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타리크 알리·수잔 왓킨스 지음 | 삼인
머리글 - 권위에 의문을 제기한 시기



역사는 그것이 비극으로서든 희극으로서든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는 분명히 반복되는 요소가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1968년의 반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1996년과 199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파업과 학생 봉기에 대한 글을 거듭 읽다보면 그 나라에서 30년 전에 일어났던 훨씬 더 극적인 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로랑 카빌라가 콩고를 횡단하며 의기양양하게 행진하고, 서구의 지원을 받았던 압제자 모부투가 수치스럽게 도주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대중의 분노가 아직도 해방군을 통해 표출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1968년은 그 해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들의 정치적 지향이 어떠했든 간에 결코 잊지 못할 한 해였다. 1968년은 전 세계의 모든 세대에게 흔적을 남긴 해였다. '세계화'라는 말이 자유시장 체제의 정치 문화에서 애용되는 단어가 되기 오래 전에 1968년의 사건들은 인간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의 한 부분인 정치적 급진주의를 세계화한 바 있다. 1968년은 희망의 해였다. 그때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낀 사람들이었다. 지구상의 가련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그들의 유산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1968년의 정치적 달력이다. 이 책은 1968년 일어났던 사건을 보고하고 설명하려는 책이다. 그 해의 어느 달, 세계의 어느 곳에선가 일어났던 폭발적인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실 가장 확실한 성공은 파키스탄에서 이루어졌다. 파키스탄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정권을 전복시킨 거대한 민중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나 국가 건설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들조차 그 실체를 의심스러워했던 국가의 붕괴를 초래했다.

오늘날 1968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그 세계는 가라앉은 대륙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세계에, 자조(自嘲)와 이기주의가 평등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대체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 20세기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승리를 일궈낸 체제는 그 특권을 포기하기보다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여전히 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1968 1월



"어이,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




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이 볼리비아의 어느 계곡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3개월 전 그들은 볼리비아에서 CIA 요원들에게 비밀리에 살해되어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1968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혁명적인 행위와 국제주의를 호소하는 그들의 용감한 목소리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선을 넓힘으로써 즉 '제2, 제3의 더 많은 베트남'을 창조함으로써, 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국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자는 체 게바라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 게릴라 부대들이 이미 콜롬비아와 우루과이, 베네주엘라와 과테말라, 그리고 모잠비크와 기니, 앙골라와 로데샤(현재의 짐바브웨)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베트남에서는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의 게릴라 전사들이 마침내 미국을 퇴각시키고 전쟁의 흐름을 극적으로 반전시킬 구정공세를 계획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젊은 세대 전체가 반란에 휩싸인 것 같았다. 장발과 기묘한 복장, 시끄러운 음악, 무절제한 섹스와 마약, 인디언들의 종교와 사이키델릭한 전위예술….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자아발견의 씨앗은 비트족이 뿌린 것이며, 메리 프랭크스터들(Merry Franksters, 흥청망청 노는 날라리들)이 마침내 모든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항하는 반란자로 떠올랐다. 이들은 정부와 '돼지들(경찰)'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혐오스런 미국의 전쟁 기구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저항하였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냉전의 위기가 일시적으로 사그라들고,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는 '열전(熱戰)'이 급격하게 고조되어 갔다. 미국의 통치자들은 소련 혹은 중국이 베트남 측에 가담하여 전쟁에 뛰어들어, 하나의 '지역적 수렁(Local quagmire)'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동요와 비교해볼 때 모스크바의 신중한 관료들이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좌파인 듯한 그런 거대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동유럽과 소련에도 역시 다양성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지식인들은 문화적·예술적 자유를 논의하고 있었다. 더구나 새롭게 공산권에 가담한 쿠바는 그때까지는 단호하게 소비에트 블록과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쿠바는 아바나에 주재하고 있는 소련고문관들을 "모스크바의 발상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소아병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쿠바는 체 게바라처럼 변화, 즉 '혁명 안의 혁명'을 위한 쿠바 자체의 국제주의적 계획을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1968년 1월 말이 되자 전 세계의 청년 세대가 그러한 또 하나의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

1월 1일 미국 - 자유세계의 수호자



갸름하고 뾰족한 턱을 지닌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 진행 상황에 대한 신년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는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라고 씌어 있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에 따르면, 50만 명의 미군이 수행하는 '수색과 파괴' 전략은 베트남 게릴라 군대를 정글 깊숙한 기지로 내몰고 있으며, 따라서 이제 다시 주요 도시가 공격당할 여지는 없었다. 1968년 베트남 전에 참전한 미군 장군들이 한결같이 요구한 것은 그들이 임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와 무기, 더 많은 폭탄과 탱크, 더 많은 함대와 비행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주름이 패인 존슨의 얼굴은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미국의 정책에는 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권력 상층부의 위기였다. 웨스트모어랜드 같은 강경론자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끝장을 보기를 원했다. 필요하다면 핵폭탄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건론자들은 이미 수조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투입된 데다, 2만 명이나 되는 미국 병사들이 죽었고 오히려 3년 전보다도 승리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존슨 대통령은 강경론자들과 온건론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온건론자들은 비용이 더 들어가기 전에 타협점을 찾아 협상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미국의 병력이 이미 지나치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국방부 참모들은 1968년이 끝나기 전에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건론자들의 지적처럼 그들은 이 말을 1965년 이래 계속 반복해왔다. 그러는 동안 수백 개에 이르는 남베트남의 전통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은 군대의 철조망 안, '전략촌'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하면 마을 주민들이 NLF의 게릴라들, 즉 오로지 외국인들의 지지만 받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는 게릴라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인 빽빽한 밀림의 나무를 제거하기 위해 제초제와 고엽제를 뿌리는 데 매년 1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길이가 50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었던 아주 오래된 나무들은 화학공업에서 특별한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독립 북베트남인들이 남녘의 동포들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수십만 톤의 폭탄이 북베트남의 논과 마을에 비처럼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저항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 했다.

존슨 대통령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도쿄에서부터 빠리, 런던, 베를린까지 미국 대사관 밖에서 미국의 전쟁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이어지면서 외교기구가 무력해진 것이다. 전 세계의 거리에는 존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똑같은 슬로건이 나타났다. "어이,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Hey, Hey, LBJ, How many kids did you kill today?)" 미국에서는 불만을 품은 청년 세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생들은 흑백을 막론하고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기성세대를 놀라게 하는 어떤 광란적인 고결함을 띠고 있었다. 기성세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쟤들이 진짜 우리 애들 맞아?"라고 서로에게 물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며 생생한 역사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도시 프라하는 모스크바의 관료기구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도전이 일어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루터가 등장하기 한 세기 전, 얀 후스가 면죄부 판매에 대항해 그리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격렬하게 투쟁했던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후스는 처형당했으며 후스주의자들의 반란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그 투쟁의 기억은 살아 있었다. 프라하 사람들에게 모스크바는 바티칸 교황청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침내 알렉산드로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안토닌 노보토니를 대신해 당 서기장에 오른 것은 새로운 후스주의자들의 승리였다. 그것은 침체된 산업 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더 많은 언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소수 민족인 슬로바키아인들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주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4년 여에 걸쳐 전개한 당내 투쟁의 정점이었다.

그 투쟁은 1967년 10월말의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대학 기숙사의 열악한 난방과 전기시설에 항의하는 조그만 학생시위를 시발로 해서 극적으로 격렬해졌다. 그라드차니 성에 있는 정부 소재지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들의 표정은 고양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손에 들고 있던 촛불에 비쳐 밝게 빛이 났다. 그 촛불은 학생들이 그것으로 공부해야 했던 촛불이었다.

학생들은 1967년 여름의 작가회의에서 반체제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제명당한 작가들에게 동조했다. 오래지 않아 논의는 구체적인 항의 행동으로 변했다. 그해 겨울 외신기자들은 학생들이 길 모퉁이에서 전단을 나누어주는 모습, 그리고 경찰의 행위와 내무부 장관의 역할 등에 대해 지나가는 사람들과 뜨거운 토론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버클리 같은 서방 세계의 소란스러운 대학을 떠올렸다.

저항하는 학생들과 반항적인 지식인들, 산업기술자들, 슬로바키아 대의원들은 개혁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말고도 더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개선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러한 대중정서에 힘입어 두브체크와 개혁주의자들이 공산당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두브체크가 선택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쿠바의 아나바 - 문화 혁명가들



비자본주의 신생국 쿠바에서 문화회의가 일주일 동안 열렸다. 혁명 이후의 쿠바는 동유럽과는 매우 다른 곳이었다. 쿠바에는 음울한 단조의 음악이나 관료주의의 무능 대신 무지개 빛의 모든 색깔과 신선한 음악과 활력이 넘쳤다. 피델 끼스뜨로와 그의 동지들은 소비에트 모델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신생국 쿠바는 문학과 예술과 그것을 생산하는 작가와 예술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가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까스뜨로는 직접 그들을 맞이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급진적인 인텔리겐치아를 모으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이들 프랑스 철학자라고 한다.

문화회의는 전 세계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정치와 문화에 대해 토론하고, 작가들이 억압받는 자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논의하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민족해방 투쟁과정에서 퇴영적인 종교문화나 민족주의의 문화를 극복하는 문제는 이후 30년 동안 아일랜드나 티벳, 유고슬라비아나 이슬람 세계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문제였다. 1968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아바나에서 돌아와 『타임즈 문예 보유(Times Literary Supplement)』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쿠바가 그린 회의를 열기 위한 이상적인 장소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까스뜨로의 말처럼, 쿠바는 베트남 다음으로 전투태세를 갖춘 영웅적인 국가일 뿐 아니라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정말로 좋아하고 신뢰하는 아주 보기 드문 나라 가운데 하나라는 이유만으로도 무척 매력적이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자유롭고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문화활동, 감탄을 자아낼 만한 사회적·교육적 성취, 마음을 끄는 반물질주의적인 유토피아로의 짧은 여행, 이런 점들은 지식인들의 흥미를 끌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시도는 사하라 사막 남부의 아프리카 지역에서처럼 현대적 교역에 대한 '민중적 기대감'을 조장하기도 하며, 더욱 위험스럽게는 '다른 시대의 폭력과 혼란의 가속화된 토착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실패한다. 그런 토착화에 대해서는 아이티의 데빼스트르트가 충분히 이야기한 바 있다. 다른 한편 모로코의 벨라일 아브델 아지즈박사가 마그레브 지역의 공동체 개념이 그런 것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 전통적·민중적 문화의 일부 요소들은 어떤 반자본주의 사회에서라도 또는 기술의 논리에 완전히 종속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회에서라도 본질적인 부분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런던의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의 편집자인 알렉산더 콕번과 로빈 블랙번은 이 회의에서 뜻밖의 딜레마에 직면했다. 블랙번은 극좌 노선의 트로츠키주의적 연설문을 썼으나, 그 통렬한 연설문을 배포할 수가 없었다. 그가 유혹했던 사랑스런 쿠바의 동지가 별로 관용적이지 않다고 알려진 쿠바 경찰청장 '바바 호야'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그는 전혀 몰랐다. 블랙번이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콕번이 그 연설문을 배포했다. 그 연설문이 심각한 반 스탈린주의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콕번의 손은 떨렸다. 연설이 끝나자마자 그는 연단을 내려와 달아나버렸다.

1968 5월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빠리의 5월 사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1968년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헝클어진 머리를 한 학생들의 헤진 스웨터와 청바지, 바리케이드, 폭동 진압 경찰, 허공을 날아다니는 최루탄 등과 같은 이미지들. 학생 봉기는 전후 서유럽 사회의 "이보다 더 좋았던 적은 없었다."는 자기 만족감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지하철 벽면에는 온통 "지하철-노동-잠자리(Metro-boulot-dodo)"라는 구호가 휘갈겨져 있었다. 학생들은 짱돌을 구하려고 빠리 시내에 깔려있는 보도 블럭을 파내곤 했지만, 그들이 원했던 것은 짱돌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반란의 방식은 오랜 혁명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바리케이드는 1848년에도 같은 거리에 세워진 적이 있으며, 1871년 빠리 꼬뮌 때에도 그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근무 시간을 강제하는 시계를 모두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1968년 프랑스의 학생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혁명사를 알고 있었다. 1917년 겨울 궁전(Winter Palace)의 급습뿐만 아니라 1919년 참담하게 끝난 베를린과 뮌헨의 폭동. 같은 해에 일어난 헝가리 소비에트, 제2차 세계 대전기간에 일어났던 그리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반체제 운동, 그리고 그들 당대에 겪고 있던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 그러나 학생 반란의 원인은 국내 문제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