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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문화로 읽는 중국

박영환 지음 | 동아시아
어느 인문학자의 문화로 읽는 중국

박영환 지음

동아시아/2004년 5월/230쪽/9,000원



대륙이 좁은 중국

미국 대 중국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마디로 힘있는 강자와 힘없는 약자 간의 싸움의 연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속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다. 힘있는 나라는 언제나 자국의 주장이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주로 무력을 사용하거나 약한 상대국을 회유하려 한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나라는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내부적인 노력도 기울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다른 나라와 합종연횡(合縱連橫)을 추구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모자라는 역량을 보충하여 자국의 생존권은 물론 이익을 지키면서 강한 나라의 압력에 대응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 역사에서도 이런 모습은 심심찮게 발견된다. 전국시대 전국칠웅(全國七雄) 중에서 진(秦)나라가 가장 강성하였다.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었던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위(魏) 6국은 진나라의 압박에 위기감을 느끼며 대책 세우기에 급급하였다. 이때 소진(蘇秦)이라는 종횡가(縱橫家)가 출현하여 ‘합종항진(合縱抗秦)’ 주장을 설파한다. 즉 진나라를 제외한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결의였다. 소진의 주장에 여섯 나라는 적극 동조한다. 이때 위나라의 장의(張儀)가 친진(親秦) 정책인 ‘연횡(連橫)’을 주장하면서 소진의 반대편에 섰다. 연횡이란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와 기타 동쪽에 있던 나라 간의 연립을 말하며, 이들은 남쪽의 초나라에 대항하고자 했다. 당시 합종이 이루어지면 초나라가 강해지고, 연횡이 이루어지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다는 말이 돌았다. 합종이냐 연횡이냐에 따라 강국인 진과 초, 그리고 제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던 것이다. 결국 장의의 연행이 지속됨에 따라 진나라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으로 싸움은 끝났다.

나라 간의 합종연횡 정책이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어 흥미롭다. 중국과 미국은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사사건건 부딪치는 등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미국은 인권과 민주를 표방하면서 다방면으로 중국을 압박하였다. 그러던 중 미국 정찰기와 중국 공군기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게다가 최근 미국이 타이완의 천수이비엔(陳水扁) 총통 및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의 미국 방문을 허용한 일과, 부시와 달라이 라마의 만남은 중국을 극도로 자극했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 미국 중심의 새로운 틀을 짜려고 하는 부시 정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의 강압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우선 대내적으로 내수 촉진과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경제성장에 주력하고 있다.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 대국을 이루는 데도 소홀함이 없다. 대외적으로는 주변의 동아시아, 서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공고한 유대관계를 통하여 대외적인 영향력 강화를 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일찍이 베트남, 유럽, 나아가 제3세계인 아프리카까지 방문함으로써 미국의 압력에 대한 준비를 강화했다.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고 한다. 세계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해를 쫓아서 합종과 연횡을 거듭하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미묘한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리라.



변화의 중심에 서다

‘과학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흥시키자’

참혹한 인간성의 파멸을 불러온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홍역을 치른 중국은 1978년에 또다시 격렬한 권력투쟁에 휩싸인다. 화궈펑(華國峰)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은 집권하자마자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 정책이라는 모험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교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문, 사회과학 중심의 베이징 대학은 점차 첨단과학기술 분야에까지 학과를 확대하고, 1980년에는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이라는 전문 컴퓨터 제조업체를 설립하여 산학협동체제를 건립하였다. 동시에 이를 통한 학교 재원 마련도 추진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베이징 대학은 1998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은 기념행사에 이례적으로 국가주석인 장쩌민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 당정지도부가 대거 참석하였다. 당시 장쩌민 주석의 기념사를 통해 중국 정부가 한 대학의 개교기념 행사에 관심을 쏟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중국)의 현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적인 수준의 일류대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에 근거하여 그는 직접 베이징 대학에 적극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1952년 베이징 대학에서 분리되었던 베이징 의과대학을 2000년 4월 다시 베이징 대학에 합병하였다. 베이징 대학은 대규모 병원을 거느린 명실상부한 새로운 종합대학으로 거듭난 것이다. 변화의 움직임은 칭화 대학에서도 나타났다. 특히 1995년에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작은 기업들을 하나로 묶어서 칭화 대학 기업그룹을 발족시켰다. 이는 학교의 재원을 조달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실습현장이자 개발한 기술을 상품화하는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 정부는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과 교육을 통한 국가 발전(科敎興國)’, ‘세계 수준의 일류대학 육성’을 제창하면서 두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두 대학은 중국을 대표하는 대학으로 인식되었다. 외국의 국가원수들도 중국 방문 시 일반적으로 두 대학을 찾아 연설을 한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의 칭화 대학 연설 때문에 칭화 대학이 논란의 중심에 선 적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2월 21일 칭화 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였다. 그런데 중국 대학생들이 인터넷 상에서 부시 대통령의 연설을 받아들이는 칭화 대학 학생들의 태도를 문제삼고 비난한 것이다. 칭화 대학 학생들을 둘러싼 비판세력과 옹호세력 간의 온라인 상 논쟁은 그야말로 격렬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양국 간의 민감한 문제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은 동시에 부시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미국의 민주적 가치관을 소개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전한다. 이때 칭화 대학의 학생들은 부시가 소개한 미국의 가치관에 대한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실용적인 내용만을 가지고 질문에 임했다고 한다. 그 내용도 부시 대통령의 연설에 화답하듯 이미 제기된 타이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몇 차례 묻는 데 불과했다. 이러한 칭화 대학 학생들의 순종적인 태도가 많은 중국 대학생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전인 1998년에 있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의 베이징 대학 연설과 비교하면 정말 다른 반응임에 틀림없다. 클린턴은 당시 티베트 문제, 중국의 인권문제, 민주와 자유에 관한 문제 등을 거론하며 중국을 자극했다. 당연히 중국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에 베이징 대학 학생들은 시종일관 날카롭게 대응하며 클린턴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퍼부었다. 당시 중국 학생들의 반미 정서가 전 세계에 공개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두 대학의 차이는 뚜렷하다. 베이징 대학 학생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지식인들과 같이 적극적인 현실 참여와 비판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학 정신에 근거한 확고한 철학이나 이상을 추구한다. 근래의 신문화운동과 5․4운동에서부터 최근의 텐안먼 사건에 이르기까지 민주화를 주도하는 자리에는 늘 베이징 대학이 앞장섰다. 반면 칭화 대학 학생들은 서양문화의 영향과 기술 계통의 학풍을 중심으로 이지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면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개혁 개방과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온 덩샤오핑 노선과 이를 계승하여 실사구시를 표방하면서 ‘과학과 교육으로 나라를 부흥시키자’라고 강조하는 장쩌민 전 주석의 지도방침이 칭화 대학의 학풍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중국 지도층의 주요 멤버들이 거의 ‘칭화방’인 것은 어쩌면 시대 조류에 부응하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몇 근이나 됩니까?

진시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반대쪽에는 중국 역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도 같이 존재한다. 그는 서주 이래로 계속된 봉건귀족정치 제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료정치제도 ‘황제제(皇帝制)와 삼공구경제도(三公九卿制度)’를 시행하였다. 또한 나라마다 각기 다른 문자를 ‘소전(小篆)’으로 통일하여 중국을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제적으로도 괄목한 만한 업적을 남겼다. 진시황은 토지사유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규모를 매우 정확히 조사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징수하였다. 중국 처음으로 화폐를 통일하였는가 하면, 마차의 수레바퀴 크기를 동일하게 통일하여 교통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 최초로 정확한 숫자 개념의 정립, 즉 도량형의 통일이다. 통일 후 지역 간의 도량형 차이는 경제 발전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진시황은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통일하자마자 서둘러 도량형을 정비하였다. 덕분에 계산은 물론 세금 징수도 한결 수월해졌다. 역대 문헌기록이나 진시황이 도량형 통일을 지시하는 명령문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량형이 오늘날 척관법(尺貫法)의 모태가 되었다. 척관법이란 길이의 기본 단위인 ‘자’라는 의미의 ‘척(尺)’과 무게의 기본 단위인 ‘관(貫)’을 합친 말이다. 먼 지역 간에도 잣대가 같아지니 물건의 매매가 용이해져 상업이 쉽게 부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래서일까? 중국 사람들의 숫자 관념은 우리에 비해 상당히 엄격한 편이다. 중국 사람들은 거리를 설명할 때 무척 정확하고 세심한 편이다. 그들은 보통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약 10킬로미터 전후다.”라는 식으로 정확한 수치를 들어서 설명한다. 그 후에 “자전거로는 한 시간 정도, 지하철로는 30분 정도 소요된다.”라며 교통수단을 이용하였을 때 걸리는 시간도 덧붙인다. 숫자에 대한 정확한 개념에서만큼은 분명 중국 사람들이 우리를 능가한다.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말할 때에도 “우리 애는 여덟 살 9개월입니다.”처럼 매우 정확하게 대답하고, 주량을 말할 때에도 “나는 술을 4량(兩) 정도 마신다.”하는 식으로 꼭 단위를 붙여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말한다. 과일을 팔 때도 저울로 정확하게 무게를 달아서 가격을 정한다. 수박도 잘라서 무게만큼만 팔고 사과, 배, 포도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재밌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당신은 몇 근이나 됩니까?” 중국 사람들은 몸무게를 물을 때 이렇게 묻는다. 대개 우리는 몸무게를 말할 때 ‘킬로그램(kg)' 단위를 사용한다. 고기 무게를 말할 때나 ’근(근)‘을 쓴다. 중국에서도 ’킬로그램‘을 사용하긴 하지만 아직은 옛날 식으로 ’근‘을 많이 사용한다.

숫자에 능하다는 것은 계산에 밝다는 의미와 통한다. 또한 경제 능력이 강하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경제 능력에서 ‘짱’으로 통하는 화교들이 세계 각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유도 숫자 관념이 강한 민족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닐까?

중국 사람들은 좋아하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하다. 중국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숫자는 ‘8’과 ‘6’이고, 제일 좋아하는 글자는 ‘복(福)’과 ‘수(壽)’자다. ‘복’은 복록(福祿) 및 부의 상징이고, ‘수’는 장수의 상징이다. 숫자에 대한 호불호 역시 글자의 의미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8’의 중국식 발음은 ‘돈을 벌다’의 의미인 ‘발재(發財)’에서 ‘發’의 발음과 비슷하다. ‘6’은 그 자체가 ‘순조롭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숫자는 ‘9’다. ‘9’의 발음은 역시 ‘오래다’의 의미의 ‘久’와 발음이 같아서 장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비슷한 의미에서 ‘3’도 좋아하는 편이다. ‘3’은 광동어로는 ‘생(生)’과 비슷하고, ‘건강하다’, ‘번창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얼마 전 한 졸업생이 결혼을 한다며 인사차 나를 찾아왔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중국 친구에게서 ‘136,800원’의 축의금을 받았다고 했다. 15만 원도, 20만 원도 아닌 하필이면 잔돈까지 넣은 ‘136,800’은 ‘(결혼 후에도) 일생동안 복록이 있고, (순조롭고) 부자 되세요!’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을 대하면서도 자기 나라 식의 숫자 문화를 응용하는 중국 사람들을 보면서 숫자에 대한 강한 집착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중화민족의 멋과 낭만

한 단계 더 높이 올라서기까지

당 현종 때 왕지환(王之渙)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높은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긴 작품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변새파(邊塞派 : 주로 변방 생활을 노래하던 시인 집단) 시인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당대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였다. 왕지환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관작루에 올라서」를 음미해보자.

태양은 산을 따라 점점 넘어가고, 황하의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천 리의 사물을 바라보려 한다면, 한 층계 위로 더 올라야 하리라.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왕지환은 마지막 구절에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끊임없는 노력으로 한 단계 높이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재 상태에 안주하면서 손에 쥐고 있는 기득권이나 지키려 한다면 어떠한 진보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한 층계 위로 더 올라야 하리라(更上一層樓)”의 구절은 다양한 장면에서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특히 이 시가 외교에도 활용되고 있어 흥미롭다. 2001년 7월로 기억한다. 주중 미국대사인 클라크 란트가 중국에 부임할 때 첫 인사를 하면서 바로 이 시를 인용하였다. 그는 관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중국말로 인사를 건넨 다음, 중국과 미국의 건설적이며 적극적인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어 “멀리 있는 사물을 바라보려면, 반드시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올라서야 한다.”라고 덧붙이면서 미중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표하였다. 여기서 고대문학 작품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고대문학 작품은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는 물론, 대화의 수단으로 그리고 서로의 이해를 돕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주는 매개로도 중요하다. 미국은 효율적인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중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중국 고대문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즉 중국문화에 정통한 중국통을 주중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비록 얼마간은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한 단계 높이 올라설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짐작이 가능해진다. 서로에 대해 아는 만큼 이해의 통로가 넓어지고, 대처할 수 있는 범위도 넓고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내친김에 우리도 더욱 분발하여 한 단계 위로 올라서기를 희망한다.



중국, 그리고 중국 사람들

남녀 평등의 역사

“중국 여자들은 왜 사나워 보이죠?” 중국에 갔다 온 주변 사람들의 흔한 질문 중 하나다. 그러나 전적으로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한 편견이다. 중국 남성들이 보기에 중국 여성의 강한 입김은 당연한 남녀 평등으로 귀결된다. 반면 한국 남성들에게는 중국 여성의 지나치게 강한 기로 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반면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 사람들은 한국을 ‘따난런 주의(大男人主義)’, 즉 남성 중심주의 국가라고 비판한다. 이 역시도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같은 문화 속에서 생활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 한 사람의 한국 남성으로서 너무 속 보이는 생각일까?

내가 타이완에 처음 간 것이 1985년이었다. 타이완에 도착해서 가장 혼란스러워했던 기억 중 하나가 TV 드라마였다. 남녀 간의 갈등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내용이지만, 그 설정이 판이하게 달랐다. 주로 여성이 뺨을 때리면 남성은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이었다. 비단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공산 혁명과 관계 없이 중국 대륙과 타이완에는 남녀 평등이 잘 구축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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