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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사 1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살아있는 한국사 1

- 단군조선에서 후삼국까지 -

이덕일 지음

휴머니스트/2003년 8월/375쪽/16,000원



프롤로그

고대사는 살아있는 현대사

한국 고대사처럼 현대의 정치논리에 따라 만신창이가 된 역사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고대사가 현대의 정치 논리에 따라 재단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고대사가 사실상 한국 현대사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그 원형을 가장 심하게 훼손시킨 장본인이 바로 일제 식민사학이란 점에 이르면 한국고대사가 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이유도 쉽게 이해가 간다.

1930년대에 함북 종성 동관진 유적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제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무시된 것이 그 한 예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 외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기 쉽지 않은 구석기 시대가 이럴진대, 우리 민족국가의 시원인 단군조선이 심하게 왜곡되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단군조선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부정함으로써 말살했다면, 열국시대는 ‘삼국’의 틀에 꿰맞추면서 축소시켰다.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100년에 불과했다. 부여가 고구려 문자 왕에게 항복한 494년까지 우리 고대사는 동예․읍루 등을 제외하더라도 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가 공존하는 오국시대였다. 이후 가야가 신라 진흥왕에게 멸망하는 562년까지는 사국시대였다. 진정한 의미의 삼국시대는 가야가 멸망한 562년부터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에 멸망하는 660․668년까지로 100여 년에 불과했다.

일제 식민사학이 『삼국사기』에 대해 초기 기록 조작론을 제기한 이유는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처럼 기원 전후 신라․고구려․백제가 강력한 고대국가로 존재했다면 고대 왜국의 총독부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남단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일제식민사학은 『일본서기』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죽여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대신에 중국의 『삼국지』․『후한서』 등을 들어 당시 한반도 남단에는 강국 신라, 백제 대신에 조그마한 78개 소국으로 구성한 삼한(三澣)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 고대사의 무대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광활한 대륙과 일본 열도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 책의 ‘오국대전’은 우리 고대사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진행된 것이 아니라, 만주와 중원, 일본열도까지 포괄하는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다는 시각 속에서 쓴 것이다. 통일신라는 물론 발해를 우리 역사의 영역으로 포괄한 것 또한 우리 고대사의 주무대가 만주대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발해연안과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들

선사시대는 문헌 자료가 없어 그들의 생활모습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군집(群集)하는 사회, 부족 사회), 사용한 도구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이 중 도구로 분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도구로 분류하는 방법 중에서는 덴마크의 분류학자 톰센의, 도구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로 나누는 3시기 분류법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중 석기시대는, 잘 알려진 대로 석기를 가공하는 방법에 따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구분한다. 구석기 시대에는 타제석기(打製石器 : 뗀석기)를 사용했고, 신석기 시대에는 마제석기(磨製石器 : 간석기)를 사용했다. 타제석기는 돌에 충격을 가하거나 큰 돌에 조각을 떼어 내어 원하는 형상으로 만든 석기를 말한다. 마제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형상으로 만든 석기다.

현재 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들만 살펴보면 구석기 유물들은 약 60만 년 전의 것까지 출토된다. 하지만 신석기 유물은 기껏해야 6천 년 전까지 밖에 소급할 수 없다. 이는 돌을 떼는 방식에서 가는 방식으로 진화하기까지 60여만 년의 시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현재의 눈부신 문명 발달 시간으로 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시대 인류의 조상들, 즉 원인(猿人)들의 뇌 용량은 현대인들에 비해 아주 작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인류 최초로 석기를 사용한 원인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 손재주 있는 사람)라고 하는데, 이들이 사용한 최초의 석기는 동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26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호모 하빌리스는 약 15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 곧선 사람)로 진화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자신들이 살던 지역의 기후가 변동하자 살기 좋은 지역을 찾아 이동하는데 그 중 일부가 아프리카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원인들이 우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곧 지구의 기후 변화 때문인 것이다. 북경원인이 바로 호모 에렉투스로서 불을 사용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현생인류의 직접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 슬기슬기 사람)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5만~4만여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이전의 원인들과는 달리 정교한 석기․골각기를 만들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벽화 등 예술 작품까지 제작해 새로운 후기 구석기 문화를 창조해내었다. 이들이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으로 분화되어 전 세계에 분포하는 것은 이들이 이동 생활을 했음을 짐작케 한다.

한반도에서는 주로 대동강 유역에서 후기 구석기 시대 유적이 발굴된다. 북한의 덕천 승리산 동굴에서는 두 개 층에 걸쳐 인골의 턱뼈가 발굴되었다. 이 인류의 생존연대는 4만~3만여 년 전으로서 우리의 직접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판단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두개골의 뇌 용량은 평균 1,400cc로 현대인과 동일한 수준이다.

신석기인들의 역사 공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하는 후기 구석기 시대를 지나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인류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농경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는 선사시대를 석기 제작 기술사에 따른 분류가 아닌 경제사적인 분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역사가 V. G. 차일드는 구석기 시대를 식량채집경제단계, 신석기 시대를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 단계로 나누고, 산업혁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큰 비약이라며 신석기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질적인 전환을 이루는 농업혁명의 시기가 신석기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가 곧바로 농업혁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신석기 시대의 주요유적들이 대개 강가나 바닷가에 분포하는 것은 이들이 농경보다는 어로 등을 더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들 지역의 신석기인들은 채집과 사냥을 계속하다가 어느 시기엔가 농경을 시작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조개무지 유적과 집 자리 유적 등이 남아있다. 조개무지 유적은 신석기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개 껍질을 비롯한 쓰레기들을 같은 곳에 묻은 결과 생긴 것이다. 평남 온천군 궁산리 유적과 함북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 등에서는 조개무지 유적 외에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집자리 유적은 정착생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과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 등이 바로 조개무지 유적이 아닌 집자리 유적이다. 이런 곳에서 출토되는 토기 등의 유물들로 신석기인들이 농사나 사냥 등 여러 가지 생산 활동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또는 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재 농기구와 함께 발굴되었으며, 평남 온천군 궁산리에서는 돌까래(石鍬 : 석초), 뿔가래(骨鍬 : 골초),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기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농경생활을 영위했음을 말해준다. 또 가락바퀴나 뼈바늘이 출토되는 것은 의복을 짓거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신석기인들은 우리들의 직접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신석기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시베리아 기원설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왔다. 시베리아 신석기 문화와 우리의 신석기 문화가 동일 계통으로 인식된 데 따른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표지유물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 즐문토기)는 그 명칭 자체가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c)을 직역한 것으로서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인들도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939년 일본의 횡산장삼랑(橫山將三郞)이 우리 나라 빗살무늬 토기의 유입 경로를 시베리아, 연해주, 동북지역, 남해안 지역, 서해안 지역 순으로 전파된 것으로 발표했고 이것이 계속 학계의 정설로 통해왔다. 그러나 시베리아 기원설이 맞다고 해도 그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할 수 있다. 특히 바이칼은 신석기 인들의 이동 경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흉노족이 바이칼을 지칭할 때 사용한 ‘텡기스’라는 말은 ‘천지(天地)’라는 뜻이다.

바이칼 지역의 기하문 토기는 북만주의 송화강과 눈(嫩)강 유역 등에서도 나타나며 동심원과 사냥장면들이 주로 표현된 이 지역의 암각화는 한반도 남부의 암각화와 매우 유사하다. 바이칼에 살던 신석기인들의 한 갈래는 아무르 강(흑룡강)을 따라 북만주 지역으로 들어오고, 다른 한 갈래는 몽고초원을 경유해 중국 동북부 발해 유역과 중국 서북부 등으로 남하한 것이다.

시베리아 기원설과 함께 그 이전부터 발해유역에 살던 신석기인들의 존재 여부도 주목된다. 최근 발해 연안과 한반도에서 시베리아의 신석기 유물보다 이른 시기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발해 연안과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시베리아 계통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었음과 스스로 신석기 문화를 발전시켰음을 말해준다. 즉 이동설 외에 자체 발전설도 설득력이 있는 상황이다.

수수께끼의 왕국, 가야를 찾아서

1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낙동강 서쪽에 분포했던 국가들의 총칭인 가야는 신라, 고구려, 백제와 달리 전체사를 서술한 정사가 없기 때문에 흔히 신비의 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실체는 있는데 역사서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이나 허황 후의 등장과정이 극적인 구성을 띠고 있어 의문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가야사는 금관 가야 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고 그 핏줄들이 문무왕 이후 신라 중대의 왕실을 장악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기도 하다.

수수께끼의 왕국 가야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사국시대를 형성했던 고대국가다. 가야는 서기 전후에서 6세기 중엽까지 주로 낙동강 서쪽에 분포했던 국가들의 총칭인데, 흔히 ‘신비의 왕국’으로 표현되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실체의 상당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풍부하지는 못하지만『삼국사기』에 개국부터 멸망까지의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 반면, 가야는 개국부터 멸망까지 체계적으로 전해지는 정사가 없다. 가야에 관한 문헌 사료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비문 등의 국내 기록과 『일본서기』, 『삼국지』 등 외국 기록, 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 등에 단편적으로 전할 뿐 전체 체계를 서술한 사료가 현전(現傳)하지 않고 있다.

가야는 여러 문헌에 그 이름 자체가 달리 기록되어 있어 혼란을 더한다. 일단 가야라는 이름 자체가 기록에 따라 伽倻(가야), 伽耶(가야), 加耶(가야) 등으로 달리 표기되고 있고, 별칭도 구야(狗邪, 拘邪), 가라(加羅), 가랑(可良), 가락(駕洛) 등으로 다양하다. 가야는 여러 나라로 구성된 연맹체로 인식되고 있는데 연맹체에 속한 나라들도 기록마다 달리 나타난다. 가야에 관해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 고령가야(古寧伽倻), 대가야(大伽耶), 성산가야(星山伽耶), 소가야(小伽耶), 금관가야(金官伽耶), 비화가야(非火伽耶)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는 금관국, 대가야국(大伽耶國) 등의 지명들이 나온다.

중국이나 일본 기록에는 보다 많은 가야 제(諸)국들의 이름이 나온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한(韓)조에는 변진12국의 이름이 전하는데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접도국(接道國),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순시국(古淳是國), 반로국(半路國), 악노국(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가로국(甘路國), 구야국(狗邪國), 주조마국(走漕馬國), 안야국(安邪國), 독로국(瀆盧國)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에는 남가라(南加羅), 탁순(卓淳), 탁기탄, 가라국(伽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독로국(瀆盧國)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중요성을 띠는 것은 전․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였던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와 고령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과 관련한 가야의 건국사료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보통 금관가야의 건국설화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서기 42년까지 이 지역에는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고’,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등 9간(干)’이 백호(百戶) 7만 5천 명의 백성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운데 수로왕이 내려오는 것이다.

북쪽 구지(龜旨)에서 무엇이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서 군중 이삼백 명이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는 소리만 들렸다. 9간 등이 “우리들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물었다.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하니,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일부러 여기에 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9간들은 이 말을 좇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후 우러러보니 하늘에서 붉은 줄이 늘어져 땅에까지 닿았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해서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탑(榻 : 평상) 위에 두고, (중략)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가 매우 훤칠하니 컸으며 이내 탑 위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삼가 절을 올리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중략)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이 건국사료는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 국가였던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다. 수로왕 설화는 건국의 정통성을 하늘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건국설화와 맥락을 같이하고, 천강(天降)설화에다 난생(卵生) 설화가 함께 보인다. 전기 가야연맹의 주도국가였던 금관가야는 9간이라는 토착세력과 수로왕이라는 이주민세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을까

금관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은 어디에서 왔을까?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김유신 전에 그 단서를 추측할 만한 기록이 있다.

김유신은 왕경(王京 : 경주)사람이다. 그의 12대 조상이 수로(首露)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수로는 후한 건무 18년(42)에 구봉(龜峯)에 올라 가락(岢洛)9촌을 바라보고 그 땅에 가서 개국하여 가야라고 했다가 후에 금관국이라고 개칭했다. 그 자손이 서로 계승해 9대손 구해(仇亥), 또는 구차유(仇次休)가 되었는데 유신의 증조부다.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소호(少淏)금천(金天)씨라 하며 김씨로 성을 삼았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 : 황제헌원씨)의 후예요, 소호의 후손’이라 했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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