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역사
에크하르트 헬무트 외 지음 | 시아출판사
혁명의 역사
페터 벤데 엮음/권세훈 옮김
시아출판사/2004년 5월/528쪽/25,000원
영국 혁명(1640~1660년)
‘폭동’인가, ‘혁명’ 또는 ‘내전’인가? 1640년부터 1660년까지 왕정의 패배와 군주의 처형을 일부에서는 영국 역사의 전환점으로 이해하고 그때부터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성을 단절시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찰스 1세와 의회․ 신교도간의 갈등과 대립 : 전통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영국 왕실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국왕이 국가의 사회 엘리트 계층 ― 상층 귀족 및 하급 귀족과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 시민 계급 ― 의 합의와 협력에 의존해 통치한 사실에 기인한다. 찰스 1세가 즉위한 이래 의회와 왕권 사이는 공공연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근대 영국 헌법사에서 가장 위대한 문서인 ‘권리청원’은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은 세금 부과, 국왕의 의사에 따른 체포, 전시법(戰時法)의 적용 등이 부당한 것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국왕은 권리청원에 서명했지만 실제 정책에서는 존중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듬해 갈등이 재연되어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20년 후인 1649년 의회는 “이 나라에서 국왕이라는 직위는 불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국가 주권을 둘러싸고 혁명이 발생한 결정적 요인은 종교가 수행한 역할 때문이었다. 영국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분리된 뒤 그 수장을 국왕이 맡는 신교적 국가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공식적으로 칼뱅주의(Calvinism)에 속했으나 구교도와 급진적인 신교도들을 하나의 국가적 교회 안에 통합시키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교회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 칼뱅주의자들이 보기에,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은 영국 국교회를 가톨릭 쪽에 가깝게 몰아가는 것이었다. 정치적 지배 계층과 왕권 사이의 협력이 깨진 것은, 자신의 현실적 권력 기반을 과대 평가한 국왕의 비타협적인 정치의 결과였다.
헨리 8세 이래로 영국 왕가는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내세웠으며, 제임스 1세의 즉위로 스코틀랜드도 영국과 ‘동군연합’(同君聯合: 동일 군주 아래 두 개 이상의 국가가 결합한 것)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아일랜드는 가톨릭을 고수했지만, 스코틀랜드에는 광범위한 민중 운동을 통해 급진적인 신교가 침투했다.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 영역에 심각한 종교 대립 양상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내전과 혁명에 단초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 봉기는 찰스 1세에게 이중의 패배를 안겨주었다. 국왕이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1629년에 해산해버린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일밖에 없었다. 우선 자신의 군사 행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얻기 위해서였고, 그 시도가 실패한 후에는 전쟁의 승자가 부과한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영국 지도층은 국왕의 요청을 거부했다. 스코틀랜드의 항거를 서곡으로 전개된 영국 혁명의 제1막은 1640년부터 1642년까지 찰스 1세에게 강요된 개혁이었다. 이에 국왕은 하원에 쳐들어가 정치적 반대파 지도자들을 직접 체포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행동은 치명적인 헌법 침해 행위였다. 이제 양측은 무력 대결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1642년 8월 22일 찰스 1세가 노팅엄에서 국왕의 깃발을 세워놓고 추종자들을 불러모은 것을 계기로 내전이 일어났다.
지배 계급 내부 권력 투쟁의 한계 : 영국 혁명은 ‘시민 혁명’이라는 의미의 사회 변혁은 아니다. 내전은 정치적 국민 또는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투쟁이지만, 두 파벌(왕당파와 의회파) 간 대립의 결과는 정치 혁명이라는 구성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어떤 종류의 타협도 거부한 국왕과는 결국 지속적 평화를 도모할 수 없게 되어, 국왕의 처형과 더불어 군주제의 철폐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저항은 결국 정치 혁명으로 변화되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가적 행위의 전면과 배후에서 작용하고, 영국 혁명의 본질을 형성한 것은 종교적․정치적 차원의 급진주의였다.
영국 혁명이 ‘청교도혁명’이라 불리는 이유 : 영국 혁명이 ‘청교도혁명’이라고 불린다면, 그 이유는 ‘아래로부터 일어난’ 급진적인 종교적 민중 운동으로서 종교 개혁이 영국 혁명의 범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1650년대에 퀘이커(Quakers) 교도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모든 차이를 없앤 상태에서 자발적 연합체로서 독립적인 교회들이 형성되는 급진적 추세를 구체화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한 요구는 불가피한 결말이었으며, 크롬웰의 통치 하에서 포괄적 관용이 실현된 것은 종교적 혁명의 완성에 해당된다. 영국의 새로운 의회주의 공화정은 국민의 문서적 합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수평파(청교도혁명 당시 의회파 중 급진파를 일컫는 말로 평등파라고도 한다. 소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한 정치적 당파다)는 자신들의 헌법 초안을 ‘인민협정’이라고 명명했다. 수평파는 1646년에서부터 1649년까지의 혼란기에 비중 있는 정치 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치 혁명의 완성을 위한 구상은 실현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종래의 국가 헌법과 교회 질서뿐만 아니라 사유 재산의 불가침성, 결혼의 신성함, 그리고 심지어 신의 존재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공화정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고 왕정 복고의 길로 돌아서게 하는 데 기여했다. 1660년 군주제가 다시 부활되었음에도 의회의 위상은 높아졌다. 영국혁명은 명예혁명에서 마침내 생산적인 헌법 절충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영국 혁명은 의회 제도의 확립이라는 영국의 정치 발전 과정의 시작에 해당되며, 이 의회 제도는 영국을 정치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선구자 또는 모범으로 만들었다.
미국 혁명(1763~1787년)
미국 독립혁명의 시작을 명예혁명(1688~89년)에서 보는 관점은 식민지 헌법 구조의 발전과 정치 문화의 문제점들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1748년~49년(헬리팩스의 백작인 몬태규 던크가 새로운 농장을 가진 상무소장으로 임명되면서 개혁주의자들이 제국 정치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의 의미를 강조하는 관점은 제국의 개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7년 전쟁(1756~63년. 슐레지엔 영유를 둘러싸고 유럽 대국들이 둘로 갈라져 싸운 전쟁으로 영국은 대식민제국의 지위를 확립한다)의 종식에서 미국의 혁명적 사태가 전개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점차 증대하는 영국 민족주의로 인해 미국이 주변화되어가는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 독자적인 미국의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모두 미국 독립혁명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689년에서 1763년에 이르는 시기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1763년 이후 식민지 이주민들의 정치적 행태뿐만 아니라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비판을 이해할 수 없다.
영국 국왕과 결별 선언 : 중요한 사건은 1763년에 일어난 ‘폰티악(Pontiac)의 반란’이었다. 프랑스가 파리 조약에서 북아메리카 영토를 영국에게 할양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시시피강과 앨러게이니 산맥 사이의 지역에 거주하던 종족들이 영국 이주민들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추방했다. 영국 정부는 미국 서부에 영국군을 주둔시킬 비용을 감당할 방도를 강구해야 했다. 그 해법은 ‘인지세법(1765년 영국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강제적으로 실시한 최초의 과세법으로, 각종 증서에서부터 인쇄물에 인지를 붙일 것을 요구했다)’이었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력수단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식민지 이주민들은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모든 식민지들을 대변하는 대표 회의가 생겨났다. 1765년 10월, 9개 식민지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뉴욕에서 개최된 ‘인지세법 회의’는 ‘대륙 회의’의 모체가 되었다. 제1차 대륙 회의는 영국 법령들의 철회를 요구했고, 영국에 대한 전면적인 통상금지 조치를 취했다. 제2차 대륙 회의에서는 버지니아 출신의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식민지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제퍼슨이 구상한 독립선언문은 식민지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최후의 표현이었으며, 군주인 영국 국왕에 대해 신민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국민은 스스로를 주권을 가진 국가형태인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선언했다.
여기에서 두 가지 과제가 대두했다. 영국에 맞서 독립을 이루어내야 하는 일과 이전에 식민지였다가 서로 연합한 공동체 자체를 규정하기 위한 헌법을 마련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선거권을 광범위하게 부여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의 대중적 독재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휘그당의 보수파와는 달리 평등의 원칙에 경도된 휘그당의 급진파는 영국 국왕과 총독들을 염두에 두면서,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을 가능하면 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기관에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이 견해는 펜실바니아 헌법과 ‘연합 헌장’(1777년 11월 17일 대륙 회의에서 의결되어 1781년 3월 1일 모든 개별 주들의 비준을 거친 후 공식적으로 선포된 미국 최초의 헌법)에서 가장 순수한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인간의 영원 불변한 기본권을 명징한 권리 규범으로 헌법에 명문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예들도 기본권을 내세움으로써 공동체의 사회적 안녕과 질서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조성되었다. 버지니아 지방 의회가 버지니아의 기본권 선언을 논의할 때, 버지니아 주지사가 된 랜돌프는 이렇게 말하였다. “노예들은 버지니아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며 따라서 기본권을 내세울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의 견해는 실제로 관철되었다.
1776년 6월 12일 버지니아 ‘권리장전’이 의결되면서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권의 규범이 국가 조직에 의해서 인준되었다. 이 법과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은 오늘날까지도 미합중국의 기본권 규정을 특징짓는 연방 헌법에 대한 부속 조항의 틀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강대국들과 벌인 전쟁을 보다 강력하게 수행하기 위해 이전 식민지와의 전쟁을 가능하면 신속하게 종결짓기를 바라는 영국 내 분위기의 급격한 반전에 힘입어, 1783년 9월 3일 영국과 연방 국가들 사이의 평화 조약이 정식 조인되었다. 1787년 연방 헌법의 승인에서 보듯이 기본권과 헌법의 성문화로부터 시작된 역동적 발전 과정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미국 사회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 혁명의 ‘혁명적 성격’은 기본권과 헌법의 쟁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체성 규정 : 아메리카 합중국의 공식적인 정책은 미국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국민에 대한 고별 연설에서 말한 경고를 지키면서 이루어졌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과 원만한 교역 관계를 유지하되, ‘가능한 한 정치적 관계를 덜 맺는 것’이 미국 대외 정책의 근본 원칙들 가운데 하나였다. 외국의 모든 영향은 신생 공화국의 도덕을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주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성과를 군주제 국가들에 대응하는 사례로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른 국가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시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작용하였다.
프랑스 혁명(1789~1799)
‘고전적 해석’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주로 사회적 변혁, 즉 ‘민중’과 연대한 자본주의적 시민 계급이 반동적 봉건 귀족에 대해 거둔 승리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로 이러한 맑스주의적이고 자코뱅주의적인 해석은 점차 퇴색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적 식민 계급의 출현을 가져온 투쟁이 아니라, 근대적이고 처음으로 국민 대중을 연관시킨 민주주의적 정치 의식의 발로로 평가된다.
혁명의 정치적 발전 과정 : 프랑스 혁명은 1789년 여름이 아니라 그보다 2년 반 전에 시작되었다. 베르사유에서는 명사회(名士會: 고위 성직자, 대귀족, 소수의 부르주아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가 소집되어 루이 16세 정부의 개혁 프로그램을 논의했다. 이 개혁은 성직자와 귀족과 같은 특권 계층이 국가 부담을 분담하면서 재정 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사회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세금에 관한 사항은 삼부회(성직자, 귀족, 제3계급 등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옛 대의제로 1789년에 국민 의회로 바뀌었다)를 소집해 도입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요구를 내세웠다. 정부가 반항적인 의회를 무력화시키려고 하자 갈등은 국가 위기로 치달았다. 그 와중에서 입헌제 요구가 터져 나왔다. 정부는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세력에 항복하여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1789년 6월 17일에서 20일 사이 하급 성직자들과 연대를 이루게 된 제3계급 출신의 의원들은 국민 의회를 선포하고, 프랑스를 위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서했다. 루이 16세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1789년 7월 11일 파리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하층민들의 봉기는 국왕과 반동적 주변 세력이 계획했음직한 친위 군사 쿠데타로부터 국민 의회를 구원했다. 국민 의회는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을 위한 논의는 1791년까지 이어졌는데, 그 사이 국가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1789년 10월 민중 반란으로 인해 베르사유에서 파리 중심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던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가 입안한 헌법에 서약할 것을 강요받았는데, 이 헌법으로 프랑스에 입헌군제가 도입됐다. 프랑스의 신질서는 개인의 정치적․경제적 자유에 중점을 둔 합리적 사고 방식에 근거하고 있었다. 1791년의 헌법은 채 1년도 유지되지 못했다. 헌법 제정 국민 의회 내에 헌법 신봉자들에 맞선 공화주의 경향의 강력한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그 중심은 파리의 ‘자코뱅 클럽(국민 의회와 원외의 혁명 엘리트가 속한 가장 중요한 토론 포럼)’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그룹은 지롱드당(프랑스 혁명 당시의 온건 공화파)원들이었다. 그들은 대중적인 클럽을 통해 조직화된 하층 계급 출신의 혁명적 활동가 단체 ‘상퀼로트’(Sansculotte : 프랑스 혁명 당시 하층 계급의 공산당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귀족에 반항해 짧은 바지(Culottes)를 벗고 긴 바지를 입은 데서 유래했다)를 동원했다. 광범위한 결과들 ― 튈르리 습격, 루이 16세의 구금, 남성의 보통 선거권에 기초한 새로운 의회인 ‘국민 공회’ 선거, 공화국 선포 ― 을 낳은 1792년 8월 10일의 ‘제2차 혁명’은, 본질적으로 원외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작품이었다.
1792년 8월부터 1793년 6월까지의 기간은, 국민 공회 내부에서 공화주의 운동의 두 진영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권력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지롱드당원들이 정부의 안정에 근거한 공화국을 중시한 반면,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산악당원들은 국왕의 처형(1793. 1. 21)을 강행했으며, 상퀼로트가 일으킨 무장 군중 시위를 배경으로 지롱드당 계열의 정치 지도자들을 축출하고 독재적 방식으로 통치했다. 혁명가들과 가톨릭 주민들의 갈등은 1793년 3월 프랑스 서부(브르타뉴, 방데 등)에서 유혈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중앙 집권화, 억압, 검열, 국가 차원의 선전, 교회와 종교에 대한 집중 투쟁 등이 1793~94년 프랑스의 정치 환경을 특징지었다. 물론 산악당원들과 상퀼로트 출신의 활동가들 사이에 맺은 동맹 관계는 극도로 균열되어 불안정했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정치’에서 비상조치 이상의 의미를 찾았다. 로베스피에르와 그 추종자들은 테르미도르(혁명력 11월) 9일(1794. 7. 27) 국민 공회 다수파에 의해 실각했다. 그러나 안정된 입헌 정부를 구축하려던 ‘11월단’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자코뱅 클럽은 폐쇄되고 그 활동가들은 구금되거나 살해되었다. ‘11월단’과 ‘총재 정부’의 자유주의 경제와 중도적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국 건설 계획으로는, 국민의 충분한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1796~97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독자적 비중을 가진 정치적 요소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국내외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799년 11월 새로운 외교적 위기와 예측하기 어려운 국내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총재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제1통령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프랑스 혁명은 계급적 특권 사회의 권력체제를 파괴하고 형식상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의 사회를 세웠다. 하지만 실제적인 사회 구조는 변화시키지 못했다. 또한 왕정의 형태이든 민주공화국의 형태든 간에, 안정된 입헌 질서의 구축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혁명을 통해 촉발된 정치적 동력, 국민의 정식 동의를 통한 정치 권력의 합법화, 시민들의 참정권 요구 등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혁명은 폭발력의 일부를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