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플론, 포스트잇, 비아그라
마르틴 슈나이더 지음 | 작가정신
미국 미네소타 주의 주도 세인트폴에는 북부 장로교회가 있다. 이곳의 예배당이 오늘날 모든 사무실에서 없으면 곤란에 빠질 독창적인 발명품, 노란색 포스트잇의 요람이다. 아트 프라이는 이 교회에 열성적으로 출석하는 신도였고, 그 근방에 있는 3M으로 더 잘 알려진 회사 미네소타마이닝앤드매뉴팩처링컴퍼니의 화학 엔지니어였다. 여느 일요일처럼 예배를 드리던 프라이는 작은 문제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신도들처럼 프라이도 그날 부를 성가들을 찾기 쉽도록 성가책에 작은 종이 조각들을 끼워두었다. 그런데 성가책을 펼칠 때 종이 조각들이 바닥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프라이는 재빨리 옆 사람의 성가책을 곁눈질해 허둥지둥 맞는 쪽을 찾아 펼쳤다. 이 일이 반복된 동안 그는 장차 3M의 최고 베스트셀러를 창안해낼 씨앗을 키운 셈이다.
"귀 기울여 설교를 듣는 대신 내 생각은 어딘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종이에다 붙일 수 있는 식별표가 필요해. 해당 쪽만이 아니라, 부를 노래를 정확히 표시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아트 프라이는 당시를 회상한다. 과연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신이 주신 영감이었을까? 아니면 지루한 설교의 선물이었을까?
프라이는 몇 년 전 동료인 스펜서 실버가 제품개발 실험을 하다 망쳐버린 일이 떠올랐다. 실버는 1960년대 말 3M의 중앙 연구소에 근무하는 화학자였는데, 그의 임무는 3M이 성공리에 판매 중이던 기존의 접착제 성능을 향상시킬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회사는 초강력 접착제를 원했다. 연구팀은 호기심으로 단일 화학물질을 반응용기에 쏟아보았다. 기존의 지식에 따르면, 모든 중합화 과정이 정지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접착성이 있는 중합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중합체는 놀랍게도 완전히 새로운 화학 성분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초강력 접착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새로운 물질은 물체의 면을 접착시키기는 했지만, 그 접착성은 지속적이지 않았다. 실버는 이런 성질이 뭔가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직감했지만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에 대한 답은 그도, 3M의 다른 직원들도 이때는 알지 못했다. 어쨌든 회사 측은 실버의 설득으로 그 중합체를 특허 등록했고, 이 물질은 최소한의 경비로 미국 내에서 특허 등록이 설정되었다. 문제는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실버는 압정이나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붙일 수 있는 끈끈한 칠판을 만들어보았다. 그러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실버의 중합체는 5년이 넘도록 실험실 선반의 뒤칸에 처박힌 채, 1974년 어느 날 아트 프라이가 교회에서 예배를 볼 때까지 무의미한 존재로 잊혀져 있었다. "실버의 접착제를 사용해 종이 식별표를 만들면 어떨까?" 붙였다 뗄 수 있는 종이를 종이에 붙여둔다 - 5년 동안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떠오르지 않았던 아이디어였다.
아트 프라이는 '준비된 정신'의 산 표본이었다. 그는 지난 수년간 3M의 화학 엔지니어들과 함께 일하며 회사에서 진행 중인 모든 생산과 개발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회사의 모든 부서를 관통하는 부서에 속해 있었다. 이 부서의 업무는 한 부서가 가진 기술개발의 이점을 다른 부서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프라이는 실버의 연구실을 찾아갔고, 실버는 먼지가 뒤덮인 끈끈한 칠판을 꺼내왔다. "그걸 보고 나는 붙였다 뗄 수 있는 종이 식별표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프라이의 회상이다. 끈끈한 칠판의 첫 번째 문제는 접착물질이 종이보다는 나무에 잘 붙는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끈끈한 종이가 한 번 붙었던 장소에 끈적이는 흔적을 남긴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오랜 숙고 끝에 이 문제를 해결했다.
프라이가 진행시킨 프로젝트는 여전히 붙였다 뗄 수 있는 종이 식별표를 목표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과연 포스트잇을 식별표로 사용하는가? 단지 식별표만으로는 3M의 베스트셀러가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부서장에게 보고서를 쓰다가 질문거리가 하나 떠올랐다. 그때 내 앞에는 새로운 접착물질을 발라놓은 종이가 있었는데, 그 종이 조각을 보고서에다 붙이고 그 질문을 썼다. 부서장도 그 종이에 답을 써서 돌려보냈다. 커피를 마시며 쉬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결정적인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종이는 단지 식별표로 쓸 게 아니라 수도 없이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붙였다 떼는 메모지라는 걸." 프라이의 회상이다.
그러나 다음 문제에 봉착했다. 3M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접착 테이프를 생산해왔는데, 그 품질과 목적에 상관없이 접착테이프는 롤에 감긴 형태였다. 그런데 새로운 포스트잇은 네모난 조각으로 생산돼야 했고, 롤 테이프와는 달리 종이 뒷면 전체가 아니라 상단에 가느다란 줄 모양의 접착부가 있었을 뿐이다. "이걸 만들려면 그때까지는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기계가 필요했다."
2년 뒤에 프라이는 실험실에 2대의 기계를 설치하고 포스트잇 메모지의 전신이라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그들은 그 메모지를 회사 내 사무실에 돌렸고 압도적인 호응이 돌아왔다.
그러나 1978년 시장에 포스트잇을 선보였을 때, 붙였다 떼는 조그만 메모지에 단 1달러라도 지출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노란색 메모지는 언제까지고 상점에 놓여 팔리지 않는 제품이었다. 이에 절망적인 자구책으로 고액의 연봉을 받는 3명의 임원들이 나섰다. 그들은 포스트잇이 3M 자체 내에서 굉장한 호응을 얻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들은 한 도시를 골라 차에 실어간 물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사무실마다 포스트잇을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엄청난 호응이 돌아왔다. 무료 샘플을 받아본 사무실이면 예외 없이 포스트잇이 다 떨어지자마자 문방구에 새로운 포스트잇을 주문했다. 1980년이 되자 마치 전염병처럼 전 미국 내 사무실에 포스트잇이 퍼졌고, 1년 후에는 전 유럽 시장에 퍼졌다. 현재 3M은 포스트잇을 27가지 포맷과 33가지 색상, 여러 가지 사용 형태 등으로 다양화해서 약 400종 이상의 제품군을 생산하고 있다.신이 주신 영감인가, 지루한 설교의 선물인가? - 포스트잇1851년 미국인 존 고리가 현대 냉장고의 전신이라 할 '열대의 기온에서도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드는 장치'로 특허를 받았다. 그런데 1920년대까지는 이 냉동장치에 사용되는 냉매에 문제가 있었다. 냉동관을 순환하는 에틸렌, 암모니아, 디옥시드는 작은 틈만 있어도 밖으로 샜던 것이다. 이 냉매는 독성과 폭발성이 강하고 냄새마저 지독했다. 냉장고 판매고를 올리려면 새로운 냉매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동차뿐 아니라 냉동장치도 개발했던 당시 제너럴모터스의 과학자들은 연구 끝에 무색, 무미, 무취, 무독성인 데다 가연성도 없고, 비등점은 냉매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수준인 CFC를 발견했다. 제너럴모터스는 화학기업인 뒤퐁과 합작투자하여 '프레온(뒤퐁이 CFC에 붙인 상표)'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기적의 물질을 사용할 권리는 특허권을 가진 제너럴모터스의 냉동기 부문 생산업체에게만 있었다. 뒤퐁은 이 물질을 좀더 널리 판매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서 뒤퐁의 잭슨연구소의 한 젊은 화학자는 제너럴모터스의 특허권과 무관한 또 다른 냉매물질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그 젊은 화학자가 바로 로이 플렁켓이다. 당시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지 2년쯤 지난 27세의 젊은 연구자로서, 이것은 그의 첫 임무였다.
플렁켓은 테트라플루오르에틸렌과 염산에서 새로운 CFC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는 50킬로그램 가량 되는, 엄청난 양의 테트라플루오르에틸렌을 준비한 다음 이것을 1킬로그램씩 헤어스프레이 용기 크기의 금속용기 안에 채워넣었다. 그리고 이것을 영하 80도에서 보관했다. 1938년 그의 조수 잭 리복이 늘 그랬듯 밸브를 돌려 열었으나 가스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울 눈금을 확인했으나 그 무게로 보아 금속용기는 빈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연구보다 호기심에 이끌려 금속용기를 톱으로 잘라보았다. 용기의 내벽이 알 수 없는 백색면으로 완전히 덮혀 있었다. 그 백색 면을 가지고 몇 가지 실험을 해보았지만, 어떤 실험으로도 그 물질에서 반응을 일으킬 수 없었다. 염산과 질산을 혼합하여 만든, 거의 모든 금속을 녹이는 왕수(王水)에도 끄덕 하지 않았다. 화학자에게는 흥미로웠지만 실용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다. 물론 찾고 있던 냉매물질로도 적당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값비싼 실수였다.
그러나 플랑켓이 이 물질을 뒤퐁의 고분자연구 부서에 전했고, 그곳의 화학자들은 이 물질이 견고한 이유를 찾아냈다. 그것은 PTEE(폴리테트라플루오르에틸렌, 플루오르수지의 한 종류) 분자들 내의 화학적 결합이 아주 강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일론을 발명해낸 바 있는 이 화학자들은 자세한 분석을 해본 뒤 그 물질이 별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내렸다. PTEE는 회사 창고로 보내지는 신세가 되었다.
1943년, 원자폭탄의 아버지들은 맨해튼프로젝트를 전개하던 중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핵분열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해선 UF6(육불화우라늄)로 실험을 해야 했는데 이 물질은 매우 파괴력이 강해, 어떤 용기나 관이든 닿기만 하면 극히 짧은 시간 안에 파괴시켜버렸다. 원자폭탄 연구자들은 화학회사에 도움을 청했고, 이 요청을 받은 뒤퐁은 회사 내에 어떤 공격에도 끄덕 않는 독특한 물질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1943년부터 원자폭탄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용기나 관에 테플론 보호막을 입혔다.
전쟁이 끝난 1948년부터 뒤퐁은 테플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테플론은 보호막을 입히거나 차폐효과를 주고, 새는 곳을 막아주는 등의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우주개발 전쟁이 시작되자 미항공우주국의 엔지니어들도 테플론을 활용하였다. 익스플로러 1호에서 스페이스 셔틀에 이르기까지 테플론과 이를 이용한 파생물질은 케이블 절연, 열차단 재료, 우주복의 보호피 등으로 활용되며 미국의 우주여행에 동반했다.
우주여행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유명한 테플론 프라이팬은 이미 10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 발견에도 역시 우연이 크게 작용했다. 1950년대 초 프랑스의 화학자 마크 그레구아르는 미끈미끈하다는 이상한 물질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낚시광이었던 이 화학자가 낚싯줄에 아주 얇게 테플론 막을 입히자 엉켰을 때 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그게 테플론과 무슨 상관이냐고? 아이디어는 그의 아내에게서 나왔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도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레구아르는 회사를 설립하고 프라이팬 업계에 뛰어들었다. 이 회사의 이름이 바로 '테팔'이다.
테플론 발견사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기업인 윌리엄 고어는 한때 뒤퐁에서 일했는데 그는 뒤퐁이 생산한 원재료를 전기기구에 사용되는 절연물질로 가공했다. 그의 아들 밥은 1969년에 기존의 비싼 물질을 대체하고 투입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는 테플론 막대를 가열하면서 양쪽 끝에서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는데 테플론은 몇 센티미터 늘어나더니 깨져버렸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밥은 화가 나서 뜨겁게 달아오른 테플론 막대를 석면 장갑을 낀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막대가 부서지지 않고 늘어나는 게 아닌가? 테플론 원소재를 최대한 잡아당겨 얻는 얇은 테플론 피막은 저항력이 매우 강해서 밀폐용 부품으로 활용하기에 적당했다. 고어는 테플론 피막을 '고어텍스'라고 이름 붙였지만, 오늘날 '고어텍스'라는 말을 듣고 파이프용 밀폐 소재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고어텍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밀폐 기능이었다. 얇게 늘인 테플론 피막은 방수성이 있으면서도 수증기는 통과시켰다. 비는 막아주지만 호흡은 가능한 성질이었다. 신발이나 겉옷에 막을 입히면 어떤 야외 활동에도 이상적인 고어텍스는, 그야말로 꿈의 소재였다.
한편, 로이 플렁켓은 1938년의 우연한 발견을 통해 점착 방지 프라이팬과 의복용 피막, 혈관 삽입물의 발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후에도 계속해서 뒤퐁에서 다른 과제를 맡았다. 1975년 은퇴할 때까지 유기화학물 생산품 매니저로 인한 플렁켓은 그 후에도 뒤퐁의 핵심 멤버로 머물다, 1994년 83세로 영면에 들었다. 그는 굉장한 부자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테플론 특허권은 회사 소유였기 때문이다.가깝고도 먼 사이, 원자폭탄과 프라이팬 - 테플론알프레드 노벨은 질소화합물인 니트로글리셀린을 이용하여 비교적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폭약인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했다. 노벨은 말년에 점점 더 심해지는 협심증으로 몹시 고생했다. 그런데 가슴을 압박하는 극심한 통증을 줄이기 위해 의사들이 처방해준 약은 다름 아닌 니트로글리세린이었다. 다이너마이트가 탄생하고 얼마 뒤인 1879년에 영국의 한 의사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극도로 희석하여 폭발력을 제거한 뒤 협심증에 대단히 효과가 좋은 약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삼질산글리세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협심증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생화학자 페리드 머래드는 1977년 아드레날린 호르몬이 간에서 포도당 합성을 촉진시키는 과정을 연구하던 중 이상한 현상과 마주친다. 신호가 전달되는 여러 단계에서 의심할 바 없는 산화질소(NO)가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산화질소가 발견되는 곳에서는 항상 근육이완 등과 같은 놀라운 효과가 발생했다.
뉴욕 주립대학의 로버트 퍼치고트는 1940년대부터 줄곧 혈관확장의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우리 몸속의 혈관들은 섬세한 근육으로 둘러싸여 있다. 체내 어느 곳에 더 많은 혈액이 필요하면 이 근육들이 이완되면서 혈관은 확장된다. 심장과 순환기 조절의 문제를 연구하던 퍼치고트는 몇 년 뒤, 다양한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혈관 근육의 확장방식을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근육이 수축된 초기 상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는 카르바졸을 사용했다. 카르바졸은 아세틸콜린과 유사한 물질로서 1940년대부터 독자적으로 혈관수축을 촉진시킨다고 알려져 왔다. 그는 미리 실험 방법과 절차를 정했다. 우선 신경 전달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을 통해 실험재료인 혈관 표본에 수축을 일으키는 실험을 한다. 이 실험에 쓰인 혈관을 소금 용액으로 깨끗이 세척하여 묻어 있는 노르아드레날린을 모두 제거한다. 다시 카르바졸을 이용하여 그 혈관수축 실험을 실시한다. 이것을 다시 세심하게 씻어낸다. 그후 본격적인 혈관확장 실험으로 돌입한다. 이상이 그가 세운 실험 계획이었다.
1978년 5월 5일, 그들은 실험을 시작했다. 첫 번째 수축 실험 후 혈관을 세척하는 것을 잊고 카르바졸을 투입했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혈관이 수축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 것이다. 퍼치고트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차이점이라고는 조수가 평소에는 선형으로 자르던 혈관을 고리 모양으로 자른 것뿐이었다. 퍼치고트는 철저한 조사와 실험을 통해 마침내 해답을 찾아냈다. "선형으로 자른 혈관 표본을 가지고 했던 이전의 모든 실험에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내피세포를 파괴했다. 혈관을 자를 때 내피를 건드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했더니 선형의 혈관도 아세틸콜린의 투입 후에 확장되었다."고 퍼치고트는 회고하였다.
1980년에 실시된 실험에서 퍼치고트는 혈관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혈관 내벽에 있는 내피세포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아세틸콜린이 내피세포를 자극하여 전달물질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다시 내피세포가 없는 혈관에 확장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퍼치고트는 이 전달물질이 무엇인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