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과 궁녀
박영규 지음 | 김영사
환관은 일반적인 남자에 비해 외형상 특이한 면이 여럿 있다. 고환이 없기 때문에 그곳에서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이 없어 수염이 나지 않고, 정자를 생산하지 못하므로 그로 인해 후대를 이을 수 없다. 거세를 당함으로 해서 생기는 또 하나의 외형적인 특징은 살이 많이 찐다는 점이다. 거세한 환관들은 남성 호르몬을 생산하고 배출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영양분이 몸 속에 축적되어 비만 증세를 나타내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모든 환관이 다 뚱뚱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조 말기에 찍힌 환관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몸이 바짝 마른 경우도 많다. 이들은 대개 아주 어린 시절에 거세된 환관일 가능성이 높다. 거세를 아주 어린 시절에 한 사람은 이미 몸의 대사가 거세한 상태에 맞춰서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의 원래 체질대로 체형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관의 또 하나의 특징은 피부가 여성처럼 매우 희고 깨끗하며, 대개 성격도 감정이 예민하고, 눈물이 많으며, 목소리도 여성들처럼 가늘고 톤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환관은 궁녀처럼 왕과 함께 지내며 왕의 수족으로 살고 왕의 총애를 받길 원하지만, 궁녀와는 달리 왕과 육체적으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왕의 총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권력뿐이다. 따라서 환관은 기본적으로 모두 권력지향형일 수밖에 없다. 모든 환관이 권력만을 추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귀와 영화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비참한 처지의 그들이었기에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일반적인 남성에 비해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얻는 환관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노예처럼 일하고 개처럼 주인을 섬겨야 했다. 또한 비록 권력의 맛을 본 환관이라도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불행한 종말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조선 왕들의 환관 정책 및 주요 환관환관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소멸
환관의 기원과 어원환관은 중국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프리카와 유럽 등 수많은 나라의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대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환관 제도를 두었으며, 특히 왕의 절대 권력이 강했던 곳일수록 환관 제도는 더욱 발달하였다. 이들 국가에서 환관을 두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녀들의 정절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환관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자기 이외의 어떤 남자와도 만날 수 없도록 해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궁궐 안의 여자들을 지키고, 시중을 들면서도, 성관계는 맺을 수 없는 환관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자신의 남성을 포기하고 궁궐로 들어가 환관 노릇을 자처하겠는가? 특히 학식과 능력을 갖춘 신하들이 환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왕들은 어떤 사람들을 환관으로 만들었으며, 언제부터 그런 일들이 자행됐을까? 중국 역사에서 문자 상으로 환관의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이다. 갑골문에 따르면 은나라의 초기 환관들은 전쟁 포로들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고자를 만드는 형벌인 궁형이 하나라 이전인 요순 시절에 법으로 정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환관이 오제(五帝)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관이 중국사에 처음 나타난 시기는 적어도 서기전 2500년 이전이라 할 수 있다.
수조 이후로 중국 역사는 환관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환관의 역할이 커진다. 환관을 중국 역사의 단골 조역으로 만든 나라는 유방의 한 왕조였다. 특히 한무제는 숱한 문신들을 환관으로 만드는 바람에 환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환관이 황제를 세우고 환관의 딸이 황후가 되는 등 환관의 영향력이 기이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후로 환관은 중국 황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어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환관 조직이 조정 백관을 지배하는 '환관의 치'를 구가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환관이 존재했을까? 우리 역사에서 환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신라본기」에서 발견된다. 내관이 환관들로만 구성된 시기는 조선시대부터인데, 고려시대의 환관은 내시부의 일부로서만 존재했다. 신라가 중국의 여러 제도를 수입하면서 함께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환관 제도는 전해지는 기록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사고로 남성을 잃은 사람들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환관의 외형과 성향조선은 태조 대에 환관의 조직이 거의 완성되었지만, 환관의 대우는 왕의 성향과 시대 상황에 따라 매우 달랐다. 전체적으로 보면 후대로 갈수록 왕들의 환관에 대한 입장은 다소 강경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당파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당쟁의 양상은 후기로 갈수록 한층 격화되었고, 이 당쟁에 환관이 가담하기도 했다. 특히 경종과 영조의 세력 다툼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는 환관이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를 위협하거나 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환관은 정치적 희생자가 되었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환관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종 대에 이르러서는 외세의 침입으로 왕실의 힘이 극도로 약해져서 결과적으로 환관 제도 자체가 혁파되고 말았다.우리 역사를 풍미한 환관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1품 공신 박한종박한종은 명종 대에 권세를 누렸던 환관으로 1품 벼슬을 받고 공신에 올라 재상도 부럽지 않은 권력을 누렸던 인물이다. 그가 대전 환관인 승전색에 오른 것은 중종 29년인데, 세력을 얻고 공신의 반열에도 오르게 된 것은 명종 즉위 무렵이다. 승전색으로서 인종의 병환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던 그는 인종의 병세를 문정왕후에게 때맞춰 보고한 공으로 명종 즉위와 동시에 공신의 칭호를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권좌에 있는 자들과 친해져 재물을 축적하고자 하는 이들을 조정의 실세들과 연결시켜주면서 뇌물을 받고 재산을 축적하며 세력을 키웠다.
1547년 박한종은 환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벼슬로 종2품에 해당되는 가의대부 벼슬을 받았고, 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의 총애에 힘입어 정식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르고 봉군까지 되었으니 그의 위세가 가히 하늘을 찌를 법했다. 게다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의 자식들을 적자로 만들어 양첩(양민의 신분으로 남의 첩이 된 여자) 자식들과 혼인하게 하는 데 힘을 보태 윤원형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덕분에 그는 궁궐에서 소용되는 쌀과 천 및 잡물을 비롯하여 궁궐 노비를 관장하는 내수사의 제조에 임명되었다. 환관이 내수사의 관원을 지배한 예는 조선 건국 이래 거의 없던 일이었다.
박한종이 내수사를 맡은 뒤부터는 내수사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었으며, 그는 승정원의 고유 업무까지 침범했다. 박한종의 태도가 이렇듯 기고만장해지자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으나 문정왕후는 개의치 않았다. 섭정이 끝나면 영향력이 약화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문정왕후는 조정의 힘보다는 측근들의 힘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고, 이 일을 위한 교량 역할을 할 인물이 필요했으므로 박한종에게 큰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당시 유림들의 입에서는 이런 말들이 흘러나왔다. "재상 진복창, 내시 박한종, 승려 보우 중에 한 사람만 있어도 족히 나라를 해칠 수 있다." 진복창은 사림의 숙청을 주도했던 인물로 윤원형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옥사를 일으켜 제거했던 간악한 인간이었기에 그런 말을 들어도 억울한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또 보우는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고 있던 조선에서 승려로서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국사나 된 듯이 불교 융성을 주도했으니 유림들에겐 원수 같은 존재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복창을 비롯한 윤원형의 측근 세력과 보우를 위시한 불교 세력을 문정왕후에게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박한종이었다. 그들이 직접 문정왕후를 만나기는 어려웠으므로 기실 박한종의 권세는 재상 진복창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1553년 9월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박한종은 궁지에 몰렸다. 당시 박한종은 궁궐 공사를 모두 관장하고 있었는데, 새로 지은 전각에 온돌을 만들면서 박한종이 하인들에게 지나치게 불을 많이 때게 하여 화재가 났다. 당시 하인들은 불이라도 날까봐 방 안을 들여다보려 했으나 박한종이 방을 자물쇠로 잠궈놓고 가버리는 바람에 확인을 하지 못해 불이 났다고 하였다. 이를 기회로 조정 대신들의 거센 추궁을 받은 박한종은 더욱 심한 궁지에 몰렸지만 명종은 파직 이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558년 1월, 박한종의 양자인 박세겸이 어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며 뇌물을 받아 챙기고 있으므로 심문해야 한다는 상소가 있자 명종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의금부에 내려 추고할 것을 윤허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박한종은 그 무렵 세자를 보양한 공에 힘입어 종1품 숭정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환관은 원래 종2품까지로 벼슬을 한정한다는 원칙을 깨뜨리고 종1품을 제수한 것이다. 1563년 박한종이 죽자 명종은 1품 공신이 환관으로 죽었으니 그에 맞는 상례를 치러줄 것을 명했다. 이에 대해 당시 사관은 이렇게 통탄하고 있다. "박한종이 후한 은총을 받아 부귀로 일생을 마쳤으니, 아, 이것이 박한종에게는 다행이지만, 국가에게는 큰 불행이로다."궁녀, 그들은 누구인가?
궁녀의 범주와 명칭 - 여관, 견습나인, 생각시, 정식나인, 상궁, 비자, 방자, 무수리궁녀란 말 그대로 궁궐 안에서 살거나 근무하는 여자들이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궁녀란 '궁중여관(宮中女官)'의 별칭으로 궁중에 머물면서 일정한 지위와 월봉을 받는 왕조시대의 여성 공무원을 통칭하는 말이다.
· 여관 - 흔히 궁녀라고 하면 이들 여관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상궁으로 불리는 여관은 대개 5품과 6품 벼슬을 얻은 여자들이고, 나머지 7품 이하는 나인으로 불리었다. 정상적이라면 대궐에 들어온 지 15년이 되면 나인이 되었고, 나인이 된 지 15년이 되면 상궁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 견습나인 - 여관이 될 궁녀들은 통상 4세에서 16세 사이에 궁궐에 들어와서 15년 정도 교육을 받고 20세를 전후해 관례를 치르고 정식나인이 된다. 견습나인은 정식나인이 되기 이전의 교육생을 지칭하는 말. 견습나인은 상궁들에게 한 명씩 맡겨져 양육되며, 상궁들로부터 궁중예절과 언어, 걸음걸이 등의 일상생활을 배운다. 또 훈민정음을 익힌 뒤에 나인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서적들을 익히고, 궁체를 배운다. 견습나인들은 행동반경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 곳이나 출입할 수 없었고, 이를 어겼을 때에는 심한 벌을 받아야 했다.
· 생각시 - 견습나인들 중 4, 5세의 나이에 궁궐에 들어오는 지밀, 침방, 수방의 아기 나인들을 이른다. 이들은 생머리(실로 된 갯버들 모양의 머리)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생각시라고 부른다.
· 정식나인 - 정식나인은 견습 시절을 끝내고 관례를 올린 나인을 지칭한다. 이때부터 정식으로 여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입궁하는 이들의 나이가 달랐기 때문에 처소마다 입궁 후 15년이 지난 뒤에 하는 것이 원칙인 관례를 올리는 연령이 달랐다. 조선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여자는 관례를 올리지 않지만 특별히 궁녀들이 관례를 올린 것은 이 일이 그들에겐 혼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관례를 올린 정식나인에게는 따로 방이 주어지고, 월봉도 받고 품계도 얻는다. 방은 반드시 다른 처소의 나인과 함께 쓰도록 되어 있다. 나인들끼리는 서로서로 김씨 형님, 무슨 항아(姮娥)님 등으로 부르지만, 법적으로는 모두 고유한 호칭을 받는다. 이때 상궁들도 '박가 아무개' 식으로 성을 붙여 불러준다. 견습나인들은 그들을 '항아님'이라 높여 부른다.
· 상궁 - 정식나인이 된 지 15년이 되면 상궁이 된다. 품계도 꾸준히 올라 대개 6품 벼슬 이상을 받고, 월봉도 많이 오르고, 거처도 따로 마련된다. 심부름하는 각심이와 침모, 나인들도 거느릴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상궁이 되려면 궁중에서 30년을 생활해야 한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궁궐 귀신'이 되어야 상궁에 오르는 것이다. 상궁 중에는 임금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특별상궁이라는 것도 있다.
· 비자 - 궁녀들의 하녀로서 심부름이나 각종 잡역을 맡은 여자들이다. 붙박이로 궁궐에 머무는 궁궐 노비라 할 수 있는데, 관비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차출되었다.
· 방자(房子) - 이들은 상궁의 살림집 가정부다. 방자는 일반 비자와 달리 관비 출신이 아니고, 대개 여관들이 알음알이를 통해 친족이나 본가의 이웃에서 데려온 여자들이다. 부엌일 경험이 풍부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 경력이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독신이어야 했다.
· 무수리 - 수사(水賜)라고도 하는데, 물 긷는 일이 주된 일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궁이에 불 때기나 그 외의 잡다한 막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신분패를 차고 다니면서 궁궐을 출입하며 출퇴근을 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결혼하지 않은 어린 소녀도 있었는데 나이가 차면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었다. 특별한 기준 없이 민간의 아낙 중에서 힘 좋고 일 잘하는 여자를 택했다.실록에 의녀의 이름이 거론된 기사는 대부분 좋지 않은 일과 연루되어 있다. 간통 사건이나 양반들이 의녀를 첩으로 들였다가 생긴 문제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매우 드물지만 의술로 이름을 떨쳐 실록에 이름을 남긴 의녀들도 있다.
조선의 의녀 중에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는 인물은 중종 대의 대장금이다. 대장금은 의녀로서는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 역할을 했고, 중종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을 맡겼을 정도로 신뢰 받던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대장금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종 10년(1515년) 3월 8일이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원자(훗날의 인종)를 생산한 후 사망하자, 사헌부는 대장금을 비롯한 의녀가 말한 대로 약을 지었다는 의원의 증언에 따라 대장금을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종은 끝까지 장금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후 대장금은 1522년 자순대비의 중풍 증세를 호전시킨 공로로 중종의 병 치료를 전담하게 된다. 1524년 2월 15일 대장금에게 체아직을 내리고 자신의 간병을 전담토록 조치했던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대장금은 명실공히 중종의 어의녀이자 주치의가 되었다. 하지만 한갓 의녀에 불과한 장금을 주치의로 삼은 사실을 못마땅해한 대신들은 중종의 몸이 좋지 않을 때마다 그것을 마치 대장금의 의술이 부족한 탓인 양 말하곤 했다.
1544년(중종 39) 2월에 이르면 중종의 병증은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이미 57세의 노구인 데다가 오랫동안 앓아오던 풍증과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병증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종은 당시 자신의 병을 오로지 대장금에게 맡겨두고 있을 만큼 대장금을 신뢰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앓은 후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 했지만 중종의 병은 완치된 것이 아니었다. 중종의 몸에는 늘 냉기가 감돌았고, 대소변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10월쯤에는 중증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이에 대장금을 비롯하여 여러 의원들이 약을 처방하여 먹게 하였으나 이미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11월 15일 어두워질 무렵에 왕을 알현한 대장금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상의 징후가 위급하십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전에서 곡소리가 터져나왔다. 중종의 승하와 함께 대장금에 관한 기록도 사라졌다. 왕이 죽었지만 그녀가 특별한 실수를 한 것은 아니니 의녀 직분은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랫동안 왕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것이 문제가 되어 내의원에 계속 머물러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여관의 선발과 교육조선이 건국될 당시에는 궁궐에 여관이 몇 명 없었다. 여관 제도를 확립한 왕은 태종이다. 그러자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