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근대
박지향 지음 | 푸른역사
공기와 물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안개가 조용하고 창백하게 깔려있고, 회색 빛 구름은
평화로운 푸른 빛 하늘에 걸쳐있고. 모든 것이 희미하고 창백하고 핼쓱하여, 우리가 탄 배가 뿜고 있는 물거품의 요란함이 잠자고 있는 아시아를 시끄럽게 침략하는 것 같았다.단조로움은 주민들의 집에서도 발견된다. 커즌은 천편일률적으로 진흙과 종이와 나무로 지어진 한국의 집에서 아름다움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한국인들은 온통 흰옷만 입으며, 일본 주민들의 의복도 대체로 "따분한 갈색, 회색, 파란색 일색이며, 모든 것이 가난하고 창백하고, 도시들은 단조로운 평범함이 그 특징이다." 이처럼 한국에 대해 단조롭고 따분한 곳이라고 여겼던 비숍은 시간이 갈수록 한국에서 이상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즉, 비숍은 어떤 마을에서 무당굿과 장례식 그리고 결혼식을 보고 정체된 한국 사회에도 활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의 전체적 인상은 생명력의 부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움이었다. 비숍과 커즌에 의하면 한국은 쇠락하고 죽어가는 나라이며 궁중으로부터 밑바닥 빈민가까지 개혁에 대해 끈질기게 저항한다. 따라서 비숍과 커즌은 모두 '보수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한국을 변하지 않는 나라로 표상한다. 커즌은 한국의 정치 형태가 "테헤란에서 서울에 이르는 전근대적인 동양국가들의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요코하마 항의 "잠자고 있는 아시아"의 이미지는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사라져버린다. 일본은 정체된 동양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일본 도시들은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부산해보였다. 따라서 비숍은 일본이 "열심히 통치되고 있다."라고 진단하며 커즌도 일본의 서구화를 놀랄 만 하다고 판단한다. 무엇보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정치인들의 자질에서 나타나는데, 커즌이 볼 때 일본의 내각은 "인재들의 총 집합"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하다. 그는 수 차례에 걸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과 대화를 나눈 후 그처럼 걸출한 인물을 길러낸 국가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외무대신을 만났을 때의 인상은 전혀 딴판이다. 커즌은 서양의 실용주의자들이 조차권과 은행 같은 근대적 제도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희생을 강요했음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야기하는 고통은 한국이 문명과 만나는 경험의 대가일 뿐이라고 정당화한다. 한편 비숍과 커즌은 19세기 영국인들이 문명사회의 기본 조건 중 하나로 여겼던 예의범절을 동양을 평가하는 척도로 삼았는데, 이 점에서 일본과 한국은 뚜렷이 다르다. 비숍에게 한국의 야만성은 거의 모든 계층에서 발견되는 무례함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한국의 모든 계층이 무례하고 매너가 없다는 점을 누누이 지적한다. 비숍이 어느 마을에서 납치되다시피 하여 어떤 부잣집에 끌려간 일이 있는데 노인과 젊은이, 아내, 첩, 하녀를 막론하고 모두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실상 비숍은 원주민이 서양에 물들지 않은 채 전통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선호했으면서도 그들이 서양식 예절을 따르지 않을 때에는 참을 수 없어 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 양반계층의 무례함을 강조하는 데서 한국식 예절에 대한 그녀의 불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반면 비숍은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산간마을이나 기차 안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발견한다. 비숍이 오지를 탐방하면서 한 마을에 체류할 때 호기심으로 그녀를 찾아온 그곳 사람들의 태도를 보자. 마을 사람들은 비숍에게 "이렇게 훌륭한" 여행가를 맞게 되어 영광이라고 칭송하고, 그에 대해 비숍은 "이렇게 훌륭한" 나라를 보게 되어서 감사하다고 응답한다. 그리고 모두는 넘칠 정도로 절을 한다. 이들이 갖춘 고상함과 위엄과 정중함이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 아니라 일본식 예의범절과 행동거지라는 점은 일본을 문명사회로 평가하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3장 오만과 편견에 갇힌 인형의 집
동양도 서양도 아닌 잡종의 나라오랫동안 일본을 관찰한 사람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일본인들은 매우 비밀스럽고 교활한 자족적 인종으로 비추어졌다. 나아가 이들은 일본인들의 애국심과 일본 정신에 내재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최고의 일본 전문가라 불린 동경제국대학 교수 배질 체임벌린(Basil Chamberlain)은 무사도에 대한 영국인들의 찬탄에 반대하면서, 그것은 지배 엘리트가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조작한 이념으로 천황 숭배와 일본 숭배의 일부임을 지적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성공회 초대 조선 주교로 서품 받고(1889) 강화도에서 포교활동 중이던 코프 주교도 본국의 「가디언(Guardian)」지에 투고한 글에서 "우리처럼 한국에서 일본인들이 진정 어떠한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일본이 그처럼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유럽 국민들과 정부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서양적 의미에서 문명국"으로 믿도록 호도한 것이 놀라울 따름이라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일본 예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충격이 가시면서 영국인들 사이에는 일본을 신비와 환상의 땅으로 미화만 할 것이 아니라 좀더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일본에 대한 서양인들의 인식에 깊이 각인된 "게이샤, 벚꽃과 연꽃, 오래된 궁전과 사원들, 동양적 삶에 대한 진솔한 놀라움과 경이"와 같은 인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문명을 향해 전진하는 일본을 "일종의 애정 어린 멸시감"을 가지고 주목한 영국인들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서구화가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일본인들은 봉건제를 제거하고 유럽식 기차와 전보 같은 "겉보기에 진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성취하는 등 기술적·물질적 근대화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정신적 근대화는 전혀 이루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할복자살이 하나의 제도로서 존재했을 만큼.
모든 것이 너무 피상적이었다. 갑작스런 정열이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아 낡은 것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주저 없이, 그리고 아무런 의문 없이 "서양에서 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용하게 만든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일본 학생들은 겉만 똑같고 속이 텅 비어 있는 기압계를 가지고 다니며 자랑하는데, 모든 면이 이와 같다는 것이었다. '겉만 같으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이것이 일본인들의 생각이라는 판단이었다. 또한 "과장된 형태의 프랑스 제복을 독일식으로 엄격하게 입고 있는" 조그만 기병대 병사라든가, 유난히 근시가 많은 것도 아닌데 단지 독일인들이 쓰기 때문에 테가 큰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일본 대학생들에 대한 조롱의 언급도 발견된다.
한편 일본의 면면이 근대성의 결핍으로 해석되면서 그때까지 찬탄의 대상이던 일본적 미도 원시적인 것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고 근대성의 결핍과 봉건성의 표현으로 치부되어버렸다. 물론 일본 미에 심취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의 "치장되지 않은 단순함"을 찬양한 피것 같은 일본 예찬론자는 "아름답게 정돈된 정원, 절제된 단순함, 단지 한 가지 색채나 비싼 꽃병에 담겨있는 꽃에 의해서만 그 단순함이 깨어지는 집, 햇빛이 문풍지에 닿아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황금색"을 칭송하였다. 피것은 일본식 정원이 "어느 정도 이상해 보이기는 한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일본의 미를 "극도의 섬세함"으로 특징지었다.
그는 심지어 할복자살조차 서양 결투의 세련된 의례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본적 미는 결핍과 부족을 의미하였다. 비숍도 일본여행기에서 일본인들의 왜소하고 보기 흉한 외모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되풀이해서 언급하고 있다. "납작한 코와 두터운 입술, 몽골식으로 처져있는 눈은 아무리 좋게 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다. 서양인들의 예찬 대상이던 일본 정원에 대해 서양의 감각으로는 정원이라 할 수 없다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일본식 정원은 단지 "비뚤어지고 고문 받은 식물들의 집합"이고. 일본 집은 "미개인의 오두막에서 한 두 발자국 나아간 것"일 뿐이며, 일본 집에서 발견되는 정돈의 획일성은 "초기 단계에 억제된 문명"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의 미는 고상한 의미의 미가 아니라, '원시적 단순성'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시 또한 아름답고 표현력이 좋긴 하나 활력과 힘이 결여되어 있으며 수백 년 간 지속된 '제국적 억압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4장 영원히 클 수 없는 어린아이의 나라
부패하고 무능한 웃음거리 왕국영국의 정치인 커즌은 1893년 한국을 방문한 후 "이 작은 나라는 독립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부패했고, 독립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기에는 너무나도 쇠약했다."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한국에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 때문이라고 확신하였다. 영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실정에 경악하였다. 한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보였고, "동양적 전제정"의 원형이었으며, "웃음거리" 왕국이었다. 영국 외교관이나 여행자 모두 정부와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한국 관리들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부패하고, 행정은 썩을 대로 썩어 착취가 만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할 동기를 잃었으며, 그 결과 나태가 만연하고 좋은 땅들이 놀려져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관리들이 습관적으로 수탈과 횡령을 자행하고 있으며, 그 부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국왕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궁내부 고문으로 고종을 가까이서 보좌했던 미국인 샌즈도 이러한 부정의 꼭대기에 왕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부정의 상납금이 최종적으로 고종에게로 갔다는 것이다.
한국 국왕과 지배층은 공공정신을 결여한 채 개인적 이해관계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 지도자들의 헌신적 희생과 비교되었다. '개인이나 가문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지배 엘리트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원칙이라는 판단이었다. 이것이 시민이 주축이 되는 근대국가가 성립되지 못한 전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으로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적 축재는 신망 받는 정치인에게서도 발견되었다. 한국 정부의 재정 고문으로 세관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영국인 매크리비 브라운은 민영환에게서도 그 점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을 닮아 돈 문제에 느슨한" 민영환을 보며 오히려 즐거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일제 침략에 대항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 민영환에게 이처럼 숨겨진 면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전쟁에서 실패한 후 체포되어 심문 받는 자리에서 중앙 탐관오리의 대표로 민영준, 고영근과 함께 민영환을 들기도 하였다.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 민감한 영국 외교관들은 한국의 시급한 개혁이 당면한 우선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무능과 지배층의 파벌싸움에 실망한 영국인들은, 한국인들은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한국을 일본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896년부터 1905년까지 서울 주재 총영사 및 주한 영국 공사로 서울에서 복무한 존 조든은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독립협회의 개혁운동 등에 좋은 인상을 받아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가 한 역할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서울이 할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지만 곧 실망하였다. 조든은 "고종이 그의 위엄을 건드리는 문제에 기울이는 관심을 국가 통치에 쏟는다면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라고 애석해하였다. 일단 한국 정부에 대해 실망하자 조든은 일본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하였다. 선교사들이 일본인들의 야비함을 여러 차례 고발했지만 조든은 이를 일축하면서 한국의 개혁을 위해 일본이 담당하고 있는 "엄청난 과제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오히려 선교사들을 탓하였다.
한국 정부가 기회를 놓쳤다는 조든의 판단에 대부분의 관찰자들도 인식을 같이했다. 조든을 대신해 1902년부터 잠시 서울에서 복무한 도쿄 주재 영사 구빈스도 한국을 "완전 붕괴 상태에 있는 동양 국가"로 표현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누구보다도 밝았던 새토우 역시 "한국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은 한국 정부의 허약함과 부패, 분열에 의해 조장되었다."라고 판단했다. 터키가 '유럽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아시아의 환자'라는 것이었다.5장 흠모와 애증, 경탄할 만한 부의 제국
영국에 대한 열렬한 흠모1870∼1880년대 일본에는 서양문명의 과정이 보편적 인간의 진보를 대표한다는 믿음이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서 문명이라는 단어가 서양 문명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다. 근대성의 보편적 경향을 무엇보다도 산업화, 과학적 지식과 기술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찾은 일본인들은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근대성의 상장을 발견하였다. 서양의 위대한 근대국가들은 전부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근대성의 요소들을 함유한 대표적 국가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문명의 최고 수준에 달한 나라로, 세계 최대의 부국, 가장 안정된 형태의 입헌군주국,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제국이라는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그리하여 일본인들은 "영국을 적으로 하면 세계를 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까지 말하며 경외했던 것이다. 영국은 일본이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아직 쇄국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막부시대에도 초슈 사쓰마로부터 많은 수의 유학생들이 비밀리에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 훗날 메이지 시대 지도자가 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이 영국을 모범으로 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한 선구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에 최초로 서양 문명을 소개한 후쿠자와는 『서양사정(西洋事情)』『민정일신(民情一新)』『영국의사원담(英國議事院談)』등에서 영국을 모범으로 서양 문명을 설명하였다. 그가 보기에 영국은 옛것을 존중하지만 고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후쿠자와의 마음에 들었던 요소는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충성심이었다. 즉 영국은 "상하화친(上下和親)의 민주주의의 국가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와세다 대학의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를 중심으로 한 와세다 파도 친영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독일이나 프랑스의 과격성을 배척하고 영국식의 온건한 점진주의를 높이 표방하였다.
영국의 영향은 산업, 은행, 조선업 그리고 특히 해군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일본 해군은 거의 전적으로 영국인들에 의해 개혁되고 훈련되었다. 1871년부터 7년간 영국에서 유학한 바 있는 러일전쟁의 승리자 도고 헤이하치로는 특히 넬슨 제독을 열렬히 흠모하여, 넬슨의 전술을 자주 적용하였다. 물론 영국을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친영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1870년 유럽을 경험하고 귀국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보불전쟁에서 완승한 독일 군대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영국 의회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 인상이 일생 동안 그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였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毆 : 아시아에서 탈피해 유럽으로 편입된다)론'이 보여주듯 동양을 설정함으로써 일본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많은 일본인들은 나아가 스스로를 '명예 백인'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모리 아리노리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어를 영어로 대체할 것과 천황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설득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1887년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우리나라를 유럽 스타일의 제국으로 변모시키자. 우리 국민을 유럽 스타일의 국민으로 변화시키자. 동양의 바다 위에 유럽 스타일의 제국을 건설하자."라고 외침으로써 전통문화의 열등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