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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책읽기

헤럴드 블룸 지음 | 해바라기
교양인의 책읽기

헤럴드 블룸 지음/최용훈 옮김

해바라기/2004년 10월/432쪽/23,000원



저자 서문

책을 잘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왜 읽어야 하는가?’에는 특별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참다운 지혜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운이 좋은 사람은 특별한 교사를 만나 도움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이 책에서는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단편 및 길고 짧은 시들, 장편소설, 희곡 등의 작품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 선별된 작품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목록은 아니다. 단지 왜 읽어야 하는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견본일 뿐이다. 잘 읽는 것은 내적인 훈련을 통해 수행된다. 한마디로 스스로 잘 읽는 법을 훈련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독서의 동기나 용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는 이 책의 주제인 ‘어떻게’와 ‘왜’를 굳이 분리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논쟁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읽기를 가르치고자 할 뿐이다.



프롤로그 :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자신만의 판단과 견해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끊임없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에게만 달려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왜’ 읽어야 하는가는 어디까지나 독자의 관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라고 충고했다. 랄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도 “최고의 책은 ‘하나의 본성이 글을 쓰며 바로 그 본성이 읽는다’는 확신을 우리가 느끼게 해 준다.”라고 말했다. 베이컨,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에머슨의 생각을 종합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찰하며 숙고하는 데 사용되는 것,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작가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바로 그것을 찾도록 하라!

실용주의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먼저 셰익스피어를 찾고 이후 셰익스피어가 당신을 찾도록 하라는 의미다. 만일 리어 왕이 당신을 찾는다면 그것이 당신과 공유하는 본성, 즉 당신에 대한 그 작품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고 숙고하라. 베이컨, 존슨, 에머슨 모두가 동의하듯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독서를 한다. 즉, 자아의 진정한 관심사를 알기 위해 읽는다.

독서를 통해 얻게 될 독자들의 숭고함은 ‘사랑에 빠지는’ 행위처럼 불안정한 감정을 제외하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세속적 초월이다.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믿지 말고, 받아들이지 말고, 논박하지 말고, 읽고 쓰는 하나의 본성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





1. 단편소설 Short Stories

프랭크 오코너는 「외로운 목소리」에서 단편소설이야말로 고립된 개인,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잘 그려 낼 수 있다고 예찬한 바 있다. 그리고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의 「사냥꾼의 수기」를 다른 어떤 단편소설보다 높게 평가했다. 농노 해방의 필요성과 같은 당대 사회 문제는 이후 러시아 역사의 대재난에 묻혀 버렸지만, 쓰여진 지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은 여전히 신선하다. 투르게네프의 단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전체를 놓고 볼 때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셰익스피어를 제외하고 가장 훌륭한 답을 제시한다.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사랑했던 투르게네프는 모든 인류를 ‘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누었다. 존 폴스타프(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희극적 인물)나 산초 판자스(『돈 키호테』에 나오는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수기」에 담긴 25편의 작품 중에서 여러 다른 비평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 중에서도 「베진 초원」과 「아름다운 땅에서 온 카시안」을 특히 좋아한다. 「베진 초원」은 아름다운 7월의 아침, 투르게네프가 거위 사냥에 나서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냥꾼은 길을 잃고 헤매다 밤이 되어 한 목초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소작농 사내아이들이 두 개의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 그들과 어울리는 가운데 어느 새 투르게네프는 우리를 그들의 세계로 안내한다. 일곱 살에서 열네 살에 이르는 아이들은 모두 ‘귀신’과 ‘꼬마 요정들’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고 믿는다. 투르게네프는 교묘한 방법으로 아이들의 대화를 유도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보다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건 다섯 아이들 중 가장 호감이 가고 영리하고 용감한 ‘파블루샤’라는 아이다. 그 파블루샤가 그 해의 끝자락에 말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우리는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우리의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고, 투르게네프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초연함 등을 미학적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의 글에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이나 아이들, 사냥꾼 자신만큼이나 순수한 운명에 대해서일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도덕적 판단을 삼간다는 점에서 가장 셰익스피어적인 작가들 중 하나다. 반면,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러시아)나 헤밍웨이의 작품은 투르게네프의 작품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 세 작가는 겉으로 초연해 보이지만 실제로 공유하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연 풍경과 인간의 친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체호프의 초기 단편들에는 외형적인 정교함과 진지한 성찰이 있다.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삶을 묘사하는 데 있어 그는 탁월한 작가였으며, 이후 모든 작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체호프는 작가란 독자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글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이 등장 인물의 행위, 대화, 상념만으로도 충분히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훌륭한 단편으로 33세데 쓴 세 페이지짜리 짧은 소설 「학생」을 꼽았다. 「학생」은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지만 아름다운 소설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젊은 신학도가 성(聖) 금요일에 모녀 간인 두 과부와 우연히 만나 여인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에 몸을 녹이게 된다. 그리고 모녀에게 사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정하고 마침내 회개하여 통곡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때 어머니가 흐느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내면에서 기쁨이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진실과 아름다움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끈에 의해 지속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이야기의 전부다.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절묘하고 극적인 심리학자였던 체호프는 왜 「학생」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단편이라고 꼽았을까? 주인공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작품에 나오는 모든 분위기가 무섭도록 음산하다. 냉정과 불행 속에서 몰개성적인 즐거움과 개인적 희망이 불합리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것이 체호프 본인을 가장 감동시켰던 것 같다. 고리키는 체호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체호프는 평범의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냈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일상적 불행과 비극적 환희가 끊임없이 혼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느끼게 해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적 환희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익살맞은 패러디와 소극에서조차 체호프의 평범함을 찾아 볼 수 없다.

현대 단편소설은 체호프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한 인상주의적이다. 이는 헤밍웨이, 플래너리 오코너뿐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환상과 더불어 이와는 크게 다른 무언가가 현대 소설 기법에 등장했다. 카프카는 체호프를 대신해 20세기 후반, 단편소설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등장을 예고했다. 오늘날의 단편소설은 체호프적이거나 보르헤스적인 것으로 대별되는 경향이 있다. 이 두 가지 성향을 모두 담아내는 작품은 현재 거의 없다. 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그는 문학의 살아있는 미로다. 체호프와 그의 제자들에 매료된 독자는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누리지만, 보르헤스는 독자를 매혹시켜 비개성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추억은 거대한 심연이고 독자들이 이야기에 빠지면 남아 있던 자아의 전부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고자 한다. 그것이 단편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최고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에서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가 가장 터무니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보르헤스가 실제 인물과 실제 장소를 작품에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맑시즘과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모두를 거부했던 보르헤스는 틀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아닌 ‘현실’을 고발한다. 그 환상은 창의적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의 일부다. 이야기는 실제로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르헨티나 소설가 아돌프 비오이 카사레스가 보르헤스의 시골집에서 늦은 저녁 식탁 앞에 앉아,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울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비오이는 우크바르 지방의 사교 교주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해 낸다. 이튿날 비오이는 전화를 걸어 네 페이지에 걸친 우르바르에 관한 설명이 있는 자신의 백과 사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크바르의 지리와 역사는 모호했고, 그곳에 문학은 모두 공상적인 것으로 틀뢴과 같은 상상 속의 영역을 다루었다. 이야기는 어느덧 영국인 기술자 허버트 애쉬에게로 넘어간다. 애쉬가 죽은 후, 보르헤스는 그가 호텔 바에 남겨둔 한 권의 책을 본다. ‘틀뢴 백과사전 초본 제11권’이라는 제목의 책인데 출간 연도와 장소 등이 나오지 않았다. 이 수수께끼 같은 책에 몰입한 보르헤스는 틀뢴이라는 우주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 우주 속에는 원인과 결과가 없고 절대적 환상의 심리학과 형이상학만이 존재할 뿐이다. 작품 속에서 보르헤스는 위의 내용은 「틀뢴, 우크바르, 제3의 지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1947년에 쓴 후기를 아울러 소개했는데, 여기에서 환상의 영역이 더욱 확장된다. 회의주의적 몽상가인 보르헤스의 매력은 우리가 그의 경고를 받아들일 때 빛을 발한다: 현실은 너무도 쉽게 굴복하고 만다. 우리의 개인적 환상은 틀뢴만큼 정교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보편적 경향에 대해 묘사하면서 우리가 왜 읽는가에 관한 근본적 열정을 충족시켜 주었다.

현대 단편소설은 두 가지 대립하는 전통, 즉 체호프적인 것과 보르헤스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체호프적 소설들은 갑자기 시작해서 생략으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호프는 독자들이 그의 사실주의, 즉 우리의 일상적 존재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믿어 주기를 바란다. 카프카와 그의 뒤를 잇는 보르헤스는 환상 속에 몰두하고 있다. 체호프-헤밍웨이적 양식과 보르헤스적 양식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다. 독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후자는 현실을 넘어서 보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가를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양식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헨리 제임스는 단편을 “시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 미묘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단편은 암묵적인 게 좋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작가가 회피하느니 설명까지도 찾아내기를 바란다. 독자들은 의도적으로라도 서두르지 말고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관심을 통해 독자는 인물들의 얘기를 엿보거나 들을 수 있다.



2. 시 Poems

나의 관심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며 왜 읽는가에 대한 것이므로 시와 관련해서는 보다 큰 상상의 창조물에 대한 추구로 초점을 맞추었다. 시는 예언적 양식의 하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상상력에 의한 문학 최고봉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 먼 나라에서 내 마음속으로

죽음의 바람이 부네:



기억에 박힌 저 푸른 언덕들은 무엇인가.

저 첨탑과 농장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잃어버린 만족의 땅.

내게는 빛나는 광야.



내가 갔었던 그 행복의 길을

이제 다시는 가지 못하리니.



이 작품은 하우스먼의 『슈롭셔의 아이』 중 마흔 번째로 나오는 서정시다. ‘어떻게 시를 읽을 것인가?’는 하우스먼(Alfred Edward Housman, 1859~1936)의 시를 살펴보면 가장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압축적인 양식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준다. 정교한 간결성은 위대한 시를 규정하는 깊이와 반향을 담고 있다. 하우스먼의 직접적인 표현은 어떻게 시를 읽을 것인가에 대한 첫 번째 원리를 보여 준다. 면밀하게 읽어라. 왜냐하면 좋은 시의 진정한 평가 기준은 면밀히 읽혀질 만한가 하는 점에 달려 있다.

우리가 타인과 교류를 하는 데 있어 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묘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혹은 우리 안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럼으로써 보다 충분히, 그리고 미묘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테니슨(Alfred Lord Tennyson, 1809~1892.영국)과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 영국)의 극적 독백은 시의 중요한 양식 중 하나다. 다시 말해 시란, 내성적이며 모든 것에 대해 절망적이지만 강인한 자아와 인내, 저항력에 대해서는 예외라는 점을 보여 준다. 테니슨, 브라우닝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 시인은 월트 휘트먼과 에밀리 디킨슨이다. 내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독서하는 이유가 자아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면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이다. 그러나 에머슨이 창시한 ‘자립’과 관련된 미국적 종교는 휘트먼과 디킨슨의 시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에머슨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한편 에밀리 디킨슨의 서정시들은 ‘자립’의 철학을 셰익스피어 이후 그 어떤 시보다도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셰익스피어에게는 뛰어난 의식이 ‘자기 엿듣기’라는 행위에서 현격하게 드러나지만 휘트먼의 경우는 이따금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시도했다. 자신을 엿듣는 일은 자신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타자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민주주의 시인이라고 선언했지만 휘트먼은 가장 뛰어나고 개성 있는 시인으로 동시에 난해하고 신비로우며 엘리트주의적인 면이 있다. 휘트먼의 자기 묘사는 흔히 ‘외적 인격’, 즉 가면을 쓴 인격이다. 진정한 휘트먼의 모습은 없다. 그의 작품은 쉬워 보이지만 미묘하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들은 밤이고 낮이고 날 찾아와서는 또다시 내게서 멀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정한 나는 아니다.



휘트먼은 동성애적이기보다는 나체주의 수도자의 모습으로 외부의 자아와 영혼 사이의 포옹으로 「나의 노래」를 시작한다. 이 포옹은 시인에게도 하나의 수수께끼겠지만, 그것은 인격이나 거친 ‘남성적’ 자아와 대조되는 성격 혹은 에토스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나, 즉 ‘진정한 나’는 휘트먼적인 영혼과는 부정적인 관계만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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