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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타리크 알리·수잔 왓킨스 지음 | 삼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2차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반이자 마오쩌둥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예견되었던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의 지지자들에 의해 '반역자, 배신자, 악질 반동'으로 탄핵당한 후 자신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던 바로 그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류샤오치는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되는 방법(How to be Good Communist)』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중국의 성공사례를 재현하고자 하는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교리 문답서와 같은 책이었다.



끔찍한 재앙중의 재앙은 마오쩌둥이 일거에 중국을 산업화시키고자 계획한 '대약진 운동(Great Leap Forward, 1957∼1959)'이었다. 3년 동안의 고된 노동과 희생은 천 년간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산업생산을 세 배로 늘려 줄 것이라던 60만 개의 제련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 농업을 재편하고 농민 수백만 명을 동원한 대약진 운동은 거대한 경제적 위기와 수백만 명을 죽인 무시무시한 기근을 초래했다.



마오쩌둥에 이어 당 서열 2위인 류샤오치(그는 1922년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대학(University for Toilers of the in Moscow)에서 공부한 노련한 당원이었다)는 1962년 고향인 후난성을 시찰한 뒤 대약진 운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황폐함과 농민의 고통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근의 70퍼센트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류샤오치와 다른 세 명의 지도자, 즉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천윈(陣雲)은 농업 부문에서 농민들의 주도권을 일부 회복하는 것을 포함하여 안정과 긴축을 기조로 하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펴고자 했다. 당에 대한 통제권이 위대한 조타수(Great Helmsman)의 손에서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1965년 1월, 마오쩌둥은 자신의 충실한 전기 작가 에드가 스노우에게 류샤오치를 반드시 제거해야겠다고 말했다. 마오쩌둥 파는 다음과 같이 강력히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노선을 취한 권력자들은 당 중앙위원회 내부에 부르주아의 본부를 만들어 수정주의적인 정치·조직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뿐만 아니라 모든 성·시·읍과 자치지역에 그들의 앞잡이들이 있다.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정치적·문화적 혁명을 수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혁명을 통해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타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책은 1966년 5월 16일에 열린 임시 정치국 회의에서 더욱 정식화 되었다. 이 회의에서 문화 혁명단(Cultural Revolution Group)이 결성되었는데 사실상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최고 권부가 된다.



1968년 10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2차 총회는 몇 년 전에 열렸던 총회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 마오쩌둥에게 충성을 다하는 지지자들이 총회를 가득 메웠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주자파의 일인자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류샤오치는 배신자, 반역자, 악질반동, 그리고 제국주의와 수정주의, 국민당의 추종자라는 비난을 받고 베이징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폐렴과 당뇨병에 걸려 다른 교도소로 들것에 실려 옮겨지게 된다. 1969년 11월, 류샤오치는 교도소의 독방에서 교도관 단 한사람의 입회 아래 죽는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그의 지지자 몇몇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게 된다.9월 8일 미국의 오클랜드 - 전쟁 포로들5월 11일 프랑스의 빠리 - 안녕하십니까, 뽕삐두 선생1968 9월

"왜 여성은 안 된단 말인가?"매년 이 무렵 뉴저지 주의 해안 도시인 애틀랜틱시티에는 하이힐을 신은 수영복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매력에 등급을 매기는 중년 남성들 앞에 줄지어 선다. 여자들은 이날을 위해 몇 달 동안 다이어트와 피부 관리, 머리 손질과 잔털 뽑기를 한다. 눈썹을 정리하고, 다리 마사지를 하며, 겨드랑이 털을 깎는다. 몇 시간 동안 화장을 하고 머리를 빗는다. 그들은 이러한 노력의 마지막 순간에 '미스 아메리카' 왕관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지 초조한 심경으로 기다린다.



그러나 이번 해에는 달랐다. 애틀랜틱시티의 컨벤션 홀 밖에서는 여성 가두 연극단이 이것과는 전혀 다른 볼거리를 공연하고 있다. 뉴욕에 있는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몇 달 동안 번갈아 모임을 가져온 이 여성들은 대부분 신좌파이거나 반전 운동가 출신이었다. 그들은 모두 운동과정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역할에 더욱 깊이 검토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역할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대화의 주제는 남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여성들이 경쟁을 벌이는 한심한 짓거리를 상징하고 있었다. "우리가 이 대회에 한방 먹여야 해." 한 여성이 말했다. 1968년 10월, 여러 단편 글을 모아 펴낸 『지나친 일(Going Too Far)』이라는 책에서 로빈 모건은 이렇게 설명했다.미스 아메리카 행사가 목표로 선택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분별없는 성적 대상의 이미지를 퍼뜨림으로써) 여성의 품위를 분명히 떨어뜨린다. 그것은 언제나 인종차별적인 백인 여성들의 경연대회였다(흑인 여성이 결승까지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 다). 우승자는 살인자들의 마스코트가 되어 군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베트남을 여행한다. 그 행사에서 사람의 이목을 끄는 수법은 모두 스폰서의 상품을 팔아먹으려는 야바위꾼들 의 상업적인 놀음일 뿐이다. 어디서 인종차별주의, 군국주의, 자본주의 같은 미국적 가치 가 완벽하게 결합해서 하나의 '이상적인' 상징, 즉 한 사람의 여성 속에 포괄되어 나타난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역사는 그것이 비극으로서든 희극으로서든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는 분명히 반복되는 요소가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1968년의 반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1996년과 1997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파업과 학생 봉기에 대한 글을 거듭 읽다보면 그 나라에서 30년 전에 일어났던 훨씬 더 극적인 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로랑 카빌라가 콩고를 횡단하며 의기양양하게 행진하고, 서구의 지원을 받았던 압제자 모부투가 수치스럽게 도주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대중의 분노가 아직도 해방군을 통해 표출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1968년은 그 해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들의 정치적 지향이 어떠했든 간에 결코 잊지 못할 한 해였다. 1968년은 전 세계의 모든 세대에게 흔적을 남긴 해였다. '세계화'라는 말이 자유시장 체제의 정치 문화에서 애용되는 단어가 되기 오래 전에 1968년의 사건들은 인간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투쟁의 한 부분인 정치적 급진주의를 세계화한 바 있다. 1968년은 희망의 해였다. 그때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박탈당했다고 느낀 사람들이었다. 지구상의 가련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이 그들의 유산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은 1968년의 정치적 달력이다. 이 책은 1968년 일어났던 사건을 보고하고 설명하려는 책이다. 그 해의 어느 달, 세계의 어느 곳에선가 일어났던 폭발적인 사건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실 가장 확실한 성공은 파키스탄에서 이루어졌다. 파키스탄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정권을 전복시킨 거대한 민중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결국 민중봉기가 일어나 국가 건설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들조차 그 실체를 의심스러워했던 국가의 붕괴를 초래했다.



오늘날 1968년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그 세계는 가라앉은 대륙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세계에, 자조(自嘲)와 이기주의가 평등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대체해 버린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 20세기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승리를 일궈낸 체제는 그 특권을 포기하기보다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무익하거나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여전히 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체 게바라와 그의 동지들의 시신이 볼리비아의 어느 계곡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3개월 전 그들은 볼리비아에서 CIA 요원들에게 비밀리에 살해되어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1968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혁명적인 행위와 국제주의를 호소하는 그들의 용감한 목소리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전선을 넓힘으로써 즉 '제2, 제3의 더 많은 베트남'을 창조함으로써, 베트남을 폭격하는 미국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자는 체 게바라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 게릴라 부대들이 이미 콜롬비아와 우루과이, 베네주엘라와 과테말라, 그리고 모잠비크와 기니, 앙골라와 로데샤(현재의 짐바브웨)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편 베트남에서는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NLF)의 게릴라 전사들이 마침내 미국을 퇴각시키고 전쟁의 흐름을 극적으로 반전시킬 구정공세를 계획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젊은 세대 전체가 반란에 휩싸인 것 같았다. 장발과 기묘한 복장, 시끄러운 음악, 무절제한 섹스와 마약, 인디언들의 종교와 사이키델릭한 전위예술….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자아발견의 씨앗은 비트족이 뿌린 것이며, 메리 프랭크스터들(Merry Franksters, 흥청망청 노는 날라리들)이 마침내 모든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항하는 반란자로 떠올랐다. 이들은 정부와 '돼지들(경찰)'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혐오스런 미국의 전쟁 기구에 대해서도 본능적으로 저항하였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냉전의 위기가 일시적으로 사그라들고,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는 '열전(熱戰)'이 급격하게 고조되어 갔다. 미국의 통치자들은 소련 혹은 중국이 베트남 측에 가담하여 전쟁에 뛰어들어, 하나의 '지역적 수렁(Local quagmire)'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하지만 미국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인 동요와 비교해볼 때 모스크바의 신중한 관료들이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대한 좌파인 듯한 그런 거대한 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동유럽과 소련에도 역시 다양성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지식인들은 문화적·예술적 자유를 논의하고 있었다. 더구나 새롭게 공산권에 가담한 쿠바는 그때까지는 단호하게 소비에트 블록과 독립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쿠바는 아바나에 주재하고 있는 소련고문관들을 "모스크바의 발상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소아병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쿠바는 체 게바라처럼 변화, 즉 '혁명 안의 혁명'을 위한 쿠바 자체의 국제주의적 계획을 밀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1968년 1월 말이 되자 전 세계의 청년 세대가 그러한 또 하나의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다.갸름하고 뾰족한 턱을 지닌 미군 총사령관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은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 진행 상황에 대한 신년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에는 "터널 끝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라고 씌어 있었다. 웨스트 모어랜드 장군에 따르면, 50만 명의 미군이 수행하는 '수색과 파괴' 전략은 베트남 게릴라 군대를 정글 깊숙한 기지로 내몰고 있으며, 따라서 이제 다시 주요 도시가 공격당할 여지는 없었다. 1968년 베트남 전에 참전한 미군 장군들이 한결같이 요구한 것은 그들이 임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와 무기, 더 많은 폭탄과 탱크, 더 많은 함대와 비행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알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주름이 패인 존슨의 얼굴은 지치고 불안해 보였다. 미국의 정책에는 위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권력 상층부의 위기였다. 웨스트모어랜드 같은 강경론자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끝장을 보기를 원했다. 필요하다면 핵폭탄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건론자들은 이미 수조 달러에 이르는 비용이 투입된 데다, 2만 명이나 되는 미국 병사들이 죽었고 오히려 3년 전보다도 승리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존슨 대통령은 강경론자들과 온건론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온건론자들은 비용이 더 들어가기 전에 타협점을 찾아 협상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미국의 병력이 이미 지나치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국방부 참모들은 1968년이 끝나기 전에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온건론자들의 지적처럼 그들은 이 말을 1965년 이래 계속 반복해왔다. 그러는 동안 수백 개에 이르는 남베트남의 전통 마을이 파괴되고 주민들은 군대의 철조망 안, '전략촌'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하면 마을 주민들이 NLF의 게릴라들, 즉 오로지 외국인들의 지지만 받는 남베트남 정부에 대항해서 투쟁하고 있는 게릴라들을 돕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인 빽빽한 밀림의 나무를 제거하기 위해 제초제와 고엽제를 뿌리는 데 매년 1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길이가 50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었던 아주 오래된 나무들은 화학공업에서 특별한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독립 북베트남인들이 남녘의 동포들을 포기하도록 하려고 수십만 톤의 폭탄이 북베트남의 논과 마을에 비처럼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십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저항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 했다.

존슨 대통령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도쿄에서부터 빠리, 런던, 베를린까지 미국 대사관 밖에서 미국의 전쟁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연이어지면서 외교기구가 무력해진 것이다. 전 세계의 거리에는 존슨(Lyndon Baines Johnson) 대통령의 이름 머리글자를 딴 똑같은 슬로건이 나타났다. "어이, LBJ,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죽였나?(Hey, Hey, LBJ, How many kids did you kill today?)" 미국에서는 불만을 품은 청년 세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생들은 흑백을 막론하고 모두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기성세대를 놀라게 하는 어떤 광란적인 고결함을 띠고 있었다. 기성세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쟤들이 진짜 우리 애들 맞아?"라고 서로에게 물었다.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며 생생한 역사 감각을 가지고 있는 도시 프라하는 모스크바의 관료기구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도전이 일어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루터가 등장하기 한 세기 전, 얀 후스가 면죄부 판매에 대항해 그리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격렬하게 투쟁했던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 후스는 처형당했으며 후스주의자들의 반란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그 투쟁의 기억은 살아 있었다. 프라하 사람들에게 모스크바는 바티칸 교황청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침내 알렉산드로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안토닌 노보토니를 대신해 당 서기장에 오른 것은 새로운 후스주의자들의 승리였다. 그것은 침체된 산업 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더 많은 언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소수 민족인 슬로바키아인들에게 더 많은 자치권을 주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정치적·문화적 자유를 누리기 위해, 4년 여에 걸쳐 전개한 당내 투쟁의 정점이었다.



그 투쟁은 1967년 10월말의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 대학 기숙사의 열악한 난방과 전기시설에 항의하는 조그만 학생시위를 시발로 해서 극적으로 격렬해졌다. 그라드차니 성에 있는 정부 소재지를 향해 나아가는 학생들의 표정은 고양되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손에 들고 있던 촛불에 비쳐 밝게 빛이 났다. 그 촛불은 학생들이 그것으로 공부해야 했던 촛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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