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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홀로코스트

로버트 S. 위스트리치 지음 | 을유문화사
인류가 기록을 시작한 이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대량학살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동부전선에서 독일 측은 유대인의 멸종 이상의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원래 폴란드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하거나 살해함으로써, 인종분포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대담한 계획에서 비롯되었다. 집시들도 몰살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집시들은 '사회위협'으로 간주되었지, 유대인처럼 독일과 '아리아인'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음모를 꾸미는 불구대천의 원수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1945년까지 유럽 유대인 가운데 3분의 2가 나치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거의 2000년 동안이나 유럽의 토양에 뿌리박혀 있던 유구한 유대문화의 잔재뿐이었다. '유대인 혐오증'과 '독일인 혐오증'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은 그저 한두 가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기독교적 반유대주의, 신낭만주의적 '민족적' 신비주의, 그리고 유대인과 다른 '이방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나치 이데올로기에 특히 악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는 실제로 유대인의 선민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내용만 바꾼 것으로, 어쩌면 유대인들에게 불리하게끔 기묘하게 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선택된 민족이 둘일 수는 없는 것이다. 히틀러가 구세주로 자임할 수 있으려면, 3000년 동안이나 선택된 민족으로 여겨졌던 바로 그 유대인이 사라져야 했다. 그러므로 유대민족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에 앞서 우선 유대교의 가치체계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근절되어야 했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독립을 상실하기 전에도, 이미 거의 2000년 동안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그리고 페르시아와 같은 거대한 고대 제국의 영향력에 저항하면서 살아남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기원전 142년에는 단명하긴 했지만 유대(Judea : 팔레스타인 남부에 있었던 고대 로마령)에서 유대인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전통 유산과 신앙을 포기하기보다는 순교의 길을 택했다. 기원 후 첫 세기에,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에서 분리된 한 종파로서 기독교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구세주를 찾는 분위기에서였다. 이 새로운 신앙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유럽이 점차 기독교화 되기 시작한 4세기 이후, 장차 나라를 잃고 떠돌 유대민족의 운명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었다. 중세 유대인들은 세속적 지배자와 기독교의 일정한 보호 아래에서 살아가도록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대가로 종교적으로 '저주받은 민족'이자 '하느님의 살해자'라는 낙인을 받은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 이 악랄한 저주의 주된 효과는 기독교 탄생의 모체인 유대교를 부인하는 데 있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에 이제는 기독교회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서 계약의 새로운 당사자로 등장했기 때문에, 유대교는 더 이상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나치의 인종학살 이전, 유대인이 최절정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바로 그 유럽사회에서 마녀사냥이 일어났다는 것은, 다시 말해 19세기 및 20세기는 독일인과 유대인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내다보이는 시점에서 전개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반유대주의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은 독일의 급진적 언론인 빌헬름 마르가 1879년 이보다 더 전통적인 형태의 기독교적 유대인 혐오증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면서부터였다.

1917년 11월에는 유대인의 근대사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의회민주주의의 실험장을 전복시켰다. 차르 체제의 몰락으로 인정된 러시아 유대인의 해방은 확고해졌지만, 1918년부터 1921년 사이에 유대인 역사에 최악의 박해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반볼셰비키인 백군 반동 집단과 우크라이나 민족 군대로서, 이들은 유대인을 공산주의혁명과 동일어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등식은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억측에 불과했지만, 혁명 초기 단계에서 요직에 있었던 볼셰비키 인물 가운데 유대인 출신이 유독 많았다. 대다수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공산주의에 공감하지 않았지만, 반볼셰비키의 박해자들이 보여준 반유대주의 만행에 놀라 결국은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이 볼셰비키 망령은 독일에 특히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드러났다. 1919년 이후에 새로 창설된 나치당은 볼셰비키들이 독일과 서방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을 열렬하게 선전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상상은 후에 홀로코스트의 주요한 추진력이 될 것이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승리를 구가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국가건설"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했다. 이것이 1922년 공식화되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그리고 1948년에 탄생하게 될 이스라엘 국가의 초석이 되었다. 밸푸어 선언으로 시온주의운동은 이제 국제 무대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통적인 유대사회가 근대화에서 보여준 분산적이고 해체적인 경향을 벗어나 새로 집결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전망을 열어주었다. 독일 및 다른 나라의 나치들, 민족주의자, 그리고 반유대주의자들은 시오니즘의 시도에 대해 공산주의에 대해서보다 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나치 정권의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역이야말로 달갑지 않은 유대인들을 처리할 적당한 쓰레기장일 수 있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이 정복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음모설에 자양분을 제공했다.바이마르공화국이 수립된 후 예상치 못한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황제의 퇴위, 공산주의혁명의 위협, 굴욕적인 베르사유조약, 그리고 서방연합국에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보상금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전후에는 독자적인 많은 인종적 반유대주의 일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그 중 가장 과격했던 분파가 바로 1919년 뮌헨에서 창당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혹은 나치당)이었다. 나치당 강령 제4조에는 '게르만족의 피를 받은 사람'만이 민족의 성원이 될 수 있고, 따라서 국적도 획득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히틀러에 따르면, 게르만 인종에게 가장 절실한 일은 위협적인 국제공산주의의 거점인 소비에트 러시아를 없애고 동구권에 더 넓은 생활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그리고 지정학적 이유에서 '유대인 교리인 마르크스 주의'와 전면 전쟁을 선언했다. 히틀러의 마음속에는 전쟁, 혁명 그리고 유대인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결부되어 있었다. 그가 이 정치 문제에 대해 최초로 발언한 것은 1919년 9월 16일에 보낸 '유대인 문제'에 관한 편지에서였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을 종교 집단이 아닌 '인종' 집단이라고 엄격하게 정의했다.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를 제창했고, 그것의 최종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이어야 한다."라고 그는 수신자에게 말했다.



나치는 유대인과의 전면전을 계기로 바이마르 '체제'를 완전히 타파하고 그 부패한 토대를 엄격한 인종차별적 독재체제로 바꾸고자 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에도 미치기 시작하자, 농촌과 도시의 중산계층 내에서 나치의 선전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32년 이들은 단연 제1당으로 떠올라 엄격한 민주체제 하에서는 최고의 역량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이적인 성장은 나치당이 하나의 통합정당으로 등장하여 '민족공동체'라는 포괄적인 이상에 호소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반유대주의는 지역적인 불만을 자극하거나 SA(나치돌격대)의 행동대원들이 느끼는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적 충동을 해소시키기 위해,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에 대한 거리투쟁을 강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예기치 않게도 히틀러에게 권력의 문을 열어준 것은 권위주의적 보수정치가들, 부유한 기업가들, 그리고 군 장성 등의 막후 책동이었다. 이들 보수주의 일당은 나치를 이용하여 공통된 목표와 소망을 이루려 했는데, 곧 바이마르 의회제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결국 좌파 정당을 와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항상 이 공화국을 혐오해왔던 반동 엘리트들은 히틀러를 길들여 자신들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내세우고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후 6년 동안 지난 1세기에 걸쳐 유대인이 독일의 사회와 문화에 통합되었던 과정이 모두 강제로 되돌려졌다. 나치들은 처음부터 테러정책을 숨기지 않았으며 정치적 반대자인 유대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나치 정권 동안 유대인 약 20만 명이 독일을 떠났고, 1938년에는 약 8만 2천 명이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길에 올랐다. 사실 유대인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원래 독일에서 유대인을 추방시키는 한 방식으로, 나치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이다. 제3제국조차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 지도부와 '이주' 협정을 체결하여, 유대인들이 자기 소유의 일부 자본을 독일 상품으로 바꾸어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많은 비판을 받은 이 협정으로 독일 유대인 수천 명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이러한 교육받은 인력과 기술 및 관리 능력이 유입됨으로써 그곳 유대인 사회는 탄탄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아직 유대인에게 남아 있던 시민권을 형식상 박탈하는 것이었다. 제국시민법은 누가 유대인이고 또 누가 유대인에 속하지 않는지를 새로 규정했다. 이러한 분류상의 차이는 생사를 가늠하는 문제가 될 것이었다.



1938년, 히틀러는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거의 20만 명에 달하는 번창한 유대인 공동체를 자랑하던 빈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을 신속히 강제추방하는 모범 도시로 탈바꿈했다. 1938년 6월에는 유대인 사업체에 대한 강제적인 '아리안화'를 규정하는 법안이 등장했다. 유대인을 대하는 분위기는 더욱더 흉흉해졌다.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 재산 몰수, 그리고 전반적인 정권 탄압 등으로, 당연하게도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서 떠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이는 민주 국가들에게 경고가 되었다.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목을 내세운 국제회의가 1938년 7월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렸다. 그렇지만 주최국이었던 미국이 일단 자국의 문호를 개방하기를 꺼려하고 있음을 밝히자, 에비앙 회의는 사실상 그것으로 끝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계획은 미 국무부가 자국으로 향하는 난민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자국의 이민법을 자유화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에 앞질러 선수를 치려는 수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나치 정부에 대한 비난도 원천적으로 삼갔다. 이 커다란 실책을 두고 말들이 많은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히틀러의 경멸에 찬 반응이었다. 이 회의의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그는 '이들 범죄자들'(곧 유대인)을 걱정하는 척하는 서구 민주주의(특히 영국과 미국)의 인간적 면모를 비웃었다. 실제로 나치 지도부가 에비앙 회의에서 얻은 것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정책을 점차 더 가혹하게 실행해도 된다는 확신이었다.소련과의 협정을 통해 폴란드를 차지하기로 결정한 독일은 이들 대다수 국민들을 예속민으로 전락시키려는 작업을 하나씩 추진해나갔다. 1937년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 및 영국 정부와 교섭을 추진하여 폴란드 유대인 100만 명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나치 지도부는 프랑스가 패배하자 이 섬에 대한 통제권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오게 되면 1차적으로 유대인 400만 명을 유럽에서 추방하여 마다가스카르 섬에 정착시킬 청사진을 담은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이 구상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시온주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나치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1940년 대영 제국에 대한 공세가 실패하자, 이 아프리카 해결책은 이내 조용히 유보되었다.



1941년 6월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집행된 처형사건을 보고하는 한 문서에는 수도인 키예프의 외곽에서 벌어진 악명 높은 바비 야르 대량학살도 포함되어 있다. 1920년대부터 히틀러는 동부에 생활공간을 창출하여 대독일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소련과의 전쟁을 꿈꾸어왔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이 서구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인종전쟁이 될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했다. 이제 문제는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이들 일련의 학살행위에서 어떠한 질적인 변화가 있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폴란드 침공을 감행한 때부터 1941년 6월까지는 히틀러의 인종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야심을 '시험해보는' 기간으로 볼 수도 있다. 공산주의 치하의 러시아는 최종 결전을 위한 결투장, 곧 '천년왕국의 전주곡'이 되었다. 폴란드의 인종차별정책은 독일 제국에 병합된 지역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추방하고 거기에 '인종적으로 순수한' 게르만족과 '독일 국민'을 이주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렇지만 독일이 공산주의 치하의 러시아를 침공하면서부터 급격히 변했다.



1941년 9월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독일 제국에서 동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에는 소련의 유대인만을 제거하려는 제한된 조치가 아니라, 유럽 전역에 걸쳐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었다. 첫 학살수용소가 폴란드 헤움노(독일명 콜름호프)에 세워져 1941년 12월 8일부터 유대인들을 가스로 살해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폴란드 동부의 베우제츠가 그 뒤를 따랐는데, 이곳은 상설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학살수용소였다. 학살수용소 가운데 최대 규모가 될 슐레지엔에 있던 아우슈비츠 - 비르케나우 수용소 단지는 가장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 상징물이 되었다. 이와 유사한 살해 설비가 폴란드의 다른 학살수용소 - 소비부르(1942년 5월), 트레블링카(1942년 7월), 그리고 마즈다네크(1942년 가을) - 에 설치되었으며, 그 설비의 유일한 목적이자 산물은 대량학살이었다. 제국중앙안전부의 과도한 추정에 따르면, 유럽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서 대상이 된 유대인은 1100만 명을 훨씬 상회했다.



히틀러는 '최종 해결'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아랍이 해방되는 시기가 오면 중동에서 독일의 유일한 목표는 "영국의 권력에 의해 보호를 받으면서 아랍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는 일"이 될 것이었다. 히틀러의 인종학살 계획 이면에는 중동 및 '유럽 밖' 민족까지를 포함하는 전지구적인 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소련의 유대공산주의만이 아니라, 영국의 '유대' 자본주의까지도 그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미국이 예기치 않게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2주일도 채 안 되어) 이 대립의 전지구화 및 '유대화'는 훨씬 더 확연해질 것이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은 세 강대국(미국, 소련, 영국)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투쟁은 사실 히틀러에게 단순한 선전도구나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 그 이상의 것이었다. 히틀러는 '유대인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인류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확신에 가득 찼고, 결국 처참한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완전히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히틀러는 (그가 자살하기 하루 전인) 1945년 4월 29일 베를린 수상 관저에 소련군의 폭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소위 '정치적 유언장'을 작성하도록 일렀다. 히틀러의 최후 유언장은 대량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함과 동시에 홀로코스트를 맨 처음으로 부인하는 문서였다. 그는 유대인과 벌인 전쟁을 자신을 방어하려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히틀러의 정책은 메시아적 과대망상증과 그릇된 종교성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홀로코스트는 사실상 그 논리적 귀결이었다.나치의 인종학살은 "금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살인 가운데 가장 극적이자 잔인한 사례"라 일컬어져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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