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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정두희 지음 | 아카넷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배향김굉필의 문제는 조광조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중종 대 사림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잇는 문제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중종은 "문묘에 종사할 만한 사람이 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문묘 종사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말을 받아 조광조는 "김굉필처럼 그 지향하는 바가 바르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도가 있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고 발언하였다. 문제는 김굉필을 정몽주와 함께 문묘에 배향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중종 12년 8월 9일,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굉필이 중종 대의 조정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새로운 정치 세력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었다. 말하자면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문제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이, 그리고 행실로는 절의가 가장 중요한 덕목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건국에 끝까지 따르지 않았던 정몽주와 연산군 대에 사형을 당한 김굉필이 이처럼 높이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중종 대에 이르러 세조 대의 정치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땅에 떨어진 성리학의 가르침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며, 나라에 등용할 인재는 성리학에 뛰어나고 절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중종에게 국가 통치의 방향과 인재 등용에 있어서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과거의 정치와 과거의 정치 세력과는 결별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로 대신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반대했던 것이며, 중종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종 13년(1518) 4월 조광조는 "위에서 격물치지의 학문이 없으면 군자를 보고도 소인이라 할 수 있으며, 소인을 보고도 군자라 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중종이 성리학을 더욱 선양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는 연산군 대 이후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였는데, 이는 연산군의 반유교적인 정치로 성리학의 가르침이 침체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연원이 정몽주 - 길재 - 김종직 - 김굉필로 이어지고 있음을 논하고, 자신들이 이처럼 학문적 연원을 중요시하는 것을 반대파에서는 혹시 '붕당'이라 모함할 가능성이 있음을 중종에게 일깨우고자 하였다. 중종 14년(1519) 전경 김명윤은 조광조 한 사람으로 사림의 기풍이 크게 진작되었음을 밝히면서, 정몽주 - 김굉필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이 조광조로 이어진다고 자신하였다. 이것을 반대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광조는 새로운 학문,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세력의 상징적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소격서 폐지 논쟁에 나타난 조광조와 중종의 대립



조광조의 소격서 폐지에 관한 상소중종 13년 4월 5일, 왕은 사정전에서 영의정 정광필을 위시한 주요 관리들을 모아 놓고 종묘대제에 쓰일 희생 제물인 소가 갑자기 죽은 것은 큰 사건이니 조정에서 이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라고 당부하였다. 조광조는 나라의 제례를 옛 성인들의 제도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성리학적 규범에 맞는 제도의 개혁이 필요함을 암시하였다. 이 때에 좌의정 신용개는 다른 중요한 제례는 함부로 폐할 수 없지만 도교적 제사를 올리는 소격서 같은 것은 폐지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밝혔다. 중종 13년 8월 1일,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던 조광조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재론함으로써 소격서에 대한 논쟁은 매우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이 소격서의 문제를 영의정 정광필처럼 사소한 문제로 보지 않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로 해석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조광조는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은 아직도 조선의 정치의 대본(大本)을 성리학의 기초 위에 놓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조광조는 소격서 그 자체가 아니라 왕권을 문제삼은 것이었다. 세조 대의 정치를 비판하고, 연산군 대를 폐조라 비판하는 것은 모두 유교적인 윤리관과 이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소격서 폐지를 주장하는 조광조의 상소 제출로 시작된 중종 13년 8월 한 달은 온통 소격서 폐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대간은 여러 날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고 있었는데, 곧 다가올 과거 시험을 앞두고 대간을 그냥 공석으로 남겨 둘 수도 없었다. 중종이 대간을 교체하라는 명을 내리자 왕이 언로를 막으며,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을 왕의 권위로 무리하게 밀어붙인다는 비난이 일어났다. 이 문제는 조광조 같은 유신들과 왕권의 대립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소격서 폐지를 극력 반대하는 중종을 연산군의 폐정에 비유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이 문제가 중종반정 이후 10여 년이 지나 비로소 새로운 기풍의 진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런 것조차 바로잡지 못한다면 성리학적인 이념에 의한 새로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중종 13년 9월 3일, 왕은 소격서의 폐지를 기정 사실로 인정하였으며, 사직하고 물러난 대간은 속히 복직하여 밀린 업무를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조광조의 실각과 소격서의 부활기묘사화의 결과 조광조가 실각하게 되자 중종은 곧 소격서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소격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중종의 의지가 조광조의 열정적 반대로 꺾인 것이므로, 중종은 곧 이를 부활시킴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하였다. 중종 14년(1519) 11월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다음달인 중종 14년 12월에 사약을 받고 생애를 마쳤다. 중종 15년(1520) 정월 17일 좌의정 남곤·우의정 이유청 등 기묘사화를 주도한 대신들과 함께 여러 가지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중종은 단지 기우제나 기청제 등의 일만 하고 있는 소격서를 폐지한 것은 잘못된 일인 것 같다고 하며 이를 부활시킬 뜻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남곤은 반대하였다. 이제 혁파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것을 다시 부활시킨다면 이 또한 실책일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소격서 부활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입장은 정광필이나 남곤의 생각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거의 삼 년이 지난 중종 17년(1522) 12월, 중종은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다시 소격서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로써 소격서는 다시 복구될 수 있었다.소격서 논쟁이 의미하는 것조광조는 성리학의 이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을 전개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리학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력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쪽으로보다는 좀 더 왕조의 현실을 전진적으로 바꾸려는 개혁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현실적인 계산을 바탕으로 그의 절충적인 개혁안조차도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거니와 문묘에 배향되어 사후일망정 그가 존경받는 위치에 올라선 때에도 완전히 무시되었다. 중종 20년 이후 처음으로 조광조의 복권운동이 전개될 때는 그와 함께 그가 추진하고자 했던 제도 개혁의 의미도 거론되었다. 당시에는 조광조의 복권과 현량과의 복원 문제가 서로 결부되어 매우 중요한 논쟁점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을사사화로 그의 복권운동이 좌절을 겪고 20여 년이 다시 지난 후에 일어난 제2차 조광조 복권운동에서는 현량과를 비롯한 이 제도개혁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문묘 배향으로 가장 존경받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바랐던 현실 개혁의 꿈은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묘사화 이후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논쟁에서 조광조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결국 승리하였지만, 그 승리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도와 같은 조선 왕조의 지배체제에는 근본적 변화가 가해지지는 못하였다.



16세기는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로 이해되고 있다. 퇴계와 율곡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이 이 시대에 줄을 이어 나타났으며,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품격을 한껏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내면적 심화과정은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현실정치를 이상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고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였던 조광조의 신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이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정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은 과거제와 같은 조선왕조 지배체제의 중심적 제도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할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조선 왕조에 남긴 조광조의 유산조광조는 조선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학자요, 정치가요 관료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광조가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그 시대 그와 유사한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지녔던 역사적 상황까지도 초월할 수는 없는 사람임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조광조를 통해 우리는 조선 시대의 학자요, 관료였던 사람들에 대해 매우 체계적인 지식을 갖출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곧 조선 시대 통치 체제의 매우 중요한 한 단면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과 정치는 일치할 수 있는가? : 조광조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보면서 항상 제기되는 문제는 학문의 길과 정치의 길은 일치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유교에서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였다.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학자는 그대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이룩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학문과 정치를 일체시하였다. 조광조도 이 점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단정하였으며, 이 위기는 유교적 가르침과 정치 행위가 서로 어긋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억울하게 폐출된 중종의 왕비 신씨의 복권을 주장했던 박상과 김정을 옹호하였으며, 단종의 어머니이며 문종의 왕비인 현덕왕후 권씨를 복권함과 동시에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와 연산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고,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중종이 정국공신들의 일방적인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광조를 발탁하고 그를 중용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중종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중종조차도 세조나 연산군 같은 군주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이 그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소격서를 끝까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 뜻을 관철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종은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조광조가 또 다른 의미에서 왕권을 제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중종은 기묘사화를 가져온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련 없이 조광조를 제거하였다.



조광조가 실각하자마자 중종이 취한 조치가 다름아닌 소격서의 부활이었다는 점이 이 때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유교에서 학문과 정치를 일체시하였다 하더라도 이 양자는 결코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학문적 가르침은 해석상의 차이를 갖게 마련이며, 원칙에 맞는 해석이 항상 원칙을 가장한 해석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란 세력 간의 파당을 형성하게 마련이며, 여기에서 옳은 편이 그른 편을 압도하는 것도 아니었다. 조광조가 아무리 학문과 정치를 일체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따르려 했더라도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한 파당적인 정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학문과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힘이 문제였다. 그가 실패함으로써 학문과 정치의 일체성이라는 유교적 이념은 이념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현실적인 정치 구도를 개혁하고자 조광조가 보여주었던 열정은 이후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선 왕조에서 유교는 현실적 체제를 지키는 보수적 역할을 할 뿐 현실을 개혁하는 이상으로서 존재하지는 못하였다.



지성인으로서의 조광조 :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광조 자신은 조선 왕조의 명문에서 태어났으며 왕조 체제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조선의 정치적 현실을 과감하게 개혁하고자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왕조의 퇴색된 유교 이념을 재확립하고, 그 이념에 투철한 인물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 제도를 혁신하고자 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의 골격을 조금도 해치지 않은 것이며, 조선 왕조의 지배층인 양반의 이익에 반하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개혁으로 조광조는 목숨을 잃었으며, 그의 죽음과 더불어 현량과도 폐지되고 말았다. 조광조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복권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으며, 그는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길이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조광조를 높이 평가했던 사람들이 집권했던 때에도 과거제도를 본격적으로 개혁하려는 노력은 전혀 시도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개혁은 조선 왕조 지배층의 내부에서 자체적인 노력으로 시도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시도가 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정치가라기보다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양심이 추구하는 바를 현실적 상황에 맞게 조정하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의 지성이 추구하는 이상을 현실적 장애를 무릅쓰고 구현하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그의 불행이라면 당시에는 학문과 정치가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성인으로서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조광조는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양심으로서 활동하였으며, 자기가 속한 체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입장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를 버리지 않은 조광조는 정치가로서 성공할 수는 없었지만, 지성인으로서는 해야 할 바를 다한 것이었다. 지성인은 오늘날에도 이 사회의 기본 체제에 속해있지만 그 체제 자체를 객관화하여 비판하는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숙할 수 있느냐 하는 정도는 그러한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비판이 허용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광조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반성해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중종 초 반역과 모반의 정치사



조광조 등장의 역사적 배경소격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기구였다. 소격서가 도교에 관계된 것이라 해도 일찍이 이단 논쟁에 휩싸인 적이 없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중종에게 성리학과 성리학이 아닌 것 중 하나를 택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단을 택한다는 것은 중종이 세조나 연산군과 같은 군주가 되려고 하는 것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었다. 한편 조광조의 등장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던 중종은 소격서 문제로 조광조와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힘으로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반정공신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반격을 노리는 수구 세력에게 결정적 기회를 제공하였다. 조광조는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공신 세력의 힘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힘만으로는 열세를 면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이념적 논쟁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것이다. 문제는 중종이었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를 바랐지만, 소격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 유일한 수단은 결코 아니었다. 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정치 세력인 공신 집단을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왕권보다도 위에 성리학의 이념을 둘 것인가의 선택을 요구하는 미묘한 정치적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중종은 결과적으로 전자를 택함으로써 다시는 자신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현량과 : 이념과 현실의 갈등



천거제에 대한 조광조의 주장조선 왕조에서는 과거를 통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나, 때로는 천거를 통하여 유능한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는 논의도 제기되곤 하였다. 중종 초에도 천거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지만, 특별히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종 13년에 들어서 조광조를 중심으로 천거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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