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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을 위한 서양사

정기문 지음 | 푸른역사
스미스는 당시 유행한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신봉자로, 이신론에 따르면 신은 시계 제조공과 같다. 전능한 능력으로 세상을 창조했지만, 시계가 스스로 움직이듯 세상의 운행에는 관여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의 시계인 세상은 법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작동한다. 이 원리는 자연의 일원인 인간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제를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보고, 이기심을 자연 질서에 부합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스미스의 주장은 근대 경제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으로 인식된 개인의 이익 추구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자, 신의 질서에 맞는 태도로 탈바꿈한 것이다. 1776년에 발표한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자신의 경제 논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때 사용한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경제가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데 사회나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거나 조정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고,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정부는 경제에 최소한으로 개입해야 한다.



스미스의 뒤를 이어 맬서스, 리카도가 발전시킨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은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고전 경제학이 발전하면서 자유방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자유방임을 당시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해보면, 사회 제도나 국가의 법이 특정 집단, 즉 빈곤한 자들을 돕는 것은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했다. 이로써 관습이나 종교, 정부의 통제 없이 오직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자율적인 노동 시장이 형성되었다. 기계제 공장의 등장은 상품 생산 방식의 혁신을 가져왔다. 미숙련 노동자가 많이 필요하게 되자, 자본가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고용하였다. 흔히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 기계·증기 기관·철도 등의 발명이 인간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외형적인 변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외형적인 변화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혁명이 맬서스적 환경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맬서스적 환경 속에서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었다. 식량 부족이라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혀서 노인을 죽이고 아이를 버리고 서로 싸워야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이런 고민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현대 인간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산업혁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업혁명과 이 혁명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까지 미화할 수는 없다. 산업혁명 초기 자본가들은 이 '비극'은 일시적인 현상이고,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에 머지않아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고 인류에게 눈부신 풍요가 찾아올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예상은 실현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들의 생활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노예처럼 비굴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대변해줄 새로운 사상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떠오른 것이 사회주의 사상이었다.퀘이커교도였던 영국인 윌리엄 펜은 1693년에 출간한 『유럽평화론』에서 유럽 각국이 인구와 경제력에 비례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유럽 의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였다. 루소는 국적을 초월한 '유럽 시민'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유럽인들이 유럽 통합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1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전쟁을 거치며 유럽은 피폐해졌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이제 유럽이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유럽 통합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났다. 이제 세계의 대립 구도는 미국-소련-유럽으로 삼분되어, 유럽은 양 강대국 사이에 낀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유럽 통합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포문을 연 사람은 영국의 수상 처칠이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좋은 성과를 거두자 회원국들은 좀더 강력한 연합체를 모색하여, 1957년 3월 25일에는 유럽경제공동체(ECC)가 탄생하였다. 이 조약으로 유럽은 사실상 하나의 경제 공동체가 되었다. 유럽경제공동체가 좋은 성과를 보이자, 1961년 8월 9일 영국이 정식으로 가입을 신청했으나 영국의 가입은 좌절되었다. 미국과 친한 영국이 공동체에 가입하면 미국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는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우려 때문이었다.



1967년 7월 1일 유럽공동체(EC)가 만들어졌다. 유럽공동체의 경제 통합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며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정치적 통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유럽의 정치적 통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조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었다. 1991년 12월 체결된 이 조약은 유럽공동체가 시장 통합을 넘어 정치·경제적 통합체로 진전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 조약은 유럽공동체라는 명칭을 유럽연합(EU)으로 바꾸고,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단일 통화를 단계적으로 도입하며, 유러폴(European police intelligence agency, 유럽경찰)을 창설한다고 규정하였다. 현재까지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합의 사항들은 착실하게 이행되고 있다. 이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독일인·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루이 16세의 죽음과 혁명의 '수출''테르미도르의 반동' 과 혁명의 종결경제 통합에서 정치 통합까지, 유럽연합의 탄생그런데 근세 초에 나타난 위대한 천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을 깨뜨렸다. 최초의 위대한 천재는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1514년 라테란 공의회는 역법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 코페르니쿠스를 초대하였다. 달력은 로마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력이었다. 로마인들은 지구가 태양을 365.2422일 만에 한 번씩 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일로 잡고, 매 4년마다(초기에는 매 3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두어 실제 1년의 길이는 365.25일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시대에 이미 달력과 실제 날짜 사이에 10일 이상의 편차가 생긴 상태였다. 교회는 춘분, 즉 3월 21일 이후 보름달이 뜬 다음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었는데, 달력에 오차가 있다면 부활절 날짜가 뒤죽박죽 돼버리기 때문에 정확한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 코페르니쿠스를 초대한 것이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제대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수학과 천문학 자체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다. 행성의 타원 운동, 역행 운동은 고대 때부터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고대인들은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다섯 개 행성이 별자리 사이를 조금씩 옮겨 다닌다는 사실을 관측하였다. 지구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인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고 가정한다면 다른 행성들의 운동이 조리 있게 해명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뒤엎고, 성경을 부정하는 이단적인 생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지구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고, 천구에 있는 신들이 인간을 보살핀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뒤엎었다. 이 주장은 갈릴레이를 거쳐 뉴턴에 와서 입증되었다.우주가 생명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나서 진화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조르주 르메트르라는 벨기에의 과학자는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까이 붙어 있었어야 하고, 그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간다면 은하들이 점점 더 가까워지다가 결국 단 하나의 점으로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메트르는 그 최초의 한 점을 '원시 원자' 또는 '우주의 달걀'이라 명명하고, 그 점이 궁극적으로 제로 상태가 될 때까지 수축하다가 마침내 폭발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최초의 폭발을 '큰 소리(big noise)'라고 불렀다. 이 이론이 발표되자 호일 등의 천문학자들이 이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호일은 1940년대에 BBC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큰 소리 이론을 비판하면서 이 이론을 '빅 뱅(Big Bang, 꽝 소리)'이라고 불렀다.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했지만, 이 말은 오늘날 대폭발 이론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후 러시아 출신의 물리학자 가모프(1904∼1968)가 원시 불덩어리 속에 일어나는 핵반응이 우주의 99퍼센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인 수소·중수소·헬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초신성 폭발로 인해서 온 우주가 뜨거운 열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우주에는 이 열 세례를 입증해주는 마이크로파인 우주 배경복사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1965년, 마침내 그때까지 계속된 우주 진화 논의를 일단락 지을 수 있는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펜지어스와 윌슨은 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전파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었는데, 통신 위성의 전화를 중계해주는 수신기에서 나는 소리가 우주에서 오는 전파라고 생각하고 이를 과학계에 보고하였다. 과학자들은 이 소리가 가모프가 주장했던 우주 배경복사, 즉 태초의 불덩어리에서 퍼져 나온 빛이 소멸되면서 내는 전파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가모프의 대폭발 이론, 빅 뱅 이론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해주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모든 사상이나 주의(主義)의 바탕에는 우주론이 깔려 있다. 우주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서 사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규명해야만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건축의 상징으로 하늘 높이 솟은 성당의 첨탑은 한 발짝이라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했던 중세인들의 심성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알고 있다면, 중세인들의 의식 구조뿐만 아니라 생활 습관을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중세인들은 조금이라도 하늘 가까이로 올라가 있는 것은 좋은 것이고, 땅속에 들어 있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대 주요 사상에 우주론은 큰 영향을 끼쳤다. 17세기의 과학혁명 이후, 구체적으로는 뉴턴 이후의 과학자들은 우주가 규칙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18세기 이후 서양의 사상가들은 우주가 규칙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한다면, 인간 세계도 규칙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유주의·계몽주의·사회주의의 바탕에는 모두 이 같은 생각이 깔려 있다. 우주론의 발전은 서양인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적 우주론이 탄생하기 이전까지 서양인들은 신화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즉 자연과 인간사의 모든 것을 신이 장악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전근대적 우주관을 깨트린 이후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이 허구임을 깨달았고 자연과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발전시켰다. 이후 우주론에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서양인들의 자연관과 인간관, 생활양식도 그에 따라서 변했다. 결국 모든 사고의 바탕에는 우주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원시인들이 면밀한 천문학자였음은 틀림없지만, 천문학을 하나의 학문체계로서 발달시키고 그것을 후대에 남긴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다. 그리스의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지구 주위를 도는 여덟 개의 천구에 별들이 붙박여 있고, 그 천구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우주관은 로마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기독교에 의하여 더욱 힘을 얻었다. 우선 「창세기」의 창조 신화와 잘 어우러지고, 이 세상은 불완전한 것이니 미련을 두지 말고 완전한 저 세상, 즉 신의 세상을 추구하라는 기독교 교리와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고·중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갈릴레이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뉴턴(1642∼1727)이다. 뉴턴 이론은 관성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물체의 운동상태는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이 이론에 의해서 우주의 별들이 왜 계속해서 움직이는지가 설명되었다. 중력의 법칙은 모든 물체는 다른 물체를 끌어들이는 중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태양·위성·행성들이 자기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운동하는 것이 상호 간의 중력 때문임을 밝혔다. 이렇듯 코페르니쿠스·갈릴레이·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하였지만 결정적인 한계는 있었다. 즉, 이들은 전 우주가 하나의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물질세계이며 그 크기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지만, 우주가 정적인 세계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우주도 진화하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행성의 질량효과로 인해 행성 주위의 공간이 휘어졌다고 했다. 질량이 큰 물체의 주위 공간은 그 질량의 영향으로 휘어져 있다고 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을 태양 주위에서 빛이 휘는 현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뉴턴의 우주론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가령 질량이 매우 큰 물체는 자기 주변의 공간을 휘게 만들어 주변의 물체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면 행성과 항성, 항성과 항성이 충돌할 수 있고, 그 결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등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즉 우주는 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는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짐이 곧 국가"라는 말을 남긴 루이 14세 이래 프랑스의 왕들은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하며 강력한 통치를 행했다. 그러던 1789년, 루이 16세가 160여 년간 소집되지 않던 의회를 다시 소집했다. 당시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재무 대신 칼로느가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하였다. 귀족들은 삼부회를 소집하여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제 자신의 무덤을 판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삼부회 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면서 프랑스 전체를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실상 혁명은 삼부회의 선거 과정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삼부회는 각 신분별 대표가 비슷한 비율로 구성되어 신분별 투표를 했는데, 제3신분(평민) 옹호자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삼부회가 열리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제3신분의 대표 수가 배로 늘어났다. 평민 대표들은 독자적으로 회의를 삼부회가 아니라 '국민의회'라고 명명했다. 이 순간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왕권을 온전히 보존하고, 혁명을 막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군인들조차도 혁명을 열렬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은 전제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감옥을 함락한 후 시민군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시민들이 지배 계급에게 받았던 대로 복수를 했으며 이후 혁명은 피의 길이었다.



민중들의 혁명 열기가 계속 분출되는 가운데 국민의회는 자신들의 임무가 프랑스를 새롭게 운영해나갈 헌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의회 이름을 '제헌국민의회'로 바꾸었다. 국민의회는 1789년 8월 4일, 처음으로 중요한 성과를 내놓았다. 봉건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이다. 국민의회에는 분명히 고위 귀족들과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기들도 평민들과 똑같이 세금을 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000년간이나 지속된 봉건 지배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1517년 일어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기독교 세계의 보편성을 깨뜨렸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유럽을 대체할 수 없었고, 기독교가 미국을 비롯한 새로운 영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따라서 유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기독교 세계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다른 말을 찾기 시작했다. 더욱이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감에 따라 기존 지역과 새로 발견한 지역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날로 커졌다. 이때 유럽인들은 '서양(the west)'이라는 말을 유럽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시작했다. 하여튼 서양은 자신들이 동양과 다르다는 생각을 체계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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