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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리더 후진타오

기 에이리끼 지음 | FKI미디어
1985년 7월, 42세의 후진타오는 전국 최연소 지방성공산당서기로 귀주성에 부임했다. 중국 서남부의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전출한 것이었으나 후진타오는 성실하게 일해 지역 사람들의 호평과 호요방 총서기의 신뢰를 획득하게 된다.



귀주에 대한 속담에 '날씨는 사흘 계속 맑은 날이 없고, 토지는 3리(里) 계속되는 평지가 없으며, 사람은 단 돈 세 푼과도 인연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은 귀주의 빈곤을 잘 대변해준다. 인구 2,900만 명 가운데 약 30퍼센트에 달하는 800만 농민은 매우 빈곤해 먹고 입을 것이 항시 부족했다. 개간을 과도하게 추진한 결과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총면적의 30퍼센트가 넘던 삼림면적이 1985년에는 약 12퍼센트까지 격감해 있었다. 당시 귀주성의 1인당 총생산은 티베트의 59퍼센트, 상배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문맹률이 인구 3분의 1에 달했다.



그는 부임 초부터 귀주성 정부 간부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그들의 힘을 단결시켜 서민의 생활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빈곤 탈출은 중견간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청년단 출신의 후진타오는 젊은이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고난을 각오하자고 말했다. 사명감과 긴장감을 갖고 일해줄 것을 당부했다.



한 달 정도 조사를 마친 후진타오는 귀주를 개혁하기 위해 시급한 해결과제 두 가지를 선정했다. 첫째는 의식개혁을 통해 시장경제 관념을 갖게 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교육에 힘을 쏟는 것이었다. 귀주 재임 중 후진타오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농업, 축산업 분야에서 적극적인 교류를 했다. 뉴질랜드 기술자를 초청해 지방의 농민을 지도했다. 본인이 직접 대학에 강의를 들으러 나가면서 간부들의 직업훈련을 장려해 연수제도를 확립했다. 1986년 1년 동안 소수민족을 위한 간부 연수학교가 242개나 설립되었다.



후진타오는 '겸허한 자세를 보이고, 실무에 능하며, 서민과 친한' 종래의 정치 스타일을 고수했다. 시찰을 나갈 때 언론의 인터뷰는 기본적으로 피했고, 귀주성의 각 언론에 대해서는 자신의 개인 업적을 선전하는 식의 보도를 자제토록 요구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사실을 보고할 것, 실효를 생각할 것, 직접 현장을 찾을 것' 등의 원칙에 따라 화려한 행사나 눈앞의 이익을 탐하지 말고 서민의 입장에서 일하라고 했다.



호요방은 1986년 설에 귀주를 찾아 후진타오와 함께 지방을 시찰했다. 부임 후 겨우 반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귀주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그는 호요방의 질문에 상세히 답했고 그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후진타오는 귀주에 있는 동안 농촌지역에서 그때까지 시행되었던 집단생산체제를 바꾸었다. 식량생산의 청부제도를 실시해 경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다. 귀주에서 3년 반 동안 가장 큰 성과는 빈곤지역에 대한 지원이었다. 1985년에 비해 1988년에는 평균 수입 200원 이하의 빈곤인구가 22%에서 7%로 감소했고, 500만 명의 농민이 궁핍에서 탈출했다. 또 취학연령의 아동 입학률도 85%에서 90%까지 상승했다.



1985년 9월 당대회에서 호요방은 등소평의 지원을 받아 100명 이상의 노령 중앙위원을 강제로 퇴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호요방은 홍콩 신문기자와의 잡담 중에 국가 기밀로 되어 있는 등소평의 용퇴 시기를 발설하는 실수를 했고,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북경 정계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때 막 중앙고문위원회 멤버에서 강제 퇴임한 노인들은 등소평에게 호요방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권력을 이양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호요방의 권력은 대폭 삭감되고 공산당 제13차 전대의 인사권을 뺏기고 말았다.



1986년 말, 중국과학기술대학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는 효요방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12월 23일 천 명이 넘는 청화대학과 북경대학 학생들이 학장과 공산당서기를 상대로 민주, 인권에 관한 토론을 요구하며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호요방은 그들을 최대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자, 공산당 내부에 반(反) 호요방 세력이 결집했다.



1987년 설은 후진타오에게 가장 가혹한 정월이었다. 은사 호요방의 돌연한 실각에 의해, 그는 권력투쟁의 참혹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후진타오는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불똥을 피해갈 수 있었다. 더구나 등소평에게 더없이 좋은 인상을 심어주게 되었다.1989년은 중국인이 잊을 수 없는 해였다. 1월, 중국 편입을 지지하던 판첸 라마 10세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달라이라마 지지자들은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에서 티베트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소요를 일으켰다. 또 5월에는 민주, 자유와 부패일소를 주장하는 대학생 수만 명이 북경에 집결해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개혁을 요구했다.



두 사건은 원인은 각기 달랐지만 결말은 같았다. 라싸에서는 티베트 자치구 공산당서기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진타오가 무력으로 소동을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해 신속하게 질서를 회복했다. 북경에서는 등소평의 명령으로 계엄령이 발동되어, 군대와 전차가 출동해 천안문광장에 모였던 학생들을 몰아내고 이후 십여 년에 걸친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의 기반을 굳혔던 것이다.



분리 독립에 대한 후진타오의 단호한 결정과 쾌도난마 같은 과단성 있는 행동력, 경제진흥책과 티베트인에 대한 회유책 등은 등소평의 눈에 띄었다. 1992년, 등소평의 추천으로 후진타오는 정치국상무위원회에 들어갔고, 모택동의 뒤를 잇는 네 번째 후계자로 내정되었다.



티베트는 총면적 120만 평방 킬로미터로 중국 전 국토의 약 8분의 1을 점하고 있다. 특히 길이가 4천 km에 달하는 국경선은 국방면에서 중요했다. 1989년 설이 지나서 후진타오는 홀몸으로 티베트에 부임, 공산당 서기에 취임했다. 1988년 1년 동안 라싸에서 세 차례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티베트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북경에서는 호요방이 비판의 집중 포화를 받고 있었다. 지도부의 원로들은 소동의 원인을 호요방의 자유화 용인정책 탓으로 돌렸다. 또 호요방의 티베트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했던 오정화에게도 책임을 물어, 후임 선출을 시작했다. 마침 오정화는 고산병을 얻어 직무수행이 곤란한 상태였다.



1988년 말 후진타오가 티베트 자치구 공산당서기로 임명된 지 며칠 후, 북경 정부는 30년 만에 판첸 라마의 티베트 귀환을 허가했다. 판첸 라마는 문화대혁명 중 9년 8개월 동안 투옥되었지만 중국과의 분리 독립은 원하지 않는 티베트의 지도자였다. 북경 정부는 판첸 라마를 귀향시킴으로써 달라이라마의 영향력을 상쇄하려고 했다. 그러나 티베트에 온 판첸 라마가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문제가 커졌다.



후진타오는 장례식에서 자치구의 안정을 지키자며 티베트 주민에게 협력을 호소하였으나 1989년 3월 5일부터 군중과 경찰의 유혈충돌이 시작되었다. 3월 7일, 티베트자치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라싸 시가지 및 다쿠세 현(縣) 동쪽 일부지역에 대해 계엄령을 선포하여 데모, 집회, 파업, 시위 활동, 기타 집회를 금지했다. 계엄령을 선포한 지역에 출입하는 사람과 차량에 대해서는 보안 검사가 실시되었다. 티베트의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후진타오는 악인이었다. 그러나 중남해에서 티베트의 정세를 지켜보던 장로들에게 그는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1990년 1월, 티베트공산당서기로 부임한 지 1년이 된 후진타오는 라싸가 안정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 처음으로 「인민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계엄령 실시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5월 1일, 이붕 총리는 직권 명령으로 519일에 걸친 티베트 계엄령의 해제를 발표했다. 티베트의 과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장기안정, 두 번째는 경제진흥이다. 그래서 중앙정부는 농지의 청부와 가축의 사유를 인정하는 경제정책을 폈다. 또 농업세를 면제하고, 국·공영 기업과 개인 기업의 세금 일부를 감면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 외국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티베트에 설립한 외자기업에 대해 전국에서 가장 낮은 세율을 부과했다.



티베트 부임 1년 만에 후진타오는 심한 고산병을 얻어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고, 1992년 10월 19일 공산당 제14차 전대가 종료될 때 7명의 신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는 약관 49세의 후진타오가 포함되어 있었다.



1991년 8월 20일, 등소평은 강택민을 불러 지도부 인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후진타오를 상무위원에 추천했다. 첫째, 사람됨이 좋다. 후진타오는 선발한 은혜를 잊지 않는다. 둘째, 원칙을 견지한다. 티베트 독립 소요 당시 강한 의지력으로 대처했다. 셋째, 경력이 충분하다. 말단 부문에서의 경험도 있고, 청년단 중앙이나 지방장관의 경험도 있다. 넷째, 서부지역의 상황을 숙지하고 있다. 다섯째, 나이가 젊다.모택동 시절 이후 중국공산당지도부는 매년 여름이면 피서지로 유명한 북대하에서 일하는 습관이 있다. 1991년 8월 20일, 권력자 등소평의 한 마디로 후진타오는 강택민의 대를 이어 '제4세대'의 리더로 내정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북대하에 전용 별장을 갖게 되었다. 1992년 사퇴해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겠다고 발표한 등소평은 두 가지 행동을 했다. 하나는 중국남방을 시찰하고 개혁개방정책을 추구하는 것, 다음 하나는 강택민에 이어 차세대 후계자로 후진타오를 지명한 것이다.



중국공산당 역사상 후계자들은 거의 줄타기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건국 초기의 고강을 시작으로 유소기, 임표, 왕홍문은 모두 후계자로 지명돼 최고 권력을 눈앞에 두고 있다가 결국에는 실각하고 체포되는 몸이 되어버렸다. 문화대혁명 후에는 화국봉, 호요방, 조자양 세 사람이 연이어 당주석, 총서기로 취임했으나, 이 세 사람은 모두 등소평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결국 모두 실각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각기 커다란 공적이 있으며, 그것이 평가되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행정수완이나 실적은 극히 평범하다. 옛날 식으로 말하면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황제운이 있는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경영수완이 없었기 때문에 사업이 잘 되지 않아 '부르주아 계급의 아들'이라는 딱지를 피할 수 있었다. 청화대학 졸업 후에는 주변부인 감숙성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주성의 공산당서기였기 때문에 호요방 실각 당시 화를 면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티베트에서는 소요 진압의 업적을 세울 수 있었다. 건강이 나빠 부득이 북경에 나와 있을 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되었다. 후진타오는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두 계급 이상의 승진을 경험했다.



10년 전, 후진타오는 공산당 제14차 전대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및 서기처 서기로 뽑혀 당무 전반을 맡았다. 1998년에는 국가부주석에 취임해 나라의 행정, 외교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에는 중앙군사위원회 상무부주석이 됨으로써 해방군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10년 동안 그에게 현저한 실적은 없지만 커다란 실책도 없었다.



제4세대 인물 중 강택민의 가장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사람은 쩡칭홍이다. 강택민이 최고지도자로서 지도부에 계속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한 쩡칭홍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후진타오는 차기 지도자로 내정되긴 했으나, 그 지위가 확고하진 않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파벌을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최근 후진타오는 측근들을 적극적으로 지방 장관에 발탁하는 등 조금씩 그 세력을 넓혀나가고 있으며, 공산당 제16차 전대 후에는 후진타오 국가주석 취임과 함께 크게 약진할 것으로 전망된다.안내역으로 후진타오의 공식 방문에 동행했던 말레이시아 국제공업무역부 차관 곽수진에 의하면 후진타오는 지식이 풍부하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식견도 있고, 활기찬 새로운 타입의 중국 지도자라고 한다. 곽수진은 근거리에서 그를 관찰할 기회를 갖고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당무활동가 출신으로 경제분야에 어둡다고 알려진 후진타오가, 며칠 만나는 동안 실로 국제금융과 경제무역에 대해 해박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후진타오는 표현이 정확하고, 기억력이 좋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후진타오는 10년 전 중국최고지도부가 되었고, 처음부터 강택민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처음 7년 동안은 북경과 워싱턴 간의 언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5월, 미국이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을 오폭한 날 밤, 분노한 학생과 젊은이들의 행동이 반미 시위로 번지자 후진타오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을 필두로 하는 NATO군이 우리 대사관을 공격하고, 인명을 빼앗고, 건물을 파괴했다. 이것은 '범죄행위'이며, '야만적인 행동'이다. 학생과 인민은 대단히 격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정부는 모든 합법적인 시위를 지지한다고 표명하고, 인민에게는 국가의 근본적 이익을 생각해 과도한 반응을 삼가달라고 호소했다. 2001년 4월, 중국 전투기가 근해에서 미국 PC3정찰기와 충돌, 중미 관계는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위기가 수습될 때까지 후진타오는 워싱턴의 오만함에 분개를 표시했다.



권력교체의 시기가 가까워지면서 후진타오는 외교정책에서 강한 자세를 보이려는 듯하다. 2002년 1월, 그는 비공식적으로 미국문제연구팀을 설립, 미국 국회에 로비활동을 시도, 중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려 했다. 이 팀은 대만 문제에 대한 장기 전략도 연구과제로 하고 있다. 대만 문제는 여전히 중미 관계의 주요 관심사항이다. 대만 문제에서 어떤 성과를 내느냐가 후진타오의 대미 정책의 성패를 가름하는 바로미터이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패권주의' 반대를 표명하고, 최근 워싱턴이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해가고 있는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을 가할지도 모른다.



1999년 6월 26일, 후진타오는 홍콩에서 100여 명의 홍콩 선출 전국인민대표, 전국정치협상회의상무위원 및 각계 저명인사와 간담회를 가졌다. 한 기자는 회견에 대해, "후진타오는 메모도 보지 않고 인사했는데, 그 말이 논리정연하고 적절한 표현으로, 부주의한 발언은 일체 없었다. 인사에 흔히 들어가는 '저', '그'라는 말조차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중국에 없었던 새로운 타입의 지도자이다."라고 썼다. 홍콩특별행정구입법회의의 주석 범서려태는 "그는 대단히 소탈하고 친절하며, 인사할 때는 결코 메모에 의존하지 않으며, 말투가 또렷합니다. 대단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영진 정치협상상무위원은 회견 후, "젊고 유능하며, 두뇌가 명석하며 실행력이 풍부합니다. 이러한 부주석이 있다는 데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훌륭한 후계자로, 나라의 장래를 밝혀주십시오."라고 말했다.1968년 12월, 후진타오는 감숙성에 위치한 수력부 직속 제4댐건설국으로 전출이 결정되었다. 그는 유가협댐 공사지구 토목건축대에서 일반 작업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유가협댐 발전소는 1958년 수력부 북경댐 설계원에서 설계해 같은 해 가을에 착공되었는데, 1960년대 들어 시작된 중·소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국내 경제가 타격을 입자 부득이 공사를 중단했다가 1964년에야 공사가 재개되었다. 당시 이 댐은 아시아 최대규모의 수력 발전소였다. 그는 낮에는 다른 작업원과 함께 벽돌을 운반하거나 모르타르를 붓거나 하고 저녁에는 일반 공원과 같이 초라한 숙소에서 자면서, 석유 램프 불빛으로 모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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