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색의 문화사
21세기연구회 지음 | 예담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색 중 하나는 호랑가시나무와 전나무의 짙은 녹색이다. 호랑가시나무와 전나무는 어떻게 크리스마스와 연결되었을까.
그리스도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호랑가시나무는 그러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떠오르는데, 그 이유는 호랑가시나무의 가시가 가시관을 연상시키고 붉은 열매가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나뭇잎으로 집을 장식하는 풍습은 기독교 포교 이전 유럽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다만 그때는 호랑가시나무가 아니라 기생나무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전해진 첫 해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집집마다 이 기생나무를 장식했다. 하지만 교회가 기독교를 포교하면서 기독교의 해석에 잘 맞는 호랑가시나무를 대체 식물로 권했기 때문에 점차 크리스마스에는 호랑가시나무로 장식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8세기 전반 호랑가시나무보다 늦게 독일에서 나타났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기독교가 전해지기 전까지 오크(너도밤나무과의 수목)를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기독교를 전한 영국인 선교사가 사람들이 지나치게 오크를 신성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눈앞에서 오크를 잘라버리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밝혔다. 그때 쓰러진 오크 옆 전나무의 어린 싹을 발견한 그 선교사는 이를 그리스도의 기적과 연결시켜 신앙의 상징으로 삼았다. 이는 다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설에 불과하며, 전나무 역시 오크와 마찬가지로 신성시되어 왔기 때문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전나무 장식이 만들어졌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상록수인 포인세티아의 꽃은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많이 쓰이는데, 이 꽃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꾸미기 시작한 것은 1828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그 풍습이 전해진 후이다. 스페인의 침공 후 기독교화된 멕시코에서는 18세기경부터 빨강과 녹색의 잎을 동시에 갖고 있는 포인세티아 잎의 형태를 그리스도 탄생을 의미하는 베들레헴의 별로 보고, '성스러운 밤의 꽃'이라 불렀다. 그리고 멕시코에 부임한 초대 미국 대사가 이러한 풍습을 알고 미국에 전했다. 빨강과 녹색의 장식도 멕시코인의 전설도 이 식물이 크리스마스에 그 무엇보다 잘 어울렸기 때문인 것이다. '포인세티아'라는 이름은 그 미국 대사를 기려 붙인 이름이다.4장 풍요와 열정의 색 가득한 이슬람의 세계
에메랄드 빛 신의 옥좌5장 빨강, 정열적으로 강하게
경사스러운 날에는 빨강을기원전 1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이란 고원을 거치고 카이바르 고개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했다.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가부장적인 대가족과 함께 행동했지만 씨족장, 부족장이 그들을 총괄했기 때문에 이주 과정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강하게 단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이미 정치적 권력자, 종교적 권력자(사제), 그리고 일반 민중이라는 세 가지 신분이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 아리아인은 인더스 문명과 접촉한 뒤 힌두스탄 평원으로 이주하여 그 문명을 흡수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점차 혼혈이 생기고 농경문화로 생활양식이 변화했으며, 신에 대한 찬가를 모은 인도 최고의 문헌 『리그베다』가 탄생했다.
기원전 1000년경에는 인도인들이 성스러운 강으로 숭배하는 갠지스 강 유역에서 정주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때부터 기원전 600년경까지 『리그베다』에 이어 브라만교의 기본적인 성전이 되는 세 편의 베다도 만들어졌다. 이러한 종교 문서가 차례로 씌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가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즉 이는 농경과 목축 등의 노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브라만(사제 계급), 크샤트리아(왕족이나 무사), 바이샤(농민이나 목축민, 상인 등), 수드라(원주민 노예)라는 네 종류의 계급(바르나)이 생겨났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의 초기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신분의 차는 점점 엄격해져서 계급을 초월한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고, 식사 때도 계급이 다르면 한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계급을 뜻하는 '바르나'라는 말에는 '색'이라는 의미도 있다. 가장 높은 위치의 브라만이 하양, 크샤트리아가 빨강, 바이샤가 노랑, 수드라가 검정으로 상징되었다. 일설에는 이동해 온 아리아인의 피부색이 원주민보다는 하얗다는 이유에서 흰색을 최고로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점차 혼혈이 생기면서 피부색에 따른 구별은 없어졌지만 그들이 피부색으로 사람을 구별했다는 흔적인지 '바르나'라는 말은 신분 제도의 명칭으로 그대로 남았다.운동회 등에서 만국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에 매우 다양한 색들이 쓰인 듯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빨강, 노랑, 녹색, 파랑, 하양, 검정, 오렌지색의 일곱 가지 색으로 표현된다. 국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에 대한 선호는 문화와 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색채학적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각각의 나라 또는 지역에서 선호하는 색에 대해 살펴보겠다.
국경. 인종, 종교를 막론하여 우선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파랑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서 사람들은 검정과 회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태초에 '빛'이 신으로부터 주어졌다고 한 것처럼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빛이다. 따라서 빛이 없는 상태인 검정과 빛이 약해진 듯한 회색은 인간이 생리적으로 거부하는 색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색의 선호도 조사에서 검정을 좋아하고, 파랑을 싫어한다는 결과가 완전히 뒤바뀐 적은 없다. 즉 종교나 문화가 색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색 자체에 대한 선호는 그것을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국기처럼 그 나라의 종교, 문화의 영향과 색의 선호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싫어함에도 검정을 국기에 사용하는 나라가 적지 않은 것이다.
파랑처럼 녹색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국기에 사용되는 녹색의 경우 이슬람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슬람과 종교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다. 빨강은 사회적·생리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따라 사상적인 것, 피의 이미지, 흥분을 일으키는 색 등으로 나라마다 그 의미가 달라진다.
노랑의 경우는 아주 복잡하다. 예전 중국에서 노랑은 황제의 색으로 국토를 상징했다. 인도나 타이에서는 노랑이 승려의 옷 색깔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또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북유럽에서는 태양 광선에 대한 동경 때문에 이 색이 사랑받는다. 하지만 서구에서 노랑은 요주의의 색이며, 인종 문제와 연결된다. 특히 오랫동안 유대인을 차별해온 유럽인들은 유대인에게 노란 표적을 붙였던 과거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색으로 노란색을 꼽는다.6장 순수한 파랑의 비밀
귀족의 피는 왜 파란가7장 노랑, 황제의 색인가 박해받는 자의 색인가
'노란 소년'이 부른 옐로 저널리즘19세기 말 미국에서 통속소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를 옐로백(yellowback : 노란 표지본)이라 불렀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효과가 있는 노랑은 서점에서도 눈에 띄는 색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정보 발신지였던 뉴욕에서는 신문의 판매 경쟁이 치열했다. 내용으로는 승부를 겨루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며, 결국 외관에서 승부가 갈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하면 독자의 눈을 한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잉크의 색깔이었다. 인쇄기를 개량해 검정 이외의 잉크를 사용하여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을 색깔 있는 글자로 큼직하게 찍어냈던 것이다. 그렇게 1890년대 다색 인쇄가 시작되자 신문의 판매고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896년 조지프 퓰리처가 이끄는 뉴욕의 「월드(world)」지는 일요일 판에 연재 만화를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문에 만화를 정착시킨 초기의 공로자는 「월드」지의 리처드 펠튼 아웃코트였다. 아웃코트가 만들어낸 주인공은 둥근 얼굴에 머리칼이 하나도 없고 헐렁헐렁한 옷을 입은 아이로 속어를 사용하여 세상을 풍자했다. 그리고 대사는 말풍선이 아니라 그의 옷 위에 씌어졌는데, 그의 말을 눈에 띄게 하기 위하여 옷을 노랑으로 인쇄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인기를 얻은 이 캐릭터에는 '옐로 키드(Yellow Kid)'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만화의 제목까지도 '옐로 키드'가 되었다. 그러자 「월드」지의 판매 부수는 급속히 증가했다.
1896년 뉴욕 내셔널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아웃코트를 스카우트하여 자사 신문 「저널(journal)」의 판매 증가를 꾀했다. 그러자 「월드」지는 다른 만화가를 채용해 '옐로 키드'를 다시 연재했지만 아웃코트가 저작권을 주장하면서 「저널」지에도 '옐로 키드'를 실었기 때문에 이 만화의 권리를 둘러싸고 두 신문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이 소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 두 신문사를 '옐로 키드 저널'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그것이 줄여진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결국 이 '노란 소년'을 둘러싼 분쟁으로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정주의적인 출판의 모습이 드러났고, 나쁜 의미의 표현까지 탄생했던 것이다.인간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식물의 녹색을 생명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녹색은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 식물이 필요한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을 떠올리게 하는 색인지도 모른다. 예언자 마호메트도 『코란』에서 낙원의 녹색이 얼마나 기분 좋게 만드는지를 이야기했다.
이 낙원의 녹색을 의식해서인지 마호메트는 녹색의 기를 가졌고, 4대 칼리프(마호메트가 죽은 후의 교단 지도자)인 알리는 녹색의 외투를 입었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19세기의 이집트에서 샤리프(예언자 마호메트의 직계 손자)는 녹색의 터번을 머리에 둘렀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의 모스크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의 모스크 지붕은 녹색으로 채색된다.
이슬람 각국의 국기, 이슬람 국가들의 연합기, 아랍 연맹의 연맹기 등에 녹색이 많이 쓰이는 것은 이슬람의 이런 역사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리비아는 마호메트가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는 깃발의 녹색 하나로 만든 별다른 표시 없는 국기를 사용한다. 이를 통해 이슬람 혹은 아랍의 강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인류가 시체를 매장하게 된 것은 5, 6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시대부터라고 추정된다. 그 후 죽음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인류는 사후 세계를 확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즉 현세는 낮, 내세는 밤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이다. 들짐승에게 습격 당할 위험이 높은 밤은 내세로 향하는 어둠의 세계와 동일시되었다. 그 때문에 무사히 밤을 보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빛이 되는 불, 횃불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사람의 종교와 상관없이 보통 검정 의상을 입는데, 유럽에서는 로마 시대부터의 전통이었다. 피부가 하얀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을 석탄 등으로 검게 칠했다고도 한다. 반대로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악령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몸에 흰 진흙을 바르는 풍습을 지닌 아메리카의 흑인 부족도 있었다. 아무튼 일상이 아닌 다른 상태가 됨으로써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풍습은 형태는 달라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참고로 영어로 장례는 'funeral'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횃불이란 뜻의 라틴어 푸누스(funus)에서 유래한다. 여기에도 사후의 세계와 마주할 때 불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나타난다. 검정의 뜻을 가진 영어 'black'도 '타는 것'에서 유래한다. 라틴어로 불을 나타내는 플람마(falmma)가 고대 영어로 변하면서 '무언가를 태우는 것'을 가리키는 색으로 정착된 듯하다. '검을 흑(黑)'이라는 한자도 불을 피우는 곳의 천장이나 굴뚝에 그을음이 점점이 붙어 있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하양은 웨딩드레스가 흰색인 것처럼 경사로운 색이다. 반면 흑과 백, 혹은 청과 백의 조합으로 장례의 색이 되기도 한다. 또 검정도 장례식의 색만은 아니다. 혼례, 제례 등을 할 때에도 검정 예복을 입는다. 그리고 남성은 하얀 넥타이로 경사, 검정 넥타이로 장례에 대처할 수 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메이지유신 이후의 서구화 정책에 큰 영향을 받았다. 본래 일본인들은 하양을 맑고 깨끗하고 신성한 색으로 여기면서 장례용 색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화 정책에 의해 점차 꺼림칙한 색으로서의 이미지가 사라졌다. 검정도 본래 어둠의 색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장례의 색이 된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이다.
일본에서 하양에서 검정으로 상복 색깔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태평양 전쟁 때문이다. 공습에 의해 불타 죽은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상복을 대여해주는 업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때 대여업자들이 준비한 옷이 메이지 시대에 규정한 검은 몬츠키와 검은 양장이었다. 흰 옷의 수요도 있었지만 장례식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하양처럼 더러워지기 쉬운 색은 아무래도 멀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검정색 상복이 사람들 속에서 정착하여 사람들은 점차 검정색 상복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침낭을 가리켜 영어의 속어로 플리백(fleabag)이라 한다. 플리(flea)란 벼룩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벼룩을 쉽게 볼 수 없지만 예전 일본에서는 잠자기 전에 꼭 모기장을 치고 벼룩 잡는 가루를 뿌렸다. 사실 벼룩과의 싸움은 태곳적부터 계속되어 왔다. 근세까지 왕후 귀족의 화려한 치장 뒤에는 벼룩으로 고생한 역사가 있었다. 중세 유럽의 귀부인들도 크고 풍성하게 퍼진 드레스 안의 벼룩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넓게 퍼진 드레스 속으로 가늘고 긴 벼룩 잡는 도구를 집어넣은 귀부인도 있었다고 한다.
방에서 편히 쉴 때도 벼룩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매일 그렇게 벼룩과 서로 맞대고 있다 보면 피를 빨기 전의 벼룩, 피를 빨아먹은 후의 벼룩을 구별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14세기가 되자 프랑스에서 퓨스(puce, 벼룩)라는 새로운 색이 탄생했다. 이는 피를 빨아먹은 벼룩의 색, 즉 적갈색이다. 영어에도 같은 말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18세기 후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 이 퓨스는 인기가 높은 색이었다고 한다. 또한 왕비가 옷을 새로 맞출 때마다 '벼룩의 배', '빨간 얼굴의 벼룩' 등 새로운 색이 차례차례 발표되기도 했다. 이 색들은 벼룩과의 싸움에 지친 사람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태어난 듯도 하지만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는 여러 가지 기묘한 색이 차례로 발표되고 있었다.
벼룩 색과 함께 선호되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머리색인 블론드에 가까운 노랑이었다. 그리고 노랑 계통의 새로운 색이 차례로 발표되어 짙은 노랑에 '황태자의 똥', '솔개의 똥' 등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 밖에도 노랑과 녹색의 혼합색으로 '런던의 쓰레기', '독을 마신 원숭이', '카르멜파 수도사의 아랫배', '살아 돌아온 죽은 자', '천연두' 등의 기묘한 이름의 색이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피를 먹은 벼룩의 색 등은 그나마 품위 있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경사스러운 날이면 일본에서는 홍백색을, 중국에서는 빨강과 금문자나 금색 용 등 강렬한 색을 조합한 색을 많이 사용한다. 또한 '복 복(福)'이나 '기쁠 희(喜)' 등의 문자를 사용한 금문자도 빠뜨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사람들이 매일 같이 빨강이나 금색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만 특별히 그러한 색을 사용하여 축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