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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 이마고
7부 불가사의한 존재 - 미궁에 빠진 수수께끼



두 번 변심한 스파이 - 비탈리 유르첸코8부 아마추어 스파이 - 첩보전의 또 다른 세계



대문호의 스파이 활동 - 어니스트 헤밍웨이1939년 31세의 나이에 가족의 사업인 주식중개업을 떠맡고 있던 이언 플레밍은 당시 NID(해군정보사단)의 책임자로 있던 존 카프리 제독을 만나 그로부터 해군 장교의 직함과 함께 그의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플레밍의 임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이었는데, 전쟁이 터지자 플레밍은 아이디어들을 짜내기 시작하였다. 그가 제안한 아주 흥미로운 계획 중에는 사회부적격자들을 중심으로 특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해 적의 후방에서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게 하자는 것도 있었다. '제30강습부대'라 불린 이 게릴라 부대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잠입해 독일 병기들이 잔뜩 보관되어 있는 전술 거점을 찾아내기도 했다.



1941년에 플레밍은 뉴욕의 MI6 기지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미국을 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이 목적의 일환으로 이미 MI6 책임자인 윌리엄 스티븐슨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정관인 윌리엄 도노번 사이에는 친밀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훗날 OSS(전략정보국)의 책임자가 되는 도노번은 영국처럼 미국도 중앙집권화된 민간 정보기관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정보기관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플레밍은 영국의 모델에 기초하여 그에게 상세한 도움을 주었다. 루스벨트는 일단 그 계획을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당시에 수립된 계획은 훗날 CIA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플레밍은 정보국 이곳저곳에 걸린 수많은 작전들에 관여했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 해군의 해상 기록과 암호를 탈취하는 작전을 꾸몄고, 프랑스에서는 신형 항공기 엔진 도난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했으며, 전쟁 막바지에 독일에서는 18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각종 군사 기록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독일 해군의 문서 보관소를 통째로 장악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7년간의 스파이 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주식중개인의 자리로 돌아온 플레밍은 삶의 활기를 잃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타고난 재능을 한껏 발휘할 만한 새로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가 되어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을 되살려냈다. 이 모든 일들이 소설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첩보의 역사에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바로 소설가로서의 명성 때문이다.



암호명 007로 통하는 그의 소설 주인공 제임스 본드 요원은 그가 알고 있거나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첩보원들의 성격을 종합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었고, 본드의 극중 상관인 'M'은 스파이를 잡는 명수로 유명한 MI5의 고위 관료 맥스웰 나이트를 모델로 만든 인물이다. 플레밍의 예상과는 달리 제임스 본드의 활극 시리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고, 특히 영화로 제작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비탈리 유르첸코는 1959년 KGB 요원으로 발탁되었는데, 방첩활동에 알맞은 적성을 인정받아 1961년경에는 소련 흑해 함대에서 KGB 부대를 지휘하는 중요한 작전 장교가 되었고, 1968년에는 해외 정보작전에까지 투입되었다. 미국 정보부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75년 KGB의 중요한 해외기지 중 한군데인 워싱턴 D. C. 주재 소련 대사관의 보안 담당관이 되면서부터였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모든 정보요원과 외교관들을 감시하는 것과 동시에 CIA나 FBI의 침투를 방지하는 임무를 맡으면서 그는 KGB의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었고, CIA와 FBI는 그들의 적수를 연구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 정보기관들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그가 소련 외교관과 결혼한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는 몬트리올에 살고 있었으므로 유르첸코가 연인과의 사랑을 위해 미국에서의 새 삶을 찾아 망명을 고려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예상이었다. 미국 정보기관들이 그런 식의 망명을 어떻게 주선해야 할 것인지 채 궁리를 마치기도 전에 당시 KGB 해외 정보총국의 선임 간부직을 맡고 있던 그는 미국 대사관에 나타나 캐나다행을 요청했다. CIA가 특파한 특수부대가 호위하는 가운데 이제는 알렉스라는 암호명을 가지게 된 이 스파이는 로버트 로드먼이라는 새로운 미국인 신분증을 지니고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유르첸코는 그녀에게 자신이 CIA에 전향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미국에서 자신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떠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하여 유르첸코는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 진행되는 KGB의 모든 작전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KGB 작전들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알고 있었던 그가 제공한 정보 가운데 충격적인 내용은 KGB가 미국의 정보기관 중 가장 은밀한 부분인 미국국가안전보장국에까지 침투하여 미국이 가장 은밀하게 감추고 있던 정보 관련 기밀을 누출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미국인들은 소련에서 수행하는 CIA의 작전들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밝히고, KGB가 미국, 서독, 캐나다 등 각국의 정부기관에 심어놓은 스파이들의 존재를 폭로했다.



하지만 망명의 진짜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이유 때문에 CIA의 일각에서는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CIA는 몇 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면서 일을 한층 꼬이게 만들었다. 당시 CIA 국장이었던 윌리엄 캐시가 추락해가는 CIA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유르첸코의 망명을 슬슬 누설한 것과 CIA의 일부 요원들이 유르첸코의 연인을 공공연히 조롱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르첸코는 1986년 9월 2일 밤, 경호원 두 명과 함께 워싱턴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불쑥 그곳을 나와 소련 대사관으로 가버렸다.



그가 돌아오고 이틀 후 소련 대사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유르첸코는 CIA가 자신을 납치한 후 약물을 투입하여 KGB에 관한 이야기를 자백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CIA에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CIA는 첩보 역사상 귀중한 망명자 가운데 한 명을 놓친 것에 대한 질타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었다. 한편 모스크바로 돌아온 유르첸코는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가 진짜 변절자였는지는 오직 유르첸코 자신만이 알고 있겠지만 정황을 살펴보면 그가 적어도 KGB의 계획적인 첩자는 아닐 거라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후 유르첸코는 KGB에서 계속 일하게 되었다.MI5에서 가장 뛰어난 방첩 수사관으로 알려졌던 스카던은 1950년 1월에 매우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국과 미국의 방첩대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푹스가 자인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당시 최고의 극비사항이었던 원자폭탄 개발계획은 소련 정보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로 푹스의 공작에 의해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푹스의 염탐행위를 확실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 정보의 출처를 법정에서 유죄의 증거로 내놓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 출처를 증거로 제시해 푹스를 기소한다면 서방 정보부가 은밀하게 진행 중인 최대의 기밀이 폭로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암호명 '베노나'.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의 정보부가 취급한 산더미 같은 무선통신문을 모조리 해독하려는 실로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서방의 대규모 암호해독작전이었다. 1949년경 암호분석가들은 원자폭탄 제조에 관한 기밀을 입수하려는 소련의 공작이 진행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였는데, 그 공작의 핵심 정보원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푹스였다. 그의 이름은 소련 정보부의 암호 통신문에서 연이어 지칭된 특정 인물의 신원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지게 되었다. 그래서 서방 정보국은 일단 푹스를 직접 신문해보기로 결정했는데, 푹스의 자백 말고는 그를 잡아넣을 만한 법적인 방책이 없는 상황이었다.



피의자의 심리를 잘 '읽는' 것으로 유명한 스카던은 푹스로부터 거의 혼자 힘으로 소련에 원자폭탄을 넘겨주었다는 자백을 받아냈고, 1년 후 이는 법정에서 간첩행위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인정되어 결국 푹스는 1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베노나 암호해독작전의 간첩 사냥은 더 깊게 파헤쳐 들어가고 있었으므로 푹스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1932년 19세의 나이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푹스는 장래가 촉망되는 명석한 물리학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33년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면서 푹스의 출세 가도 역시 급작스레 차단되고 말았다. 영국으로 도망친 푹스는 맹목적으로 소련을 추종한 완고한 공산주의자였으므로 그때부터 모스크바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1941년 원자폭탄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된 푹스는 미국과 영국이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하고 원자폭탄 개발의 본궤도에 오른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이 이 엄청난 비밀을 연합국인 소련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국의 거물급 GRU(군사정보총국) 스파이 루스 쿠친스키에게 이미 포섭되어 있던 푹스는 프로젝트에서 나온 서류들을 빼돌려 마이크로필름에 찍어둔 다음 자신의 과학적 소견을 첨부하여 쿠친스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타가 공인하는 공산주의자였던 푹스가 원자폭탄 개발과 같은 극비 프로젝트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MI5 내부에 침투해 있던 한 KGB 두더지가 푹스의 공산주의 편향성이 간과될 수 있게 기록을 조작해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몇 년 후 밝혀졌다. 1945년 영국 정보부는 모든 공산주의자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는 문서를 입수했는데, MI5는 영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중에 소련 정보부에 넘어갔을 수도 있는 공산주의자를 한 명이라도 색출해내기 위해 그 서류들을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MI5의 당시 조서에는 푹스를 조사했다는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은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믿기 어려운 과오였다.



1943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폭스는 1944년 무렵 폭탄 제조의 핵심 비밀을 소련에 건네줄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무기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열쇠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내파 설계법이었다. 푹스가 제공해주는 정보에 목을 맨 GRU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요한 미국인 정보제공자들 중 한 명인 해리 골드를 로스앨러모스 근교로 보내 푹스와 순간적으로 접선한 후 그가 빼돌린 자료를 낚아채오게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년 후 푹스가 모든 것을 자백하는 바람에 그가 해리 골드와 접촉한 사실까지 드러나고 말았다. 해리 골드는 미국의 첨단 산업기술을 빼돌리는 마지막 조직에서 스파이로 활동했는데, 거기서 주된 임무는 조직원들 사이를 오가는 연락책 역할이었다.



한편 1945년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껴 FBI(연방수사국)에 접근한 한 조직원이 자신이 GRU 미주총책의 조수이며, 그의 산하 조직 중에는 산업기술을 훔쳐내는 거대 조직도 포함되어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상관이 조직원 가운데 '줄리어스'라고 불리는 사내와 접촉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베노나 암호해독작전에 의해 첩보원 부부 한 쌍이 이번 원자폭탄 첩보작전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들의 친척 한 명이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맞춰준 사람은 푹스였다. 용의선상에 오른 GRU 소속 미국인 정보제공자들의 사진을 쭉 훑어보던 푹스가 로스앨러모스에서 접선해 정보를 건네준 적이 있는 골드를 알아본 것이었다.



FBI는 골드를 덮쳤고, 그는 모든 것을 자백한 후 다른 조직원들의 신원까지 모두 FBI에 불고 말았다. 푹스는 자신의 자백이 불러온 파멸적인 결과로 인해 괴로웠지만 그런 심경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1959년 출감한 그는 동독으로 이주하여 동독의 핵물리학 연구소에서 일했다. 1979년 은퇴할 때까지 묵묵히 연구활동을 했고, 그로부터 9년 후에 사망했다. 1933년에 소련의 핵물리학자들은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대체로 클라우스 푹스가 전해준 자료를 토대로 제조된 것이었음을 인정했다.ONI(해군성정보국) 정보기관 소속의 미국 해병대 대령 존 W. 토머슨 주니어는 그저 아마추어 스파이에 불과한 헤밍웨이가 일본인들이 미국을 공격할 거라는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1941년 봄에 극동지방을 여행하면서 들은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미국 해군을 공격할 날이 임박했음을 암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뒤에 터진 진주만 공격은 헤밍웨이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해주었다.



헤밍웨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채용된 또 다른 12명의 미국인들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스파이 역할을 자원했던 아마추어 스파이들이었다. 세상이 지금보다 단순했던 그 시대에 그들은 직업상 의무와 미국의 작은 정보기관을 위해 정보를 수집해주는 일을 결부시키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그들은 나름대로 미국이 보유한 실질적인 정보 역량이었다.



각국의 스파이들이 몰려드는 첩보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마주친 음모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동경한 헤밍웨이는 ONI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수집한 단편적인 정보 조각들을 건네주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헤밍웨이의 오랜 친구로 ONI에서 근무하고 있던 토머슨은 그에게 전 세계를 여행하다가 어떤 정보든 얻게 되면 자기에게 꼭 보내달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막상 그 정보를 가지고 오면 무시당하는 것에 실망하기는 했어도 자신의 애국 의무를 수행하고픈 열망을 가지고 있던 헤밍웨이는 에스파냐 내전이 끝난 후 쿠바로 피신해온 수십만 명의 에스파냐 난민들 사이에서 그런 일감을 찾을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그는 친구이자 당시 쿠바 주재 미국 대사였던 스프륄 브레이든에게 난민들 중에는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파시스트 동조자가 숨어 있다고 말했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브레이든에 의해 헤밍웨이는 국무성 정보부를 대표하여 신뢰할 만한 에스파냐 난민 조직을 구성하여 파시스트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조직원 중에서 몇 명을 선발하여 U 보트 사냥이라는 대담한 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이 작전에는 그의 유명한 40피트짜리 낚싯배 필라르 호가 주로 동원되었다.



헤밍웨이는 쿠바에서 이른바 인간 쓰레기에 해당하는 26명의 뒤죽박죽 인간들로 구성된 조직망을 만들었다. 삶에 찌들려 있던 그들은 헤밍웨이에게 약간의 돈을 받고 신나게 그 조직에 가담하였다. 한편 브레이든의 아낌없는 후원에 힘입어 필라르 호는 강력한 무전기와 구경 50밀리의 기관총 한 조 그리고 그 외의 소형 무기들을 탑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거느린 아마추어 '첩보원'들은 제대로 된 정보라고는 단 하나도 건져오지 못했으며, U 보트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게 그가 구성한 조직이 첩보계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바람에 미국의 정보기관은 중요한 정보작전에 다시는 아마추어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방침을 확실히 하게 되었다. 브레이든의 보호에도 불구하고 FBI의 거센 반대로 말미암아 결국 1943년 4월 헤밍웨이의 조직인 '파파의 엉터리 공장'에 대한 모든 지원이 중단되었다.



지원이 중단된 후에도 FBI는 헤밍웨이가 1961년에 자살할 때까지 그를 줄곧 감시했으며, 그의 신상에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기록한 수만 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나중에 이러한 감찰작전이 대중에 폭로되면서 그런 영역에서 FBI의 활동범위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FBI가 그간 저지른 수치스러운 작태가 방송을 타고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FBI가 수행한 대규모의 불법적인 국내 감찰활동은 결국 J. 에드거 후버 국장의 평판을 급격하게 악화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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