐다. 벌써 한 10년은 됐을 텐데, 우리 시대의 대목(大木)인 신영훈 선생이 한번 좋은 음식을 사겠다고 나를 데려간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안국동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잇는데, 인사동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종종 '지형지물'로 등장하는 크라운 베이커리 - '빵집'이란 좋은 말 놔두고 왜 영어를 쓰는지 모르지만 - 의 뒷골목에 있다.
이 골목에 즐비한 한정식 집들은 인사동에서 역사가 있는 집으로 꼽힌다. 당시 신영훈 선생은 이 집들 가운데서도 제일 낫다는 집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갔던 것이다. 음식이 나오자 그 집의 명성 그대로 밥상에 반찬이 가득 깔렸다. 정말로 수십 가지의 반찬이었다. 그땐 으레 한정식이란 이런 음식이겠거니 하면서 포식했다. 이 기억은 몇 년 동안 내내 남아 있었다. 그 뒤 외국 친구가 왔을 때도 이 집에 데려가서 한국 음식을 맘껏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입장에서는 그런 한국 음식을 반드시 자랑 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런 음식 문화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때 그 반찬의 엄청난 나열이 인상에 너무 강하게 박혀 있어 이 집을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외상의 전통정교수와 내가 식당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사랑채에 해당되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상에는 항상 그렇듯 하얀 종이가 갈려 있었다. 몇 년 만에 산해진미를 보고 먹을 생각을 하니 여간 기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음식 전문가와 같이 식사를 하니 얼마나 많이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까지 좋았다. 곧 음식이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전처럼 반찬들이 상에 가득 깔리지는 않았고, 음식 접시가 없는 부분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반찬들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전통이랄 것도 없지만 밥상에 반찬 그릇들을 있는 대로 까는 것은 이제 종적을 감추고, 코스별로 들어오는 서양식 혹은 중국식의 패턴으로 한정식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두 양식이 섞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꽉 깔아놓고 먹는 게 우리 전통은 아니죠." 정교수의 일침이었다. "네? 그래요? 저는 왕창 깔아놓고 먹는 게 우리의 전통인 줄 알았는데요." 아직 한국 음식의 형식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 남자가 대꾸했다. "아니에요.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은 다 외상을 받았지 이렇게 여러 사람이 "떡부러지게" 차려놓고 먹는 일은 잔치 같은 특수한 때가 아니면 하지 않았죠." 처음부터 내가 전통이란 걸 완전히 잘못 안 것이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이런 한정식은 어떤 배경에서 생기게 된 건가요?" 화제를 다시 전공 쪽으로 바꾸자 정교수가 이내 이야기를 풀어낸다.
"확실히 알 수 있는 주제는 아니에요. 그러나 아마 추측컨대 궁중음식이 모델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문화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경제적인 문제 등이 해결된다면 기층에 속한 사람들이 상층에 속한 사람들의 문화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현상 아닌가요? 이것은 실제로 궁중음식이 막간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궁중 음식이 민간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이전에는 봉송(封送)이라고 불렀습니다. 좀 전문적인 용어입니다만 봉송이란 왕이 양반들에게 하사하는 음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양반은 이것을 '꾸러미'로 만들어 민간에 전달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날에 한정식이라고 부르는 음식 양식이 결정되었을 터인데, 실제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최선생님도 아시겠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요정으로 명월관과 태화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궁중요리라는 명목으로 음식을 팔았는데 이게 바로 궁중의 일상식이었다고 해요. 특히 태화관 주인은 음식과 각종 연회의 요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 일제말기가 되어서 다른 한정식집이 생겨났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지요."
사라진 한식우리가 말을 나누는 중에 이미 음식이 들어오고 있었다. 음식 접시들이 대충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전에 보았던 대로 접시들이 상을 다 뒤덮겠거니 생각했는데 별로 그럴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가짓수가 퍽 줄어든 것도 그렇지만 음식을 배치한 모습이 영 성의가 없었다. 음식은 그 종류가 얼마가 되든 그런 것보다는 성의나 정성이 중요하다. 이 현장에서도 우리 문화가 깨져나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제공된 음식은 검은 해물 죽이었다. 작은 그릇에 담긴 해물 죽은 속을 부드럽게 하라는 목적으로 나온 것이다.
"전통 음식은 반도 안 되네요. 이 밥상에는 거의 20가지의 반찬이 있는데 전통음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게장, 무생채, 북어조림, 김치, 그리고 전 정도밖에는 없는 데요?"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과 너무 달랐다. 정교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게장은 꽤 오래된 음식입니다. 19세기 초에 씌어진 책으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가정 살림서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게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나온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이덕무(李德懋, 1741~17893)의 전집]의 한 장인 「사소절(士小節)」에도 게장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유교적인 도덕관에 입각한 예절이나 행동거지에 대한 내용을 담은 「사소절」에는 식사예법도 자세히 나오는데, 그 가운데 "게 껍질에 밥을 담아 먹지 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상스럽다는 거지요. 해산물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선조 때는 생선 중에 민어를 가장 많이 먹었습니다. 양반들은 생선 이름에 '치'자가 들어가는 것은 잘 먹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금 상스럽게 생각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이름에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불포화지방이 많아 산패(酸敗)되기 쉽다고 생각해 안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민어는 지금도 싼 생선은 아닙니다. 요즘 와서 잘 안 잡히기 때문에 값이 한 마리에 십만원 이상을 호가합니다."
내 눈에는 아직도 밥상위에 있는 음식들이 대부분 전통적인 음식들로 보였다. 이번에는 송이버섯을 가리키며 정 교수에게 물었다. "이 송이는 어떤가요? 아마 기름에 튀긴 것 같은데…." "옛날에는 이렇게 먹었을 리 없지요. 이전에는 송어도 적을 만들어 먹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어렸을 때 송어하고 고기하고 다른 채소들로 적을 만들어 먹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니까 기름에 튀긴 송이도 전통식은 아니다 그거지요. 그럼 이 채소들은 어떻습니까? 이 밥상을 보면 채소들을 삶아서 가공한 것보다는 날 것으로 만든 게 많네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정교수는 곧 설명하기 시작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삶은 것은 숙채(熟菜)라 하고 생으로 만든 것은 생채(生菜)라 합니다. 우리나라 나물은 생채보다 숙채가 훨씬 많습니다. 보세요. 나물하면 전부 삶아서 손으로 양념해 오밀조밀하게 만든 게 생각나지, 날것으로 만든 건 별로 안 떠오르지요. 날로 만든 나물은 기껏해야 무생채 정도 있겠군요." "맞아요, 무는 날것으로 많이 먹지요. 무생채, 참 맛있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어요. 그 많은 김치들은 다 날로 먹는데 왜 나물은 주로 익혀 먹었을까요?" "우리 조상들은 여러 채소를 삶아 양념을 해서 나물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질리지 않고 한번에 많은 양의 채소를 먹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집의 채소음식들 보세요. 이 집뿐만 아니라 요즘 많은 한정식 집에서는 삶은 나물보다는 이렇게 생채 형식으로 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런 채소들은 개념적으로 샐러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나물들은 재생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만일 묵은 나물이 있다면 그걸 우선 말립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나물이 먹고 싶으면 말린 나물을 다시 불려서 조리합니다. 고사리나 시래기 같은 오곡 나물들이 그런 것이죠. 반면에 서양의 샐러드는 재생이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우리의 나물은 대단한 음식인데 손품이 너무 많이 들어 우리 식탁에서 자꾸 사라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손이 많이 간다는 건 그만큼 고급음식이라는 뜻이죠."
1부 한식의 역사
한식의 역사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밖은 어슴프레하게 바뀌어 있었다. 많은 돈(1인당 약4만 원)을 내고 먹은 음식이었지만 찜찜한 생각이 가시지를 않았다. 전통이 여지없이 깨져 나간 현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음식도 이전에 비해 시원치 않았고 접대하는 방법도 소홀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음식도 이전에 비해 시원치 않았고 이전 전통이니 뭐 하나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기분이 씁쓸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잊을 건 빨리 잊자고 하면서 우리는 찻집으로 향했다. 인사동에는 전통찻집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 중에 제일 나은 찻집을 찾아 앉았다. 차를 우려내 한잔을 마시자 얼마간 여유를 찾은 정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한식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인들의 식습관에 관한 이야기였다.
"최 선생님, 왜 한국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먹는 것을 굉장히 밝힌다는 것도 되지요. 술 마시면서 음식을 안 먹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인들은 산으로 놀러갈 때도 꼭 먹을 걸 챙겨 가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냥 간단한 먹거리가 아니라 아예 취사도구를 메고 가서 고기를 구워 냄새를 풍겨가며 먹는 게 한국인 아닙니까? 좋은 경치를 봐도 '경치 참 좋다'고 감탄하기 바쁘게 '저기서 고기 구어서 소주하고 같이 먹으면 맛있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요. 그런데 과거에도 그런 식으로 먹는 걸 밝혔나요?" 내가 이렇게 거들자 정교수는 정색을 했다.
"우리 같은 문화 민족이 그럴 리가 있나요? 과거에는 계절마다 그 계절에 맞는 음식을 풍류에 맞추어 즐기던 민족이 우리 아니겠습니까? 자세한 내용은 뒤에 가서 보기로 하지만, 대충만 보아도 할 말이 많습니다. 봄이면 진달래 따다가 진달래 화전을 부쳐서 나누어 먹고, 여름이면 더위에 지친 몸을 보호해 주기 위해 각종 보양식을 만들어 먹었죠. 계절 음식도 그렇지만 결혼이나 제사와 같은 통과의례를 치를 때에는 음식을 나누어먹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음식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해 소중히 여겨서 그 맛과 향을 음미하고 즐겼다는 얘기지요. 이렇듯 우리의 음식 습관에는 풍류와 멋이 가득했는데 이것들은 다 사라지고 단지 음식 자체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많아요. 몸에 좋다고 하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고 먹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의 모습은 무섭기까지 합니다." 나도 정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의 밥 문화"그런데, 최 선생님은 한국음식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선뜻 대답하기 쉽지 않은 정 교수의 질문을 느닷없이 받고 나는 재빨리 말문을 열었다. "어, 그건 여러 사람들이 모여 밥 먹은 거 아닌가요?"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답도 아니네요. 밥 먹는 것은 맞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밥을 주식(主食)으로 하고 그 외의 국이나 반찬들을 부식(副食)으로 하는 주·부식형의 식사습관이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때 밥이라고 해서 쌀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장이나 조, 보리 같은 곡식 전체를 밥이라고 하는 거지요. 최 선생도 아시잖아요? 과거에 일반 서민들이 쌀밥을 먹는 기회란 일년에 두세 번밖에 안 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삼국시대를 보더라도 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한반도 북쪽에 사는 서민들은 주로 조나 기장을 먹었고 남부의 서민층은 보리를 먹었습니다. 남부의 귀족층 정도가 쌀을 먹었다고 할까요. 대체로 이런 패턴으로 곡물의 식용분포가 이루어졌지요."
고려시대, 한식 전통의 형성"우리 민족은 원래 목축을 하던 민족이라 육식을 잘했습니다. 고구려식 불고기인 맥적(貊炙)이 바로 그 증거죠. 그랬던 것이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 위주의 식습관으로 바뀌었고,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적나라한 예로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동물을 전혀 도살할 줄 몰랐던 고려인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가 원의 지배로 들어가면서 확 달라집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선 주목할 만한 현상은 고려 조정에서 당시 고려에 들어온 원의 둔전병(屯田兵)들이 요구하던 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긴 겁니다. 둔전병이란 변경 지방에 주둔하는 군인들로 평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는 병사들 아닙니까? 원에서 자기들도 먹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소를 요구했는데, 그들이 바라는 만큼의 소가 당시 고려에는 없었답니다. 그때 그들이 소 6천 두를 요구하였다고 하는데, 적지 않은 숫자에요. 어떻든 고려는 원의 이 요구에 몹시 시달렸다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몽골인들은 부족한 소를 얻기 위해 고려 땅에서 직접 목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목축 후보지로 제주도가 선정되었는데, 그것은 제주도가 목축지로서 여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가 따뜻해 겨울에도 영하로 안 내려가지요. 목초도 풍부하지요. 사나운 짐승도 없지요. 이렇게 여러 모로 제주도는 목축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충렬왕 2년(1276년)에 몽골 인들은 목축에 밝은 몽골 인들과 좋은 품종의 소나 말 등을 제주도로 보내 목장을 시작하게 합니다. 제주도가 지금도 말 원산지로 이름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이후부터 고려인들은 몽골 인들의 영향으로 고기를 식용으로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으려면 동물을 잡아야 하고 그것을 요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고려인들은 소 도살법이나 요리법 등도 몽골인 들에게 배우게 됩니다. 고려인들은 동물을 도살할 줄 모른다고 했죠? 그랬는데 추살(椎殺)이라고 해서 망치로 소의 이마에 일격을 가해서 단숨에 죽여 버리는 도살법 등을 몽골인들로부터 배웁니다. 그리고 이 도살법을 배운 무리들이 점차 계층을 형성해 화척(禾尺)이나 백정(白丁)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군(群)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학자에 따라서는 우리가 현재 즐기는 곰탕이나 설렁탕이 이때에 들어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몽골에서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을 '공탕(空湯)'이라 쓰고 '수류'라고 읽는데, 여기서 곰탕과 설렁탕의 어원을 찾자는 이야기죠. 하기야 '공탕'과 '곰탕'은 비슷하게 들리고 '수류'나 '설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