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가 된 이름, The Beatles
한경식 지음 | 더불어책
존 레논1940년 10월 9일 저녁 6시 30분, 리버풀의 옥스퍼드 스트리트 산부인과에서 존 윈스톤 레논(John Winston Lennon)이 태어났다. 존은 1945년 11월 12일 웨이버트리 구 모스피츠 레인에 있는 모스피츠 레인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퇴학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다음해 4월 5일 더브데일 초등학교로 전학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존은 타고난 문제아로 알려졌다. 존은 초등학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난 줄곧 싸움질만 했다. 상대가 나보다 커도 심리적인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싸움에서 이겼다. 난 이기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들을 위협했다." 존은 성적이 우수한 편에 속했다. 특히 미술 과목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존은 지나칠 정도의 독서광이었다. 존의 독서열이 훗날 그가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나〈I Am The Walrus〉등과 같은 노래들을 만들어 내는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52년 9월 존은 쿼리 뱅크 하이스쿨에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문학에 범상치 않은 소질을 보여주었던 존은 쿼리 뱅크에서도 재치있는 글 솜씨와 그림 솜씨로 평소 그를 우습게 보았던 선생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훗날 『In His Own Write』나 『A Spaniard In The Works』와 같은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The Daily Howl(나날의 외침)』이라고 제목 붙인 존의 노트를 보면 그 답을 알 수가 있다. 수업시간 책상 밑으로 돌려가며 존이 직접 그리거나 적어놓은 그림과 글을 몰래 보던 반 친구들을 배꼽 쥐게 만든 것은 그의 탁월한 유머 감각과 문학적인 자질이 뒷받침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앞으로 존이 펼쳐 보일 비상한 능력을 깨달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거나 존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인생 항로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존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쿼리멘존의 인생에 한줄기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그를 비쳐주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음악이었다. 어린 시절 존은 라디오를 들으며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그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1956년, 훗날 '로큰롤의 제왕'이라고 불리게 될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은 어린 존의 운명을 바꿔 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훗날 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의 삶을 바꿔버린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Heartbreak Hotel〉이라는 노래 제목이 왠지 엉터리처럼 들렸다. 곡목도 촌스럽게 들렸지만 그때는 그의 이름도 이상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전에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정말로 환상적이었다." 또한 그는 "엘비스 이전에 내게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1956년 초, 영국 전역은 젊은이들의 음악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폭발시킨 로큰롤 열풍의 중심에서 가장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기타였다. 기타에 정신이 팔려 버린 존은 기타 레슨을 받아 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서 배우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던 존은 이내 그만 두어 버렸다. 존은 한창 기타에 열을 올리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기타를 손에 넣었지만 조금 치다가 그만두고 그러다 다시 치기를 반복했다. 기타를 어느 정도 치는 데 2년은 걸렸다. 나는 여기저기서 귀동냥이나 곁눈질을 하면서 기타를 배웠다."
존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뜻밖에도 어머니 줄리아였다. 어렸을 때 밴조를 배웠던 줄리아는 존에게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존이 코드를 익힐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존이 노래 가사를 적을 수 있도록 레코드를 느리게 틀어주곤 했다. 존은 자신이 제대로 연주할 수 있었던 첫 번째 곡은 어머니로부터 배운〈That'll Be The Day〉였다고 항상 말할 정도로 존이 앞으로 펼쳐나갈 음악 인생에 있어 줄리아의 역할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 크게 작용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성 팬이던 줄리아는 음악 세계에 점점 더 깊게 빠져들고 있는 존을 진심으로 격려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주변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존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그의 어머니가 없었다면 어쩌면 비틀즈 신화는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음악에 대한 존의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늘어나고 있는 스키플 밴드의 탄생에 자극을 받은 존은 자신도 쿼리멘이라는 이름의 밴드를 만들었다. 쿼리멘의 라인업은 기타에 존 레논과 에릭 그리피스, 밴조에 로드 데이비스, 워시보드에 피트 쇼튼, 티-체스트 베이스에 렌 개리, 그리고 드럼에 콜린 핸튼이었으며 리드 보컬은 언제나 존이었다. 존이 리드 보컬을 맡은 이유는 노래를 가장 잘 하기도 했지만 그룹의 리더로서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의 고집으로 한참 인기몰이에 들어간 로큰롤이 점차 그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처음에 쿼리멘의 주요 레파토리는 스키플 음악이었다. 여섯 명의 멤버들은 자신들이 향후 무엇을 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자신들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멤버들의 크고 작은 갈등은 항상 따라 다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악적으로 그들의 유대감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들은 지역에서 펼쳐지는 각종 스키플 콘테스트에 참가했는데 그중 1957년 6월 9일 리버풀의 엠파이어 극장에서 열린〈Mr. Star Maker〉라는 콘테스트의 지역 예선에 참가했을 때의 이야기만이 유일하게 전해진다. 쿼리멘의 여섯 명은 길게 늘어선 참가자들의 틈에 끼어 지루한 기다림 끝에 간신히 기회를 잡았으나 시간에 쫓겨 자신들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조차 못하고 오디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런 과정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쿼리멘, 특히 존에게는 누군가와의 운명적인 만남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폴 매카트니제임스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는 1942년 6월 18일 리버풀의 윌튼병원에서 태어났다. 1947년 9월 폴은 스탁톤 우드 로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폴의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며 모든 면에서 모범생으로 인정받아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폴도 꽤 장난이 심한 편이었다. 폴은 학과목 중에서 영작문과 미술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53년 9월 폴은 리버풀 최고의 명문고인 리버풀 인스티튜트에 입학했다. 폴은 초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성적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예의 바르고 차분한 성격으로 변함 없이 선생님들과 친구들로부터 인기 만점의 학생이었다. 특히 모든 일에 헌신적이고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폴은 어렸을 때 음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폴이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음악에 몸을 내던지기 시작한 것은 존을 비롯한 영국의 수많은 십대들과 똑같은 이유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은 어린 폴의 눈과 귀를 완전히 멀게 만들었다. 폴은 음악신문의〈Heartbreak Hotel〉에 대한 광고에 실려 있는 엘비스의 사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는 속으로 '그래 바로 이 사람이야, 드디어 메시아가 찾아 오셨네'라고 쾌재를 불렀다. 그 날 이후 폴은 완전히 엘비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기타에 대한 폴의 정열은 뜨겁게 타올랐다. 동생 마이클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형이 기타를 손에 쥐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었다. 그는 완전히 기타에 빠져버렸다. 식사나 그 밖의 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화장실이건 욕실이건 장소에 아랑곳없이 기타를 쳤다." 폴은 또한 인기가수들의 뒤를 열심히 따라 다녔다. 폴은 처음에는 스키플에 관심이 있었으나 곧 싫증을 내고 오로지 로큰롤에만 열을 올렸다. 폴은 점점 더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폴이 나중에 존과 함께 만든〈A Day In The Life〉노랫말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86번 이층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던 폴은 매일 같은 버스를 타는 약간 무뚝뚝해 보이는 한 녀석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리버풀 인스티튜트의 일 년 후배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다.
조지 해리슨조지 해리슨은 1943년 2월 25일 리버풀 웨이버트리 구 아널드 그로브 12번지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지는 비틀즈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가정환경 하에서 부모님과 누나, 형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조지는 대단히 독립심이 강하고 누군가의 간섭을 매우 싫어하는 성격의 아이였다. 1948년 9월 조지는 더브데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모든 일을 문제의식을 갖고 바라보았다.
조지가 기타란 악기에 처음 호기심을 갖게 만든 사람은 플로리다 출신의 컨트리 앤 웨스턴 가수 슬림 휘트먼(Slim Whitman)이다. 조지는 잡지나 TV에서 기타를 치는 슬림 휘트먼의 모습을 보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으며 기타의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조지는 다양한 사운드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 역시 곧 엘비스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그는 공부와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 갔다. 그 무렵 한 학년 선배인 폴을 알게 되었다. 그때가 그가 열세 살이던 1956년 초 무렵이었다. 폴은 기타 연주에 있어 조지가 자신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직감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존을 알게 되기 이전까지 음악적으로 둘도 없는 파트너가 되었다. 둘은 서로에게 기타 코드를 알려주며 기타 연습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폴은 조지의 기타 실력에 혀를 내둘렀으며 조지는 폴의 노래 솜씨에 매료되었다.
1957년
존과 폴의 운명적인 만남폴은 리버풀 인스티튜트에서 평생을 함께 할 또 한 명의 소중한 친구를 만난다. 그가 바로 존과의 운명적인 만남의 가교 역할을 해 준 아이반 본이다. 아이반은 쿼리멘의 연주회에 가자고 폴에게 말했다.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날로 기억되고 있는 1957년 7월 6일, 쿼리멘이 연주를 시작한지 10여분 정도가 지났을 때 폴이 자전거를 타고 축제 마당에 도착했다. 폴은 독특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폴의 눈은 어느새 기타를 치는 존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기타를 치는 손놀림이 아니었다. 존은 밴조식으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어쨌거나 폴은 쿼리멘의 노래와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특히 그룹을 이끄는 확실한 리더처럼 보이는 존의 즉흥적인 무대 매너에 넋을 잃었다.
아이반은 멤버들에게 폴을 간단히 소개했다. 존은 폴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고 딴청을 부렸다. 어색한 침묵이 한참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깬 것은 폴이었다. 폴이 기타를 잡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는 순간 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존은 마침내 상대를 만났다고 직감했다. 존은 전기쇼크를 받은 사람마냥 멍하니 폴을 바라보았다. 존은 어느새 폴의 곁으로 바싹 다가가 있었다. 귀로는 노래를 듣고 눈은 열심히 폴의 손놀림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남을 칭찬하는 성격이 아닌 존은 폴의 능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존은 체면 따위는 던져 버리고 폴에게 한 수를 가르쳐 달라고 매달렸고 폴은 기타 코드를 그림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Twenty Flight Rock〉과〈Be-Bop-A-Lula〉의 노랫말까지 친절하게 적어주었다. 존의 입장에서 보면 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구세주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폴이 떠난 이후에도 존은 폴이 그려준 그림을 보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기타 연습을 했다. 존에게는 뜻깊은 하루였다. 그러나 그는 폴에게 쿼리멘의 멤버로 들어와 달라고 요청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존은 쿼리멘의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싶었고 자신에게도 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주일 정도가 지난 어느 날 폴은 쿼리멘 멤버인 피트를 링크스토 로드에서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이 함께 걷고 있을 때 피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폴, 존과 내가 함께 얘기한 건데 네가 우리 그룹에 들어오면 좋겠어." 폴은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레논-매카트니 콤비의 탄생새롭게 진용을 갖춘 쿼리멘은 10월 18일 컨서버티브 클럽에서 폴의 데뷔 무대를 가졌다. 공연이 끝난 후 폴은〈I Lost My Little Girl〉이란 자작곡을 멤버들에게 들려주었다. 존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직접 곡을 써보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던 존으로서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듯 했다. 약 6년 후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갈 레논-매카트니 콤비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두 사람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존이 일방적으로 폴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존은 폴에게 기타를 조율하는 방법부터 배웠다. 그러나 폴 역시 한가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발한 발상을 해내는 존의 자유분방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존은 폴이 알고 있는 기타 코드를 모두 전수 받았다. 두 사람이 기타 이상으로 정력을 쏟은 것은 곡 쓰기였다. 이 역시 폴이 존보다 한발 이상 앞서 있었다. 존은 폴이 쓴 곡을 모방하면서 나름대로 곡을 쓰기 시작했다. 존과 폴은 이 무렵 두 사람간의 협약을 맺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것은 당연하고 한 사람이 만들더라도 레논-매카트니와 같이 팀으로 발표한다는 것으로 이 약속은 비틀즈가 해산하는 그 날까지 끝까지 지켜졌다. 1957년 말부터 몇 년간 존과 폴 두 사람의 진정한 협력에 의해 수많은 곡이 만들어졌다. '레논-매카트니 오리지날'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폴의 노트는 하루가 다르게 두 사람의 곡으로 빼곡이 채워져 나갔다. 그러나 그 무렵 만들어진 대부분의 곡들은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다.
1958년
조지, 쿼리멘에 가입하다폴이 그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지 해리슨과 함께 나타났다. 그러나 존은 조지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친구를 그룹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왠지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지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쿼리멘의 뒤를 쫓아다녔다. 조지는 존을 그저 형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보고 배워야 할 대단한 인물로 영웅시하고 있었다. 그러한 열성에 탄복했는지 존은 조금씩 조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조지를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게 하거나 어떤 때는 기타 연주를 해 보라고 요청했으며 서로 좀 친숙해지자 멤버들 중의 누군가가 빠졌을 때는 조지에게 그 자리를 맡기는 등 점점 더 신뢰감을 보였다.
쿼리멘의 오리지널 멤버는 콜린 핸튼 뿐으로 나머지는 폴과 조지로 채워졌고 멤버 수도 네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 무렵 폴과 동급생인 존 찰스 로(John Charles Lowe)가 그룹을 드나들었다.(Duff 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탓에 존 '더프' 로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58년 늦은 봄 어느 날 존, 폴, 조지, 콜린, 그리고 존 '더프' 로 등 다섯 명은 필립스 사운드 레코딩 서비스를 찾아갔다. 그 곳은 자기 연주를 담은 레코드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일종의 데모 레코드를 제작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날 쿼리멘은 두 곡을 녹음했는데, 한 곡은〈That'll Be The Day〉이고 다른 한 곡은 폴과 조지가 함께 만든〈In Spite Of All The Danger〉로 두 곡 모두 존이 리드 보컬을 담당했다. 그들로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레코딩 세션이었다. 이 역사적인 음원은 1995년 11월 21일에 발매된『The Beatles Anthology 1』에 수록되어 전 세계 비틀즈 팬들을 환상의 세계로 안내했다.
1960년
너희가 함부르크를 아느냐?함부르크 인드라 클럽의 문을 들어선 순간 다섯 사람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모든 시설이 대단히 초라했으며 손님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어 분위기도 썰렁했다. 비틀즈는 이곳에서 1960년 8월 17일부터 10월 16일까지 평일은 4시간 반, 주말은 6시간 동안 무대에서 연주를 펼쳐야 했다. 비틀즈의 인드라 클럽의 첫 무대는 열 명도 되지 않는 손님들이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이 이런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대 변신이 요구되었다. 훗날 "나는 리버풀이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성장했다"라고 존이 말한 것처럼 향후 그들 앞에 놓여 있는 험난한 역경은 단지 음악적인 측면뿐이 아니라 멤버 개개인이 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틀즈는 무대에서 긴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서 다양한 레퍼토리를 발굴하여 자신들의 것으로 빨리 소화시켜야 했으며 존과 폴이 주로 담당했던 리드 보컬도 조지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주어야 했다. 존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 음악적인 취향이 달랐다. 그러나 우리의 서로 다른 취향은 음악적으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았다. 이는 우리의 성공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함부르크가 비틀즈를 급격하게 변모시킨 것은 그들의 무대 매너였다. 가장 먼저 존이 몸을 날렸다. 그는 무대에서 껑충껑충 뛰어다니거나 바닥을 발로 쿵쿵 내리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또한 손님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처음에 그것은 자신들이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소리였다. 그들은 손님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아랑곳하지 않고 욕이나 상스런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 그런 터프하고 야성미 넘치는 모습이 오히려 손님들의 시선을 자극하여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무대 매너는 대담해져 갔으며 비틀즈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느새 인기 그룹이 되어 있었다. 비틀즈가 함부르크에 온지 겨우 한달 보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음악적으로 크게 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