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2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미학 오디세이 2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2003년 11월/376쪽/12,000원
*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 : 벨기에의 화가, 1925년경 초현실주의로 전환한 뒤,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분을 가졌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이 주로 꿈이나 무의식을 주제로 삼은 데 반해, 언뜻 보기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마그리트의 작품은 실은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 위에 서 있다. 실제로 그는 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자신이 작품을 통해 철학을 한다고 믿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조건, 사물의 교훈, 말과 사물. 마그리트도 에셔처럼 이율 배반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글머리에 - 굿모닝 헤겔
존경하는 헤겔 선생.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은 예술이 종말을 고할 거라고 예언하셨는데, 유감스럽게도 선생의 예언은 빗나간 거 같군요. 예술은 사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 더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온갖 유파들이 명멸하고, 사람들의 생활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도 날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추신 : 약오르시죠?
먼저 내가 예술의 종말을 얘기했을 때,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이 자취를 싹 감춘다는 뜻이 아니었소. 내 말은 예술이 더 이상 진리가 생기는 결정적인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었소. 당신이 말하는 그 현대 예술이란 건 나도 이미 봤소. 내 생각이 맞지 않았소? 그 괴상망측한 예술들은 더 이상 진리가 발생하는 장소이기를 그친 것 같던데……. 안 그렇소?
존경하는 헤겔 선생! 현대의 상황을 몰라서 그러시는 거 같은데, 지금 종말을 맞고 있는 건 예술이 아니라 바로 철학입니다. 특히 선생의 철학은 온갖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죠. 이성의 독재, 총체성의 횡포 등등. 선생의 철학에 퍼부어지는 욕설만 다 모아도 족히 책 한 권은 될 겁니다. 사실 인간의 ‘이성’이란 게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겁니까!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선생과 반대로 ‘철학의 종언’을 얘기하더군요. 예술이야말로 진리가 발생하는 장소라나요? 그래선지 요즘 철학자들은 모두 시인을 닮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철학은 시(時)가 되고……. 외려 지금이야말로 예술의 시대가 아닐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현대 예술 - 가상의 파괴
이제 우리는 현대 예술의 몇 가지 흐름에 대해 살펴보게 된다. 현대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성’이 파괴된다는 데 있다. 이제 그림은 현실에 있는 어떤 것의 ‘재현’이기를 그친다. 왜? 파울 클레는 “현실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더 추상적으로 된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어쨌든 이제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한다. 이제 예술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세잔의 두 제자
헤겔이 예술의 종언을 얘기했을 때, 그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만약 그가 정말로 그의 시대 이후에 모든 예술이 사멸할 거라고 믿었다면, 유감스럽게도 그의 예언은 분명히 빗나갔다. 예술은 여전히 살아 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헤겔이 예술의 모범으로 생각했던 그런 유의 예술이 종말을 고한 건 사실이다. 그의 예언대로 이념과 물질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고 있던 고전적 예술은 수명을 다하고, 이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예술의 시대가 시작된다. 현대 예술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각은 혼란스러운 것 : 세잔은 인간의 지각이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투시원근법처럼 소실점을 중심으로 모든 걸 질서정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고 한다. 시시각각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단편들은 산만하고 혼란스럽다. 어떻게 하면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여 이것들을 하나의 구조적 전체로 통합시킬 수 있을까? 여기서 세잔은 시각적 단편들을 마치 모자이크의 단편처럼 취급하여, 그림 속에 이 조각들을 하나의 구조적 전체로 짜 맞추려고 했다.
피카소 : 이렇게 모자이크 단편을 쌓아올려 대상을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은 입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입체주의자들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해서 다시 종합하려 했다. 그들을 입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세잔의 방법을,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을 여러 시점(가령 전후좌우)에서 본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것들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려고 했다. 물론 이는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의 말대로, 세잔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사실 세잔이 화면을 모자이크처럼 구성한 것은 지각 자체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2차원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사물의 표면 그 너머에 있는 ‘사물 그 자체’를 그리는 데 있었다. 때문에 혼란스러운 지각의 편린들을 질서정연하게 정돈해 ‘사물’을 드러내는 것 - 이게 바로 세잔이 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는 대상을 제시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이 보인다. 대상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형태의 배열! 여기서 우리는 피카소가 현대 추상예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티스 : 피카소가 세잔에게서 평면을 기하학적 단편들로 처리하는 법을 배웠다면,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세잔에게서 또 다른 측면, 즉 풍부한 색채와 빛나는 표면을 발견하였다. 마티스는 현대 추상예술에 또 하나의 특징을 더한다. 이제 색은 더 이상 대상에 종속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 대상에서 해방된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채를 해방시켰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말대로, 이제 이 두 사람은 ‘위대한 목표’를 지향하기 시작했고, 결국 현대 예술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 : 마지막으로 한마디. 모더니즘 예술의 세 가지 현상을 흔히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라고 한다. ‘추상’예술은 대상의 구체적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을 말한다. 여기엔 입체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네덜란드의 데 스틸(De Stijl) 등의 흐름이 들어간다. ‘표현’ 계열의 예술은 대상보다는 주관의 내면적 감정을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형태가 왜곡되고 원색 위주의 강렬한 색채가 사용된다. 이 두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물론 피카소와 마티스다. 한편 ‘레디 메이드’란 글자 그대로 ‘기성품’으로, 가령 시장에서 산 물건에 사인을 해서 예술 작품이라 우기는 거다. 이 방법은 다다이스트들이 즐겨 사용했다. 이것이 20세기 예술의 세 가지 커다란 줄기다. 아,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전통적인 화법으로 현실이 아닌 환상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초현실주의.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호앙 미로(Joan Miro, 1893~1983),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르네 마그리트…….
가상의 파괴
이제까지는 우리는 시각적 가상의 역사를 추적해왔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가상의 역사에 또 한 번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가상은 파괴된다. 이미 물질세계를 넘어서려 했던 중세 예술은 자연의 대상이 가진 원래 형태나 색채에서 벗어나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대상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현대에 들어오면 예술은 더 이상 무언가의 가상이기를 그친다. 이제 그것은 다른 것이 된다.
형태와 색채의 해방 : 대상성의 파괴는 형태와 색채의 해방을 가져온다. 이제 형태와 색채는 대상을 재현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게 된다. 예술의 과제는 더 이상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색조의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위해 화구통 속의 내용물(물감)을 어떻게 조합하느냐다.
음악을 향하여 : 대상성에서 해방되어 형태와 색채의 자유로운 배열이 될수록, 회화는 점점 더 음악을 닮아간다. 왜? 음악 역시 전혀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 음표들의 자유로운 배열이니까. 실제로 클레의 작품은 ‘음악성’을 띠고 있어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은 그의 색조에서 미묘한 음조(tone)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칸딘스키 역시 의도적으로 회화를 음악에 접근시키려 했다. 그의 저서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그는 회화를 두 부류로 나누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순한 형태에 종속되는 단순한 구성으로, 나는 이를 선율적 구성이라 부른다. 둘째는 복합화된 구성으로서, 이는 주요 형태에 여러 형태들이 종속된 구성이다. 이 복합화된 구성을 나는 교향악적 구성이라 부른다.
오브제 : 칸딘스키에 따르면 점, 선, 면은 회화의 세 가지 요소다. 다 빈치는 점, 선, 면, 체(體)를 얘기했다. 양자를 비교해보라. 칸딘스키의 얘기엔 ‘체’가 빠져 있다. 뭔가 시사하지 않는가? 더 이상 점, 선, 면이 합하여 구체적 형체를 이룰 필요가 없다! 대상을 재현하려 했던 고전적 회화는 재현 대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였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은 더 이상 그 무언가의 ‘기호’이기를 그친다. 기호의 성격을 잃은 이상, 작품은 논리적으로 일상적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이름다운 사물(object)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현대 예술의 오브제 화(化)가 시작된다. 원래 ‘오브제’란 예술에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끌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 :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예술 작품의 정보 구조를 우리는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령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파리스의 심판>을 생각해 보라. 우린 이 작품 속의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이게 바로 그 작품의 ‘의미 정보’다. 이제 이 내용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나아가 그림 속에 보이는 형체들이 인물이며, 나무며, 들판이라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려라. 그럼 그림 속엔 순수한 형태와 색채만 남는다. 이게 바로 작품의 ‘미적 정보’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알겠는가?
위로부터의 미학 - 인간의 조건(예술적 소통 체계 1)
이제부터 우리는 현대의 예술론들을 살펴보게 된다. 먼저 우리는 예술을 하나의 소통 체계로 간주하고, 그 체계를 이루는 여러 지절(枝節)들을 더듬어가게 된다. 과연 ‘예술’은 그 중에서 어느 지절에 숨어 있을까? 예술적 소통 체계의 지절들을 연구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그걸 크게 철학적 방법과 과학적 방법으로 나누자. 여기에서는 먼저 철학적 방법들을 살펴보게 된다. 철학의 영원한 주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다. 현대 철학도 다르지 않다. 현대 미학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자들의 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작해볼까?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예술은 정보 소통의 과정이다. 무슨 정보? 아마 다른 매체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직 예술로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정보일 게다. 이걸 ‘예술적 정보’라 해두자. 우린 이미 앞에서 예술적 정보의 구조를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로 나눈 바 있다. 모든 소통엔 두 개의 끝이 있다. 정보를 보내는 발신자와 그것을 받는 수신자다. 두 사람을 매개해주는 매체도 필요하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해주는 매체를 전언(message)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전언을 만들 때 우린 어떤 약속에 따르는데, 이 약속을 약호(code)라 한다. 약호를 사용해 전언을 짜는 작업을 약호화(encode)라 한다. 반면 약호로 이 전언을 푸는 것을 해독(decode)이라 한다. 물론 약호화와 해독은 정반대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이 모델을 예술에 적용시킨다면 예술가는 ‘발신자’다. 그는 먼저 머리 속으로 작품을 구상한다. 이 구상을 디자인(design)이라 부르자. 이어서 그는 이 디자인을 물감, 음향, 신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물질적 형태로 구현한다. 이를 퍼포먼스(performance)라 부르자. 이는 일종의 ‘약호화’로 볼 수 있다. 작품이 완성되면, 작가는 이를 청중, 관객, 독자에게 발송한다. 이때 작품은 예술가가 전달하려는 예술적 정보의 담지체, 즉 ‘전언’인 셈이다. 이렇게 작품을 감상(지각)하는 건 일종의 정보 ‘해독’이다. 이럭저럭 여기에 성공할 경우 예술가의 머리에서 떠난 정보는 마침내 목표인 ‘수신자’의 머리에 도달하고, 이로써 예술적 소통은 완수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수신자가 예술언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예술적 소통에 사용되는 ‘약호’다. 약호를 모르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동일한 대상이라도 예술언어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묘사되는가? 자,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에 비평을 첨가하자. 비평은 예술적 소통 체계의 방향을 조정하는 일종의 피드백(feedback) 메커니즘으로 볼 수 있다. 근사하지?
예술가의 직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최후의 만찬〉에 대해선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거다. 이 그림이 그려질 때의 이야기다. 그림 제작을 맡아 이곳에 온 다 빈치는 여러 날 동안 붓도 대지 않고, 그림을 그릴 벽면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의아하게 생각한 수도원장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원래 고상한 천재성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외부적인 작업을 거의 안 할 때 사실은 가장 활발하게 발명을 해내는 법이오.” 이 말보다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건 없다. 그에게 예술 작품은 우리 눈앞에 있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다. 그건 예술가의 머리 속에 있다. 르네상스인들이 ‘디자인’이라 불렀던 것, 말하자면 예술가의 머리 속에 떠오른 구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 작품이다. 이를 물질적 매체로 옮기는 육체적 작업(퍼포먼스)은 부차적일 뿐이다. 가령 소설가나 작곡가에게 예술적 착상이 떠올랐다 하자. 이걸 원고지나 음표로 옮기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예술은 직관 : 크로체에 따르면, 예술은 관조 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경제 활동이나 도덕적 행위 같은 실천 활동이 아니다. 따라서 예술적 구상을 물질로 구현하는 건 예술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건 실천 활동에 속한다. 하지만 어떤 인식? 예술은 상상력을 이용한 ‘직관적’ 인식이다. 그건 지성을 이용한 ‘논리적’ 인식과 구별된다. 어떻게? 논리적 인식(학문)은 보편자를 인식하지만, 직관적 인식(예술)은 개별자를 인식한다. 논리적 인식이 ‘개념’을 생산한다면, 직관적 인식은 개개 사물의 ‘이미지’를 산출한다. 하지만 ‘직관’이 도대체 뭔가? ‘지각’? 아니다. 지각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파악하는 걸 말한다. 그럼 ‘감각’? 이것도 아니다. 감각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질료로, 수동적인 것이다. 그건 짐승들에게도 있다.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뿐, 이미지를 산출하진 못한다. 하지만 직관은 능동적으로 이미지를 산출한다. 직관은 이렇게 위로는 개념과 아래로는 감각과 구별된다. 그럼 직관은 도대체 무엇인가? 직관은 ‘표상’ 혹은 ‘이미지’다. 철학적으로 표상이란 더 이상 감각은 아니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이미지다. 다라서 그것은 이미 감각의 수준을 넘은 ‘정신적’, ‘관념적’인 것이다.
직관은 표현 : 그런 직관을 기계적, 수동적, 본능적인 감각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진정한 직관은 곧 ‘표현’이라는 거다. 직관 활동은 더도 덜도 아니고 자기가 표현하는 만큼의 직관만을 갖는다. 표현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하는 건 이미 직관이 아니다. 여기서 표현으로 객관화한다는 건 예술적 착상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육체’ 노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건 중요하지 않다. 크로체는 표현을 물질적 구현(퍼포먼스)과 철저하게 구별한다. 퍼포먼스는 관조가 아니라 실천 활동이기 때문이다. 진짜 화가는 원래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법이다. 일단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면 거기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건 저절로 따라온다. 표현은 머릿속에서 완성되며,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다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