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된 이름, The Beatles
한경식 지음 | 더불어책
브라이언,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다희망의 불빛이 보인다1957년
존과 폴의 운명적인 만남비틀즈의 미국 상륙은 마치 한 편의 성공 시나리오를 미리 완성한 후 끈질기게 기회만을 엿보다가 한 순간에 터뜨려 버린 것처럼 그 시점이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침체 일로를 걷고있던 당시(1963년 말) 미국의 시대 상황과 절묘하게 딱 들어맞았다. 고사 직전에 있던 미국인들의 황폐해진 마음을 한줄기 시원스런 물줄기로 적셔주며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준 비틀즈 음악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이는 한마디로 대답할 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그 원천은 로큰롤이었다. 비틀즈는 자신들이 음악에 눈을 뜨게 해준 스승의 나라 미국의 로큰롤을 절묘하게 해석하여 독특하고 개성적인 사운드를 창조해 냈으며, 거기에 영국 특유의 셔플 감각을 가미한 스타일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서막을 열었다. 바야흐로 비틀즈를 통해 록의 르네상스 시대가 화려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던 로큰롤로 완전무장한 영국 출신 그룹에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링고스타
링고스타 - '전설의 4인조'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다레코드점을 운영하고 있는 스물 일곱 살의 청년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지쳤는지 그 역시 이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바로 그가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비틀즈라는 무명 그룹을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전설의 4인조'로 탈바꿈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다. 이처럼 새로운 흥미거리가 뭐 없을까 궁리하던 바로 그 무렵 그 앞에 비틀즈가 나타난 것이다.
11월 9일 브라이언은 비틀즈의 런치타임 세션을 보기 위해 캐번 클럽으로 갔다. 브라이언의 사고방식으로는 비틀즈가 무대에서 보여주는 갖가지 행동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연주할 때도 담배를 피우거나 뭔가를 정신없이 먹거나 서로 잡담을 하면서 장난을 쳤다. 또한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사람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고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넘쳐흘렀다. 브라이언은 야생마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자유분방한 그들의 무대 매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한 사람, 존 레논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연이 펼쳐지는 막간을 이용하여 브라이언은 비틀즈 멤버들을 만나기 위해 관객들의 틈을 헤집고 앞으로 나갔다. 그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조지였다. "엡스타인 씨,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브라이언과 비틀즈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2월 6일 비틀즈를 다시 만난 브라이언은 "당신들은 매니저가 필요하네. 내가 그 역할을 하면 어떨까?"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자신이 매니저가 되는 경우 귀가 솔깃해질 만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존이 그룹을 대표하여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이어서 폴이 물었다. "당신이 매니저가 되면 우리에겐 무슨 차이가 있나요? 우리가 연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겠죠?"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어쨌든 기쁘네." 그 말이 끝나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역시 존이 이 분위기를 깼다. "브라이언, 그러면 좋습니다. 우리의 매니저가 되 주세요. 계약서가 있습니까? 지금 사인하죠." 12월 10일 브라이언은 비틀즈 멤버들을 만나 계약서 내용에 원칙적으로 합의를 보았다. 브라이언은 비틀즈에 대한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그들을 스타로 만들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1964년 1월 14일 비틀즈는 공항에 모여든 수 천명의 환송을 받으며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 일행들은 당황했다. 공항에는 60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만이 비틀즈의 도착을 지켜볼 뿐이었다. 첫날 오후 공연의 주 관객층은 학생들이었고 저녁 공연은 턱시도나 이브닝 가운을 입은 어른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주로 남성들이 객석을 메웠다. 설상가상으로 앰프가 고장나고 무대 뒤에서는 촬영금지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기자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들을 더욱 짜증스럽게 했다. 다음날 프랑스의 언론은 '시대에 뒤쳐진 그룹'이라는 등의 혹평을 서슴지 않고 해대며 '비틀즈 깎아내리기'에 열을 올렸다. 영국에서도 드디어 인기의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의기소침해 있던 멤버들에게 1월 17일 저녁 뜻하지 않은 희소식이 전해졌다. 〈I Want To Hold Your Hand〉가 미국 캐시박스 차트의 넘버원에 올랐다는 전보가 날아든 것이다. 멤버들은 물론 브라이언을 비롯한 일행들의 기쁨은 무엇에도 비할 수가 없었다. 올림피아 극장의 안팎은 미국의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소동이 벌어지자 비틀즈를 보기 위해 몰려든 프랑스인들로 인해 전회의 입장권이 모두 매진되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그리고 레코드점마다 비틀즈의 음반이 쫙 깔리고 대형 포스터가 나붙는 등 프랑스에도 뒤늦게 비틀즈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2월 3일 파리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와 노동허가증을 발급 받은 비틀즈는 2월 4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2월 5일 영국으로 돌아왔다.1967년은 비틀즈가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그룹으로서 마지막 불꽃을 피운 한 해였다. 그 해 비틀즈는 음악으로 한 번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비틀즈는 연초부터 새로운 앨범 작업에 전념했다. 2월 17일 싱글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을 발표했다. 이 싱글은 팝/록 역사상 최고의 싱글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는 그 해 비틀즈가 펼쳐 나갈 화려한 음악 세계의 서곡일 뿐이었다. 6월 1일『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온 세상은 잠시 숨을 멈춘 듯 했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킨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대중음악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 실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물론 '약물에 흠뻑 젖은 앨범'이라고 악평을 하거나 당시 멤버들이 푹 빠져 있던 LSD를 다룬 곡들의 집합체라고 비난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이 앨범을 통해 비틀즈는 진정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8월 29일, 브라이언의 갑작스런 죽음은 비틀즈 왕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였다.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9월 1일 그들은 폴의 집에 모여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폴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멤버들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순회공연을 중단한 이후 그룹의 결속력이 조금씩 와해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던 상황에 브라이언 마저 떠나 버린 지금 자신이 아니면 그룹이 깨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던 폴은 어떻게든 자신들을 한데 묶어둘 일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세 사람의 등을 억지로 떠밀다시피 하여 시작한 프로젝트가 바로 TV 영화『Magical Mystery』의 제작이었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영화는 완성되었고 마침내 12월 26일 BBC를 통해 영국 전역에 방송되었다. 그러나 영화 내용은 웬만한 비틀즈 팬이라도 끝까지 앉아서 지켜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음날 아침 각종 매스컴은 온갖 혹평을 퍼부어대며 데뷔 이후 줄곧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비틀즈에게 처음으로 실패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한 한 그들은 천재였다. 그들은 11월 24일에 발표한 싱글〈Hello, Goodbye/I Am The Walrus〉로 연말 인기 차트를 석권하며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지었다.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해산한 해는 1970년이고 비공식적으로는 1969년이었지만 사실상 비틀즈의 종말은 1968년에 찾아왔다. 외관상은 변함없이 새로운 싱글과 앨범을 발표하거나 애플 사 설립 등 여러 프로젝트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해 멤버들의 관계는 악화되어 나중에는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벌어져 그룹은 거의 분열 상태나 다름없었다.1964년 2월 7일 오후 1시 20분 팬 아메리칸 항공의 PA101편에 탑승한 비틀즈 일행은 뉴욕 케네디 공항을 향해 떠났다. 조지를 필두로 존, 폴, 링고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자 공항이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3천여 명의 10대들이 질러대는 고함소리로 공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2월 8일 아침 미국의 모든 신문의 1면은 비틀즈의 도착을 알리는 기사로 거의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바야흐로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드디어 2월 9일의 아침이 밝았다. 오후에 《에드 설리번 쇼》 촬영이 시작되었다. 에드 설리번의 소개로 등장한 비틀즈는〈All My Loving〉으로 포문을 연 다음〈Till There Was You〉,〈She Loves You〉로 728명의 방청객들과 7,300만 명의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쇼의 후반부에 다시 출연한 비틀즈는〈I Saw Her Standing There〉, 〈I Want To Hold Your Hand〉로 미국인들을 완전히 녹아웃 시켰다. 이 방송은 20세기 대중음악사의 최고의 순간으로 손꼽힐 만큼 대중음악의 지평을 새롭게 펼친 일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2월 11일 워싱턴에서 첫 번째 미국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뉴욕에 폭설이 쏟아져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는데 기차 안은 취재기자들로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역에 도착하자 2천여 명의 팬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일찌감치 매진 사태가 벌어진 콜리시엄에는 8,092명의 관객들로 꽉 들어차 이미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고 362명의 경관들이 동원되어 있었다. 오후 8시 31분에 무대에 오른 비틀즈는〈Roll Over Beethoven〉등 12곡을 차례로 들려주며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2월 12일 기차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멤버들은 또 다시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역에는 무려 만여 명의 10대들이 비틀즈를 보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프라자호텔로 들어간 그들은 쉴 틈도 없이 다음 행사장으로 가기 위해 또 한 번 홍역을 치러야 했다.
비틀즈 멤버들이 도착한 곳은 카네기 홀이었다. 1964년 2월 12일 오후 7시 45분과 11시 15분 카네기 홀에서 비틀즈의 역사적인 두 번의 공연이 펼쳐졌다. 2,9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카네기 홀의 입장권은 1월 27일에 예매되었으나 불과 40분만에 매진되어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난리가 벌어져 무대 위에 임시로 50석의 좌석이 만들어지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여튼 미국에서 비틀즈의 인기는 끝도 없이 계속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2월 16일 오후 8시부터는 비틀즈가 두 번째로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가 방송되었다. 마이애미 비치 도빌 호텔에는 무려 3,500명의 관객들이 몰려들었고 미국 전역에서는 7,000만 명이 이날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비틀즈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무력감과 절망감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침체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2월 21일 비틀즈는 미국에서의 추억을 간직한 채 팬암 121편에 몸을 싣고 런던으로 향했다. 이제 온 세상은 그들의 것이었다. 약 7년 전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리버풀의 말썽꾸러기들이 모여 재미 삼아 시작했던 밴드에 의해 마침내 대중 음악계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었다. 비틀즈의 시대가 활짝 나래를 펴는 순간이었다.그 후의 이야기
비틀즈 출현의 역사적 의미1964년
폭풍전야야! 미국땅이 보인다1970년 1월 3일과 4일 폴, 조지, 링고 세 사람은 조지의 신곡〈I Me Mine〉을 레코딩하기 위해 EMI 스튜디오에 모였다. 존은 덴마크로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이틀 간의 세션이 비틀즈사에 있어서 마지막 레코딩 세션이 되어버렸다. 멤버들 모두 솔로활동에 파묻혀 지내고 있던 3월 6일 비틀즈의 마지막 싱글〈Let It Be/You Know My Name(Look Up The Number)〉가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폴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재편집한 디스크에 수록된 곡 중 특히〈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듣는 순간 폴은 아연실색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자신들의 제작의도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오버 더빙이 시도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여성 코러스가 리믹스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만든 곡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 맥이 빠져버린 폴은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하고 비틀즈를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4월 10일 전 세계 비틀즈 팬들을 엄청난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 소식이 전해진다. 4월 10일자 「데일리 미러」에는 '폴, 비틀즈를 떠나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일주일이 지난 4월 17일 폴은 솔로 앨범『McCartney』를 발표하며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5월 8일 레코딩 한지 거의 일 년 반만에 앨범『Let It Be』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동명의 영화가 미국에서는 5월 13일, 영국에서는 5월 20일에 각각 개봉되었다. 그러나 비틀즈는 없었다. 리버풀의 무명 밴드로 출발한 후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그룹으로 성장하며 1960년대 사회 현상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던 비틀즈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들의 음악에는 멤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파워가 실려 있었고, 그들의 무대 매너는 리버풀의 그 어떤 그룹도 흉내 낼 수 없는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1960년 12월 27일은 비틀즈 사에 있어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대단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 날은 리버풀에 비틀마니아가 시작된 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틀즈는 그 날 리버풀에 있는 리더랜드 타운 홀에 출연했다. 정식 광고를 내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함부르크에서 온 비틀즈'라는 내용으로 그들의 출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급히 제작되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은 비틀즈가 그저 그런 독일 그룹일거라고 짐작했다. 비틀즈가 무대에 올랐을 때 손님들은 단지 외국인 그룹이라는 호기심만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폴이〈Long Tall Sally〉로 포문을 열자 홀 안은 갑자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손님들은 비틀즈를 보기 위해 한꺼번에 무대 쪽으로 몰려들었다. 춤을 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처음 보는 비틀즈란 그룹의 공연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소녀들의 괴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건 분명 비틀마니아의 시작이었다. 그들에게 1960년은 정말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그 중에서 함부르크에서 치른 혹독한 경험은 향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성공에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된다.링고는 1940년 7월 7일 리버풀에서 가장 거친 지역으로 악명 높은 딩글 구 마드린 스트리트 9번지에서 태어났다. 링고는 힘겹게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 공립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라는 별로 명예롭지 못한 훈장을 얻게 되었다. 링고가 드럼 연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54년 무렵이었다. 1959년 11월, 링고는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라는 그룹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이 그룹은 리버풀의 최고 인기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링고가 비틀즈 멤버들을 알게 되어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기 시작한 것은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즈가 함부르크의 카이저켈러 클럽에 출연했을 때부터였다. 날이 갈수록 비틀즈 멤버들과 링고의 유대관계는 더욱 깊어져 갔고1962년 어느 날 비틀즈로부터 유혹의 손길이 뻗쳤다. 링고는 거의 동시에 킹사이즈 테일러 앤 더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