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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3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2004년 3월/376쪽/14,000원



*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ranesi,1720~1778):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판화가. 그는 고대 그리스를 예술의 전범으로 삼던 시절에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동판에 담아 로마 건축의 위대함을 알게 해주었다. 시적 환상과 묘한 분위기로 가득 찬 그의 판화는 낭만주의의 탄생을 예고했고, 나아가 그 시대에 이미 예술적 ‘모던’을 예감하였다. 특히 현실에서는 결코 지어질 수 없는 상상의 건물은 에셔의 작품보다 200여 년 앞서는 것으로,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의 작가와 예술가들의 상상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글머리에 - 월인천강지곡

밤은 깊어가고, 이윽고 중천에 떠오른 달이 천 개의 강에 모습을 찍는다. 세상이 강이 왜 천 개밖에 없겠는가?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여섯 대륙을 운행하면서, 달은 이 땅의 모든 강에 제 모습을 새긴다. 그 뿐인가? 달은 다섯 바다 위에 사뿐히 내려앉고, 부서지는 파도 표면에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가 이내 스러진다. 그렇게 거품처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달의 수는 모두 몇 개나 될까? 어느 나라에서였더라? 일본의 대사가 중추절을 맞아 서양의 외교관들을 ‘달맞이’ 행사에 초대했다. 하지만 자연에 대해 우리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진 이 합리주의자들이 풍류라는 말의 뜻을 어찌 알겠는가. 이 이국적인 가든파티에 나타난 서양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천체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고 한다. 이 썰렁함이 달을 ‘관찰’할 줄만 알았지 ‘볼’ 줄을 모르는 어느 문명의 못 말릴 습성이다.

다시 달에게로. 물이 있는 곳이면 달은 어디에라도 내려앉으려 한다. 왜 그럴까? 그건 아마도 달이 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게다. 실제로 달덩이는 거대한 물덩이다. 달이 지금보다 더 크고, 그 빛이 여기보다 더 밝았을 때, 그 시절 그곳에서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달빛은 방바닥에 둥글게 호수를 토해놓고는 그 위에서 출렁거렸다. 별을 반짝이게 한다는 공기의 산란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다. 어쨌든 물로 되어 있기에 달은 또한 마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박할지 모르겠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다. 달빛은 해의 빛을 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물 위에 뜬 달들 역시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다. 그저 달에 반사된 햇빛을 다시 한번 반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허공에서 달을 지우면 천 개의 강을 찍힌 달들도 일제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하늘의 달이 사라진다고 세상의 모든 달이 사라질까? 빛과 그림자는 배척하는 게 아니다. 때론 그림자도 빛을 낸다. 천 개의 강을 찍힌 달들은 곧 달의 그림자이고, 이 달빛은 다시 해의 그림자다. 달은 그저 해를 복제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다. 때로는 거꾸로 해가 달을 복제하기도 한다. 해는 달에 빛을 주나, 달은 해에 그림자를 준다. 가끔 일식이 일어날 때면 해는 달이 된다. 해는 달처럼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며 짧은 시간 안에 차고 기우는 달의 한 달치 운동을 흉내낸다. 이렇게 일식이 일어난 어느 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빽빽한 플라타너스 숲의 나뭇잎 새로 난 틈들을 통해 반달이 된 해가 어두운 바닥에 수많은 달의 역상을 찍어놓는 장관을 보았다.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 즉 암실 효과가 바닥에 수많은 반달 모양의 해를 복제해 토해놓은 것이다. 달이 천 개의 강에 제 모습을 복제하는 것을 흉내내어, 해도 자기 자신을 천 개의 반달로 증식시킨다. 하늘에서 달을 지워도 복제를 복제한 천 개의 강이 달빛들이 세상을 은은하게 밝힌다. 하늘에서 해를 사라지게 해도 수천, 수만의 복제된 해들이 세상을 도처에서 비춘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라는 이름의 세상이다. 누군가 진리의 신, 태양신을 제 것으로 독점해도, 그것을 우러를 것 없이 세상은 수없이 복제된 작은 진리들의 빛으로 별일 없이 돌아간다. 우리는 원본 없는 세상 위에, 복제된 빛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슨 뜻이냐고? 그 얘기로 들어가 보자.



현대인의 세계 감정 - 사라짐의 미학

회화는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때 세계와 재현은 ‘닮음’을 통해 굳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재현의 원리는 파괴되었다. 세계는 해체되고, 재현은 사라진다. 세계는 견고함을 잃고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화폭 위의 형상들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완전히 사라진다. 이게 세계의 상태이고, 예술의 상태다. 여기에서는 세계가 어떻게 사라지고, 재현이 어떻게 해체되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시뮬라크르Ⅰ

플라톤 : 빌어먹을 민주주의. 그러니 저마다 정치하겠다고 나서는 자들 중에 진짜와 가짜를 가려야 하지 않겠나?아리스 : 그걸 가리는 기준이라도 있나요?

플라톤 : 물론 있지. 자네는 내 이데아론에 대해 잘 알고 있겠지?

아리스 : 그럼요. 참된 존재는 저 하늘의 이데아에 있고, 우리가 이 땅에서 보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플라톤 : 그렇지. 거기에 거울에 비친 사물의 영상이나, 대상을 그린 그림을 더하기로 하세.아리스 : 아, 그것들은 복제의 복제이겠네요? 그럼 이 세상은 원상(이데아) - 복제(현실) - 복제의 복제(그림)라는 세 층으로 나누어지는 셈인가요?플라톤 : 이 복제의 복제를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부르기로 하세. 결국 문제는 진짜와 가짜, 복제와 시뮬라르크를 가르는 데에 있겠지.

사라진 성당

파리 근교 지베르니. 거기에 유명한 ‘모네의 정원’이 있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는 여기서 만년을 보냈다. 별장 안은 온통 그가 수집한 일본판화로 뒤덮여 있다. 밖으로 나가면 마당에 꽃밭이 있고, 그 뒤로 일본식 다리가 걸린 연못이 펼쳐진다. 버드나무가 늘어진 물 위로 머리를 내민 줄기마다 연꽃이 매달려 있다. 모네가 정말 연꽃을 그렸을까? 그 꽃을 그린 게 모네냐고 묻는 게 아니다. 모네가 그린 게 연꽃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뭘 의심한단 말인가. 저기 앞에 <수련> 그림이 있고, 그 그림 안에 분명히 모네의 사인이 들어 있지 않은가? 아니, 그 꽃을 그린 게 모네냐고 묻는 게 아니다. 모네가 그린 게 연꽃이냐고 묻는 거다. 자, 그림으로 바짝 다가서서 <수련>을 들여다 보라. 저게 어디 연꽃의 모양인가? 거친 터치로 벽에 발라진 두꺼운 물감 자국에 불과하지 않은가. 거기에 꽃이 어디 있는가? 무슨 소리. 꽃은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물러서 보라. 무정형의 물감 덩어리들 속에 서서히 꽃들의 형상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가. 연못의 여기 저기에 피어 있는 저것들은 분명 연꽃이 아닌가? 님프처럼 수줍어서일까? 가까이 다가서면 꽃은 거친 물감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보라. 모네가 남긴 것은 오직 거친 터치의 흔적을 머금은 물감 덩어리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럼 우리 눈에 비치는 수련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수련의 허깨비, 캔버스의 사막 위에 아른아른 증발하는 수련의 신기루일 뿐이다. 모네는 수련을 그리지 않았다. 수련의 형상은 화가의 붓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서 완성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럼 모네는 무엇을 그렸을까? 그가 그린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꽃이 아니다. 꽃의 시각적 인상이다. 모네는 화면 위에 현실에 존재하는 꽃을 복제한 게 아니다. 우리의 눈에 복제된 꽃의 인상을 또다시 복제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저 연꽃은 반영의 반영, 복제의 복제인 셈이다.

검은 사각형 : 과거의 예술이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면, 현대 예술은 세계를 빨아들여 블랙홀이 되려는 모양이다. 1915년에 열린 어느 전시회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는 이제까지 없었던 하나의 극단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화면 위에서 모든 것을 추방하고, 하얀 바탕 위에 달랑 검은 사각형 하나만 그려 넣었던 것이다. 세잔 이후에 시작된 구상의 사라짐이 여기서 더 위로 올라갈 수가 없는 하나의 절대적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게 화면에서 가시적 대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비대상적 세계’, 즉 아무 대상도 없는 세계를 지향하는 자신의 예술적 실천을 그는 ‘절대주의(suprematisme)'라 불렀다. 절대주의는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처럼 상을 통해 모든 대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근원적 형태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또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처럼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형과 색의 미적 유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회화에서 정신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레비치가 ’절대주의적 형태‘라 부른 사각형, 동그라미, 십자가는 복잡한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얻어낸 시각적 추상이 아니며, 형과 색의 자유로운 미적 구성과도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저 무거운 검은 침묵으로써 그저 대상이 사라진 근원적인 무(無)의 상태를 가리킬 뿐이다.

매체와 숭고 :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와 그림이다. 모네는 세계의 동일성(identity)을 물 그림자 같은 환영들(differences)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했다. 말레비치는 세계의 그림을, 말하자면 캔버스 위에서 대상들의 재현을 사라지게 했다. 세계 자체는 물 그림자들 같은 환영들 속으로 해체되고, 세계의 재현은 검은 사각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자연도 사라지고 모방도 사라진다. 세계도 사라지고 거울도 사라진다. 현실도 사라지고 재현도 사라진다. 이로써 자연의 모방, 세계의 거울, 현실의 재현이라는 고전 회화의 원리는 무너진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시뮬라크르들, 물 그림자처럼 흐늘거리는 세계의 영상들, 견고한 세계가 아닌 세계의 유령 같은 환영들이다. 그뿐인가? 아니, 남은 게 하나 더 있다. 모든 형상이 사라진 흑과 백의 텅 빈 절대주의적 캔버스, 세상의 모든 대상을 집어삼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우주의 특이점. 존재자가 튀어나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존재의 근원. 재미있게도 말레비치의 작품은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맞붙은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이 현대인의 세계 감정이다. 19세기에 카메라가 발명됨으로써 세계를 재현할 의무를 사진이 떠맡게 된다. 재현의 과제를 사진에게 넘겨준 회화는 이제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재현할 의무에서 벗어나,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형상을 지우고 보이지 않는 근원적 ‘존재’를 현시(presentation)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클레(Paul Klee, 1879~1940)의 말대로 “현대 회화는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근대에서 탈근대로 - 모던 타임스

세계는 무너졌다. 적어도 19세기까지 사람들이 세계라고 믿었던 것은 무너져내려 파편으로 흩어졌다. 낡은 세계의 무덤 위에서 이제 ‘현대’라 부르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어떤 이는 오래된 세계의 해체를 한탄하며, 무너진 세계를 다시 복원하자고 말한다. 어떤 이는 폐허 위에서 무너진 세계의 파편들을 새로이 조합해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할 즐거운 궁리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낡은 세계의 무덤에서 탄생한 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 또 다른 파국의 징조를 본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창조의 언어

오늘날의 언어는 ‘자의적인 기호’, 다시 말해 인간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전달 매체일 뿐이다. 하지만 옛날의 언어는 달랐다. 그것은 신비한 힘을 갖고 있어, 죽은 것에 생명을 주고, 없는 것을 있게 할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라. 야훼는 오직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지 않으셨던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장 3절) <창세기>는 거대한 책을 쓰는 과정이다. ”빛이 있으라“ 먼저 불을 켜고, 하늘과 땅을 갈라 책을 펼친다. 이어 그 페이지 위에 세계의 저자가 날짐승, 들짐승, 물짐승, 그리고 산천초목을 적어 넣는다. 얼마나 멋진가? 신의 피조물은 원래 ‘말’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본디 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글자가 우리의 입에서 나와 물질로 응결된 음성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신의 입에서 밖으로 나와 물질로 기록된 ‘말’이다.

아담의 언어 : 세계가 말씀으로 씌어진 책이라면, 독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책을 쓰고 나서 신은 독자를 만드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그림책 속의 사물을 짚어가며 아이에게 이름을 말하게 하듯이, 신은 흙으로 빚어 만든 자식에게 당신이 지은 책 속의 사물들을 명명하게 하셨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세기> 2장 19절) 이로써 인간의 언어가 탄생한다.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Namensprache)다. 사물은 목소리가 없기에, 인간이 대신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는 바로 이 체험을 가리킨다. 소리 없는 사물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이들은 신의 창조를 돕고 있는 것이다. 이름하는 언어, 아담의 언어는 원래 이런 걸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었다.

바벨의 언어 : 바벨탑 이전의 언어는 우리 것과 달라, 그 낱말만 들으면 사물의 본질이 저절로 떠올랐다. 애초에 이름을 아무렇게나 붙이지 않고 음성에 사물의 본질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벨탑을 쌓은 죄로 인간은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언어는 더 이상 이름하지 못하고, 자의적인 기호가 되어 버린다. ‘자의적’이라는 말은 ‘제멋대로’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바벨의 언어는 제멋대로 붙인 딱지이기에, 그 음성을 들어도 그 안에 사물의 본질이 떠오르지 않는다. 제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때 아무렇게나 지어주는가? 애써 그 이름 안에 ‘아이가 커서 그렇게 되었으면’하고 바라는 모습을 담으려 애쓰지 않는가. 옛날에 인간들은 사물에 이름을 붙일 때 마치 제 자식에게 이름을 주듯이 그렇게 붙였다. 하지만 바벨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이름은 한갓 자의적 기호가 된다. 심지어 인간의 이름마저도. 기억하는가? 학창 시절 우리는 가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37번, 나와!” 아직도 이 사회는 내 정체성을 주민등록번호로 인식한다.

모방에서 미메시스로 : 아담의 언어를 되찾을 수는 없을까? 놀랍게도 이 시대에도 축복받은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어디에? 예술 속에. 정말인지 모르겠지만,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인슈타인은 연설 대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고 한다. “음악은 만국의 공용어!”라면서. 실제로 우리는 프랑스어를 몰라도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그림을 이해하고, 독일어를 몰라도 클레의 그림을 이해하고, 러시아어를 몰라도 칸딘스키의 그림을 이해한다. 그 안에 아담의 언어가 들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티스, 클레, 칸딘스키의 작품이 어디 구체적인 대상을 모방하고 있던가?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은 보편적으로 이해가 된다. 왜? 미메시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물의 외양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아담이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음성으로 옮기듯이, 그들은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언어적 본질을 듣고, 그것을 회화의 언어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아담의 언어에서 낱말과 사물이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여 있듯이, 이들의 작품에서 형상은 사물과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사성으로 묶인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이에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이 말씀이라는 것에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 유전자 코드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바로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사용한 기호다. 그 사이 인간의 방자함은 하늘을 찔러, 신이 쓰신 말씀을 제멋대로 고쳐 쓰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벌써 유전자를 조작하여 복제 양을 만들고, 복제 소를 만들고, 이제는 인간을 복제하려 한다. 말씀으로 창조하는 것은 신의 일,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을 이름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신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자연을 제멋대로 뜯어고쳐 쓰라는 뜻이 아니었을 게다.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음성으로 번역하던 아담처럼, 자연을 신이 창조하신 말씀 그대로 보살피라는 뜻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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