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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 뜨인돌
1부 황혼의 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단순한 인간으로 그려졌던 야만인들, 즉 고대 유럽인은 사실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의 예술과 사회 문화 유산은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한때 그들을 강력하게 지배했던 로마의 문화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

소위 암흑시대의 야만인에 대한 정보의 출처는 대체로 또는 거의 전부가 로마 작가에 의한 것이어서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로마인의 편견, 관습, 정책 선전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로마 제국은 유럽 문명의 발전과 유럽의 기술과 통치방식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야만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종속되어 있었던 로마 제국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로마인과 야만인 간의 교류는 기원전 27년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이후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제국이 늘 우위를 차지했다. 야만인들이 실제로 로마 세계의 기초를 흔들 수 있게 된 때는 이로부터 훨씬 후인 기원후 3세기가 되어서였다. 당시 또 다른 초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이 옛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으려 하였으며, 로마는 야만인의 위협, 질병, 쓰러져 가는 경제 등 제국에 산재한 수천 가지가 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특히 제국의 변두리에서 온 '제국 밖에서 태어난 야만인' 막시미누스 1세가 로마군의 동의를 얻어 황제가 되자 여전히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의 원로들은 238년 막시미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동안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도록 지원했다.

로마인들은 야만인들을 원군과 용병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과 국경에서 갈등이 있었으며, 수십 년이 지나면서 로마 제국의 국익 수호 임무가 야만인 출신의 사령관과 사병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240년부터는 게르만 부족, 고트족, 반달족, 카르피족 등과 같은 야만인들의 침략이 이어졌으며, 군대의 급여를 제때 지불하지 못함에 따라 반란, 내전, 권력 다툼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 또한 유럽 전체에 닥친 경제적 불황과 부분적 무정부 상태에다 페스트와 기근이 발생했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황제 한 사람이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284년부터 305년 사이에 왕위에 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공동통치가 끝난 후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박해받고 있던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았다.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기 때문인데, 이와 같이 로마가 다른 도시들에 밀린 경우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라벤나(서로마 제국 멸망 후 비잔틴 제국의 총독부가 있었던 도시), 밀라노(동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대도시), 트리에르(3세기 말 '제2의 로마'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던 무역 중심지) 등이 제국의 행정 중심지이자 황제의 공식적인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로마는 관념적으로 또는 문명적으로 분명히 모든 길이 통하는 곳이었음에 분명하지만 도시 자체를 권력과 영향력을 갖춘 하나의 중심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었을 무렵만 해도 안정적으로 정착된 로마인 사회와 불안정하고 불안한 수많은 야만인 부족 사회가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제국을 수호하는 데 야만 부족의 군사적 지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야만 부족의 힘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로마와 야만부족의 운명도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로마와 야만인 문화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유럽 대륙의 운명은 심오한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바지 문화는 근대 유럽 문화를 이룬 수많은 야만인 문화의 영향 중 한 예일 뿐이다.

야만 게르만 부족은 강력한 위협 세력이 되어 갔다. 극적이고 영속적이며 활기찬 문화의 집단으로 특징지어지는 야만인 부족 각각의 계속 변화하는 동맹관계 그리고 전쟁, 이주 등에 의해 서로 교류하고 혼합하게 된 것이다. 로마는 자체적인 두 가지 문제에 직면했는데 내부의 적, 즉 제국 안에 존재하는 야만인 그리고 외부의 적, 즉 동쪽의 가장 악명 높은 훈 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부족 대이동과 이동한 부족을 그려놓은 이 시기의 지도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근대 유럽의 지도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이동의 결과 부족의 정착이 이루어졌고 유럽의 근대 국가 형성의 뿌리가 되었다.

지옥 천사의 역사



유럽 역사에서 어떤 문화도 훈족만큼 악명 높지는 않다. 그들의 악명 높은 지도자인 아틸라(Attila)는 '신의 천벌'이라고 알려져 있다. 훈족이 지평선 넘어 숨어있을 때는 1960년대 악명 높았던 오토바이 폭주족이 미국의 작은 마을에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을 때의 두려움과 비슷한 공포를 일으켰다. 대체로 역사 속에서 훈족은 말을 탄 지옥의 천사로 묘사되지만 그것으로는 훈족과 아틸라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훈족은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들의 역사와 관습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훈족의 공격을 받았던 다른 나라 역사가들의 설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유럽 대륙의 땅을 밟은 것은 375년이었다. 그리고 당시는 남녀노소를 모두 합하여 2만에서 3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이 무엇이었든 훈족의 이동 결과로 다른 야만 부족들도 이동해야 했으며, 이것은 유럽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도미노 효과였다.

5세기 초기는 공포스러운 훈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인데, 역사가들이 언급한 최초의 훈족 왕이었던 울딘, 그리고 루가의 뒤를 이어 루가의 셋째 동생인 문디우치의 아들, 블레다와 아틸라가 권좌를 물려받아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이들은 거두어들이는 공물이 많았음에도 호전적인 침략정책을 계속했다. 10년간 성공적인 협력관계가 지속되면서 훈족의 공동 통치자들 사이에는 어떤 불협화음도 없었던 시기를 거친 후 블레다는 아틸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고, 유럽의 부를 갈취했던 제국은 이제 유일한 통치자인 훈족의 아틸라의 손 아래 들어간다. 훈족 내에는 수많은 독립 집단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집단은 로마와 군사적 동맹 관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틸라는 역사상 최고의 훈족 권력자였다.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었던 아이티우스는 갈리아 지방을 침략해 오는 야만인들을 쫓기 위해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훈족은 당시 맹위를 떨치며 이 지역의 동부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부르군트족을 진압하는 등 몇 년간의 공조 후 아이티우스와 훈족의 상호 이해관계는 깨졌고, 아이티우스와 서고트, 프랑크족, 부르군족, 색슨족, 알란족의 연합군 대 훈족, 동고트족, 게피드족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격렬했고, 전장은 피로 가득했다. 훈족은 패배했지만 아이티우스는 과거에 매우 유용했던 부족이고 미래에 또 언제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에 훈족을 쫓아내지는 않았다.

5세기 훈족 제국의 영토는 론(프랑스 동부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강) 강에서 우랄 산맥까지 해당되었다. 뛰어난 위업에도 불구하고 아틸라는 제국을 8년밖에 다스리지 못했다. 아틸라의 사망은 곧 훈족이 사라지는 예고였다. 훈족은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사라질 때도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들은 벌가(bulgar)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다.

많은 야만 부족들이 로마 문화를 모방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과는 달리 훈족은 통합할 수 있는 기회도 일축해버렸으며, 가능한 그들의 문화가 로마의 영향에서 멀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선택하고 스텝 지역으로 돌아갔으며, 역사의 밖으로 멀어져갔다. 그들은 결코 무지하고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이웃 유럽인들에게는 너무나 이국적인,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나 편한 자신들만의 문화가 있는 부족이었다.

반인반마의 흔적



훈족의 군사력의 요체는 말을 타는 능력과 활을 무기로 개발한 천재성이었다. 훈족은 그들의 말과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반인반마, 즉 사람과 짐승을 섞어놓은 괴물에 비유되었다. 훈족의 말은 동시대 유럽 군대의 말과 달리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 스텝 지역에서 자란 말들은 훈족 전사들을 매일 100km 이상씩 나를 수 있었다.

두 발로 서서 활을 쏘는 궁수들은 강하고 무거운 활을 사용할 수 있지만 말 등에 올라서 활을 쏘는 궁수는 훨씬 더 가벼운 활을 필요로 한다. 훈족의 궁술 무예를 계승하는 카사이 라조스는 훈련된 훈족 궁수는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사람이나 말을 맞춰서 죽일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말과 활을 다루는 모습은 훈족의 특징이었던 사람과 말의 혼연일체의 문화를 잘 나타낸다. 라조스는 훈족에게 말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한다. 먼저 훈족이 이동하고 전쟁을 하는 수단이었으며, 다른 가축들을 통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말은 또한 식량으로도 사용 가능하며, 주인과 함께 매장되기도 했다.

2부 세계를 덮어버린 그림자



게르만족이 물결을 지배하다




빗은 유럽 대륙의 건너편에 자리잡은 게르만족들의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빗과 함께 배 역시 이러한 두 가지 기능을 함께 가진 게르만 물질 문명의 상징이었다. 게르만족에게 배는 수송 수단 이상의 것으로 고인을 다른 세계로 떠나보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색슨족 유적지인 폴워드에서 1990년대 발굴된 배로 된 관은 길이 5미터, 폭 1.3미터이다. 시신은 수많은 중요한 부장품과 함께 배 안에 놓여 있으며 널빤지로 유물과 시신을 덮었다. 배 매장은 매우 중요한 행사로서 사회 고위층만을 위한 것이며,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발굴된 유럽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참나무로 만들어진 니담 보트(nydam boat)라고 할 수 있다. 발굴 작업은 2차 세계대전의 초기까지 드문드문 이어졌는데, 특히 1984년부터 1997년까지 니담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한 근대 고고학자들은 배 자체와 다량의 발굴품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발견된 나무의 나이테를 근거로 이 배가 320년 근처의 것임도 밝혀냈는데, 이것은 바이킹의 배보다 5백 년 이상을 앞선 것이다. 길고 좁은 형태의 이러한 배는 전쟁용이어서 속도와 기동력은 이 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바다에서 사용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해안을 따라 움직여서 강 하구로 들어가 내륙의 강을 항해할 수도 있었다. 최적의 전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배가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노걸이는 고정된 모양이 아니어서 강에서 사용하는 배처럼 환경에 따라 원하는 대로 노 젓는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배는 니담 보트의 조상이었음이 틀림없으며, 니담 보트는 후대 바이킹 배의 조상이 된다. 배 제작에는 상당한 목재 처리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상세한 양식을 살펴보면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이 약 23미터, 폭 3.5미터, 배 중앙의 높이는 1미터, 배수량은 8.8톤에 이르는 배였다. 이 배는 15쌍의 노로 운행되었으며, 노 젓는 사람 30명 가량을 포함하여 선원이 45명 가량 필요했다. 배 외에도 약 1백 개의 단검, 370개의 창, 40개의 긴 활(잉글랜드 활의 원조) 등 많은 무기가 이 늪지에서 발굴되어 이 무기를 사용한 전사들의 수는 약 5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니담 보트가 매장된 후 반 세기가 지나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유물은 거의 사라지고 반도의 절반은 유령 도시나 다름 없어진다. 이 지역에서는 부락도 묘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유물이 사라져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후 악화와 이에 따른 사회 쇠퇴는 많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부족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는 로마 군대로 복무한 적이 있었던 야만족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확실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섬이라는 점이 주변의 적에게서 멀어질 수 있어서 더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니담에서 발굴된 배는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었다. 잉글랜드로의 대이주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언어이다. 게르만 부족은 유럽 여러 지역으로 이주했으나 어디에서도 그들의 토착 언어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사용된 언어에 준 영향은 보다 인상적이었으며, 이는 중대한 문화적 변형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엄청나게 많은 이주자들이 이 새로운 섬으로 몰려들었음을 의미한다.

언어유산



앵글로색슨족의 본성은 잉글랜드의 지도, 언어, 문학 그리고 심지어 영국인들의 유머의 특징에 드러나 있다. 앵글로색슨이 사용한 고대 영어가 현대 영어가 되기까지는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어는 로마나 노르만 시대보다는 암흑 시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문자가 없는 앵글로색슨들에게 언어는 과거와 바깥 세상을 배우는 수단이었으며, 예술적 표현과 즐거움의 전달 매체였다. 그들에게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수수께끼 문제를 내고 맞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문화적 표현의 중요한 형태였다. 앵글로색슨들의 수수께끼에 있어 절대적 요소인 애매 모호함은 어린아이에서 왕까지 사회의 모든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완곡한 표현, 유추법 그리고 이중 의미를 즐기는 것은 그들의 수수께끼나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들 문화의 다른 곳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특정한 종류의 문화 유물에 대한 데이비드 리의 연구에 따르면 5세기와 6세기에 켄트에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브로치들은 시각적 환각을 일으키는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수수께끼가 진지한 말장난인 것과 같이 브로치는 이미지를 통한 놀이이다. 모호함은 그런 예술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였으므로 사소하거나 의미 없는 장치가 아니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았을 때는 동물이며, 또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는 인간인 이미지의 사용은 샤머니즘의 이론과 실제의 근본이었던 인간-동물 변형의 주제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호함을 즐기는 것은 수수께끼와 앵글로색슨의 보석 디자인에서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인 그들의 유머에서도 볼 수 있다. 다음은 존 포터가 번역한 수수께끼 모음집에 실려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사람의 허벅지 옆에, 그리고 무릎 밑에 이상하게 달려 있으며, 앞에는 구멍이 나 있다.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갈 때 구멍과 자신의 매달린 머리 끝이 인사하고자 할 때 뻣뻣하고 딱딱한 게 크게 도움이 된다. 그것은 길게 그리고 오랫동안 구멍을 채워 넣는다.

수수께끼를 내는 사람이 고의적으로 많은 성적 의미를 내포하여 갈피를 못 잡게 했지만 사실 정답은 열쇠이다.

앵글킨(앵글로색슨 재현사회)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벤 레빅은 앵글로색슨의 언어와 문화는 성적 의미를 중의적으로 갖고 있는 단어의 기원을 제공했으며, 20세기의 '외설적인' 엽서와 음란한 외설 영화에마저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두루두루 퍼졌으며, 비속한 유머에서부터 신들의 난해한 언어로 소통하는 데까지 여러 가지에 적용되었다.

3부 북쪽의 빛



바이킹 : 해적 그리고 시인




지난 수년 간 많은 사학자들은 바이킹을 새로운 관점에 비추어 봐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유럽의 진보를 중단시켰던 매우 파괴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더 긍정적인 그들 문화의 면도 차츰 조명되기 시작했다.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만 입구' 혹은 '작은 만'을 의미하는 'Vik'라는 노르웨이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바이킹'은 약탈자, 도둑, 혹은 싸움질하는 뱃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짐작컨대 그 약탈자들이 만에다가 돛을 내리거나 약탈하러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야만 사회의 소수의 사람들만을 지칭했지만, 곧 그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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