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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이안 부루마 지음 | 을유문화사
프롤로그 : 도쿄 올림픽



1964년 일본은 세계에 다시 편입했다. 가난과 치욕, 그리고 1952년까지 지속된 점령 통치의 시간이 마침내 지나가고, 경제 기적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한 패전국이 아니었다. 10월 10일, 탄게 겐조가 설계한 거대한 새 스타디움에 앉아 빨간 바지 차림의 일본 선수단을 포함한 94개국의 선수단이 입장하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히로히토 천황이 귀빈석에 앉아 세계를 향해 자애롭게 손을 흔들고, 8천 마리의 평화의 흰 비둘기가 청명한 하늘을 향해 일제히 날아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일본이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여 세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의해 나뉘기를 바라면서 1940년 주축국에 가담했던 것이 까마득히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일본인들은 친절한 태도와 효율적인 조직으로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들의 스포츠 기록을 지나칠 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기대에 못 미친 두 선수는 후에 자살까지 했다. 국가들간 서열에 매우 민감한 일본인들에게, 스포츠에서의 승리는 전시의 패배의 기억을 달래주는 한 가지 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로서는 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담력을 보여주어야 할 때였다. 일본 올림픽위원회는 개최국 특권으로 유도를 올림픽의 새 종목으로 채택했다. 힘을 넘어서 정신적 기술을 요구하는 유도의 채택, 이것은 일본 문화, 일본 정신의 우월성을 잘 보여주자는 의미였다.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딸 것으로 기대하며 일본인들이 좋아한 선수가 가미나가 아키오였다. 그는 기술이 매우 뛰어난 선수로, 일본인으로서는 매우 덩치가 큰 편이지만, 키가 198cm가 넘고 몸무게가 120kg이나 되는 네덜란드 챔피언 안톤 기싱크 선수만큼 크지는 않았다. 그 대결은 10월 23일 올림픽 마지막 날로 잡혔다. 가미나가의 경기에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됐다. 아마 천황도 틀림없이 TV를 시청했을 것이다. 경기 초반 10분 동안 가미나가와 기싱크가 거의 비등하게 경기했다. 가미나가가 공격하자, 기싱크가 그를 막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기싱크가 가미나가를 덮쳤고, 이때 덩치 큰 기싱크는 놀라울 만큼 재빠르게 가미나가를 바닥에 밀치고 내리 눌렀다. 일본 챔피언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의 단단한 장딱지는 마치 물고기가 살기 위해 버둥대듯이 바닥을 치고 또 쳤다. 그러나 끝내 종료 시간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기싱크가 이긴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비탄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치욕감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본이 우월한 서구와 맞서 시험당하였고, 다시 한 번 힘이 딸린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생각지도 않던 일이 일어났다. 기싱크가 자국 응원단들을 제지하고 가미나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목례를 한 것이다. 일본인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의 전통적 경의의 제스처에 박수를 보냈다. 그들은 이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체격으로만이 아니라 유도의 기술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본인들에게 잘 보여준 도쿄에서의 네덜란드 승자 기싱크는 일본에서 영원히 우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과신, 광신, 치떨리는 열등감, 그리고 때로 국가 위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이 모든 것들이 근대 일본의 역사에 모두 한몫을 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특성이 다른 어떤 특성보다 일본을 잘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바로 패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기품이었다.

1. 구로후네(黑船)



1853년 7월 8일, 페리 제독이 개항을 목적으로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에도 만에 나타났다. 네 척의 '악마의 검은 배'와 페리는 일본 해안에서 대포에 불을 붙이는 불길한 방식으로 인사를 했다. 해안에는 구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있었다. 페리는 당시 일본의 특수한 상황 - 상징적이고 힘없는 존재인 천황과 강력한 쇼군의 존재 - 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본의 한 항구에서, 무역할 권리를 요구하는 미 대통령의 편지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천황에게 전해줄 것을 계속 주장했다. 오랜 심의 후에, 일본인들은 내부 논쟁을 거쳐 페리 제독이 결국 뭍에 상륙하도록 허락했다. 그후 미국 함대는 지정된 항구 두 곳으로 입항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 배에는 석탄을 비롯한 공급품이 실려 있었고, 양국 무역관계의 수립을 위한 첫걸음의 대가로 지불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인의 관점에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페리는 일본인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가정은 진실에서 먼 것이었다. 그가 에도 만에 도착했을 당시, 일본의 엘리트는 훨씬 이전부터 이미 네덜란드와의 교류를 통해 미국에 대해 미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정치, 서구의 과학, 의학, 역사 그리고 지질학에 대한 지식의 범위는 주목할 만했고, 자세한 미국 지도까지 갖고 있었다. 서구의 과학은 17세기에 소개되었고, 학문은 러시아 군대, 영국 경제, 그 밖에도 많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서양의 학문을 통해 일본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1720년 유럽의 정체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고쿠가와 요시무네는 농경의 부흥에 책임을 느끼고, 경작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국 사람들보다 유럽인들이 절기 측정을 더 정확히 한다는 조언을 듣고 난학(蘭學, 네덜란드의 학문)을 장려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의 계승자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정부가 이교도의 가르침에 대해 탄압했던 19세기 초에는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아무리 당시 대부분의 난학자들이 애국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수적이었다 해도, 외국 문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반역자라는 의혹이 따랐다. 난학의 과학도들은 의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지식은 유교 국가의 철학의 합리성을 손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연의 원칙이 이성으로 분석될 수 있고, 우주론에 기초한 유교 국가가 과학에 의해서 반박을 받는다면 이것은 정치적 합리성에 심각한 도전을 받기 때문이다.

중국 또한 서구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원리적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초래할 결과를 차단하기 위한 중국 나름의 방식은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고 서구의 물질을 이용)"이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중국의 수준 낮은 기술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혼란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은 "중국=지혜의 중심"으로 보던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손쉽게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일본은 세상의 중심이 자기들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고 낡은 질서가 더 이상 잘 작동하지 않을 때 다른 어딘가에서 새로운 것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의 토착론자들은 오늘날까지 일본의 독특한 우월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국 사상을 연구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토착론자 중에, 지도적인 학자로 아이자와 세이시사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는 악한 것이며 서구 야만인들이 일본 해안을 공격하는 즉시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유럽 국가들의 힘이 우월한 이유는 서구 신앙에 연유한다고 결론짓고, 일본에게 필요한 것을 천황을 최고의 사제로 삼는 일본 고유의 국가 종교라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근대 일본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서양의 모습이 왜곡된 모양으로 그들에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토착론자들은 일본이 경쟁하기 위해 서구 세계에서 가장 나쁜 면, 가장 호전적인 면을 선택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바로 식민주의였다.

1853년부터 1868년까지 페리의 입항 후 쇼군 체제의 전복에 이르는 기간을 '바쿠후마쓰' 또는 '바쿠후(幕府) 말기'라고 한다. 페리 제독의 입항으로 '존황양이(尊皇攘夷 : 천황을 섬기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라는 슬로건은 입항을 허락한 바쿠후의 타도 전쟁을 부르짖은 외침으로 바뀌었다. 하급 무사 출신으로 구사회에서 의지할 곳을 잃게 된 젊은 극단주의자들 중 섬 출신의 사카마토 료마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국가의 순수성과 야만인들의 위험에 대한 토착론자들의 선전에 고무된 그는 해군 전문가이자 저명한 난학자인 가쓰 가이슈를 완벽한 표적이라 여겼다. 가쓰는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 개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젊은 자객과 맞닥뜨렸을 때, 가쓰는 평정을 잃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나를 죽이러 온 게냐? 그렇다면 나와 이야기한 연후에 죽여라." 여기서 극적 반전이 펼쳐진다. 가쓰는 자신도 애국자이며, 그의 유일한 목표는 일본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야만인들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술수를 배워야 하며 개항과 타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전해지는 바로 사카모토는 그의 칼을 내던지고 무릎을 끓고 자신의 '편협한 고집'을 사죄했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가쓰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바쿠후에 반대하는 남서쪽의 영지인 조슈, 사쓰마, 도사 간의 연계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담당했다. 에도 정부와 전쟁을 할 태세였던 그들에게 사카모토는 평화로운 해결을 주장했다. 이후 사카모토는 나가사키를 새로운 근거지로 그곳에서 서구 정치 체계를 공부했고 총명한 두뇌를 가지고 1867년에 바쿠후 이후의 상태에 대해 정교한 청사진을 그려내기에 이르렀다. 중·참의원, 헌법, 신분·지위 타파 등 이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대단한 발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카모토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도쿠가와 통치의 종국과 메이지유신을 생전에 보지 못했다. 바쿠후 말년은 음모자, 자객들, 떠도는 검객들로 가득 찬 무법천지였다. 1876년 겨울, 사카모토는 몸을 숨겨주었던 절친한 간장 상인의 집에서 최후를 맞았다. 두 명의 검객과 함께 쳐들어온 자객이 사카모토의 머리와 사지를 내리쳤다. 그는 쇼군의 모든 적들을 처치하기 위해 결성된 신셍구미의 일원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 일본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사카모토의 선혈이 낭자했다.

2. 문명개화



1889년 2월 11일은 일본의 신화적인 첫 번째 천황이 가계를 설립한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일본이 세계 열강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위한 날이기도 했다. 일본은 단호한 의지로 봉건주의를 탈피하고 메이지 시대의 위대한 슬로건이 된 '문명개화'의 상징으로서 최초의 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천황의 백성들은 여전히 그 헌법의 내용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주권을 전적으로 천황의 손에 돌린다는 모호한 문구의 문서였다. 새로운 궁중 예절에 따른 천황과 대신들의 유럽식 복장처럼, 도쿄 중심가에 세워진 근대식 벽돌 빌딩처럼, 헌법은 서양식 겉치레에 불과했다. 메이지 헌법에서 규정한 일본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병약한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천황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였다고는 하나 천황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관료 엘리트가 천황의 이름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군대는 민간 정부에 대해서가 아니라 군주에게만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것은 연막과 베일에 싸인 정치였으며, 권력은 행위에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 없이 견제되지 않는 상태로 행사되었다.

메이지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문제는 단순히 부유한 국가가 아니라 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강한 군대에 필요한 전략 산업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산업혁명은 영국에 뒤지긴 하였으나 독일보다는 몇 년 늦은 것에 불과했다. 근대적 기업을 인수할 만큼 용감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일본 산업의 많은 부는 소수의 회사에 집중되었고, 이들은 곧 자이바쓰(財閥)로 알려진 거대한 산업연합이 되었다. 예를 들면 미쓰비시는 작은 해운회사로 시작해서 193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서구화가 모두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치적 계산에서 연유한 것도 아니었다. 메이지 지식인 몇몇은 일본을 보다 자유주의적 방향으로 바꾸고자 서양 사상을 흡수했다. 그러나 '문명개화'에는 다른 아시아인들의 후진성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서양에 합류한다는 것은 아시아를 거부한다는 의미였다. 일본이 이전에 중국 문화권의 일부였다면 이제는 개화된 서양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고도 문명사회의 표시였다. 그 전쟁을 표현한 유명한 목판화를 보면, 일본 군인들은 키가 크고 하얀 피부에 영웅적인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와는 반대로 적군인 중국인들은 기괴한 모습으로 변발을 한 움츠러든 아시아 인종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일본인이 아시아와는 다른 인종에 속하며 유럽인에 가까운 인종인 것처럼 보인다. 당시 일본인들은 청일전쟁에 대해 이러한 애국주의적 관점에 찬동했다. 신문에서는 총알이 폐를 관통하고 나서도 임무에 충실했던 전설적인 나팔수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전쟁 영웅의 공훈을 기사화했다.

이것은 식민지 정복을 위대함과 근대성의 궁극적인 표시라는 문명개화 사상의 어두운 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부국강병이라는 또 하나의 메이지 슬로건이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이지 군국주의의 정점은 1904년 진주만식 기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의 잔혹한 전쟁이었다. 당시 서구 강대국들은 일본에게 1895년 청일전쟁 승리의 전리품에서 손을 떼라고 강요했고, 러시아를 비롯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은 아시아로 진출 중에 있었으며, 일본인들은 그 파티에서 자신들이 제외되고 있다고 느꼈다. 일본군은 먼저 뤼순을, 이어서 쓰시마해협을 공격하여 그곳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쓸어버렸다. 40년 후의 미국인들처럼(태평양전쟁), 러시아인들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감히 서구 강대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1년 후, 사상 유례없는 잔혹함의 극치를 보인 전투에서 수십만의 일본인과 러시아인들이 사망했다. 뤼순 전투에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군대는 5만 8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노기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랴오양에서는 러시아가 8만 5천 명, 일본은 7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철도권을 얻었고 요동반도를 조차하였다. 더불어 일본의 분위기는 매우 흉폭하게 변했다. 국수주의자들은 러시아에 전쟁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쿄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신세대들은 호전적이며 광신적인 애국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당시 가장 뛰어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이 서구 문명 사회를 너무 빨리 소화하려고 애써 오다가 급기야 정신분열로 향하고 있다고 우울한 경고를 했다.

3. 에로, 그로, 난센스



1920년은 많은 일본인들에게 최고의 해였다. 지구 저편의 제1차 세계대전이 그들에겐 행운이었다. 유럽 열강이 싸우는 동안 일본은 배를 만들고 옷감을 수출하고 산업기계와 군수품을 유럽에 공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정상에는 미쓰비시와 스미토모 같은 대기업, 그리고 하부에는 수많은 소규모 작업장들로 일본에는 경제 붐이 일어났다. 또한 보너스로 몇몇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연합국에 참여하여 중국과 북태평양에 있던 독일의 식민지를 거머쥔 것이다.

한편 메이지 시대 후기에 드리워진 강압적인 분위기는 모두 걷혔다. 다이쇼 천황 요시히토(일본의 제 123대 왕, 재위 1912∼1926)는 재치가 없는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가 누렸던 경외를 상징적인 존재로서도 고취시키지 못했다. 1910년 7천 명이 학살된 한국의 3월 항거와 전쟁 이후 인플레이션과 짧은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권위 없는 황실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보통 선거, 차별 받는 부락민들의 해방, 여성의 권리 신장 등, 요컨대 그 당시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시기였다. '문명개화'의 중심이었던 유럽화된 도쿄의 긴자는 메이지 말기의 어두운 시기 이후 크게 변화했다. 나팔바지, 색깔 있는 셔츠에 펄럭이는 타이를 맨 장발의 젊은이들이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들과 버드나무 가로 길을 배회하곤 했다. 긴자에는 독일식 맥주홀과 파리지앵 스타일의 카페들도 많았다. 전차를 타게 되면 긴자의 동쪽에서 대중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지 아사쿠사로 가게 된다. 이곳은 최신 할리우드 영화가 아르 데코(1920∼30년대 서유럽과 미국에서 주된 양식으로 발달한 건축과 장식미술)식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줄지어 선 반라의 코러스 걸들이 오페라에서 다리를 차올리며 춤추는 곳이었다. 다이쇼의 도쿄는 베를린을 떠올리게 하는 수선스러운, 때로는 허무주의적인 쾌락설로 기록된다. 이는 훗날 에로틱의 에로, 그로테스크의 그로, 그리고 그 자체로 의미가 통하는 난센스로 요약되는 문화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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