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죽인 책들
로버트 다운스 지음 | 예지
교과서가 죽인 책들
로버트 다운스 지음/곽재성 외 공역
예지/2004년 2월/474쪽/15,500원
서구 문학이 시작되다, 호메로스 - 일리아스․오뒤쎄이아
기원전 10세기 경에 씌어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뒤쎄이아』는 총 2만 8천 행에 달하는데,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 중 하나다. 이 두 서사시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그리스 민족 문화의 정수로, 처음 시작은 여러 작가가 했을지 모르지만 최종 완성은 천재적인 대시인 호메로스가 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 속엔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 전설, 생활방식이 들어 있어 그리스 문명의 총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호메로스의 이 두 서사시는 보존이 잘된 편이다. 호메로스가 직접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후에도 비교적 정확하게 다른 시인들의 입을 통해 낭송됐으며, 기원전 600년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 통치 시절에 전문적으로 호메로스의 시를 읊던 시인들의 낭송을 받아 적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덕분이다.
『일리아스(일리오스의 노래란 뜻인데, 일리오스는 트로이의 별칭이다)』는 전쟁 서사시로 기원전 1200년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편 『오뒤쎄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트로이를 함락한 그리스의 지휘자 가운데 오뒤쎄우스라는 인물이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는 모험담을 그리고 있다. 호메로스가 이 두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첫째는 정의이다. 살인과 치욕엔 벌이, 거짓말엔 응징이 내려진다. 둘째는 신체적인 면과 도덕적인 용기를 모두 겸비한 남성다움이다. 기타 유머감각이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 겸손 등도 강조하고 있다.
일리아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해 트로이로 데려온다. 메넬라오스 왕과 그리스 사람들은 아가멤논의 지휘 아래 원정대를 조직해 수천 척의 배를 타고 트로이로 향한다. 하지만 이후 9년 동안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일리아스』는 바로 이때 시작된다.
아폴론 신을 섬기는 사제 크리세스의 딸이 포로로 잡혀 아가멤논에게 바쳐지고, 크리세스는 딸을 풀어달라고 애원하지만 아가멤논은 거절한다. 이를 보고 화가 난 아폴론 신이 그리스 진지에 전염병이 돌게 해 많은 그리스군들이 목숨을 잃게 되자 결국 아가멤논은 크리세스의 딸을 풀어준다. 아가멤논은 이 일로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바쳐진 브리세이스란 여자를 달라고 심술을 부리고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빠지자, 그리스군들은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군에게 대패를 당한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절친한 친구가 그리스군을 구하러 가다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와 트로이군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다시 전쟁에 나선다. 이어 아킬레우스가 트로이군을 무찌르고 『일리아스』의 클라이맥스인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결전이 트로이 성 밖에서 벌어진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쓰러트리고 그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닌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막대한 몸값을 가져와 헥토르의 시신을 달라고 간청하자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내준다. 그리고 『일리아스』는 트로이 사람들이 그들의 전쟁 영웅, 헥토르를 위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일리아스와 오뒤쎄이아 사이에 일어난 일
『일리아스』와 『오뒤쎄이아』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있다. 아킬레우스는 아폴론 신의 도움을 받은 파리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파리스도 죽는다. 트로이가 여전히 함락되지 않자 그리스군은 속이 빈 목마를 만들어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놓는데 트로이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목마를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리고 트로이 왕국은 멸망한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그리스군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않다. 폭풍을 만나 많은 배가 난파당하고 메넬라오스 왕과 헬레네는 8년 뒤에야 그리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가멤논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내의 정부이자 자신의 사촌에게 살해된다. 이렇게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돌아오던 영웅 중에 오뒤쎄우스의 이야기가 『오뒤쎄이아』에서 펼쳐진다.
오뒤쎄이아
『오뒤쎄이아』는 세계 문학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중심 뼈대는 오뒤쎄우스가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겪은 일이다. 오뒤쎄우스는 10년 전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면서 작별을 고해야 했던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가려고 하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모욕한 벌로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시 10년을 헤매고 다니게 된다. 결국 오뒤쎄우스는 고향에 무사히 도착해 아내와 아들을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
『일리아스』와 『오뒤쎄우스』에서 호메로스의 천재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바로 등장인물이다. 두 서사시에는 수없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각각 구별되는 개성을 갖고 있다. 당시 웬만한 그리스 청년이라면 누구나 『일리아스』와 『오뒤쎄이아』를 암기했으며, 학교에서는 호메로스의 시를 가지고 역사와 종교, 애국심을 가르쳤다. 아폴로니우스의 『아르고 원정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단테의 『신곡』, 밀턴의 『실낙원』 등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리아스』와 『오뒤쎄이아』는 서구 문학의 세계로 들어갈 때 맨 처음 통과해야 하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도덕과 결별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 군주론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 공화국 최고행정관의 비서관이 될 때까지 마키아벨리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그는 이후 공직에 28년간 몸담고 토스카나, 로마,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외교 활동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을 두루 만나고 다녔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고, 정치는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그는 정치에 대해 무척 냉소적으로 변했고, 인간은 탐욕과 이기심 덩어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그는 공직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까지 당하게 된다. 그 뒤 작은 시골에서 초라하게 살다 1527년 세상을 떠났다.
16세기 초반 이탈리아에는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밀라노․피렌체․베네치아․나폴리․교황령, 이 5개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상황은 이탈리아의 최대 약점이 되었고 독일, 스위스, 프랑스, 에스파냐가 호시탐탐 이탈리아 땅을 노렸다.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부정부패, 절도, 살인이 난무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마키아벨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강요된 은퇴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의 조국을 고난에 빠뜨린 요소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고, 마침내 그 유일한 해결책은 강한 지도자의 출현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1513년 여름부터 6개월 만에 『군주론』을 완성한 후 이것을 당시 피렌체를 다스리던 메디치 가의 로렌초에게 바친다. 마키아벨 리가 『군주론』을 메디치 가의 로렌초에게 헌정하기는 했지만, 실제 이 책의 주인공은 체사레 보르자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17살에 추기경이 되었고, 군사적으로도 유능해 로마냐 공국을 점령했으며,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였다. 보르자의 성공은 순간에 그쳤고, 마키아벨리 자신도 원래는 공화국 체제를 옹호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혼란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보르자 같은 독재자가 이상적인 지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군주론』의 핵심은 국가의 안녕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도 정당하며, 개인의 삶과 공공의 삶에는 각각 다른 도덕의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핵심대로라면 정치가가 폭력을 행사하고 속임수를 쓰고 심지어 범죄행위를 해도 그것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당한 일이 된다. 즉 마키아벨리는 정치학과 윤리학을 따로 떼어 별개로 본 셈이다. 『군주론』은 군주들에게 어떻게 권력을 얻어서 유지할지 가르치는 지침서이다. 하지만 이때의 권력은 군주 개인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권력, 그래서 국민들에게 안정된 국가를 제공하고 혁명이나 침입에 시달리지 않게 하는 권력이란 점을 주의해야 한다.
『군주론』의 결론은 ‘해방 이탈리아를 위한 충고’가 장식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군주, “이탈리아의 영웅“이 등장할 시기가 됐다면서 애국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꿈이었던 통일된 이탈리아, 외세로부터 독립한 이탈리아는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뒤에야 실현된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죽고 4, 5년이 지나도록 필사본 상태로 유통되다가 1532년 로렌초 드 메디치의 사촌,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허락으로 책으로 출판된다. 그 뒤 20년 동안 총 25쇄가 출판되면서 점차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된다. 그리고 결국 1559년 마키아벨리의 모든 책이 금서 목록에 오르고 만다.
마키아벨리가 다시 명예를 회복하는 때는 19세기에 들어서서 북미와 프랑스, 독일에 혁명의 바람이 불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면서부터이다. 또 1870년대 이탈리아의 통일이 무르익으면서 마키아벨리의 애국심 어린 충고는 빛을 발했다. 물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 프랑스의 루이 14세, 나폴레옹, 독일의 비스마르크,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 각 시대의 독재자들과 폭군들에게 『군주론』이 사랑받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이유는 마키아벨리의 기본 원칙을 잘못 해석하거나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군주론』과 함께 『논고』를 같이 읽어야 한다. 『논고』는 마키아벨리가 5년 동안 쓴 대작으로, 『군주론』과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논고』는 “앞으로 되어야 하는 상태”를, 『군주론』은 “현재의 상태”를 다루고 있으며 『논고』는 공화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군주론』은 왕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담고 있다.
이 두 책을 비교해 읽어보면 마키아벨리가 실은 공화주의자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는 전제정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국민과 군주가 조화를 이루는 국가를 이상형으로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배자는 안전하지 못하며, 가장 안정적인 국가는 군주가 법으로 지정된 권한만을 휘두르는 국가이다. 그는 국민의 판단은 옳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 위에 서는 것은 모래 위에 서는 것과 같다’는 속담을 비난했다. 그렇다면 그토록 국민의 자유와 공화정을 옹호하는 마키아벨리가 왜 『군주론』 같은 책을 썼을까? 우리는 여기서 『군주론』이 특수한 환경과 특수 한 시대에 쓰여졌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이상인 공화정이 16세기 이탈리아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고,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곤경에 처한 이탈리아를 구할 강한 지도자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위기의 이탈리아를 구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공화정이냐 전제정치냐를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만 점차 주세페 프레졸리니의 아래와 같은 견해들이 힘을 얻고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교회의 적이다. 애국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통일된 이탈리아를 가져다 준 해방자이다. 군인의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국가 군대를 주장한 선구자이다. 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사고 체계, 즉 실용성을 강조했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거침없고 대범한 문장을 구사했다.
이런 것을 고려해볼 때, 칼 마르크스 이전에 마키아벨리만큼 정치사상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으며 마키아벨리만큼 “정치학의 창시자”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이상주의자들에게 현실을 일갈하다, 토머스 맬서스 - 인구론
18세기 말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즐겨 상상했다. 이런 꿈을 꾸었던 사람들 중 영국의 윌리엄 고드윈과 프랑스의 꽁도르세 후작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중의 열망과 비전을 대변해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거품 같은 생각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으니, 32살의 젊은 사제이자 케임브리지의 지저스 칼리지 펠로우였던 토머스 맬서스였다. 1798년 출판된 그의 『인구론』은 이상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한 답변이자, 정치경제학에 있어 가장 위대한 고전의 하나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18세기의 여러 작가들도 인구 증가의 문제에 대해 논한 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맬서스만큼 열정적이며 강력한 논조로,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이 문제를 다룬 사람은 없다. 맬서스는 처음부터 두 가지 가정을 제시하였다.
첫째, 인간의 생존에는 식량이 필요하다. 둘째, 인간에겐 성욕이 존재하며 미래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구의 힘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지구의 힘보다 더 강력하다. 만약 인구 증가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농지를 더 많이 개간하고 농업을 더욱 장려하는 등 가능한 모든 정책을 동원한다면 처음 25년 동안 영국의 농업 생산은 2배로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세대에 시작된다. 다음 세대에 인구는 2배로, 50년 후면 4배로 증가할 것이지만 식량은 4배가 늘지 않는다. 기껏 바랄 수 있는 것은 처음 식량 생산의 3배가 증가하는 것이다.
맬서스의 공식을 숫자로 표현하자면 인구는 1, 2, 4, 8, 16, 32, 64배 등으로 증가하는 반면, 식량은 1, 2, 3, 4, 5, 6, 7배 등으로 증가한다. 맬서스는 이 논리에 따라 몇 가지 현실적이며 불가피한 결론을 제시했다. 인간이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즉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자는 독신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빈민자보호법과 같은 공공 정책이 노동계층으로 하여금 부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식을 낳게 하는 유인책이 된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페인의 『인권론』에 대한 반론이었다. 개인이든 정부든 자선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전체 식량의 양을 늘리지 않고 가난한 계층에게 식량을 기부한다면, 가격을 상승시킬 것이며 결국 식량 부족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공공주택 정책도 반대한다. 이는 조혼을 확산시켜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임금도 유사한 파국을 유발할 것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덕적인 자제력을 발휘하여 결혼을 늦추는 것이다. 즉 금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맬서스는 사회를 개선시키고 부족함을 해소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실패한다고 보았다. 치유하고자 했던 해악을 결국엔 더 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젊은 성직자의 강직하고 반사회적인 자세는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맬서스의 학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이를 반대했던 사람들의 논리는 조물주의 박애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맬서스는 반종교적인 책을 출판하였다고 비난받았는데, 이는 교회의 사제인 그에겐 치명적인 평가였다. 이런 평가 때문에 인구론의 개정판에서 그는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는 장치로서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신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불행과 해악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1935년 맬서스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에서, 맬서스의 전기를 집필했던 제임스 보너는 맬서스의 사상을 틀리게 읽고, 틀리게 이해했으며, 틀리게 해석했고, 틀리게 인용했던 사람들에 맞서 맬서스를 옹호했다. 맬서스의 접근방식은 회의적인 것이 아니고 긍정적이다. 인류에 대한 맬서스의 “진정한 소망”은 첫째, 낮은 사망률, 둘째, 생활수준의 향상과 빈민구제, 셋째, 어린 생명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보너는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