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미망과 광기
찰스 맥케이 지음 | 창해
대중의 미망과 광기
찰스 맥케이 지음/이윤섭 옮김
창해/2004년 2월/455쪽/23,000원
황금을 찾아 : 미시시피 계획
존 로의 청년시절
1719년~2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시시피 계획의 광기를 알려면, 그 창시자 존 로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존이 악당인지 미친 사람인지에 대한 견해는 엇갈린다. 그는 계획의 실패로 악당과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것이 타당하지 않은 평가이며, 그는 사기꾼이 아니라 사기에 넘어간 사람이라 생각한다.
존 로는 1671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은행업과 금 세공업에 종사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아버지는 로리스톤 지방의 토지를 구입했다. 장남인 존은 14세에 아버지의 은행환전업에 뛰어들어 3년간 금융 원리를 익혔으며, 168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을 물려주자, 넓은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는 경제를 알수록 지폐의 발행과 유통 없이는 어느 나라의 경제도 번영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때까지 그는 도박으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방돔 공작, 콩티 왕자, 오를레앙 공작 등을 알게 되었는데, 존과 친해진 오를레앙 공작은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프랑스 상류사회에 자주 초대된 존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프랑스 재정개혁에 나선 존 로
루이 14세가 죽기 직전, 존은 프랑스 정부에 금융계획을 제출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존이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것을 알고 거절했다. 존은 이탈리아에 가서 사보이 공작인 빅터 아마데우스에게 '토지은행 설립 안'을 제안했다. 공작은 대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사보이가 너무 제약이 많다면서 거절했다. 그러나 공작은 다시 한번 프랑스 국왕에게 제안해 보라고 권유했다. 프랑스의 국민성이 그의 계획에 부합하므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존은 오를레앙 공작에게 두 가지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통화 부족으로 프랑스가 곤경에 처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지폐 없이 주화만 유통하는 것이 상업국가에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지폐를 유통시키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예를 들었다. 그리고 국고 수입을 관리할 은행 수립과 지폐 발행을 제안했다. 또한 은행이 국왕의 이름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삼부회에서 임명한 관리인들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가 검토되는 동안 존은 자신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널리 배포했다. 그는 곧 프랑스 국민의 신임을 얻었다.
존은 전제정부 아래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정부가 은행 같은 섬세한 조직에 미칠 수 있는 해악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10억 리브르나 되는 지폐의 발행은 프랑스를 곤경에 빠지게 할 만한 물량이었으며, 지불 능력이 없었으므로 머지않아 끝이 보였다. 의회는 외국인인 존이 막대한 권한을 가졌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수상 다게소는 지폐의 남발에 반대함으로써 해임되었는데, 그로 인해 의회는 더욱 반발했다. 오를레앙 공작의 사적 이익에 충실한 다르장송은 수상 겸 신임 재무장관이 되었고, 주화의 평가절하 정책을 실시했다.
정부의 재정정책이 위험하다고 느낀 의회가 정부에 반대하는 법령을 수 차례 발표하면서 힘 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의회는 존 로의 은행 영업에 제동을 걸었으며, 그를 모든 악의 원천으로 보았다. 또한 일부 재정관들도 그를 법정에 내세워 유죄판결이 나오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악한 존은 오를레앙 공작의 궁전으로 도피해 보호를 요청했으나 정치적 곤경에 빠진 공작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오를레앙 공작이 의회 지도자와 재정관을 투옥시킴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투기 열풍에 휩싸인 프랑스
이제 존은 미시시피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719년 초 미시시피 회사에 동인도회사, 중국과의 독점교역권이 주어졌고, 콜베르가 세운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전 재산을 넘겨받게 하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미시시피회사는 사업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이름을 '인도회사(Company of the Indies)'로 고쳤다. 존은 연간 120퍼센트의 수익을 약속했다. 대중들은 열광했다. 투자 신청서가 30만 건 넘게 날아왔으며 존의 집은 투자 희망자에게 둘러싸였다. 투자자 선정에 몇 달이 걸렸는데, 공작?후작?백작들은 문 밖에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
프랑스 국민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부자가 되는 꿈에 젖어들었다. 이름 있는 귀족들 가운데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사지 않는 사람은 생시몽 공작과 빌라 원수뿐이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미시시피회사주식에 투자했다. 존이 사는 캥캄프와 그 거리의 주택 임대료도 폭등했다. 존은 방돔 광장으로 이사했는데, 사람들은 여기까지 따라와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광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파티를 열기보다 방돔 광장에 와서 시간을 보냈다. 사무실이 너무 시끄러워지자, 존은 카리냥 왕자한테 수아송 호텔을 샀다.
존이 거처를 옮기자마자 수아송 호텔 정원에서만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다는 법령이 발표되었다. 정원에는 천막 5백 개가 세워졌다. 미친 짓이 일어나는 동안 카리냥 왕자는 천막임대로 큰 돈을 벌었다. 정직한 군인인 빌라 원수는 프랑스인들의 잘못을 보고 분노했다. 그는 방돔 광장을 마차로 지나가다가 정신 나간 군중들을 보고 ‘구역질나는 탐욕’을 버리라고 30분이나 설교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에게 휘파람을 불고 고함을 지르며 야유했다. 심지어 빌라 원수에게 물건을 던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무사히 빠져나온 그는 다시는 설교하지 않았다.
투기 거품의 붕괴
1720년이 될 때까지 존 로의 은행체제는 잘 진행되었다. 지폐의 과다 발행이 국가를 파산시킬 것이라는 의회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금융 원리를 전혀 모르는 오를레앙 공작은 이제까지 성공한 제도가 실패할 리 없다고 보았다. 5억 장의 지폐가 유통되어 효과를 보았다면, 5억 장을 추가 발행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존은 이러한 착각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미시시피 주가가 오를 수록 지폐 발행은 늘어났다. 하지만 대중의 불신이 폭발하면 존 로의 체제는 무너질 게 뻔했다.
1720년 2월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어, 지폐의 신용을 회복하려 했으나 파괴적인 결과를 빚어 혁명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 법령은 1인당 5백 리브르 이상의 주화 소지를 금지했고 그 이상을 소지하면 몰수하는 것이었다. 보석과 귀금속의 매점도 금지되었고 고발자는 적발된 양의 50퍼센트를 지급받기로 규정했다. 전례 없는 권력의 횡포에 전국이 신음했다. 가족의 사생활은 고발자에게 침해되었고 도덕적이고 정직한 사람들마저 금을 숨겼다고 고발당했다. 하인들은 주인을 고발했고, 시민들은 이웃의 감시자가 되었으며, 체포되는 사람과 몰수되는 귀금속의 양이 급증했다. 의심받는 것만으로도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1718년 존에게 반대한다고 해임되었던 다게소가 공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6월 1일 5백 리브르 이상의 주화 소유를 불법으로 규정한 법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원하는 만큼 갖는 것이 허용되었다. 파리시의 재정 수입에 기반해 연 2.5퍼센트의 이자를 주는 2천 5백 만 장의 신지폐가 발행되었고 구 지폐는 소각되었다. 신지폐는 장당 10리브르였다. 6월 10일 지폐와 충분히 교환할 수 있는 은화를 준비하고 은행 문이 열렸다.
프랑스를 떠난 존
절망에 빠지고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존은 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 파리에서 은퇴해 지방에 머무르겠다고 오를레앙 공작에게 청원했고, 공작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존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다시 활동할 기회를 얻고 싶어했다. 그는 오를레앙 공작과의 마지막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실수를 많이 저지른 것은 인정합니다. 나도 인간이므로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사악하거나 부정직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존이 파리를 떠난 후 2, 3일이 지나 오를레앙 공작은 존에게 언제든지 프랑스를 떠날 수 있도록 허가한다고 친절하게 편지를 써 보냈다. 또한 존에게 필요한 돈도 주겠다고 했다. 존은 정중히 거절하고 부르봉 공작의 정부인 프리마담의 마차를 타고 브뤼셀로 떠났다.
존이 프랑스를 떠난 것이 알려지자마자 부동산과 서적은 모두 몰수되었다. 그가 프랑스를 빠져나간 것을 알고 대중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존의 금융지식이 곤경에 빠진 프랑스를 위해 사용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재정위원회의 조사결과, 유통되고 있는 지폐는 27억 리브르였다. 오를레앙 공작은 존이 독단적으로 12억 리브르의 지폐를 발행했다며 모든 책임을 존에게 돌렸다. 오를레앙 공작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사치와 인내심 부족으로 존이 지폐를 남발했다는 사실을 말했으면 망신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은 프랑스로 돌아가서 명예를 되찾고 싶어했지만 1723년 오를레앙 공작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모든 희망을 버려야 했다. 그는 한동안 도박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존은 코펜하겐으로 가서 영국 영사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1719년에 윌슨을 죽인 죄를 사면 받았기 때문이다. 존은 영국에 4년간 머물다가 베니스로 가서 1729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 윌리엄은 존의 은행과 관계를 맺었는데, 공금횡령으로 바스티유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무혐의로 밝혀져 15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후 윌리엄은 성공을 거두었고, 로의 가문은 현재 프랑스에서 로리스톤 후작의 지위를 갖고 있다.
남해회사 거품 사건
남해회사의 설립
1711년 옥스퍼드 백작 할리는 '남해회사(The South-Sea Company)'를 세웠다. 이때 영국은 재정이 악화되어 정부채무가 1천만 파운드에 달해 휘그 당 내각이 무너진 상태였다. 한 무리의 상인들이 채무변제를 하기 위해 발행한 공채를 떠맡았고 정부는 6퍼센트의 이자를 약속했다. 그 후 정부는 이자 때문에 포도주, 인도의 수입품, 비단 ,담배 등에 대한 관세를 부가했다. 그리고 남해회사는 무역독점권을 얻었다. 회사 설립 초기 남아메리카 광산에 대한 매우 야심찬 전망이 제시되었다. 페루와 멕시코의 금광과 은광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고, 매장량이 엄청나다는 믿음이 팽배했다. 스페인이 칠레와 페루 해안의 항구 4곳을 교역을 위해 양보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 때문에 남해회사의 주식은 오랫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거품회사의 난립
남해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법안이 의회에서 두 달에 걸쳐 심의되는 동안, 회사의 이사들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황당한 소문들이 무성하게 생겨났다. 투기 열풍은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았다. 모든 국민이 주식 중개인이 된 것 같았다. 주식거래소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미어터졌다. 이러한 모습을 풍자한 노래가 나왔다.
미천한 사람들 가슴에 별이 떠올랐네
그 별을 사고팔고 보기 위해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몰려들었네
고귀한 귀부인들이 줄줄이 찾아와
마차가 거리에 꽉 찼구나
주식거래를 위해 보석마저 저당 잡히는 구나
남해회사 주식뿐 아니라 다른 사업계획에도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투자대상 주식 리스트가 작성되었고 거래량도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주가를 올리려고 별의별 작전이 다 동원되었다. 한편 주식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 회사들은 곧, ‘거품회사'라 불렸는데, 참으로 지당한 명명이었다. 일부는 일주일이나 2주 만에 사라졌는데, 이보다 수명이 짧은 회사도 많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사업계획이 발표되었다. 신분이 높은 귀족들도 주식 중개인처럼 돈벌이에 열중했다. 영국 황태자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 4만 파운드를 벌었다. 브리지워터 공작과 찬도스 공작도 사업에 뛰어들었다. 줄잡아 1백 개의 거창한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고 대중들은 그것에 투자했다. 그 결과 몇몇 사기꾼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해졌다.
남해회사의 몰락
이제 수많은 탐욕스런 사람들을 집어삼킨 남해회사로 돌아갈 차례다. 5월 29일 주가는 500으로 뛰었고, 연금수령인들의 3분의 2는 국채를 남해회사주식으로 전환했다. 6월초 남해회사 주식은 890으로 뛰었다. 이제 오를 만큼 올랐다는 견해가 팽배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주식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자 했다. 6월 3일 팔려는 사람은 많고 사려는 사람은 적었으므로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 남해회사의 이사들은 깜짝 놀라 주가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로 주식을 매입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했고 주가는 750 수준을 유지했다.
거품이 일어나는 동안 영국은 특이한 모습을 보였다. 대중의 심리는 건전하지 못한 열정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는 것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거부가 되리라는 희망이 대중을 부주의하고 사치스럽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한 사치풍조가 일어나고 도덕의 해이 현상이 두드러졌다. 의회 조사에서 남해회사 이사들의 방종이 드러났다. 벼락부자가 된 이사는 말먹이를 놓는 판까지 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국 정부의 구제조치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지자 조지 1세는 하노버의 일정을 줄이고 급히 귀국했고,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동안 영국의 도시에서는 대중 집회가 열렸고 남해회사 이사들의 사기행각을 처벌해달라는 청원서가 작성되었다. 누구도 영국인 전체가 남해회사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중은 단순하고 정직하고 근면한데, 죽일 놈들인 강도들에게 당한 것뿐이었다. 이것이 영국 전체의 분위기였다. 12월 9일 사태를 수습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수정안이 통과되
었다. 남해회사 이사들은 의회에서 모든 일을 진술해야 했다. 재앙은 주로 주식중개인의 사악한 행각 때문으로 판정되었고 이를 방지하는 법령을 세우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월폴 경은 남해회사가 체결한 계약이나 회사채 발행을 현 상태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활발한 토론 끝에 259대 117표로 모든 계약을 인정한다고 결정이 났다. 다음날 월폴 경은 의회에 금융질서 회복안을 제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남해회사에 투자된 거액의 자금을 불법적으로 처분했다. 남해회사법이 통과되기 전 회사 장부에는 125만 9,325파운드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주식판매로 들어온 대금은 57만 4,500파운드였다. 그러나 이 주식은 모두 조작되었으며 법안 통과를 촉진하기 위해 처분되었다. 회사에게 자본을 늘릴 권한이 부여되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위원회는 모든 거래를 조사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신용이 회복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기업이란 이카로스(Icaro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밀랍과 새의 깃털로 날개를 달아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가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추락해서 죽음)와 같아 너무 높이 날면 날개의 밀랍이 녹는다. 그리고 이카로스처럼 바다에 추락한다.
번영의 시기에는 투기가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한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유사한 프로젝트가 여러 개 생겨난다. 자유로이 통상하는 나라에서는 하나의 사업이 성공하면 그것에 뛰어드는 사람이 줄줄이 나오고 거품이 생긴다. 1825년에도 많은 거품회사들이 생겼는데, 1720년의 경우처럼 악덕기업가들이 돈을 벌었다. 그러나 심판의 날이 오자 그들이나 투자자나 모두 손해를 입었다. 1836년에도 투기물결이 일었으나 다행히도 재앙이 닥치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튤립 투기 대소동
튤립의 유럽 유입
튤립은 터키어 '터번(turban)'에서 유래되었는데, 16세기 중반 서유럽에서 들어왔다. 콘라드 게스너는 튤립을 널리 알린 사람으로, 1559년 아우쿠스부르크의 어느 집 정원에서 튤립을 보았다. 그의 친구가 튤립이 인기를 끌던 콘스탄티노플(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에서 튤립 한 뿌리를 보내왔던 것이다. 10년쯤 지나자 튤립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부유층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암스테르담의 부자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사람을 직접 보내 튤립을 엄청난 값에 사 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