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리처드 루드글리 지음 | 뜨인돌
빗은 유럽 대륙의 건너편에 자리잡은 게르만족들의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그리고 빗과 함께 배 역시 이러한 두 가지 기능을 함께 가진 게르만 물질 문명의 상징이었다. 게르만족에게 배는 수송 수단 이상의 것으로 고인을 다른 세계로 떠나보내는 수단이기도 했다. 색슨족 유적지인 폴워드에서 1990년대 발굴된 배로 된 관은 길이 5미터, 폭 1.3미터이다. 시신은 수많은 중요한 부장품과 함께 배 안에 놓여 있으며 널빤지로 유물과 시신을 덮었다. 배 매장은 매우 중요한 행사로서 사회 고위층만을 위한 것이며,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발굴된 유럽의 유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참나무로 만들어진 니담 보트(nydam boat)라고 할 수 있다. 발굴 작업은 2차 세계대전의 초기까지 드문드문 이어졌는데, 특히 1984년부터 1997년까지 니담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한 근대 고고학자들은 배 자체와 다량의 발굴품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발견된 나무의 나이테를 근거로 이 배가 320년 근처의 것임도 밝혀냈는데, 이것은 바이킹의 배보다 5백 년 이상을 앞선 것이다. 길고 좁은 형태의 이러한 배는 전쟁용이어서 속도와 기동력은 이 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바다에서 사용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해안을 따라 움직여서 강 하구로 들어가 내륙의 강을 항해할 수도 있었다. 최적의 전함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배가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노걸이는 고정된 모양이 아니어서 강에서 사용하는 배처럼 환경에 따라 원하는 대로 노 젓는 방향을 바꿀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배는 니담 보트의 조상이었음이 틀림없으며, 니담 보트는 후대 바이킹 배의 조상이 된다. 배 제작에는 상당한 목재 처리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상세한 양식을 살펴보면 상당히 고도의 기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길이 약 23미터, 폭 3.5미터, 배 중앙의 높이는 1미터, 배수량은 8.8톤에 이르는 배였다. 이 배는 15쌍의 노로 운행되었으며, 노 젓는 사람 30명 가량을 포함하여 선원이 45명 가량 필요했다. 배 외에도 약 1백 개의 단검, 370개의 창, 40개의 긴 활(잉글랜드 활의 원조) 등 많은 무기가 이 늪지에서 발굴되어 이 무기를 사용한 전사들의 수는 약 5백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니담 보트가 매장된 후 반 세기가 지나고,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유물은 거의 사라지고 반도의 절반은 유령 도시나 다름 없어진다. 이 지역에서는 부락도 묘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유물이 사라져버렸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후 악화와 이에 따른 사회 쇠퇴는 많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부족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는 로마 군대로 복무한 적이 있었던 야만족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확실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섬이라는 점이 주변의 적에게서 멀어질 수 있어서 더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니담에서 발굴된 배는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었다. 잉글랜드로의 대이주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언어이다. 게르만 부족은 유럽 여러 지역으로 이주했으나 어디에서도 그들의 토착 언어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서 사용된 언어에 준 영향은 보다 인상적이었으며, 이는 중대한 문화적 변형이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엄청나게 많은 이주자들이 이 새로운 섬으로 몰려들었음을 의미한다.1부 황혼의 로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3부 북쪽의 빛



바이킹 : 해적 그리고 시인반인반마의 흔적지난 수년 간 많은 사학자들은 바이킹을 새로운 관점에 비추어 봐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유럽의 진보를 중단시켰던 매우 파괴적인 집단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더 긍정적인 그들 문화의 면도 차츰 조명되기 시작했다.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만 입구' 혹은 '작은 만'을 의미하는 'Vik'라는 노르웨이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바이킹'은 약탈자, 도둑, 혹은 싸움질하는 뱃사람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짐작컨대 그 약탈자들이 만에다가 돛을 내리거나 약탈하러 들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야만 사회의 소수의 사람들만을 지칭했지만, 곧 그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화려한 수도원과 도시들에 대한 바이킹의 대규모 약탈전쟁은 드라마틱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바이킹이 약탈과 노예 사냥을 즐겼다는 것 외에는 바이킹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의 당해낼 수 없는 잔인함에 대한 무시무시하고 왜곡된 이야기들은 또한 그들이 중세의 가장 금지된 종족 중의 하나로 명성을 얻는 데 기여했다. 물론 바이킹으로부터 빈번하게 약탈을 당한 린디스판의 수도승이나 앵글로색슨의 기독교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이킹들은 폭력적인 야만족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이 바이킹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야만족만큼 기독교인들도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똑같이 무자비하고 폭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의 바이킹이 앵글로색슨의 기독교 사회 외부에서부터 몰려와서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틀림없다.



바이킹은 8세기 이전부터 북해를 건너 많은 상호 교류를 해왔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 교역이 약탈로 바뀌었고, 스칸디나비아 야만족들은 바이킹으로 지칭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은 훈련된 군대가 아니라 책략가들로 첩자를 보내 상대의 약점을 알아낸 뒤 그것을 이용해서 공격했다. 그들의 신속하고 맵시 나는 배는 기동성이 아주 뛰어나 기습 공격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고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약탈의 생활로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이킹의 기원이 되는 노르웨이의 오래된 법들과 관련해 얻은 정보를 볼 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로 느껴진다. 살인이나 폭력은 반드시 처벌되었고 엄격한 행동 강령이 있었다. 법이 제정되었고, 싱(thing)이라고 불리는 자유민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민사 분쟁과 범죄 사건의 심리가 진행되었는데, 많은 스칸디나비아의 지명이 당시 그곳들이 의회의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준다.



거친 바다와 강을 마음대로 휘저으며 다니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경제와 가족 생활의 기초는 농장이었으며, 안정적인 경제 기반은 이미 바이킹의 시대 이전에 그들이 번창하는 무역망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경제를 매우 전문적으로 운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는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쌍의 저울과 오차가 거의 없는 열 개의 저울추가 있다.



바이킹 사회는 계층이 완전히 고정된 사회는 아니어서 사회적 신분 상승 혹은 부락이 발생할 수 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변이들이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노예, 자유민 그리고 귀족 세 개의 사회계층이 있었다. 노예는 비참하게 살고 비참하게 죽었으며, 너무나 '운이 좋아서' 그들의 주인과 함께 매장되지 않으면 빈민의 무덤에 묻혔는데, '운이 좋다'는 것은 일생을 마치기 전에 함께 묻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자유민들은 경작하는 땅을 가진 농부들이었는데, 부유한 홀드 자작농과 안정적이지 않은 본드 자작농으로 나뉘었다. 사회의 구조는 바이킹의 문화가 더 확장될수록 더 복잡해졌고 노동은 더 세분화되었다. 대장장이들, 배 만드는 사람들, 다른 숙련공들은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 구성원들이었고, 새로운 타입의 자유민이 되어 싱과 같은 회의에도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었다. 바이킹 귀족은 그들 사회의 지도자였으며, 왕도 이 귀족에서 나왔다. 전통적으로 이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지주들인데, 상인들이 멀리까지 원정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되자 결국 새로운 계층이 출현했고, 그들이 바로 졸부 바이킹이다.



바이킹과 그들의 선조가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든 무역망은 그들에게 엄청나게 다양한 물품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칸디나비아 원주민 기술공들은 그들의 기술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항상 외국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브랙티트(bracteate)라고 불리는 원형의 금 펜던트는 로마 제국의 메달을 따라 만든 것이다. 또한 바이킹 사회를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바이킹이 악명 높은 해적이었다는 것 외에 체스를 즐겼고, 골동품 수집가였으며 시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바이킹들이 기록한 그들의 역사가 없으므로 그들의 시각을 재구성하는 일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정도는 아니다. 많은 공예품들과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스칸디나비아와 그 밖의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들과 접촉을 한 사람들의 기록과 더불어 이런 증거들로 그들의 세계에 관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야만인의 관점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들의 중심지인 스칸디나비아로 여행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부 세계를 덮어버린 그림자



게르만족이 물결을 지배하다언어유산바이킹의 상인들이 행동 반경을 확장해나감에 따라 스칸디나비아에는 고틀란드의 헤더비와 비카 같은 수많은 무역 도시가 생겼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는 도시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빗이나 보석과 같은 품목과 바꾸는 대가로 농장에서 나온 음식을 제공했다. 가장 번영기였던 10세기에는 아마도 약 1,500명 정도의 인구가 밀집해 있었을 것이다. 농사의 수고로부터 해방된 도시민들은 장거리 무역을 개발할 여유를 갖게 된다.



물품과 상인들이 서양과 동양에서, 어떤 것들은 정말로 멀리에서 헤더비와 비카로 몰려왔다. 비카에서 발굴된 바이킹 시대의 무덤에서는 중국제 비단도 발견되었다.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발트해는 바이킹의 시대에 동양과 서양을 잇는 해상 무역 루트의 교차로였다.



바이킹 시대의 보물은 거의 은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은의 전체 무게는 2톤에 달한다. 이처럼 은의 강물이 바이킹의 세계로 흘러 들어오기 전에는 금(대체로 로마 동전의 형태로)이 주요한 값진 금속이었다.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로마의 메달 전통을 따라 브락티에츠(bracteates)를 발전시키면서 기원전 400에서 550년은 북방의 황금시대라 명명되었다. 황금시대가 로마와의 연관을 나타내준다면, 9세기에 시작된 은의 시대는 세계의 무대에 나타났던 새로운 최강 세력인 이슬람 제국과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다양한 곳에서 고틀란드로 유입된 동전들은 고틀란드에서 번영한 무역 체계의 일부분이었으나 그것이 오늘날의 화폐처럼 쓰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중요시했던 것은 오로지 무게였다. 보물 더미에는 저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이나 4분의 1로 잘라진 동전들이 많이 있다. 12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고틀란드에서 동전이 화폐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오늘날 고틀란드는 서양사회를 지배하는 무역의 동맥과는 거리가 멀지만 바이킹의 시대에는 발트해가 경제의 중심이었다. 그 섬 주민들은 이국적인 물건들을 양 방향으로 교환하면서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은 더미를 쌓을 수 있었다. 수정은 중간상인들이 관리하는 특별한 물건 중 하나였으며, 철과 특히 칼을 무역하는 것은 이문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사업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한편 바이킹의 배에 사용된 부품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선박 고고학자들이 범선의 복원물을 만드는 데는 바이킹들의 비석에 그려진 배의 이미지가 매우 유용했다. 배의 부품과 부속물의 특징을 알 수 있고, 비석에 묘사된 보트가 매우 작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배들은 으레 15명에서 20명 정도 혹은 그 이하의 선원들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범선들은 작았지만 러시아의 강을 따라 무역을 하기에 유용했다. 더 큰 배들은 육상으로 끌고 가기에는 너무나 컸지만 그것은 동방으로 가는 스칸디나비아의 무역업자들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바이킹 시대의 고틀란드 사회 질서는 스웨덴 본국과는 매우 달랐다. 그곳은 무역업자인 동시에 농부들의 사회였다. 모든 섬 사람들은 그들을 바깥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무역망과 이해관계가 있었으며, 모든 행정은 싱에 의해서만 운영되었다. 섬의 모든 지역은 그들만의 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섬의 각 지역의 대표가 참여하는 얼싱(Althing)이 있었다. 섬의 민주적인 경향은 본국 스웨덴에서 나타나고 있던 중앙집권적인 왕국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와 더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식민지에서도 이와 동일한 민주적 제도가 있었다.고트족의 땅 : 야만인의 은행로마인들의 손에 의해 단순한 인간으로 그려졌던 야만인들, 즉 고대 유럽인은 사실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의 예술과 사회 문화 유산은 유럽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한때 그들을 강력하게 지배했던 로마의 문화만큼이나 큰 영향을 주었다.



소위 암흑시대의 야만인에 대한 정보의 출처는 대체로 또는 거의 전부가 로마 작가에 의한 것이어서 이 시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로마인의 편견, 관습, 정책 선전의 왜곡된 렌즈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로마 제국은 유럽 문명의 발전과 유럽의 기술과 통치방식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야만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종속되어 있었던 로마 제국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로마인과 야만인 간의 교류는 기원전 27년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이후 몇 세기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제국이 늘 우위를 차지했다. 야만인들이 실제로 로마 세계의 기초를 흔들 수 있게 된 때는 이로부터 훨씬 후인 기원후 3세기가 되어서였다. 당시 또 다른 초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이 옛 영토를 무력으로 되찾으려 하였으며, 로마는 야만인의 위협, 질병, 쓰러져 가는 경제 등 제국에 산재한 수천 가지가 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특히 제국의 변두리에서 온 '제국 밖에서 태어난 야만인' 막시미누스 1세가 로마군의 동의를 얻어 황제가 되자 여전히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의 원로들은 238년 막시미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동안 자객을 보내 그를 살해하도록 지원했다.



로마인들은 야만인들을 원군과 용병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과 국경에서 갈등이 있었으며, 수십 년이 지나면서 로마 제국의 국익 수호 임무가 야만인 출신의 사령관과 사병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240년부터는 게르만 부족, 고트족, 반달족, 카르피족 등과 같은 야만인들의 침략이 이어졌으며, 군대의 급여를 제때 지불하지 못함에 따라 반란, 내전, 권력 다툼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럽 대륙 또한 유럽 전체에 닥친 경제적 불황과 부분적 무정부 상태에다 페스트와 기근이 발생했다.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황제 한 사람이 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284년부터 305년 사이에 왕위에 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둘로 나누어 자신은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공동통치가 끝난 후 제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박해받고 있던 기독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았다.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기 때문인데, 이와 같이 로마가 다른 도시들에 밀린 경우가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라벤나(서로마 제국 멸망 후 비잔틴 제국의 총독부가 있었던 도시), 밀라노(동로마 제국에서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대도시), 트리에르(3세기 말 '제2의 로마'라 불릴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던 무역 중심지) 등이 제국의 행정 중심지이자 황제의 공식적인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로마는 관념적으로 또는 문명적으로 분명히 모든 길이 통하는 곳이었음에 분명하지만 도시 자체를 권력과 영향력을 갖춘 하나의 중심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었을 무렵만 해도 안정적으로 정착된 로마인 사회와 불안정하고 불안한 수많은 야만인 부족 사회가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제국을 수호하는 데 야만 부족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