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지음 | 김영사
아버지는 지면을 첫째,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성과 악랄성을 폭로하며 둘째, 친일파·민족반역자들의 죄행과 비리를 단죄하고, 셋째, 인민들에게 민족재생의 신념을 안겨주는 것을 투쟁의 슬로건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총독 우가키 가즈나리와 미묘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본국으로부터 여운형을 잘 구슬려서 민심을 유도하는 데 이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수입이 높은 공직과 관직을 받으라고 권고하였으나, 아버지는 병 치료를 구실로 거절하였다. 아버지는 이런 인연으로 보도관제(報道管制)가 내릴 때마다 우가키를 찾아갔다. 총독부 코앞에서 쓰고 싶은 글을 다 써냈다. 논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시원해 했으나 혹시 아버지에게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 마음 졸였다. 아버지는 친일파로 전락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죄행을 폭로하는 글도 자주 내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저는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 학생입니다." 최린이 조직한 '시중회'에서 연설한다고 해서 그들을 따라가 보았더니 고급 요정에서 강연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최린은 "조선독립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실력을 기르는 것이지 힘들게 운동이나 하고 시위나 하고 파업을 일으키는 따위는 다 나라를 멍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망동에 끌려들지 말고 될수록 일본에 잘 협조해야 한다."고 떠벌렸다. "선생님 제가 존경하는 이광수, 최남선도 꼭 같은 말을 합니다." 학생은 울분에 차서 부르짖었다. "젊은이, 그자들은 친일파로 전락한 개들이야. 개들이 짖어대는 걸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해서 그러는가. 독립운동을 안 하면서도 동포들한테서 애국자인 것처럼 인정받자는 것이 바로 민족개량주의자들의 실력양성론이거든. 자네 동료들을 '시중회' 같은 데서 한 사람이라도 더 떼어내기 위해 힘써 주게. 머지않아 조선의 독립은 꼭 성취될 테니까."
원래 최린은 3·1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계한 사람으로서 3·1운동 발발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고 옥살이도 하였다. 3대 교조 손병희가 그를 천도교 교령으로 천거하였다. 그러나 최린은 돈에 맛을 들이게 되어 인생 행로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최린을 비판한 아버지의 글이 나간 후 많은 청년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며, 최린은 점차 사회에서 고립되어 갔다. 이광수도 아버지가 미워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상해에 있을 때인데 아버지가 도쿄에 있는 그를 불렀다. 상해 임정 조직 당시 이광수는 서기를 했고 「독립신문」 주필을 하였다. 그런데 서울에 돌아온 그는 공개적인 전향문과 같은 '민족개조론'을 써서 총독에게 바치고 일본 돈으로 호화롭게 살아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열등하기 때문에 일본의 보호·지도·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도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눈이 멀었지. 그놈을 믿고 '흥사단' 부단주까지 시켰으니. 몽양, 내가 내놓은 '민족인격양성론'을 민족개조론으로 변질시키다니."
아버지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슬기를 보여주는 글을 자주 써내었다. 내가 보통학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서울 공회당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동무들과 가 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주로 청년들이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옛날 다른 나라 사람들은 조선을 가리켜 '동이(東夷)'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큰 활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할아비들은 기운들이 좋고 용기가 있어 큰 활을 메고 외래 침략자들을 쏘아 이겼던 것이다." 이 연설문이 당시 「삼천리」 잡지(1936년 1호)에 게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칠칠암야와 같은 민족수난의 시기에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 희생과 자기 보신의 한계는 날이 갈수록 더 뚜렷해졌다.1919년 11월 아버지의 도쿄 행에 대한 내용은 이미 여러 출판물에 널리 공개되었다. 백전노장을 자처하는 육군 대장 다나카가 아버지를 술좌석으로 불러 회유하려다 도리어 드센 역습을 당하게 되자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조선 국민 2천만을 당장 몰살해버릴 수도 있다."라고 위협했다. "너도 글을 읽었다면 '삼군지수는 가탈이언만 필부지의는 불가탈(三軍之帥可奪, 匹夫之意不可奪 : 3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한 장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다)'이란 말의 진의를 알 것이다. 네 말대로 2천만을 일시에 다 죽일 수도 있고 여운형의 목을 일초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여운형의 마음까지를 벨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여운형이 지닌 철석같은 조국애의 일편단심과 영원불변의 독립정신까지 벨 수야 있겠느냐."고 아버지가 외쳤더니, 그 자는 얼굴이 시뻘게지며 "내가 한 말은 농담이다. 어서 술이나 먹자."라고 했다. 실로 아버지의 일본 방문은 위정자들 속에서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고 일본 정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훗날에도 아버지는 도쿄 행에 대해 사람들이 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번은 나에게, 제국주의와는 타협이나 이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폐부(肺腑)에 새기게 된 기회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파란만장의 풍운을 타고 : 아버지는 당시 국내외 정세와 우리나라 형편으로 보아서 민족주의 운동으로는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며 오직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통해서만 독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민족주의운동의 집결체라고 볼 수 있는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것은 우리나라 현실을 모르고 정치적으로 암둔한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간주하면서 반대의 입장을 표시하였다. 나는 여러 출판물에서 아버지가 상해 임정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이라고 쓴 것을 보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때 아버지가 주장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정당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미 1918년 말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물론 신한청년당은 사회주의적 정당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진보적인 청년들을 결속하여 새 사회 건설의 주력군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3.1 봉기 후 국내와 해외에서 각양각색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수없이 생겨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망명해 왔다. 아버지는 정세의 요구에 비추어 신한청년당만으로는 독립 운동가들을 모두 망라할 수 없다고 생각해 통일적인 운동조직을 만들어 조선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각계각층, 각양각파를 모두 하나로 묶어세울 것을 구상하였다. 아버지는 상해를 거점으로 조직을 가지고 전민족적 범위에서 투쟁을 벌인다면 독립의 길은 반드시 열리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도와는 달리 표결 결과 망명정부가 세워졌다.
원래부터 임시정부로는 조선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고 여겨오던 아버지는 근로인민대중을 주력군으로 하는 사회주의 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1919년 초 모스크바에 갔을 때 레닌은 아버지에게 연해주의 이동휘와 손을 잡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동휘는 단천 태생으로 한성군관학교 출신의 조선군 육군 소대장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한 조선 군대 해산에 군복을 벗은 후 여러 반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12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대한광복군을 조직하였다. 1917년 10월혁명 후 러시아와 연계를 맺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으며 1919년 4월에 고려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버지는 1920년 봄에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당중앙 번역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회주의운동가들과 손잡고 나가는 데서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도 많이 겪게 되었다.
당시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로 있던 이동휘가 직권을 이용하여 레닌에게서 받아온 자금을 자파세력 확장에 탕진하였다. 아버지는 조선독립 문제를 중국혁명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그 일환으로 보고 중국혁명의 승리가 바로 조선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미 두 번에 걸쳐 손문을 만난 적이 있는 아버지는 1924년에 다시 그를 찾아가서 레닌의 이야기를 전하고 앞으로 그를 따라 혁명에 참가할 뜻을 표시하였다. 아버지는 손문의 권고대로 국민당에도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북경에서 손문이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손문의 측근 제자였던 장개석은 일제와 야합하는 길로 나갔다. 그리하여 손문의 국공합작·삼민주의를 따른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도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일제 침략자들까지 합세하여 미행과 테러가 아버지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1929년 7월 아버지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9년 봄에 복단(福丹)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원정경기를 구실로 남양군도를 순방했는데, 이때 가는 곳마다 반일반제 연설을 하였다. 그때의 연설 내용이 그 나라 신문들에 게재된 것을 구실로 일본이 미국·영국 당국과 협공하여 체포했던 것이다. 경성 지방법원에서 아버지를 공판하던 검사가 "일본이 조선을 도와주고 있는데 왜 반일을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일본은 조선 민족으로부터 모조리 빼앗아가는 수탈정치, 억압정치를 하고 있으니 조선 민족은 살기 위해서 부득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일제는 족쇄로 아버지의 육체는 묶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의 독립 의지와 불변의 신념만은 묶을 수 없었다.
또다시 대결 : 아버지는 출옥한 이듬해(1933년) 봄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만주사변 후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약탈 정책과 민족 말살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사소한 정치적 자유도 완전히 금지된 당시의 환경에서 그래도 합법적 운동이 가능한 것은 종교활동과 신문뿐이었다. 친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신문사에 들어왔다. 당시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을 보면 대지주 김성수가 운영하는 「동아일보」는 지주, 자본가, 지방유지들의 이익을 대변하였고, 「조선일보」는 민족자본가, 중소상공업자, 지식인 등 중산층을 대변하고 있었다. 「조선중앙일보」는 두 신문의 고정 독자망에 속하지 않는 근로대중과 진보적 지식인, 이전 사회주의 운동가, 애국인사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재정적 지반이 약하고 독자들의 인기도 점점 떨어져 파산 직전에 있을 때 바로 아버지에게 사장 취임을 의뢰해 왔던 것이다.청운의 높은 뜻 :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을사조약, 헤이그 밀사 사건을 통해 이어지고 승화되어 온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1910년을 계기로 더욱 팽배해졌다. 따라서 조선 독립의 초지를 품고 해외로 망명하는 사람들의 대열도 늘어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도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산 설고 물 설은 이국 땅으로 떠나간 이 나라의 수많은 독립투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고국을 하직한 것은 1914년 가을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서 대대로 명문가였던 우리 가문은 청렴결백하고 불의를 용서치 않는 것을 가풍으로 여겨왔다. 외세에 의해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민족 수난의 시기인 1886년에 태어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정의감이 강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에 열아홉 살이던 아버지는 졸업을 한 달 앞두고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이 일제의 관리 하에 넘어가게 됨에 따라 자퇴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다. 다른 많은 독립투사들처럼 아버지도 독립운동의 첫걸음을 국민 계몽 사업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국권상실의 요인을 당시 지배층의 무능과 실정으로 인한 '나라의 후진성'과 일제의 교활한 침략에서 찾은 아버지는, 고향집 사랑채를 개축하고 1909년에 광동(光東)학교를 세웠으며 청년들에 대한 신식 학문과 반일교육에 힘썼다. 일제는 아버지를 요시찰 인물로 점찍고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인 배정자(1887년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후 철저한 밀정교육을 받고 1894년 귀국하여 다년간 일제의 밀정으로 암약하였다)로 하여금 아버지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아버지와 배정자는 승동교회 시절부터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아버지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때 서울로 올라가 승동교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기독교를 통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경의 감시를 피해 강원도 강릉의 초당의숙(草堂義熟)으로 자리를 옮기고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반일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은 아버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아버지에게는 결국 일제의 관헌의 촉수가 미치지 않는 해외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아버지는 처음에는 남경 금릉(金陵)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상해로 갔다.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도 반일 독립 운동가들이 많았지만 국제외교를 벌이기 쉬운 상해로 뜻있는 지사들이 더 많이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상해에 살고 있는 교민들을 통합시켜 교민회 사업을 벌이며 대단히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당시는 온 세계를 동란 속에 몰아넣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와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고 바야흐로 평화가 깃들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없었던 세계의 여러 약소 민족들과 피압박 인민들은 자기들의 처지가 이미 해결이나 된 듯이 간주하면서 열광적으로 환호하고 시위하며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강들의 강화회의가 열린다고 하니, 아버지는 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 문제와 그 해결을 청원하기로 결심하였다. 활기에 넘친 아버지는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그 명의로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썼다. 그리하여 조선 민족 대표로서 김규식을 파리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는 하나의 꿈이었다. '민족자결론'은 미국이 사회주의 10월혁명의 영향력을 막고 세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내놓은 위선적 구호였던 것이다. 다민족 국가인 소련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며 식민지 약소국가 인민들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단합하지 못하도록 서로 분리시키는 한편, 전쟁 패전국들을 희생시켜 그 영토를 차지해 보려고 획책하였다. 미국 대표는 조선 대표를 만나는 것조차 거절하였다. 아버지는 결코 주저앉지 않고 다시 새 길을 모색하였다. 때마침 일본 정부에서 아버지를 초청한다는 연락이 왔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 민족대표를 보낸 여운형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보자는 심산이었다.비껴온 서광
조선독립의 초지(初志)를 품고일본 천황과 담판하다"조선 사람인 것이 아깝다" : 중·일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일제는 조·중 인민의 강한 반발과 인적·물적 자원의 고갈로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깊이 빠져들었다. 일제는 그 출로를 찾기 위해 전쟁의 과중한 인적·물적 부담을 조선 인민에게 들씌우면서 조선 사람의 마지막 넋까지 완전 소멸하기 위한 '황민화' 운동의 돌개바람을 미친 듯이 일으켰다. 하루는 총독부에서 화려한 장식을 한 종이에 우리 집 식구의 이름을 일본말로 고쳐서 인쇄한 것을 보내 왔다. 그것을 받아 쥔 아버지는 좍좍 찢으며 소리질렀다. 아버지가 버티면 버틸수록 일제는 아버지를 친일의 길로 돌려세우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였다. 한번은 「매일신보」 주최로 '여운형, 장덕수가 시국강연에 출연'이라는 거짓 광고를 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밀듯이 부민관으로 밀려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결국 장덕수 혼자서 강연에 출연하였다. 장덕수로 말하면 일찍이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고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후 국내에 들어와 변절하고 미국 유학을 갔다와서 총독부의 충실한 시녀가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황민화' 운동에 기어이 끌어들이려던 자기들의 기도가 파탄되자 일제는 악이 받치었다. 그러나 일제는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된 일제는 큰 걸림돌이었던 중국의 항일세력을 약화시키는 공작에 아버지를 이용해 보려고 하였다.
1940년 3월 어느 날 조선군 사령부의 정훈 소좌가 육군성 병무국장 다나카 다카요시에게서 만자나는 연락이 왔으니 가보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도쿄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나는 후에 경구(여운형의 일본 천왕 만남에 동행했던 조카 여경구 박사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후 해방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