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정신
고홍명 지음 | 예담차이나
중국 언어중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중국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중국어란 도대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중국에는 두 가지 언어(여기서는 방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가 존재한다. 즉 구어(백화)와 문어(문언)다. 중국인이 이렇듯 두 가지로 구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중국어 구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어 구어는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여섯 가지 언어와 비교해 볼 때, 말레이어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쉬운 언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중국어에는 격과 시제가 없고, 규칙과 불규칙 동사가 없다. 즉 문법이 없고, 어떠한 규칙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중국어 구어가 너무 간단하고 규칙과 문법이 없어, 오히려 배우기가 힘들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구어체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 즉 어린이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박식한 언어학자와 한학자들이 중국어가 이처럼 어렵다고 크게 떠벌리고 있을 때, 유럽의 아이들은 오히려 실용적인 중국어를 쉽게 배운다고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제 문어(文語)를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의 문어는 과연 어려운가? 나의 대답은 어렵기도 하고 어렵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문어가 아주 우아한 언어이자 고급 고전 중국어라 할지라도 어렵지 않은 까닭은, 구어체와 마찬가지로 간결하기 때문이다. 당시(唐詩)의 원문과 서툰 영역시를 비교해 보면, 중국어의 단어와 스타일은 아주 소박하며 의미는 아주 간결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간단 명료한 단어, 형식, 의미에 아주 심오한 사상과 심층적 정감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시적 의미와 운율의 맛구어체이거나 문어체이거나, 중국어는 어떤 측면에서는 아주 어려운 언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이유가 복잡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어는 언어 자체의 심오함 때문에 어렵고, 심층적인 정감을 간결한 어투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중국어가 배우기 힘들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나는 중국어가 영혼의 언어이자 시적 언어이므로 시적 의미와 운율의 맛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대 중국인이 쓴 산문체의 짧은 편지일지라도 마치 운율을 가진 시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문어, 즉 고도로 우아한 중국어를 이해하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천성(영혼과 두뇌), 영혼, 지혜를 동시에 개발해야만 한다.첫 번째 문제를 보자. 중국에 대한 유럽인의 지식에 변화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언어적 지식을 장악하는 데 곤란함이 사라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자일즈 박사는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언어를 배울 수 있지만, 중국 방언만은 배우기 어려운 언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중국 방언이 어렵다고 보편적으로 여기게 된 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역사 소설로 대치되었다."라고 말했다. 분명히 구어뿐만 아니라 문어도 이와 마찬가지다. 영국 영사관에서 번역 일을 하는 영국 학생이 북경에서 2년 동안 거주하면서 영사관에서 일을 도우면, 전보의 의미를 대강은 읽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중국 지식에 어느 정도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흔쾌히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보다 더 과장된 어휘는 매우 회의적이다.마지막으로 중국인의 정신 혹은 진정한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진정한 중국인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어른의 이성을 가진 삶을 사는 사람이며, 그들의 정신은 영혼과 이성의 완벽한 결합체로 나타난다. 만약 중국의 예술과 문학 작품을 연구한다면, 영혼과 이성의 조화가 중국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의 정신이라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이 과학, 철학, 신학 혹은 어떠한 '주의(主義)'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인의 정신은 대뇌 활동의 산물이 결코 아니며, 영혼의 상태이자 지향이기에 속기술이나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것처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심경(心境), 시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천상의 은혜를 입은 듯한 평온하고 고요한 심경이다. 사물의 이미지에 내재한 생명을 통찰하는 침착함과 평온함, 즉 천상의 은혜를 입은 심경은 상상력이 풍부한 이성이자 중국인의 정신인 것이다.중국 문학 속 철학의 깊이 간과두 번째 시기는 권위 있는 두 권의 저서 출간을 기점으로 한다. 하나는 토마스 웨이드(Thomas Wade 경의 『자이집(自邇集)』이고, 또 하나는 레게 박사의 『중국 경전(中國經典)』 번역서다. 북경관화(Mandarin)를 하는 수준의 중국 지식을 가진 서양인들은 첫 번째 책에 대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은 기존에 출판된 중국 언어에 관한 영문 서적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다. 이 책은 시대적 요청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며 언젠가는 나올 책이었다. 중국 경전은 분명 번역되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시대의 요구이다. 레게 박사가 중국 경전을 번역한 결과로, 놀라운 규모의 번역서들이 출판되었다. 단순히 양으로만 보더라도 분명 놀랍고 경이적인 성과다. 그 수많은 번역자들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렇지만 번역이 그다지 만족스러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인정해야 한다. 벨포어(Frederic Henry Balfour) 선생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전문용어들이 제멋대로 번역되었음을 공정하게 비판하고 있다. 레게 박사의 용어들은 어색하고 조잡하며 적당치 않아 보인다. 어떤 부분은 언어 습관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내용적인 측면까지 경솔한 의견을 개진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광동의 파베르 목사의 판단을 빌리는 것이 좋을 듯하다. 파베르 목사는 일찍이 "맹자에 관한 레게 박사의 번역은 맹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의 부족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만약 레게 박사가 공자와 그 학파의 가르침을 유기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작품을 읽거나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레게 박사는 주석뿐만 아니라 주제의 논술이나 단어, 구문도 매끄럽지 못했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완전한 철학으로 파악하여 표현하지 못했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레게 박사의 경전 가치에 대한 평론은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며, 새로운 번역자들이 계속 나타날 것임이 분명하다. 웨이드와 레게의 서적이 나타난 이후 중국에 관련한 저작들이 잇달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 학술적 가치가 있는 책이 몇 권 있기는 하지만, 중국학의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서적은 없다.중국학 Ⅱ중국 문학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한 독일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 문명은 그리스와 로마, 팔레스타인 문명의 기초 하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인도인, 페르시아인, 유럽인은 모두 아리안 인종이므로 친속 관계라 할 수 있다. 중세에 아랍인들은 유럽 문명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 관계는 지금까지 소실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국 문명의 기원과 발전, 존재의 기초는 유럽 문화와 아무 상관도 없다. 따라서 중국 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이 불편을 감수하고 극복해야만 기본 관념과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중국 민족의 관념과 개념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럽 언어에서 대응물을 찾아야만 한다. 만약 대응물이 유럽 언어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관념과 개념들을 분해하여 보편적 인성의 어떤 면에 속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국 경전에 끊임없이 나오는 인(仁), 의(義), 예(禮)라는 개념을 'benevolence, justice, propriety'라고 일반적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영어 단어의 의미를 조사해 보면, 번역어의 의미가 본의(本意)와 상당히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번역어는 중국 문자의 모든 의미를 완전하게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humanity가 인(仁)의 의미에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humanity는 영어에서의 일반적 사용법과 달리 이해되어야 한다. 몇몇 대담한 번역자는『성경』의 love와 righteousness를 인(仁)으로 번역한다. 번역의 정확도란 '단어의 함의를 전달하고 언어 습관에 부합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언어로의 변환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가 전달하는 의미를 파악하고 보편적 인성으로 해석하여 구별해 보면, 전체적인 함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민족 역사 연구를 통한 민족 연구의 체계화민족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 개념으로 무장한 연구자만이 연구 목표를 민족의 사회관계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원칙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의 사회제도나 예절은 버섯처럼 하루 저녁에 자라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나야만 한다. 따라서 민족역사 연구가 가장 필요하다. 공자는 일찍이 제자에게 "예의 사용은 태연자약함을 귀하게 여기니, 선왕(先王)의 도리 중에 좋은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했다. 경서에는 "예란 공경함이다(禮者, 敬也)."라고 말한다. 지금껏 보았듯이, 민족의 예의에 대한 평가는 마땅히 민족이 지닌 도덕 원칙의 지식 기반 위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의 마지막 단계인 국가, 정부, 정치제도의 연구도 그들의 철학적 원리와 역사 지식의 이해를 바탕으로 행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외국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경전인『대학(大學)』의 단락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대학』에서는 "천하에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한다면, 먼저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려 한다면, 먼저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하며, 집안을 다스리려 한다면, 먼
저 자신을 잘 닦아야 한다."라고 말한다.집단숭배 종교 또는 전쟁과 전쟁의 출구
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1914년 8월 유럽 민중 사이에 파란을 일으킨 무서운 기계(군국주의)가 러시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유럽의 민중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즉 유럽의 민중에게 만연된 군중 집단적 공포 때문에 전쟁 상황의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의 사고가 제어되고 마비되었다. 그들은 무력해졌고 끝내 전쟁이 터진 것이다.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이 국민을 전쟁에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이기심, 비겁함, 연약함, 최후의 전환점인 놀랄 만한 공포로 인하여 전쟁이 야기된 것이다. 그들이 가련하고 무기력한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을 전쟁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나는 유럽의 비참한 상황이 전쟁 상황의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의 불쌍한 무력함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현재 유럽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갈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즉 전쟁 상태의 국가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을 무기력한 상태에서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유럽의 비참하고 희망 없는 국면은, 사실상 평화를 바라지만 평화를 만들 용기와 역량을 지닌 사람이 없기 대문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을 무기력한 상태에서 구출해야 한다.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 권력으로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유일한 지름길은 전쟁 상황의 유럽 민중들을 위해 '자유대헌장'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장을 제정하는 것이리라. 새로운 헌장은 중국의 우량시민 종교에서 중국인에게 부여한 '충성대헌장(忠誠大憲章)' 같은 것이다.진정한 평화는 채찍이 아닌 '우량시민의식'에서 발아한다과거 유럽의 통치자들이 국내 질서와 유럽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통치자, 군인, 외교관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숭배하지 않고, 우매한 집단인 국내 민중들을 숭배하고 경외하는 지경이 되었다. 대영제국의 우매한 집단숭배, 중국에 거주하는 영국인과 기타 외국인들의 우매한 집단숭배는 유럽과 미국에서 가져온 우매한 집단숭배 종교다. 이것은 중국의 혁명을 야기하고 공화국의 악몽을 가져왔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귀중한 문명적 자산인 진정한 중국인을 파멸시킬 위협이 되었다. 대영제국의 우매한 집단숭배, 즉 유럽과 미국의 우매한 집단숭배 종교가 즉시 타도되지 않으면, 유럽과 미국의 문명이 파멸될 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명도 파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 문명을 위협하는 우매한 집단숭배 종교를 무너뜨리려 한다.
'충성의 교리(Religion of Loyalty)'는 중국인의 것으로 중국의 '우량시민 종교'에 있는 '충성대헌장'과 같은 성례(聖禮)다. 중국인의 '우량시민 종교'는 경서(經書)에서 "도를 어겨가면서 국민의 명예를 얻으려 나아가지 않고, 백성들의 바람을 거슬러 자신의 욕망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도를 어기면서 국민의 명예를 얻으려 나아감'이 우매한 집단숭배이고, '백성들의 바람을 거슬러 자신의 욕망에 따름'이 강권숭배다. '충성대헌장'을 지닌 '우량시민 종교'는 전쟁의 발생 원인이 되는 우매한 집단 숭배와 강권숭배를 없애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겪은 쥬베르트(Joubert)는 자유주의를 위한 외침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위해 소리지르자, 자유인을 위해 고함지르지 말고, 도덕적 자유는 지극히 중요한 자유 가운데 하나로, 이런 자유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된다.그러나 기타 자유는 도덕에 부합될 때만 좋고 유익한 것이다. 복종 그 자체는 자유보다 낫다. 왜냐하면 하나는 서열을 암시하고, 또 하나는 고립 가운데의 만족을 의미한다. 하나는 화음(和音)을 의미하고 또 하나는 단음(單音)을 의미한다. 하나는 전체(全體)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다."서론 - 우량시민 종교
총으로 총을 지배할 수 없다모든 문명은 자연에 대한 정복에서부터 시작됐다. 즉 문명은 인류가 자연의 거대한 물리적 힘에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해 이를 정복하고 지배함으로써 생성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연적인 힘 이외에도 그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욕망이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힘이 인류에게 끼칠 수 있는 피해는 인류의 욕망에 의해 야기되는 피해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통제하지 않는다면, 문명의 존재뿐 아니라 인류의 생존조차도 불가능할 것은 분명하다. 인류는 사회형성 초기 단계에서 발생된 인간의 욕망을 물리적인 힘으로 억누르고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물리적인 힘에 통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명의 진보에 따라 인류는 욕망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물리적인 힘보다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인 역량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힘이다. 과거 유럽인들에게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도덕적인 힘은 바로 기독교였다. 그렇지만 피비린내 나는 지금의 전쟁은 그것을 훨씬 뛰어 넘어버렸다. 이는 도덕적 힘을 지닌 기독교가 더 이상 효력이 없음을 드러내는 듯했다. 사실 오늘날 유럽의 군국주의는 도덕적 역량의 효과가 결핍되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는 전쟁을 야기하고, 전쟁은 파괴와 황폐를 의미한다. 이렇듯 유럽인은 진퇴양난에 빠져 핍박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벗어날 방법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미국인 에머슨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령 유명한 인물들 대다수가 구식 소총의 숭배자일지라도 나는 용렬하고 비속한 활강총(구식 소총)의 숭배에 대한 파산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바로 하느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총을 다른 총으로 바꿀 수 없음을 뜻한다. 오직 사랑과 정의의 법칙만이 깨끗한 혁명을 이끌 수 있다."
현재 유럽인이 진정 군국주의를 무너뜨리려 한다면, 그것을 이루는 유일한 행동 방식은 에머슨이 말한 대로 총을 다른 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법칙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이는 도덕적인 힘에 호소하는 것이다. 효과적인 도덕적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군국주의는 더 이상 필요없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