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여유, 그리스
권삼윤 지음 | 푸른숲
육체가 넘실대는 아테네권하고 싶은 신혼여행지, 타소스타소스는 카발라 앞에 있는 섬이다. 그곳에선 여름철 주말이면 노천극장에서 고대 비극이 상연된다고 하였는데,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바로 부두로 향했고 도중에 들른 관광안내소에서 배는 늦게까지 다니지만 그날은 공연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깜깜한 밤바다를 사십 분이나 항해하여 도착한 타소스의 프리누 마을은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유로파'란 호텔에 짐을 풀었다. 타소스의 볼거리는 프리누에서 24km쯤 떨어진 리메나스에 집중돼 있다 하여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길에는 올리브 밭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에게 해 위로는 하얀 요트가 떠 다녀 별세계 같았다. 나는 고대 비극이 상영되는 극장부터 찾기로 했다. 꽤 먼 길을 걸어 그곳에 도착했으나 공사 중이라며 입구를 막아놓았다. '포기'라는 말을 잊어버린지 오래인 나는 울창한 숲을 헤치며 극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극장은 크지 않았고, 복구하느라 장비들이 흩어져 있었으나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작고 외딴 섬에 2천 년 전에 극장이 세워져 비극이 상연되곤 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극장은 그들 공동체에게 중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로, 그곳에 올려졌던 비극은 그들에게 의미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그런 촌구석까지 극장을 지었고 자유시민이라면 누구나 비극 공연을 감상했는데, 그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였다.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비극을 통해 형식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인 지금 극장은 상당부분 허물어져 수리를 받고 있었다. 텅 빈 극장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어 해변가로 갔다. 그곳에 있는 타베르나에서 식사를 하고 프리누행 버스에 올랐다. 대낮인데도 만원이었다. 수영복 차림이 많은 것으로 보아 금방 내릴 것 같더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들이 내린 곳 가운데 하나는 깎아지른 벼랑 위. 그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수건 한 장 크기의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삼면이 막혀 호젓하기 짝이 없는.
어릴 때 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외딴 섬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아내와 단둘이만 지내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곳을 보자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신혼여행지로 어디가 좋겠느냐고 물으면 타소스 섬의 저 이름 없는 해변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프리누에서 카발라로 가는 배는 전날 밤에 보지 못했던 북 에게 해의 푸른 바다와 바위로 된 섬들, 진초록의 소나무, 하얀 집 등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수채화로 그린 듯한 풍경이 눈 앞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왜 이 타소스를 찾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카사 비앙카와 부겐빌레아몇 시간을 망망대해 위를 달리다가 깎아지른 수직의 벼랑이 빚어내는 흑색과 적색의 단층, 그 위로 드러나는 하얀색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어느 순간 멈춰버린 듯하여 어떤 신비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곳은 산토리니, 그리스인들이 '테라'라고 부르는 화산섬이었다. 사라져버린 아틀란티스의 일부분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는 그 섬으로 가는 배 위에서 사십대의 미국인 부부를 만났다. 남편 되는 이는 섬 북쪽 끝에 위치한 오이아 마을에서 붉게 타오른 석양을 즐기다 아내를 처음 만났다며 지금 결혼 7주년을 기념해서 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바다와 함께 하얀 그리스식 가옥이 붉게 물든 모습이 장관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아무래도 오이아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섬에 닿는 것이 그때쯤이고, 그곳에서는 하룻밤밖에 머물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그가 그렇게도 찬탄해 마지 않던 석양이 서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포도주 빛 바다와 서쪽 하늘에 엷게 드리운 조각구름이 금세 금빛으로 물드는데, 그 사이로 때마침 불을 환하게 밝힌 여객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이아의 것은 저보다 더 황홀하다면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산토리니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000년경이고, 그들은 오래지 않아 그 남쪽의 크레타 섬의 미노아 왕국으로부터 유럽 최초의 문명을 받아들여 일찍이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다 기원전 1450년경 연이어 터진 화산 폭발로 모든 것이 땅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섬 또한 검붉은 화산재로 뒤덮이면서 전혀 다른 경관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참 뒤인 기원전 4세기, 철학자 플라톤은 『대화』에서 아틀란티스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그 일부가 산토리니라는 주장을 폈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대로 수놓인 단층 구조를 하고 있는 이 섬은 바다와 맞닿은 곳에선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이루고 꼭대기에선 카사 비앙카, 즉 하얀 집들이 수평을 그린다. 에게 해의 여러 섬들을 다녔지만 이런 섬은 보지 못했다. 산토리니는 그만큼 특이한 경관을 자랑했다. '에게 해의 진주'란 별명은 그래서 붙은 것이리라.
나는 산토리니 최대 마을 피라에서 얼마간 떨어진 작은 펜션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2층 방을 배정받았다. 밤의 피라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서자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벽과 길바닥은 하얗고, 골목을 향해 나 있는 쇼윈도에는 산토리니의 풍경을 담은 그림엽서와 조개껍데기로 만든 장신구 등 예쁜 공예품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제우스같은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영웅의 이름을 내건 타베르나와 레스토랑, 카페 등이 행인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세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꽉 차버리는 길을 나귀와 말도 지나다녔다. 그중에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카페테리아 자포라 앞에서 바라보니 부두에 정박해 있는 배들의 불빛까지 보이고 그 야경이 이 세상의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체 주민이라야 고작 8천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 마을 하나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품격을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세계적인 관광 명소임을 말해주는 확실한 물증이리라.
다음날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오이아로 출발했다. 낭떠러지를 따라 하얀 집들이 이리저리 빼곡이 들어서 있었는데 집의 구조가 특이하지 않으면 대문이 시선을 끌었고, 어떤 집은 풀장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마을은 지극히 고요했다. 지난 밤 늦게까지 손님들 맞이한 탓에 기상이 그만큼 늦는 것인지 마을이 부산해지기 시작한 것은 10시경이었다. 카페와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열었고 피라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에서 붉게 타오른 석양 대신 붉은 꽃을 가득 피운 부겐빌레아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분꽃과의 열대식물인 부겐빌레아는 제라늄과 함께 오이아에선 아주 흔하다. 워낙 꽃이 예쁘고 주위 풍경과도 너무나 잘 어울려 꽃의 이름만은 알아두어야겠다 싶어 어느 가게에 들러 물어보았던 것이다. 나에게 꽃이름을 가르쳐준 가게 주인은 꽃 한송이를 꺽어선 내 수첩 속에 끼워주었다. 오이아를 잊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성화는 올림피아에 채화된다펠레폰네소스 반도는 그리스 정신의 원천이며 독립운동의 뿌리 역시 이곳에 두고 있다. 1820년대 지독스런 오지 산골 마을 칼라브리타에서 그 첫 횃불은 타올랐다. 자연 속의 정원을 방불케 하는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올림피아는 여전히 작은 도시였다. 500m쯤 계속되는 중심거리 좌우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기념품 가게와 호텔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관광산업이란 말이 나왔지만 2천여 년 전 올림픽 제전이 열렸던 그때도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그 당시 엘리스라 불렸던 이곳은 흥청거렸을 것이다. '아킬레스'란 이름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다음 날 아침 올림픽 제전이 벌어졌던 신역(神域)으로 향했다. 시내에서 1km떨어진 그 앞으로 그 옛날 선수들이 땀을 씻곤 했다는 알페이오스 강이 흘렀다. 지금은 물이 말라 개울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수량이 풍부했을 듯도 하다. 강 위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너자 크로노스 산의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유적지가 나왔고, 입구를 지나나 곧 김나지움의 기둥 자리와 헤라 신전이 나타났다. 헤라 신전은 올림피아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기원전 7세기)것인데도 아직 몇 개의 기둥이 하늘을 향해 곧바로 서 있어 제법 볼 만했다.
헤라는 신 중의 신 제우스의 아내였다. 그녀는 질투심이 강해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상대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을 몹시 구박했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산과 풍요의 여신이라며 그녀를 섬겼다. 그 물증이 바로 헤라 신전이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제전을 밝힐 성화도 늘 이곳에서 채화했다. 그들은 성화를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라 생각하여 헤라 신전 서쪽에 불의 신전인 프리타네온을 세우고, 그 속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밤낮으로 지켰다. 불은 인간을 어여쁘게 본 프로메테우스가 하늘 나라의 불을 훔쳐다 주어 문명을 이루게 한 위대한 선물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만, 일반 가정에서 불씨를 얻어 가는 실용적인 목적도 갖고 있었다.
1928년부터 근대올림픽에서 재현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성화채화는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사제에 의해 헤라 신전에서 행해진다. 그때는 하늘의 불을 훔친다는 뜻에서 채화용 오목거울을 사용한다(오목거울은 볼록렌즈처럼 빛을 모으는 성질이 있다). 불을 붙인 여사제는 한 손에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훨훨 타오르는 성화를 치켜들고는 고대 그리스어로 "빛나는 올림피아의 어머니시여, 진실의 어머니시여, 제우스 신이시여…"로 시작되는 핀다로스의 시를 읊은 다음 "아폴로 신이여, 이 성스러운 빛을 올림픽이 열리는 곳으로 보내주시고, 성스러운 올림픽 대회의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시며…"라는 축사를 낭송한다. 성화 채화마저도 너무나 낭만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776년 시작된 고대 올림픽 제전은 서기 261년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폐지될 때까지 1천 년간 이곳 올림피아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개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올림피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서쪽 아주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고 올림피아가 바다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교통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그곳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어째서 그리스인들은 이토록 교통이 불편한 곳에서 민족 전체의 제전을 천 년 동안이나 계속했던 것일까. 아테네나 스파르타처럼 큰 도시가 아니었기에 남에게 원수질 일도 하지 않아 친선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것일까.
올림픽 제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와 관련된다. 헤라클레스는 헤라 소생이 아니라 테베의 장군 엠피트론의 아내 알코메네와의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질투심이 많은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죽이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계략에 빠져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메가라와 아들을 죽였다. 정신이 들어 자기가 저지른 엄청난 일을 알게된 헤라클레스는 고민 끝에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 그가 속죄할 수 있는 길을 물으니 불가능에 가까운 열두 가지 일을 끝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일을 무사히 끝마친 그는 제우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크로노스 산에 올림피아 신전을 짓고 4년마다 경기 대회를 열어 그리스 청년들을 자기처럼 용기와 힘을 기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신화는 제우스와 관련된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이곳 크로노스 산속에 살고 있었다. 장성한 제우스는 크로노스 산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맞붙어 싸워 그를 쓰러뜨리고 신들의 대권을 차지했다. 그게 레슬링의 유래가 됐는데, 이런 이유로 고대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승자가 빈번히 그 해의 올림픽 영웅으로 선정되곤 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실이든 상상력 가득한 그들의 이야기는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유쾌하게 올림픽 제전에 참가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완전한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올림픽 제전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한때나마 각자의 벽을 허물고 서로 기쁘게 만나는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당시 올림픽 제전은 엘리스(지금의 올림피아)시의 전령들이 머리에는 올리브관을 쓰고 손에 전령 지팡이를 들고 대회가 시작된다고 각 도시를 다니며 알림으로써 시작됐다. 전령들의 포고를 들은 순간부터 평화 협정의 효력이 개시되어 이때 만약 다른 도시를 공격하면 벌금을 물렸다. 물론 성지 올림피아를 무력으로 더럽히는 경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나 관람자들에게는 국경의 무사 통과를 보장해주었다. 그리스는 작은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있었으나 이런 제전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을 갖게 됐다. 그리스에서 가장 잘생기고 가장 기민하며 용감한 청년들을 뽑아 제우스 신전에 바친다는 의미를 가진 제전은, 그리스 문화는 행동하는 문화이며 누구든지 알몸으로 자유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인간 완성을 꾀할 수 있다는 위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
그들이 '아곤'이라 불렀던 경쟁은 상대를 생존 대열에서 탈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는 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정신과 능력을 가진 '완전한 자유인'을 길러내고 민주주의 사회란 자유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그들은 알몸을 드러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올림픽 제전에서는 선수들과 관중들까지 모두 알몸이 되었다. 알몸은 건강함, 자유로움,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아레테(덕)의 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고 있는 투명성과도 관련이 있다. 절차를 중요시하는 민주주의는 투명성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우승자에 대한 시상이라고 하는 것은 제우스 신전 서쪽에 자라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건강한 소년이 황금의 낫으로 잘라 만든 관을 종목별 우승자에게 씌워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진정한 용기와 자유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에 올림픽 승자에게는 돈이 될 만한 것은 절대로 주지 않고 곧 시들게 마련인 올리브관의 수여로 끝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의 상징이었다. 완전한 자유, 바로 그것의 표상이었으니까.
고대에는 우승자만 있었지 2위나 3위는 없었다. 경기 기록도 측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 갱신이란 말도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한 아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고대에도 공정한 경쟁을 위해 심판을 두었다는 점이다. 대회 개최 1년 전 선거에 의해 뽑힌 심판은 열 달 동안 올림피아에 머물면서 경기에 관한 것들을 익히고 출전자 명단을 접수하고서는 그리스인의 혈통을 가진 자유시민인지, 품행이 바른 자인지를 가린 다음에야 출전 자격을 주는 일도 하였다. 그러다 경기가 열리면 규율 준수 여부를 점검하고 질서 유지에 힘썼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도 심판에게는 아무런 보수가 주어지지 않았다. 무보수 명예직이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게임의 룰'이 우리 사회에 정착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선 2500년 전에 게임의 룰을 정하고 그걸 담보할 수 있는 심판을 양성하였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안녕 그리스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아테네엔 육체가 넘실댔다. 여인들이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로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스 곳곳에 남아 있는 인체 조각상을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몸을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뜨거운 태양과 건조한 날씨가 그들을 벗도록 했겠지만 남들에게 내놓아도 좋은 만한 신체 조건을 가졌던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니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기만 해도 주제가 몸이나 몸이 즐거워할 것 같은 것에만 맴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이상학이다, 철학이다 하며 골치 아픈 것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을 지배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은 도시국가에 살았기 때문에 늘 전투에 대비해야 했고, 자연히 신체의 단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으니 김나지움(체력 단련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