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
고모리 요이치 지음 | 뿌리와이파리
1. 21세기의 역사인식오늘날 일본에서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군사력 행사를 욕망하는 자들에게 헌법 제9조 개악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정치적 당면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과거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려 한다. 현재의 국회 상황만 보면, 언제라도 헌법 개악을 발의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에서 과반수를 얻기 위해서는 국민의 평화의식을 형성해온, 전쟁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침략전쟁을 미화하기 위해 학교에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교과서를 사용함으로써 국민을 세뇌할 생각을 하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수상이 된 이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움직임과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중심으로 한 '역사 부정론자'들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쿄재판사관'은 '자학사관'이라며 표면적으로는 반미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면서 등장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그 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정치세력은 일본의 우파 보수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상, 내실로서는 현 시점에서 미일 안보체제를 견지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냉전구조가 붕괴된 이후, '세계의 헌병'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는 미국의 부시 정권을 철저하게 추종하면서, 미국에 종속하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동맹 속에서 미국과 같은 자세로 서서 "미국과 함께 가는 전쟁"을 하여 "자신감을 회복한다"는 것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나 고이즈미 정권의 기본적인 계획이다. 하지만 미국의 무법적인 세계 전략을 위한 하나의 말(馬)로 사용되어 목숨을 잃은 자위대원의 죽음은 미국을 위한 죽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는 죽은 모든 자위대원을 합사(合祀)하게 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호출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죽었든 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기만 하면 일본(천황=국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으로 꾸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우파 보수세력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종합하면, 그 기둥으로서 1968년에 미시마 유키오가 『문화방위론』에서 말한 '문화 개념으로서의 천황'을 둘러싼 논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행하려는 천황제의 재정의는 천황은 직접적인 권력은 지니지 않고 항상 문화적 권위로서만 기능한 것으로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진 대원수였던 메이지, 다이쇼, 쇼와, 이 3대에 걸친 근대 천황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체의 관여를 역사 서술로부터 말소함으로써 그 책임을 면죄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표현대로, 천황 아키히토가 '국화와 칼의 영광'을 군인에게 주는 천황 - 문화적 권위의 천황 - 이 되려면 그 전제로서 '국화와 칼'을 통합했던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근대의 세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역할을 떠맡게 된 것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역사교과서이다.
2. '옥음 방송'을 다시 읽는다매년 8월 15일이 되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반드시 방송되는 옥음 방송은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힘든 것을 견뎌…"라는 한 구절만이 잘라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전문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는 '종전 조서' 전문을 인용하고, 그 담론을 분석하고자 한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충량한 너 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 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대저 제국 신민의 강녕(康寧)을 도모하고 만방공영(萬邦共榮)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유범(遺範)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自存)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 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 : 조정의 많은 관리)의 여정(勵精), 짐의 일억 중서(一億衆庶)의 봉공 (奉公)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백성들을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 미치는 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億兆)의 적자(赤 子)를 보호하고 황조황종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여러 맹방(盟邦)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 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죽고 직역(職域)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 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 (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에 이르러서는 짐의 우려하는 바가 크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물론 심상치 않고, 너희 신민의 충정은 짐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時運)이 흘러가는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太平)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를 수호할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신민의 적성(赤誠)을 믿고 의지하며 항 상 너희 신민과 함께 할 것이다. 만약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 거나 혹은 동포들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信義)를 잃는 일은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 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 : 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志 操)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 록 하라. 너희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 어명(御名) 어새(御璽)
'종전'이라고 해도 여기서는 "미·영 2개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전쟁밖에 문제되지 않았다. 중국과 소련을 제외함으로써 분명히 전쟁 기간을 1941년 이후의 전쟁으로만 국한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 이 종전 조서에는 패전인식이 없으며 중국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사실상 '천황제 지속 선언'인 것이다. 또한 타국의 주권 침탈 행위에 대해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는 변명 같은 왜곡된 표현으로, 미국과 영국에 대한 태평양전쟁을 '자존, 자위'의 전쟁이라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침략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감추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단 제국과 동아를 분리한 다음, 다시 쌍 관계로 만듦으로써 명백히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해온 일련의 침략 전쟁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마치 없었던 것인 양 꾸며졌다.
일찍부터 이 종전 조서의 특징을 간파한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1938년 중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아바스 통신 도쿄 지국장으로 일본에 와서 1946년까지 체재한 로베르 길랭이라는 사람이다. 길랭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 조칙에 패전이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항복이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잔인한 원자폭탄이 이 전쟁의 종결 이유라고 했다. … 만일 구(舊) 군인이 장래에 자기 좋을 대로 역사를 다시 쓸 기회를 얻는다면, 그들은 이 조칙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그만둔 것은, 단지 우리 적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의 천황은 휘하의 군대가 깊은 상처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육을 막는 데 동의했다. 왜냐하면 천황은 일본의 구세주일 뿐 아니라 어떠한 잔학 행위에도 반대하는, 인간 문명의 방위자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길랭은 전쟁과 천황의 미화를 위해 '자기 좋을 대로 역사를 다시 쓸 기회'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하고 염려했는데, 그것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구(舊) 군인의 회상록 류의 글에서, 자존을 위한 전쟁이라는 시점은 반복해서 등장하고, 일본의 구세주로서의 천황 상도 성단(聖斷)이라고 명명하는 것과 함께 역사 개찬파의 기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3. 맥아더와 히로히토2002년 10월, 1945년 9월 27일에 있었던 맥아더와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제1차 회견에 대한 외무성 기록이 공개되었다. 황거(皇居)가 내려다보이는 다이이치(第一) 생명 빌딩에 GHQ(연합군사령부)가 설치된 이후, 히로히토의 측근들은 천황제를 둘러싼 GHQ의 방침을 확인하기 위해 맥아더와 직접 접촉할 기회를 만들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국내에서 '천황제 타도'가 외쳐지고, 미국 내에서도 천황 비판의 목소리가 고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시종장이었던 후지타 히사노리의 기억에 따르면 히로히토는 "패전에 이른 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로 책임이 추궁되고 있지만, 그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라고 말했고, 이에 대해 맥아더는 "일찍이 전쟁에 패한 나라의 원수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세계 역사에서도 전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점령정책의 수행에서도 폐하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에 공개된 외무성의 공식 기록에는 천황 히로히토의 "책임은 모두 나에게 있다.", "내 한 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등의 발언은 보이지 않는다. 외무성 공식 기록에서 히로히토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로서는 이번 전쟁을 극력 피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아주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반면 맥아더의 발언은 후지타의 기록과 상당히 가까운 점이 있다. 히로히토가 자신의 전쟁 책임을 인정했다는 인식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64년 일본에서 번역되어 간행된, 이 회담의 한쪽 당사자인 맥아더의 『회상록』에 의해서다. 이 책에서 나온 내용과 후지타의 증언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히로히토의 이야기만 왜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 외무성 공식 기록의 공개를 보도한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는 제8차 이후의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던 전(前) 외교관 마쓰이 아키라의 수기를 인용했다. 전쟁 책임을 인정한 히로히토의 발언에 대해 "너무나 중대한 것임을 고려해 기록에서 삭제했다." 이 문제는 말 그대로 이 시점에서 중대한 것이었다. 맥아더가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면책하고 소련이나 영국이 요구하는 전범으로서의 소추를 피하는 것을 노리고 있는데, 본인이 전쟁책임을 인정해버리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이다.
맥아더와의 제1차 회담에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 발언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사실 당시 통역을 맡았던 오쿠무라 가쓰조가 죽고 난 직후부터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전쟁책임' 발언 여부를 일단 접어두고, GHQ의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진행해가고자 하는 맥아더와 어떻게 해서든 '국체수호'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미일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관련시켜 생각해보자. 제1차 회담 이후, 맥아더 앞으로 보낸 보너 펠러즈 준장의 메모는 '전쟁책임'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개전'을 둘러싼 책임 회피의 방법을 제안하면서 히로히토의 면책이 점령을 효과적으로 행하는 비장의 카드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펠러즈는 법적으로 개전 책임은 천황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개전은 천황의 자발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것은 천황의 의사와 도조 히데키(태평양 전쟁 당시 총리이자 일본군 최고 권력자)의 '이용' 방법이 달랐다는 것을 입증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때 '국체 수호'의 요체는 단숨에 '진주만 공격'과 '개전 조서'의 관계로 초점화되었다. 즉 히로히토는 어디까지나 교섭이라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 미일관계를 개척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수부가 개전 쪽으로 나가고, 정부가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대일본제국 헌법'의 관례에 따라 이에 대해 '비토=거부권'을 발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주만 공격'에 관해서는 상세한 작전계획을 보고받지 않았다는 대강의 줄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동시에 히로히토를 이용함으로써 미국은 '무혈침공'이 가능해졌고, '700만' 군대가 무장해제되었기 때문에 그 후의 점령정책 실시에서도 천황의 이용 가치는 충분했다. 측근들은 곧바로 히로히토가 '진주만 공격'에 대해 사전에 상세한 정보를 보고받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느라 분주해졌다.
이 시점에서 미국=GHQ과 일본 지배층 사이의, 이를테면 합작 시나리오에 의한,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에 대한 철저한 왜소화가 모의되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본 지배층이 '국체 수호'를 위해 짜낸 '종전 조서'의 논리, 전쟁을 미국과 영국에 대한 '4년'간으로 한정하고 중국에 대한 전쟁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거하며 히로히토는 전쟁에 반대했다는 대강의 줄거리가 미국=GHQ에 의해 추인된 것이다.
4. '인간선언'이라는 속임수GHQ는 천황의 신격화를 중심으로 세계에 대한 일본 민족의 우월감 등의 신념을 해체시키는 방법에 대해 고려하고 있었다. GHQ의 사회교육국 다이크 국장은 가큐슈인(學習院 : 귀족, 화족 자제들의 교육기관)의 교사였던 블라이스를 중개자로 하여, 히로히토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격을 부정하는 메시지를 발표하도록 하는 활동을 개시했다. 블라이스가 가큐슈인 원장 야마나시 가쓰노신에게 가져온 비밀 메모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제 신년이고 신일본의 새로운 해다. 세계는 이제 국가보다 인류를 최대의 목표로 하는 새로운 이상을 가지고 있다. … 인류에 대한 충절은 국가에 대한 충절보다 위에 있다. … 외곬으로 인류의 행복과 안녕에 공헌하자. 폐하께서는 자기 인격의 어떠한 신격화나 신화화도 전면적으로 부정하신다."
이른바 '인간선언'은 먼저 GHQ가 발안했고, 극비리에 블라이스로부터 야마나시 원장을 경유하여 궁중의 측근과 연락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무엇보다 히로히토를 도쿄 재판에 소추하지 않기 위한 책동이었다. 미국 국내의 천황에 대한 전쟁책임 추궁, 국제여론의 엄격한 감시 속에서 천황제와 천황의 온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천황제가 완전히 민주화되어 두 번 다시 군국주의세력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1946년 1월 1일, '연두 조서'가 각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조서에서 히로히토의 요청에 의해 부가된 '5개조의 서문'과 조서 본문의 접합점에 극히 교묘한 속임수가 사용됨으로써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은밀히(어쩌면 노골적으로) 구축되었다.
'5개조의 서문'의 다섯 번째 항목에는 "지식을 세계에서 구하여 황국의 기반을 크게 진작하라."고 되어 있다. 황국의 기반, 즉 천황이 국가를 다스리는 사업의 기초를 진작, 즉 불러 일으켜 활발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천황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선언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에 대해 위의 인용 바로 뒤에 이어지는 본문은 "예지가 공명정대하니, 또 무엇을 덧붙이겠는가."라고 정면 긍정하면서 '5개조의 서문'을 히로히토 자신의 선언으로 만들고 있다. '예지'란 곧 천자의 생각, 혹은 천자가 말한 것을 가리킨다. 즉 이 말 속에는 일찍이 '5개조의 서문'을 발표한 메이지 천황이라는 주체가 히로히토와 같은 천자로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이에 짐은 각오를 새로이 하여 국운을 열고자 한다."는 구절이 있는 이상, 이 조서는 쇼와 천황에 의한 국가 통치의 계속을 '새로이' 선언한 문서가 된다. 그리고 '건설'될 '신일본'이란 곧 히로히토가 통치하는 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무릇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나라에서 특별히 그 열렬함을 본다. 이제 실로 이 마음을 확충하여 인류애의 완성을 향해"라는 형태로, 근대 천황제를 기분, 감정으로 지탱해온 가족국가주의를 다시 끄집어내면서, 그것이 그대로 '인류애'로 이어질 것이라는 완전히 파탄된 논리가 제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