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
이안 부루마 지음 | 을유문화사
일본의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일본에서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은 일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전쟁이라고 부르는가에 상관없이 1931년에 아시아 대륙에 대한 일본의 국수주의적 공격이 새롭게 시작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에 일어났다. 그 이전에도 일어날 가능성은 농후했다. 중국 군벌이 만주를 반독립적인 통치지구로 다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인이 이미 강력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관동군은 하얼빈이나 선양 같은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지나는 남만주 철도를 따라 그 지역을 통제하고 있었다. 다롄과 뤼순 항구 도시도 이미 일본의 직접적인 행정 지배하에 있었다. 문제의 하나는 중국이 만주를 중국의 한 부분으로 본 반면, 일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일본인은 만주를 누구의 소유도 아닌 무법지로 보고 일본이 그곳에 질서를 세울 것이라고 믿었다.
1930년대 만주엔 호전적인 일본 장교, 우익 몽상가, 혁명적인 부랑자들이 득실거렸다. 이시하라 간지 중령은 위의 모든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3년간 수행했으며, 그의 정신적 지주인 기타 잇키와 같이 니치롄종의 신도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지붕 아래 전세계의 통합을 꿈꾸었다.
1928년 장꿔린 열차 폭파 실패 이후, 1931년엔 좀더 조직적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9월 18일 밤 선양 근처의 철도 옆에서 일본군이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남만주 철도 재산에 실질적인 피해는 아무 것도 없었고 기차도 여전히 정시 운행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선양의 중국군을 '사보타주'로 비난하며 중국군을 공격할 좋은 구실로 삼았다. 6개월 안에 만주의 많은 부분이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중국인은 국제연맹에 호소했다. 만주사변 당시의 수상인 와카쓰키 레이지로는 중국에 대해 화해 정책을 선호한 정당 정치가였다. 그는 공포 상태에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으나 군사 행동은 총리의 관할 밖의 일이기 때문에 관동군의 소행에 대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민간 정부는 군사 장교들에 대해 아무런 통제권을 갖지 못했지만 그들이 일으킨 만주에서의 기정 사실들을 변호해야 하는 불합리한 지위에 있었다.
이후 총리가 된 이누카이 쓰요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본 군대가 상하이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고 했으나, 이에 반감을 품은 해군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 때 암살되었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 통치한 14명의 총리 중에서 민간인은 단지 4명뿐이었다. 이것은 이시하라 간지 같은 책략가뿐만 아니라 그의 계획에 공모한 도쿄의 최고 군대 장교들의 목적이기도 했다.프롤로그 : 도쿄 올림픽1964년 일본은 세계에 다시 편입했다. 가난과 치욕, 그리고 1952년까지 지속된 점령 통치의 시간이 마침내 지나가고, 경제 기적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한 패전국이 아니었다. 10월 10일, 탄게 겐조가 설계한 거대한 새 스타디움에 앉아 빨간 바지 차림의 일본 선수단을 포함한 94개국의 선수단이 입장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히로히토 천황이 귀빈석에 앉아 세계를 향해 자애롭게 손을 흔들고, 8천 마리의 평화의 흰 비둘기가 청명한 하늘을 향해 일제히 날아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일본이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세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의해 나뉘기를 바라면서 1940년 주축국에 가담했던 것이 까마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일본인들은 친절한 태도와 효율적인 조직으로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들의 스포츠 기록을 지나칠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기대에 못 미친 두 선수는 후에 자살까지 했다. 국가들간 서열에 매우 민감한 일본인들에게,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전시의 패배의 기억을 달래주는 한 가지 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로서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담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일본 올림픽위원회는 개최국 특권으로 유도를 올림픽의 새 종목으로 채택했다. 힘을 넘어서 정신적 기술을 요구하는 유도의 채택, 이것은 일본 문화, 일본 정신의 우월성을 잘 보여주자는 의미였다.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하며 일본인들이 좋아한 선수가 가미나가 아키오였다. 그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선수로, 일본인으로서는 매우 덩치가 큰 편이지만, 키가 198cm가 넘고 몸무게가 120kg이나 되는 네덜란드 챔피언 안톤 기싱크 선수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 대결은 10월 23일 올림픽 마지막 날로 잡혔다. 가미나가의 경기에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마 천황도 틀림없이 TV를 시청했을 것이다. 경기 초반 10분 동안 가미나가와 기싱크가 거의 비등하게 경기했다. 가미나가가 공격하자, 기싱크가 그를 막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기싱크가 가미나가를 덮쳤고, 이때 덩치 큰 기싱크는 놀라울 만큼 재빠르게 가미나가를 바닥에 밀치고 내리 눌렀다. 일본 챔피언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의 단단한 장딱지는 마치 물고기가 살기 위해 버둥대듯이 바닥을 치고 또 쳤다. 그러나 끝내 종료 시간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기싱크가 이긴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비탄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치욕감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이 우월한 서구와 맞서 시험당하였고, 다시 한 번 힘이 딸린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생각지도 않던 일이 일어났다. 기싱크가 자국 응원단들을 제지하고 가미나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목례를 한 것이다. 일본인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의 전통적 경의의 제스처에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이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체격으로만이 아니라 유도의 기술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준 도쿄에서의 네덜란드 승자 기싱크는 일본에서 영원히 우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과신, 광신, 치떨리는 열등감, 그리고 때로 국가 위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이 모든 것들이 근대 일본의 역사에 모두 한몫을 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특성이 다른 어떤 특성보다 일본을 잘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바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품이었다.대부분의 일본 문제들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정점이 나약하고 분화되어 있다는 데서 나온 결과였다. 일본은 결코 통합된 국가가 아니었으며 왕실, 군대, 관료, 의회와 파벌로 나뉘어 지배되었다. 이들은 외부의 적들에 대해서 열정을 나타냈으며 그 열정만큼 서로가 격렬하게 싸웠다. 천황이 전시정치에서 꼭두각시에 불과했는지, 능동적인 행위자로 역할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가 신의 뜻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한, 그를 제외한 다른 어떤 사람도 최고통치자가 될 수는 없었다.
1937년 겨울의 난징대학살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 전쟁에서 최악의 잔학 행위다. 난징대학살은 계획된 인종 멸절 작전이 아니라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일본 군인들은 중세의 정복자들처럼 전리품을 마차에 싣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을 윤간하고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도쿄 전범재판소에서는 난징학살의 희생자 수를 25만 명으로 보았다. 왜 이러한 극도의 사태가 일어난 것일까? 왜 일본 군대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일까? 이것은 도쿄 정부가 지시한 것 같지는 않다. 천황과 고문들은 국제 여론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량학살은 포로를 만들지 않으려는 일본 정책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중국 대륙에 상륙한 그 순간부터 일본 장교들은 난징까지 싸워나가면서 사로잡은 군인들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게릴라 전투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구별할 수 없었다. 또한 잔인해진 일본 군인들에게 여자와 아이 또한 모두 적이었고, 그런 적에게 음식을 주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간단했던 것이다. 한편 학살은 사악한 사상주입의 결과이기도 했다. 수 년 동안 일본인들은 중국인은 열등한 민족이며 일본인이 신성한 민족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이로 인해 희생자들의 인간성을 박탈함으로써 죽이는 것을 더 쉽게 만들었다.5. 서양과의 전쟁1941년 12월 7일, 진주만에서 일본의 어뢰와 급강하 폭격기가 수많은 미국 함대를 쳐부수었을 때, 천황과 그의 부하들에게는 환희가 극치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날 히로히토 천황은 해군복 정장 차림을 했고, 궁내청은 천황 폐하께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심정"이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서구의 물질적 우월성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긴 열등감과 모욕감이 일거에 해소된 것이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일본인들의 생활에서 추방되었던 것은 '앵글로색슨'과 연계되는 서구였다. 일본의 자유주의자들이 메이지유신 이래로 경외하고 모방하려 해온 그 모든 것들이었다. 일본의 전쟁은 다른 무엇과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런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처칠과 루스벨트로 대표되는 '앵글로-아메리카의 금수들'을 쳐부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거의 100여 년에 걸쳐 서구화를 경험한 후, 이제는 이를 악물고 아시아인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1940년 1월, 미국이 국가 방위의 관점에서 일본에 더 이상 선박 운항 연료와 철강을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전쟁이라는 마지막 결말에 이르게 되는 전초전이 시작되었다. 또한 1941년 7월 일본군이 남부 인도차이나를 점령하자, 영국과 네덜란드, 미국은 석유 수출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신문들은 일본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분위기에 맞춰 일본의 생명선이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당시 일본은 확실히 체계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점이고, 미국과의 협상 이면에 이미 진주만 공격 계획을 완료했다는 점이다. 가고시마 만에서 해군 특공대가 침투 연습을 계속하고 있었고 철두철미한 야마모토 해군 대장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 치밀하게 다 검토해두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성전(聖戰)이라 부른 그 전쟁은 아시아에서 가공하리 만치 잔학성을 띠었다. 전쟁 포로들은 고문을 당했고, 때로 중노동으로 죽어갔다. 중국과 만주에서는 특수 실험 조직이 중국인과 유럽인들에게 소름끼치는 의료실험을 감행했다. 조선, 중국, 동남아에서 끌려온 여성과 소녀들은 강제로 군 위안소에서 일하도록 했다. 고통은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진주만 공격 한 해 전에 이미 쌀은 배급이 중단된 상태였다.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군사력만으로 세워질 수 없었다. 조선인들과 대만인들은 일본 이름으로 바꿔야 했고,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의 어린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사무라이 정신에 대해 배워야 했지만, 문화란 그런 방식으로 수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면 미국인들은 일본 본토에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군사적 천재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할지라도 - 실상 그렇지도 않았지만 - 그 전쟁은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일본보다 비행기와 배와 다른 전쟁 필수물자를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1942년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 섬이 함락되고,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 타라와가 함락되었다. 콰절런 환초, 필리핌 섬 레이테와 루손, 괌, 사이판, 마침내 일본의 이오 섬이 함락되었다. 이오 섬에서 일본 도시까지는 B-29 폭격기의 사정 거리 내에 있었다.1. 구로후네(黑船)1853년 7월 8일, 페리 제독이 개항을 목적으로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 만에 나타났다. 네 척의 '악마의 검은 배'와 페리는 일본 해안에서 대포에 불을 붙이는 불길한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해안에는 구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페리는 당시 일본의 특수한 상황 - 상징적이고 힘없는 존재인 천황과 강력한 쇼군의 존재 - 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한 항구에서, 무역할 권리를 요구하는 미 대통령의 편지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천황에게 전해줄 것을 계속 주장했다. 오랜 심의 후에, 일본인들은 내부 논쟁을 거쳐 페리 제독이 결국 뭍에 상륙하도록 허락했다. 그후 미국 함대는 지정된 항구 두 곳으로 입항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배에는 석탄을 비롯한 공급품이 실려 있었고, 양국 무역관계의 수립을 위한 첫걸음의 대가로 지불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인의 관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페리는 일본인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가정은 진실에서 먼 것이었다. 그가 에도 만에 도착했을 당시, 일본의 엘리트는 훨씬 이전부터 이미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미국에 대해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정치, 서구의 과학, 의학, 역사 그리고 지질학에 대한 지식의 범위는 주목할 만했고, 자세한 미국 지도까지 갖고 있었다. 서구의 과학은 17세기에 소개되었고, 학문은 러시아 군대, 영국 경제, 그 밖에도 많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의 학문을 통해 일본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1720년 유럽의 정체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고쿠가와 요시무네는 농경의 부흥에 책임을 느끼고, 경작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국 사람들보다 유럽인들이 절기 측정을 더 정확히 한다는 조언을 듣고 난학(蘭學, 네덜란드의 학문)을 장려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계승자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부가 이교도의 가르침에 대해 탄압했던 19세기 초에는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당시 대부분의 난학자들이 애국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수적이었다 해도, 외국 문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반역자라는 의혹이 따랐다. 난학의 과학도들은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지식은 유교 국가의 철학의 합리성을 손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연의 원칙이 이성으로 분석될 수 있고, 우주론에 기초한 유교 국가가 과학에 의해서 반박을 받는다면 이것은 정치적 합리성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중국 또한 서구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원리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초래할 결과를 차단하기 위한 중국 나름의 방식은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고 서구의 물질을 이용)"이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중국의 수준 낮은 기술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은 "중국=지혜의 중심"으로 보던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손쉽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일본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들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낡은 질서가 더 이상 잘 작동하지 않을 때 다른 어딘가에서 새로운 것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토착론자들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독특한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국 사상을 연구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토착론자 중에, 지도적인 학자로 아이자와 세이시사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는 악한 것이며 서구 야만인들이 일본 해안을 공격하는 즉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 국가들의 힘이 우월한 이유는 서구 신앙에 연유한다고 결론짓고, 일본에게 필요한 것을 천황을 최고의 사제로 삼는 일본 고유의 국가 종교라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근대 일본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서양의 모습이 왜곡된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토착론자들은 일본이 경쟁하기 위해 서구 세계에서 가장 나쁜 면, 가장 호전적인 면을 선택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바로 식민주의였다.
1853년부터 1868년까지 페리의 입항 후 쇼군 체제의 전복에 이르는 기간을 '바쿠후마쓰' 또는 '바쿠후(幕府) 말기'라고 한다. 페리 제독의 입항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 : 천황을 섬기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라는 슬로건은 입항을 허락한 바쿠후의 타도 전쟁을 부르짖은 외침으로 바뀌었다. 하급 무사 출신으로 구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게 된 젊은 극단주의자들 중 섬 출신의 사카마토 료마라는 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