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필레보스
플라톤 지음 | 서광사
『필레보스』 해제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많은 대화편이 그렇듯, 대화 주제가 아닌 '필레보스'라는 인명이 그 제목으로 붙여진 것이다. 훗날 사람들에 의해 '즐거움에 관하여(peri h don s)'라는 부제로도 알려져 온 것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즐거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전체의 약 4/9에 걸쳐 있는 데다가, 대화편 전체를 통해서도 이에 관하여 수시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이 경우의 부제는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인 셈이다. 이 대화편은 플라톤의 최후의 거작인 『법률(nomoi)』편 바로 앞, 『일곱째 서한』보다는 뒤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철학은 '지혜의 학문'이었다. 철학을 의미하는 philosophia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요, '지혜를 사랑하는 활동'이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 자체가 가장 바람직한 삶의 방식 또는 생활 태도(tropos)였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학문 활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철학이 지혜를 추구하는 학문이었던 것은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의 가르침을 따라 "캐묻지 않은 삶은 사람에게는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애타게 일러주며 지혜를 사랑하기(철학함 : philosophein)를 온 마음과 온몸으로 했던 그를 불세출의 철인으로 알아본 이가 플라톤이었다. 이 스승의 인격과 지혜에 대한 사랑을 그 가능성에 있어서까지 거의 전방위로 최대한 확장한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다. 그 결과로 그의 철학은 전통적으로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정치 사상, 교육 사상, 예술론, 수학, 언어, 과학, 종교 등의 넓은 분야에 걸쳐 있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고, 이후로 철학은 오랫동안 그처럼 포괄적이며 통합적일 수 있는 것을 이상적인 철학 체계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에 반해 오늘날 철학은, 지난 세기에 논리적 실증주의가 대두한 이후로 논리나 언어 분석이 주류를 이루면서, 지혜의 학문이기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지 이미 오래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게 되었다. 플라톤의 『필레보스』 편을 읽게 되면, 어떻게 해서 철학이 '지혜의 학문'일 수 있으며 또한 왜 철학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학문'이어야만 하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새삼스레 생각해 보게 하는 하나의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 대화편에서 하게 되는 논의는 필레보스라는 젊은이가 이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것한테는 즐거움(쾌락 : h don )이 곧 좋은 것이며 목표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역시 이 주장의 옹호자인 친구 프로타르코스로 하여금 소크라테스를 상대로 대화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반하여 '좋은 것'과 '즐거운 것'은 엄연히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이기도 하지만, 즐거움보다는 앎(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지성이 오히려 '좋음'(좋은 것)의 부류에 더 가깝다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 또는 '좋음(善)'의 문제는 당분간 접어두고 '즐거움(쾌락)'이나 '앎'이 과연 한 가지로 말할 수 있는 것들인지를 먼저 문제삼게 된다. '즐거움'이라 하면, 그것이 얼른 듣기에는 단순하게 '한 가지 것'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은 온갖 형태의 다양한 것이요,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와 '여럿'이라는 철학적인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를테면, 음성(소리)을 갖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음성(소리)은 어찌 보면 하나이면서 또한 수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그렇게만 보아버리고 말았다면, 우리는 소리 글자나 음악과 관련해서 무지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중간 것들'로 '어떤 종류(성질)의 것들'이 '몇 가지나' 되는지를 알게 되었을 경우에야 우리는 그런 문자(문법)에 밝고 음악에도 밝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만큼 창조적이고 슬기롭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나 앎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들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것들 각각에 '어떤 종류(성질)의 것들'이 '몇 가지나' 되는지를 알아야만, 슬기로우면서 즐거운 삶의 선택이, 즉 지혜와 참된 즐거움이 '혼합된 삶' 또는 '결합된 삶'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대화편과 관련해서 플라톤이 『파이돈』 편 이후의 중기 대화편들에서 적극 주장해 온 형상 이론(刑賞理論)을 실제로 포기 또는 수정했는지 여부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편에서 하고 있는 생성의 세계에 대한 언급은, 감각적 지각의 대상들과 지성의 대상들인 형상들을 구별하도록 하는 일에 주안점을 두었던 『파이돈』 편이나 『국가(政體)』 편 등의 중기 대화편들의 경우와는 달리, 사물들이 어떤 이치에 따라 생성되고 있는지를 밝혀 보이려하고 있기 때문에 종래의 형상 이론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소피스테스』 편이나 『정치가』 편을 통해 형상 이론이 오히려 형상들의 결합 이론으로 더 보완되었다는 것을 이 대화편을 통해서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하고 있다. 이를테면, "만약에 우리가 좋음을 한 가지 모습에 의해서는 추구할 수 없다면, 세 가지에 의해서, 즉 아름다움과 균형 그리고 진실성에 의해서 포착한 다음, 하나인 것과도 같은 이것 " 이라는 구절은 좋음의 형상을 결합 형태에 있어서 보는 것이다.
『필레보스』 목차1. '좋은 것'은 즐거움(쾌락)이라는 주장과 지혜라는 주장의 대립
2. '좋은 것'과 관련된 세 번째 주장의 성립 가능성
3. 한 가지가 아닌 즐거움의 다양성; 그 부류와 부분
4. 앎(지식)의 다양성
5. 하나와 여럿의 문제
6. 논의의 목적에 대한 확인
7. '좋은 것'의 판단 기준들(완전함, 충족함, 택함 직함)과 좋은(행복한) 삶
8. 우주에 있는 것들: 그 네 가지 부류
9. 즐거움에 대한 고찰
10. 앎(지식)의 종류들
11. 좋은 것 그리고 '좋음' 자체를 찾아서
12. 좋은 것들의 순위 매김과 논의의 끝마무리
대화자들소크라테스(S krat s, 469 399) : 여기에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아래인 청소년들을 상대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프로타르코스(Pr tarchos) : 소크라테스의 실질적인 주된 대화 상대.
필레보스(Phil bos) : 이 대화편의 첫머리에 즐거움이 좋은 것임을 주창하는 자로서 등장하지만, 막상 대화 가 진행되면서부터는 간간이 대화에 참여할 뿐이다.
'좋은 것'은 즐거움(쾌락)이라는 주장과 지혜라는 주장의 대립 소크라테스 : 필레보스는 살아있는 모든 것한테는 기뻐함(즐거워함), 즐거움(쾌락) , 유쾌함, 그리고 이 부류에 부합하는 하고많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네. 하지만 우리 쪽에서 반론하는 점은 슬기로움(분별 있음), 이해함(지성에 의해 이해함), 기억함, 바른 판단(바른 의견)과 참된 추론(헤아림)들이, 이것들에 관여할 수 있는 모든 것한테는 즐거움보다도 더 좋고 더 바람직한 것들로 된다는 것일세. 이제 우리는 각기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혼의 어떤 습성이나 상태를 밝히어 보이는 일에 착수하게 될 것일세. 자네들은 그것을 기뻐함(즐거워함)의 상태로서, 반면에 우리는 그걸 슬기로움(분별 있음)의 상태로서 밝히어 보이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이 둘보다 더 좋은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게 즐거움(쾌락)에 더 가까운 부류로 밝혀진다면, 즐거움 쪽의 삶이 지혜 쪽의 삶은 제압하게 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그게 지혜에 더 가까운 것으로 밝혀진다면, 지혜가 즐거움을 이기게 되겠지?
즐거움의 다양성과 앎(지식)의 다양성소크라테스 : 나는 즐거움이 다양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네. 그것은 듣기에는 한 가지 것(hen ti)으로 들리지만, 그것은 아마도 온갖 형태를 보이고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서로 다르기까지 하기 때문이야. 이를테면, 무절제한 사람이 즐거워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말하는가 하면, 절제하는 사람 또한 바로 그 절제함에 의해서 즐거워한다고 말하네. 또한 어리석은 생각(의견)들과 희망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도 즐거워한다고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 또한 바로 그 슬기로움으로 인해 즐거워한다고 우리는 말하네. 즐거움이 최소한 서로 같지 않으며, 어떤 것들은 상반되는 것들이기도 하다는 걸 자네는 시인할 걸세. 또한 앎(지식, 학문) 일체도 여럿이며, 이것들 가운데 일부는 서로 같지도(닮지도) 않은 것들로 여겨질 것이네.
프로타르코스 : 많은 같지 않은 즐거움들이 있는 것으로 하되, 많은 다른 앎(지식)들도 있는 것으로 하죠.
소크라테스: 그러면, 프로타르코스! 양쪽이 어떻게든 검토(논박)되고 나면, 즐거움을 좋은 것이라고 말해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지혜(사려 분별) 또는 세 번째(제3)의 다른 어떤 것을 좋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를 밝혀 드러내 줄 걸세. 지금 우리는 내가 내세우는 것들이 이기는 것들로 하거나 또는 자네가 내세우는 것들이 이기는 것들로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양쪽 다가 가장 참된 것과 한편이 되어 싸워야만 하네.
하나와 여럿의 문제소크라테스 : 옛 사람들이 이런 전설을 전해 주었네. '…이다'(있다)라고 일상 말하게 되는 것들은 하나와 여럿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이것들은 한정(한도, 한정자)과 한정되지(한도가 지어지지) 않은 상태를 자기들 안에 본디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전설일세.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과 관련해서 '하나의 이데아'를 상정하고서, '이걸' 찾아야만 한다는 게야.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포착하게 되면, 그 하나 다음에는, 혹시라도 둘이 있을 경우에는, 둘을, 그렇지도 않을 경우에는, 셋 또는 다른 어떤 수의 것들을 우리가 찾아야만 한다는 게야. 그리고, 한정되지 않은 (수의)것과 하나 사이에 있는 '다수'의 수를 모두 간파할 때까지는,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가 지어지지 않은 것)의 성질을 '다수'에다 적용시켜서는 아니 되고, 그때 가서야 모든 것의 하나 하나를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가 지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내고서, 그만두어도 된다는 게야. 그러나 오늘날의 현자들은, 알맞은 정도보다 더 빨리 또는 더 더디게, '하나'라거나 '여럿'이라 해 버리는가 하면, '하나' 다음에는 곧바로 한정 없는 것들(한정되지 않은 것들)로 넘어가 버려, '그 중간 것들'이 그들을 빗겨가 버리지. 이 중간 것들에 의해 우리는 서로 변증적으로(대화적으로) 논의를 하는지, 아니면 논쟁적으로 논의를 하는지가 구별된다네.
소크라테스 : 내가 말하는 바는 문자들의 경우에야말로 명확하다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음성(소리)은 어쩌면 하나이면서 또한 수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네. 그런데 이 둘 중의 어느 한쪽 것에 의해서는 우리가 결코 슬기롭게 되지는 못하네. 하지만 음성이 몇 가지나 되며, 그것들이 어떤 종류(성질)의 것들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저마다 문자(문법)에 밝게끔 만드는 것일세. 음악에 있어서도 (그 자체로는) 하나일세. 소리(음성)의 높낮이와 관련하여 음정들이 수에 있어서 얼마나 되며, 또 어떤 종류(성질)의 것들인지를 자네가 파악하고, 음정들의 경계들을 파악하며, 또한 이것들로 이루어지는 하고많은 음계들을 파악할 때에야, 이것들을 선법(harmonia)들로 부르게 하며, 또한 몸의 움직임들 속에 생겨나 있게 되는 또 다른 그와 같은 상태들은 다름 아닌 수들에 의해 측정되는 것들로서, 리듬들과 박자들로 불리어 마땅하다고 그들이 말하면서, 동시에 모든 하나와 여럿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고찰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들 또한 이렇게 파악할 때, 그때에야 자네는 통달한 자(슬기로운 자)가 되어 있을 걸세.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든 그 하나를 자네가 이런 식으로 고찰하여 이해하게 되었을 때, 자네는 그 하나에 대해 그만큼 슬기롭게(통달하게) 되어 있을 걸세.
필레보스 : 그렇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희를 상대로 지금 하신 말씀들을 하시게 된 것이며, 도대체 무슨 취지로 하신 것입니까?
소크라테스 : 누군가가 그게 무엇이든 '하나'를 붙들었을 경우에, 그는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의 성질로 바로 눈길을 주지 말고, '어떤 수'로 눈길을 주어야만 하는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에도, 즉 어떤 사람이 '한정되지 않은 것'(한도 지어지지 않은 것)을 먼저 붙잡지 않을 수 없게 될 때에도, '하나'로 바로 눈길을 주지 말고, '어떤 수'에 눈길을 주되, 그 각각이 '얼마만큼의 다수'를 갖고 있는 깨달아야만 하며, 또한 이 모두로부터 하나에 이르고서야 끝을 맺도록 해야만 하네.
'좋은 것'의 판단 기준들과 좋은 삶소크라테스 : 그러면 즐거움(만)의 삶과 지혜(만)의 삶을 따로따로 보면서 검토하고 판단하도록 하세. 즐거움(만)의 삶에는 지혜(사리 분별)가 없는 것으로 하고, 지혜(만)의 삶에는 즐거움이 없는 것으로 하게나. 프로타르코스여! 자네는 평생을 최대의 즐거움들을 누리면서 사는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면 만일 자네가 그것을 완벽하게 향유할 경우에, 자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추가로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적어도 지성, 기억, 앎(지식), 참된 판단(참된 의견)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첫째로, 자네는 자신이 기뻐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뻐하고 있지 않은지조차 필연적으로 모르고 있을 게 분명하겠지? 그야말로 사려 분별(지혜)이라곤 전혀 없다면 말일세. 더 나아가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자네는 자신이 한때 기뻐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 또한 당장에 마주치게 될 즐거움에 대한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을 것이 필연적이고, 추론하는 (헤아리는 능력이 없으면 장차 기뻐하게 되리라는 것도 추론할(헤아릴) 수가 없어서, 일종의 해파리나 조가비 같은 몸을 가진 온갖 바다 생물들의 삶을 사는 것이지.
소크라테스 : 이번에는 바꾸어서 지성(만)의 삶을 보도록 하세. 지혜(사려 분별), 지성, 앎(지식),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온갖 기억은 지니고 있으면서도, 즐거움에는 크건 작건 간에 관여하지 않고, 또한 괴로움(고통)에도 관여하지 않아. 이와 같은 모든 것에 대해서는 전혀 느낌이 없이 사는 것을 받아들일 경우를 말일세.
프로타르코스 : 제게는 이들 중 어느 쪽 삶도 택함직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 하지만 양면적인 삶, 즉 이 양쪽 것들로 혼합되어 결합된 삶은 어떤가?
프로타르코스 : 모두가 분명히 그 둘 중의 어느 하나보다는 즐거움과 지성 및 지혜로 혼합된 것을 먼저 선택할 것입니다.
필레보스 : 선생님, 선생님의 지성도 좋음(좋은 것)은 아니고, 어쩌면 불만스러운 점들을 지닌 것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아마도 나의 지성이야 그럴 게야. 그렇다고 해서 으뜸상을 두고 내가 결합된 삶에 맞서 아직도 지성을 위해서 다투고 있는 건 아닐세. 그렇긴 하나 버금상과 관련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는 살피고 고찰해야 하네. 아마도 우리는 이 결합된 삶의 원인을 주장함에 있어서 각기 한편은 지성을 그 원인이라 하고, 다른 한편은 즐거움을 원인이라 하겠기 때문이야. 이 혼합된 삶에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