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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기행 1

위치우위 지음 | 미래M&B
폼페이가 화산 잿더미에 파묻힌 것은 서기 79년 8월 24일이었다. 이미 1900여 년 전의 일이다. 1900여 년 전 도시라면 화산 폭발이 아니더라도 지금쯤은 모두 폐허로 변해있을 터이다. 그러니 폐허로 남았다고 해서 그렇게 마음 아파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19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뚫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전율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전혀 예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죽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파멸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순식간에 몰살당하거나 훼멸당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진이나 해일, 혹은 원자폭탄 등에 의한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철저하게 파괴되기 때문에 파괴 전후의 모습을 직접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폼페이의 훼멸은 단지 화산재가 뒤덮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천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된 뒤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자 거리와 점포, 정원과 조각상이 고스란히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돌길 사이사이 수레가 남겨 놓은 바퀴 자국과 빵가게의 각종 기물들, 창녀촌의 음탕한 그림, 저택 내부의 밀실들, 마치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금세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 여행객들이었다. 허무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랫동안 내 발길을 잡아끈 것은 크고 작은 극장 두 곳이었다. 노천극장인 대극장은 어림잡아서 4, 5천 명의 관중을, 소극장은 1천 명 정도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을 듯했다. 두 극장은 그 옆의 신전과 교묘하게 어울려 치밀한 건축군을 이루고 있었다. 광장에는 제법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도대체 언제 이곳이 파괴되었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극장에선 여전히 연극이 공연되고 있고, 관람객들이 관람석을 메우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재앙이 일어난 때는 정오였다. 별다른 조명이 없던 시대라서 야간공연은 거의 없었으며, 공연은 주로 오후에 열렸다. 만약 재앙이 정오를 지나 좀더 늦게 일어났다면 엄청난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19세기의 고고학자들은 극장 안에 있는 화산재 덩어리를 처음 조사하면서 관중으로 여겨지는 '사람 모양의 틀'을 발견했다. 화산재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몸부림치던 그 자세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뜨거운 화산재가 식으면서 굳게 되자 사람 형태 그대로 단단한 틀이 만들어졌다. 그 틀 안에 석고를 천천히 주입해 굳힌 다음 틀을 깨뜨리는 방법이 고안되면서 우리는 죽음과 사투를 벌인 폼페이 시민들의 최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폼페이를 소개하는 여러 글에서 우리는 심심찮게 비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이들은 폼페이가 극도로 사치스럽고 부패한 생활 때문에 하늘의 벌을 받았다고 떠들어댄다. 그들이 제시하는 사치와 부패의 증거물인 공중목욕탕과 일반 시민들의 저택과 정원, 창녀촌과 숱한 춘화는 고대 로마의 일반적인 생활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사실 폼페이는 비교적 협소한 도시였다. 오히려 폼페이를 통해 후대의 제왕들이 얼마나 과장성세를 즐겼으며, 얼마나 도시를 확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물론 폼페이 유적에는 부패하고 사치스러운 모습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참혹하게 무너진 도시를 앞에 두고 천벌 운운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폼페이 시민들보다 훨씬 다양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고통받는 이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어느 한 순간 조롱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재난이 닥치는 날 정작 그들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곳 폼페이에 재앙이 닥치던 그날, 오히려 도처에서는 인간 본연의 찬란한 광채가 빛났다. 위기가 닥쳐오는 순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성문을 지켰던 병사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아이와 노인들을 보호하려 했던 폼페이 사람들의 형상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암스테르담은 색채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생화 수출량이 세계 최대인데다 색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렘브란트와 고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쇼윈도에 적나라하게 서 있는 섹시한 여자들의 다채로운 모습까지 더해져 눈이 부실 정도이다.



서양의 대 화가들 중에 평생 동안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모두 네덜란드인, 바로 렘브란트와 고흐였다. 그 중에서도 집단적인 심미적 상황과 관련되어 억울한 경우를 당한 렘브란트의 일생은 이 도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642년 렘브란트의 나이 서른여섯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순셋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더 이상 예술창작으로 생계를 도모할 수 없었으며, 일상생활 자체가 크게 위협을 받았다. 그 일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열여덟 명의 암스테르담 시민대는 렘브란트에게 자신들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을 한 화폭에 담기는 어려웠으므로 렘브란트는 숙고 끝에 경보가 울린 상황에서 신분에 따라 제각기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그려넣었다. 이 그림이 바로 예술사상 가장 진귀한 명품 중 하나인 <야경>이다. 그런데 시민대원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공평하지 못하며, 특히 뒤쪽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명암이나 크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려 그림을 사지 않기로 결정했을 뿐 아니라 법정에 고소하는 법석을 피웠다.



이 작품은 구경한 암스테르담의 수많은 시민들은 타인이 재난을 당한 것에 대한 흥분을 웃음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의 예술적인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가 없을 예술평론가들과 화가들은 무지한 시민대와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렘브란트를 구해내기는커녕 작품 앞에 서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세상 사람들의 표준대로 시민대가 밝은 옷을 입고 음식이 가득 쌓여있는 식탁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을 그리라는 제안을 거절하자 렘브란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그의 그림은 날로 좋아졌지만 더 이상 그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그는 늘 가난했다.



그가 죽은 뒤 백 년이 지나 영국,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의 유명한 화가들이 모두 렘브란트로부터 예술적 감화를 받았다고 말하자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라 암스테르담은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했고, 여덟 명의 시민대 역시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최근 몇 년 들어 렘브란트의 고택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고택만 보면 그가 말년에 그다지 가난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더 이상 빚을 갚을 능력이 없자 공증 사무실에서 그의 집을 경매 처분했다고 한다. 렘브란트는 남루하기 짝이 없는 유태인 건물로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거장의 사인이 새겨져 있는 빨간 넥타이를 사서 맸다. 그의 이름은 다양한 서체로 크고 작은 문들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몇 백 년 동안 이 이름 때문에 존재했고, 이 이름을 위해 환호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은 오로지 넥타이에 남겨진 서명뿐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그가 가장 강한 터치로 이 혼잡한 세상을 향해 이렇게 변론을 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거리의 이름이 바로 유랑자대로이다. 이곳은 주객 구분 없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며, 예술적인 분위기가 넘쳐 흐른다. 신사적 풍격과 군자적 기백을 엿볼 수 있는 문명의 질서로 가득하다. 이 거리를 돌아다니다 지친 우리 일행은 바람을 쐬려고 해변으로 향했다. 해변 역시 하나의 광장으로 중간에 큰 탑이 솟아 있었는데, 탑의 꼭대기 부분에는 콜럼버스의 입상이 보였다. 그는 발 밑에 무엇이 있든지 개의치 말고 앞에 펼쳐진 것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유랑자대로의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콜럼버스로 인해 나는 바르셀로나의 또 다른 거인 가우디를 알게 되었다. 처음 나는 바르셀로나의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 건설이라는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그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공사를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이었는데, 그 후 44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외관을 완성했다. 그리고 외관 완공을 축하하기 2주일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일흔네 살이었다.



그리고 꼭 74년이 흘렀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이 계속 교회를 건설하고 있지만 아직도 건물은 미완성인 상태이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시 당국에서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20년 뒤에 완공 예정이라고 하니 168년 만에 완성될 것이다. 가우디는 시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온 신경을 집중시킨 것은 오로지 건축 그 자체였다. 참으로 특이하긴 하지만 그의 웅장하고 위대한 행위 방식을 접하면서 유랑자들은 본성적으로 바로 발 아래 놓인 '지금'이 아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건축의 천재였던 가우디는 대담하게 여러 가지 측량 기술을 익히고 발명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것들은 구체적인 수단일 뿐 총체적인 행로는 아니었다. 그는 그의 행로를 시간에, 미지의 세계에, 숙명에 내맡겨 버렸다. 그가 만약 교회 건설을 세심하게 계획하고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여 기한에 맞춰 완성했다면 그는 만족스러운 건축설계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단 일에 착수하자 수시로 새로운 발견이 이어졌으며, 창조적인 충동이 밀려들었다. 그의 두 발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언제 그곳에 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이처럼 공사 기간이 연장됨으로써 예상하지 못한 투자비가 더욱 늘어났으니 계약 위반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일에 완전히 몰입하는 그의 진지함과 성실함 그리고 이전까지 그가 이룩한 성과로 인해 그는 폭넓은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제자들은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가며 이미 완성해놓은 외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적 격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스승이 마지막 도달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유랑을 시작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후속 공사가 한창인 교회 건설 현장에서 제자들은 가우디를 비판함으로써 가우디를 받들고 그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나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을 존경해 마지않는다. 14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니. 얼마나 큰 관용과 인내심을 발휘한 것인가. 시 당국이 20년이라고 답변했지만 몇 년이 필요한지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이미 100여 년을 참아온 이 도시는 기다림을 즐기는 일에 익숙해진 지 오래이다. 이러한 교회와 가우디, 그리고 그의 제자들과 시민들의 묵계에 힘입어 유랑은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테마가 되었다. 유랑에 충분한 증거와 이유를 가지게 되었다.



가우디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늙어서도 그는 자신의 거처를 동화 세계처럼 꾸며 놓았다. 의자 하나, 탁자 하나, 거울 하나에 이르기까지 틈만 있으면 열심히 가꾸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일상 속에서 정형화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을 할 때마다 일상적인 틀과 정형에서 벗어나 탁자 하나, 의자 하나에도 모두 유랑의 성격을 부여하고자 애썼다.



가우디는 1936년에 차 사고로 죽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시신 안치실로 옮겼는데, 그의 옷이나 물품 어디에서도 그의 신분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뒤 가우디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가우디의 도시'는 당황하여 사방으로 그를 찾으러 다녔다. 결국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 도시 전체는 길고 긴 탄식과 함께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그의 고택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가 항상 머물던 집을 우러러본다. 그리고 그의 침대가 얼마나 작은지를 발견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이 독신자가 항상 길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에 야전침대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카페는 시끄러운 큰길 교차로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리 지붕이 인상적이었는데, 유리 지붕 바로 아래 있는 자리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그곳에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과 높은 건물들을 볼 수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번화한 시가지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면 때론 강렬하고 때론 평화로운 파리 사람들의 눈빛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실내는 커피 향이 진동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혼자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거나 상대방과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손님들로 가득 찼지만 소란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종업원에게 그들이 자주 앉았던 자리를 물어보았고, 마침 그 자리가 비어 있어 우리는 그 자리에 앉은 다음 일단 커피를 주문했다. 금세 커피가 나왔다. 잔을 들고 향을 맡았다. 들이 자주 마시던 커피를 시켜 그들과 같은 향기를 맡아보고 싶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그들이란 바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이다. 카페 드 프롤르는 사르트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파리 시민들도 익히 알고 있는 카페이다. 나는 전부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이 카페에 자주 들러 많은 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로 친구를 만나거나 여러 사람들과 토론하던 장소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이곳에서 글을 썼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수많은 명저가 바로 이 카페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손님들이 줄곧 들락거려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글을 썼단 말인가? 혹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인사를 주고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유명한 한 철학자와 일반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거리와 가게가 합쳐져서 세계적인 명저를 탄생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집에 별도의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자료들도 거의 집에 있을 것이니 깊이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데는 당연히 카페보다 집이 낫지 않겠는가? 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 정도라면 거주 환경도 평안하고 풍요로웠던 터인데, 굳이 카페의 작은 탁자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의문부호의 종점은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제법 이름이 난 가게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는 일이 드물다. 원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예전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어쩌면 내가 해답을 구하는 데 이런 모습이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와 사르르트에 대한 대담을 하기 위해 찾아온 팀들 이외에 카페에 있는 여덟 명의 사람은 각기 네 부분의 자기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각각의 자기장이 모두 내향적이며 스스로에게 이미 만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울타리를 만들어 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분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곳에 또 다른 자기장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이 이처럼 다른 사람의 존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이유는 사실 다른 사람의 존재 형태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을 존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문제는 카페에서 스스로 자신들을 위한 벽을 쌓을 바에야 왜 집이라는 자연스러운 벽을 활용하지 않는가에 있었다. 사실 그들의 영역을 에워싸고 있는 벽은 반투명한 것이다. 결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자신들의 느낌을 번잡한 세상에 대한 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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