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
정기문 지음 | 푸른역사
19세기 말에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고, 이스라엘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오니즘운동의 첫 번째 성과는 아마도 '밸푸어 선언'일 것이다. 시온주의자들은 독일 프랑스·영국·미국 등 주요 국가에서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정치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왔는데, 1917년 영국의 국회의장 조지와 외무상 밸푸어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영국이 밸푸어선언을 한 데에는 물론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친영국적인 유대 국가가 건설되면 수에즈 운하를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영국은 한편으로는 맥마흔 협정(1915)을 통하여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랍인의 지배를 약속하는 등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영국 정부는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체적으로 친아랍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현실적으로 중동의 자원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39년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공식적으로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유대인 이민 제한을 발표했다. 아마 이 시기에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본격적인 반영 투쟁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와 맞서기 위해서 영국에 협조했다. 그러면서 영국 정부와 싸우지는 않았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영국 총독부와는 계속해서 싸웠다. 자신들의 독립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의 테러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가능한 한 빨리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팔레스타인 문제는 전적으로 유엔에 맡겨졌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세 개 구역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각각 만들고,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로 만들자는 이 제안은 1947년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환호했고, 1948년 5월 14일 독립국가 탄생을 선포했다. 아랍인들은 아랍 연맹을 결성하여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계속된 기부금 요청에 지쳐 있었지만, 유대 민족의 혼과 자존심을 일깨우는 골다의 연설에 감동했다. 골다는 5,000만 달러를 모금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있었다.
골다가 갑자기 영웅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건설 과정에서 골다는 수십 번이나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해야 했다. 요르단 국왕 압둘라를 설득하기 위해서 아랍 여인으로 변장하고 적진을 통과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골다의 이 헌신적인 노력을 잘 알고 있던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 벤구리온은 골다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골다는 외무부 장관 등 정부 요직을 거치며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유지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리고 1969년, 마침내 이스라엘의 4대 수상이 되었다.골다가 수상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인 1973년 10월 6일, 그날은 유대인들의 대속죄일이었다. 대속죄일은 유대인들이 1년에 한 번씩 그동안 지은 죄를 사면받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이면 염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제비를 뽑아 한 마리는 야훼께 속죄 제물로 바치고, 한 마리는 광야에 내다 버렸다. 버려진 양은 맹수에게 잡혀 먹히든지 굶어 죽는데, 유대인들은 그 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간다고 믿었다. 이 대속죄일에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이집트의 사다트가 중심이 된 아랍 연맹국이 이스라엘을 선제 공격하였다. 골다는 이스라엘이 침략자로 낙인찍혀서는 안 된다며 사태를 좀더 지켜보자고 했다. 어찌 보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분별없는 행동처럼 보였을 수도 있지만, 골다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아랍인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이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순간, 골다는 다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아랍 연합국과 휴전을 맺기로 한 것이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골다를 배신자라고 비난했지만 골다는 단호했다. 아랍 연합국을 완전히 패배시킨다면 그들은 다시 복수의 칼날을 갈 것이고,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음 선거에서 골다를 다시 수상으로 선출함으로써 이러한 평화주의 노선을 승인했다. 그리고 4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아랍과 이스라엘이 평화를 위한 중요한 진전을 이루어가던 1978년, 골다는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골다가 죽은 지 석 달 후 카터의 중재 하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결과 30여 년간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되던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아랍의 다른 나라들은 이집트를 배신자로 규정했고, 1981년 10월 평화 협정을 주도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암살당하면서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는 다시 깨졌다. 오늘도 팔레스타인에는 총성이 멎지 않고 있다. 이러한 때 골다 메이어의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골다를 '건국의 어머니'로 숭배하고 있다.이집트와 로마 영웅을 다 사랑한 야심가그리스 최고의 지성, 아스파시아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가르친 여성연설문을 작성해준 페리클레스의 아내이자 고문프롤레마이오스 12세는 죽음을 앞두고 가장 현명하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으니, 클레오파트라의 재능과 자질을 알아보고 그녀를 왕위 후계자로 지정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아들의 계승권이 딸의 계승권보다 앞선다는 이유로 클레오파트라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18세였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열 살에 불과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형제끼리 결혼하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에 따라서, 그리고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나라를 공동 통치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왕권을 강화시켜 점차 독자적인 통치를 펴나갔다. 그러자 환관 포티누스는 군인 아킬라스 등과 손잡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앞세워 클레오파트라에게 도전하였다. 결국 환관 포티누스의 공격을 받은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망명하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권력의 정상 자리를 두고 투쟁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평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측근들은 폼페이우스 장군을 환영하는 체하다가 죽여서 카이사르에게 선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온 카이사르는 이집트가 내분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행히도 카이사르는 신의 있는 로마의 지배자로서 로마가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양위하기 전 자신이 로마와 맺은 동맹 계약서에 의거하여 자기 자녀를 로마가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로마도 거기에 동의하였다. 카이사르는 분쟁 당사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를 불러서 의견을 들어보고 가능한 한 타협을 유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클레오파트라는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여 시리아에서 조그만 배를 구해 시종 몇 명만 거느린 채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감시망을 뚫고 카이사르가 있는 왕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또 한 번의 묘책을 생각해냈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하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융단에 돌돌 말아서 상자에 넣어 궁정 입구로 가서 카이사르에게 바칠 선물이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마법처럼 융단 속에서 튀어나온 절세 미녀.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젊고 예쁠 뿐만 아니라 두둑한 담력과 기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둘은 사랑을 나누었고,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기원전 47년,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꿈같은 세월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동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카이사르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카이사르가 이집트의 부를 이용하여 권력을 더욱 강화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카이사르는 온갖 비방과 질투를 받은 끝에 결국 자신이 양자로 삼으려고 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카이사르와 손잡고 세계를 지배하려던 클레오파트라의 꿈도 깨졌다.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절세 미녀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유혹한 요부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그 외모가 아니라 뛰어난 지성과 훌륭한 언어 구사력, 그리고 용기와 지략에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망명지 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오기 위해서 조각배를 타는 모험을 감행했고, 양탄자 속에 숨어 들어가 카이사르를 만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사랑했지만 결코 그 사랑에 취해서 자신과 조국을 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서 조국 이집트를 부흥시키고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려고 했다. 덕분에 이집트는 람세스 2세 이후 1,000여 년 만에 다시 근동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추앙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이 고액의 수업료를 받을 때 소크라테스가 거의 무료로 지식을 가르쳤다는 점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아스파시아와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는 천한 헤타이라이 출신 여성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스파시아의 용기는 또 어떤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추앙받던 소크라테스에게 매를 들었던 그 용기와 자신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흔히 여자들이 논리적·철학적인 사고 면에서 남자보다 뒤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역사 속 인물들을 추적해보면 뛰어난 여성 과학자·철학자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여성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해주지 않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문제이다.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발굴과 재평가 작업이 시급하다.세계의 절반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선구자, 월스톤크래프트
불우한 가정 환경과 『여권의 옹호』의 탄생성녀 혹은 악녀,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온몸을 바치다세계 제국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부장이었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 ?∼ 30)를 중심으로 한 카이사르 파와 브루투스, 키케로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귀족파) 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와 유대를 정복하고, 서서히 이집트 쪽으로 진출해왔다. 그리고 기원전 41년, 타르수스에 정박해 있던 안토니우스는 일부 이집트인들이 공화파를 지지한 사실을 추궁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최고급 장식과 보물들로 치장하고, 귀한 보물을 싣고 안토니우스에게로 향했다. 쾌락과 사치를 갈망하던 안토니우스는 첫눈에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마흔 두 살이었다. 이집트의 무한한 부와 안토니우스의 강력한 군대가 결합하였으니 세상에 무엇이 부러웠겠는가. 안토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시리아·아르메니아·메디아·키프로스를 지배하는 대제국
의 왕이 되었다. 동방 지역에서 클레오파트라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자 로마는 매우 당황하였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더 이상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부했고, 이제 양자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지휘하는 이집트군과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충돌하였다. 마침내 악티움, 즉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아카르나니아 북쪽 갑(岬)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후퇴를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후퇴한 것을 안 안토니우스는 격분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뒤였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안토니우스가 살아 돌아오자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 바로 앞까지 도달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사절을 보내 싸움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그는 클레오파트라만 구할 수 있다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제안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도리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사절을 보내 '왕위에서 물러나고, 안토니우스를 처형한다면' 평안한 여생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거절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전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가 전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여왕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비통해하며 칼을 자신의 배에 꽂았다. 그러나 잠시 후 신하가 와서 여왕이 살아 있다고 전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에서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라서 자살하였다. 이렇게 해서 클레오파트라의 야망과 사랑은 막을 내렸다. 클레오파트라의 나이 39세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후 태양의 나라 이집트는 로마에 병합되었고, 그 화려했던 문명의 영광도 영원히 사라졌다.세계 제국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부장이었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82 ?∼ 30)를 중심으로 한 카이사르 파와 브루투스, 키케로를 중심으로 한 공화파(귀족파) 간의 내전이 일어났다. 안토니우스는 동방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스와 유대를 정복하고, 서서히 이집트 쪽으로 진출해왔다. 그리고 기원전 41년, 타르수스에 정박해 있던 안토니우스는 일부 이집트인들이 공화파를 지지한 사실을 추궁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를 소환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최고급 장식과 보물들로 치장하고, 귀한 보물을 싣고 안토니우스에게로 향했다. 쾌락과 사치를 갈망하던 안토니우스는 첫눈에 클레오파트라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마흔 두 살이었다. 이집트의 무한한 부와 안토니우스의 강력한 군대가 결합하였으니 세상에 무엇이 부러웠겠는가. 안토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시리아·아르메니아·메디아·키프로스를 지배하는 대제국
의 왕이 되었다. 동방 지역에서 클레오파트라가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자 로마는 매우 당황하였다. 로마인들은 안토니우스에게 더 이상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요구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부했고, 이제 양자 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지휘하는 이집트군과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립파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충돌하였다. 마침내 악티움, 즉 그리스 서해안에 있는 아카르나니아 북쪽 갑(岬)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후퇴를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가 후퇴한 것을 안 안토니우스는 격분하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관계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은 뒤였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을 배반했다고 생각했으며, 클레오파트라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안토니우스가 살아 돌아오자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 바로 앞까지 도달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사절을 보내 싸움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그는 클레오파트라만 구할 수 있다면 목숨도 바치겠다고 제안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도리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사절을 보내 '왕위에서 물러나고, 안토니우스를 처형한다면' 평안한 여생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거절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전력을 다해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그가 전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여왕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비통해하며 칼을 자신의 배에 꽂았다. 그러나 잠시 후 신하가 와서 여왕이 살아 있다고 전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가슴에서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라서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