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 이마고
1부 두더지 - 적의 내부자가 되다
만주의 꼭두각시 - 조지 블레이크블레이크는 1948년 서울에 잠입하여 한국에 MI6(해외정보국) 기지를 처음 개설했던 MI6 요원으로, 1950년 북한군이 순식간에 서울을 휩쓸자 만주로 이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3년 후 출옥하여 홍콩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MI6은 그에 대해 또 한번의 수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MI6은 블레이크가 다른 정보국 요원과도 접촉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 정보국은 블레이크가 진정으로 충성을 바치던 곳, 바로 KGB(국가보안위원회)였다.
블레이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1922년 암스테르담에서 혈통 있는 유대인 가문의 자손 게오르게 베하르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청년 베하르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삼촌 헨리 큐리엘의 영향으로 완전한 공산주의자로 성장했다. 1940년 독일이 네덜란드 전역을 유린하고 있을 즈음 그는 막스 드 브리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네덜란드 저항세력의 제1세대 전사가 되었다. 그러나 게슈타포가 뒤를 추적해오자 영국으로 도주한 그는 이름을 블레이크로 바꾸고 영국에 자원 입대했는데, 정보 관련 업무를 하고 싶다는 소망과는 달리 문서 처리 업무를 맡았다. 당시 MI6에서 일하던 아이리스 피크라는 비서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집안에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자 분노와 좌절에 빠진 그는 자기의 인생에서 사랑을 빼앗아간 속물적인 기성 제도권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막역한 친구이기도 했던 헨리 큐리엘 삼촌은 복수를 제안했다. 블레이크가 영국 정보국에 침투하여 적당한 때를 기다리다 보면 가슴속에 맺힌 원한을 풀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MI6에 의해 발탁된 그는 1948년경 주요 보직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신설된 서울 기지의 책임자 자리였다.
본부에서 2년에 걸친 내근 업무를 마친 블레이크에게 MI5(보안국)가 중요시하는 기지들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으로 발령이 떨어졌다. 1955년에 KGB의 두더지로 활약하기에 베를린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베를린은 동서 첩보활동이 실질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베를린에는 온갖 정보국 소속의 요원들이 북적거렸으며, 적어도 6개국 이상의 정보기관이 그곳을 극히 중요한 해외기지로 평가하였다.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MI6과 CIA(중앙정보국)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는 경계선 아래로 터널을 뚫어서 소련의 중앙 통신망에 도청기를 설치하려는 비밀작전을 수행하느라 분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레이크와 소련 사이의 주요 연결수단인 베를린 내 정보 은닉처를 통해 이 작전에 대해 경고를 받은 KGB는 일단 그들이 터널을 파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민감한 사항이나 누설되지 말아야 할 내용은 도청되는 전화선으로는 일체 송신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CIA는 그 터널작전이 성공했다고 평가했지만 그렇게 가로챈 엄청난 정보들 가운데 정말로 쓸모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터널작전을 누설한 데 이어 베를린 기지의 지휘 아래 작전 중이던 자기가 알고 있는 MI6과 CIA의 모든 요원들의 명단을 KGB에게 넘겨주었다. 철의 장막 뒤에서 진행되던 MI6과 CIA의 비밀작전들을 거의 무력화시킨 KGB는 큰 이득을 얻었다. 하지만 서방 정보요원들에 대한 이런 대대적인 밀고는 필연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베를린 기지 내에 두더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불러왔다. 블레이크는 의혹이 증폭됨에 따라 내밀히 진행되기 시작한 내부 감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요령껏 이야기를 꾸며나갔다. 그리고 MI6 지휘부에 중동에서 일하고 싶다고 건의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져 1960년, 그는 레바논의 중동대학에서 아랍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 당시 블레이크 자신은 잘 몰랐지만 그는 이미 몰락 직전에 있었다.
블레이크가 레바논에 도착했을 때 역시 KGB의 비밀 첩보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폴란드 UB 소속의 간부 한 사람이 명백한 증거와 함께 CIA와 MI6 기지가 조지 블레이크라는 이름의 두더지에게 뻥 뚫려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일급 정보를 CIA로 전송하기 시작했다.
MI6의 수사관들은 블레이크를 런던으로 소환했고, 고등법원 판사들은 블레이크에게 징역 42년을 선고하였다.그것은 비(非) 전시의 첩보활동 관련 사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혹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복역한 지 6년 만인 1967년 블레이크는 감옥을 탈주하여 KGB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편안히 살 수 있었다. 그는 영국에 두고 온 아내와 두 자녀를 포기하고 소련 여인과 결혼했으며, 1990년에는 소련 텔레비전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CIA와 MI6의 요원 600명을 배반한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레 뽐냈다.
2부 전향자 - 망명으로 위세를 떨친 시한폭탄들
과대망상증 환자에게도 적은 있다 - 아나톨리 골리친1962년 1월, 몇 주 전에 핀란드 헬싱키에서 레지던트로 활동하던 골리친은 CIA로 망명하여 KGB가 전 세계에서 펼치고 있는 작전들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자신이 많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간단한 한 가지 사례로 몇 년전 모스크바 기지에 있을 때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의 일급기밀 서류들을 정기적으로 읽은 적이 있으며, 나토가 일급기밀에 해당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자마자 KGB의 두더지들이 그 내용을 모스크바로 전송했다고 수사관들에게 진술하였다. CIA에서는 KGB가 나토에 침투해 있다는 골리친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그에게 여러 건의 문서를 보여주자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 문서 더미에는 정교하게 위조된 문서들도 상당수 들어 있었는데, 골리친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위조문서들을 모두 골라냈다. 그 이후 2년에 걸쳐서 그는 서방세계에서 암약하는 다수의 KGB 요원과 정보 제공자들을 적발해냈다.
골리친은 1926년 우크라이나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나 군사학교를 거쳐 공산당 청년 운동단체인 콤소몰을 거쳐 KGB에 의해 발탁되었다. 2년 동안의 해외근무 후 그는 모스크바 센터로 돌아와 KGB의 가장 민감한 영역 중의 하나인 영미국에서 사건 담당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KGB가 적국인 서방의 내부에 침투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토의 일급기밀 서류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헬싱키로 발령을 받아 활동하고 있던 중 헬싱키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가족들을 데리고 망명을 선언했다.
그는 KGB나 CIA, MI6 등 어느 정보기관에서 일하든 그것을 그리 큰 문제로 여기는 인물이 아니었다. KGB의 영미국에서 일한 덕분에 골리친은 서방에 있는 KGB 정보 제공자 대다수를 개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오랜 기간 암약하던 KGB의 슈퍼 두더지를 확인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깊게 침투해 있던 흥미로운 인물 세 명이 폭로되자 서구의 방첩기관들은 크게 당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몸통 어딘가에서 그런 출혈이 있으리라 짐작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63년 후반 골리친은 KGB의 서방 침투작전에 관해 자기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은 후에는 서방의 정보기관에 KGB가 침투했다는 말을 내비쳤다.
CIA는 영국의 대규모 내부사찰작전(일명 플루언시, Fluency)을 돕기 위해서 골리친을 영국에 빌려주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임무는 영국 정보국의 작전과 망명자들이 폭로한 구체적인 실마리들을 점검해주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플루언시 작전의 탐문수사 결과와 골리친의 역할을 보도하는 비판적인 기사가 신문에 실리면서 종료되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 정보국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미국 정보국, 특히 CIA의 고위층에도 역시 KGB가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였다. CIA의 전설적인 방첩대장이기도 한 제임스 앵글턴은 슈퍼 두더지를 색출하기 위해서 CIA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결과적으로 CIA의 대 소련 작전은 마비 상태에 빠졌고, 100명이 넘는 CIA 주요 간부들의 첩보 경력이 간첩의 의혹 속에서 빛을 잃어갔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마녀사냥은 1964년 최악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1974년에 골리친의 영향력은 종지부를 찍었다. 당시 앵글턴이 CIA의 불법적인 국내 사찰을 주도한 것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해임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골리친은 여전히 영국과 미국의 정보국에 추종자들을 잔뜩 거느리고 있었다. 한때 초고에만 글자 100만 자가 사용된 초대작을 출간하였으나 출판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 후 골리친은 정보 활동의 무대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3부 전설 - 변신의 귀재들
진정한 제임스 본드 - 이언 플레밍1939년 31세의 나이에 가족의 사업인 주식중개업을 떠맡고 있던 이언 플레밍은 당시 NID(해군정보사단)의 책임자로 있던 존 카프리 제독을 만나 그로부터 해군 장교의 직함과 함께 그의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플레밍의 임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플레밍은 아이디어들을 짜내기 시작하였다. 그가 제안한 아주 흥미로운 계획 중에는 사회부적격자들을 중심으로 특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 적의 후방에서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게 하자는 것도 있었다. '제30강습부대'라 불린 이 게릴라 부대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잠입해 독일 병기들이 잔뜩 보관되어 있는 전술 거점을 찾아내기도 했다.
1941년에 플레밍은 뉴욕의 MI6 기지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미국을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 목적의 일환으로 이미 MI6 책임자인 윌리엄 스티븐슨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정관인 윌리엄 도노번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훗날 OSS(전략정보국)의 책임자가 되는 도노번은 영국처럼 미국도 중앙집권화된 민간 정보기관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정보기관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플레밍은 영국의 모델에 기초하여 그에게 상세한 도움을 주었다. 루스벨트는 일단 그 계획을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당시에 수립된 계획은 훗날 CIA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플레밍은 정보국 이곳저곳에 걸린 수많은 작전들에 관여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 해군의 해상 기록과 암호를 탈취하는 작전을 꾸몄고, 프랑스에서는 신형 항공기 엔진 도난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했으며, 전쟁 막바지에 독일에서는 18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각종 군사 기록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독일 해군의 문서 보관소를 통째로 장악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7년간의 스파이 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주식중개인의 자리로 돌아온 플레밍은 삶의 활기를 잃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타고난 재능을 한껏 발휘할 만한 새로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가 되어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을 되살려냈다. 이 모든 일들이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첩보의 역사에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바로 소설가로서의 명성 때문이다.
암호명 007로 통하는 그의 소설 주인공 제임스 본드 요원은 그가 알고 있거나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첩보원들의 성격을 종합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고, 본드의 극중 상관인 'M'은 스파이를 잡는 명수로 유명한 MI5의 고위 관료 맥스웰 나이트를 모델로 만든 인물이다. 플레밍의 예상과는 달리 제임스 본드의 활극 시리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특히 영화로 제작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4부 반역자 - 모반을 꾀한 자들
원자폭탄을 훔친 사나이 - 클라우스 폭스MI5에서 가장 뛰어난 방첩 수사관으로 알려졌던 스카던은 1950년 1월에 매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국과 미국의 방첩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푹스가 자인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당시 최고의 극비사항이었던 원자폭탄 개발계획은 소련 정보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로 푹스의 공작에 의해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푹스의 염탐행위를 확실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 정보의 출처를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내놓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 출처를 증거로 제시해 푹스를 기소한다면 서방 정보부가 은밀하게 진행 중인 최대의 기밀이 폭로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암호명 '베노나'.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정보부가 취급한 산더미 같은 무선통신문을 모조리 해독하려는 실로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서방의 대규모 암호해독작전이었다. 1949년경 암호분석가들은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기밀을 입수하려는 소련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는데, 그 공작의 핵심 정보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푹스였다. 그의 이름은 소련 정보부의 암호 통신문에서 연이어 지칭된 특정 인물의 신원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방 정보국은 일단 푹스를 직접 신문해보기로 결정했는데, 푹스의 자백 말고는 그를 잡아넣을 만한 법적인 방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피의자의 심리를 잘 '읽는' 것으로 유명한 스카던은 푹스로부터 거의 혼자 힘으로 소련에 원자폭탄을 넘겨주었다는 자백을 받아냈고, 1년 후 이는 법정에서 간첩행위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인정되어 결국 푹스는 1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베노나 암호해독작전의 간첩 사냥은 더 깊게 파헤쳐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푹스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1932년 19세의 나이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푹스는 장래가 촉망되는 명석한 물리학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33년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면서 푹스의 출세 가도 역시 급작스레 차단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도망친 푹스는 맹목적으로 소련을 추종한 완고한 공산주의자였으므로 그때부터 모스크바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1941년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된 푹스는 미국과 영국이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고 원자폭탄 개발의 본궤도에 오른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이 엄청난 비밀을 연합국인 소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국의 거물급 GRU(군사정보총국) 스파이 루스 쿠친스키에게 이미 포섭되어 있던 푹스는 프로젝트에서 나온 서류들을 빼돌려 마이크로필름에 찍어둔 다음 자신의 과학적 소견을 첨부하여 쿠친스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타가 공인하는 공산주의자였던 푹스가 원자폭탄 개발과 같은 극비 프로젝트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MI5 내부에 침투해 있던 한 KGB 두더지가 푹스의 공산주의 편향성이 간과될 수 있게 기록을 조작해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몇 년 후 밝혀졌다. 1945년 영국 정보부는 모든 공산주의자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는 문서를 입수했는데, MI5는 영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중에 소련 정보부에 넘어갔을 수도 있는 공산주의자를 한 명이라도 색출해내기 위해 그 서류들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MI5의 당시 조서에는 푹스를 조사했다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과오였다.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폭스는 1944년 무렵 폭탄 제조의 핵심 비밀을 소련에 건네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무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열쇠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내파 설계법이었다. 푹스가 제공해주는 정보에 목을 맨 GRU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요한 미국인 정보제공자들 중 한 명인 해리 골드를 로스앨러모스 근교로 보내 푹스와 순간적으로 접선한 후 그가 빼돌린 자료를 낚아채오게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 푹스가 모든 것을 자백하는 바람에 그가 해리 골드와 접촉한 사실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해리 골드는 미국의 첨단 산업기술을 빼돌리는 마지막 조직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는데, 거기서 주된 임무는 조직원들 사이를 오가는 연락책 역할이었다.
한편 1945년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FBI(연방수사국)에 접근한 한 조직원이 자신이 GRU 미주총책의 조수이며, 그의 산하 조직 중에는 산업기술을 훔쳐내는 거대 조직도 포함되어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 조직원 가운데 '줄리어스'라고 불리는 사내와 접촉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베노나 암호해독작전에 의해 첩보원 부부 한 쌍이 이번 원자폭탄 첩보작전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들의 친척 한 명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춰준 사람은 푹스였다. 용의선상에 오른 GRU 소속 미국인 정보제공자들의 사진을 쭉 훑어보던 푹스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접선해 정보를 건네준 적이 있는 골드를 알아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